지옥의 윈터 스쿨
지은이 외인 · 2026-04-29
몸만 만든 건 아니다.
가장 큰 산이 남았다. 바로 [공부].
내가 아무리 옛날에 공부를 잘했다고 해도, 손 놓은 지 10년은 넘었다.
하지만 난 공부를 좋아하는 희귀 질환자다.
보육원에서 원하는 만큼 공부할 수 없었던 목마름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약속대로 그 사람이 왔다.
거실 테이블.
칼단발에 지적인 뿔테 안경, 딱 봐도 '커리어 우먼' 포스를 풍기는 젊은 여자 선생님이 나를 건조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윤 선생. 대치동에서 1타 소리 듣는다는 수학 강사.
새엄마는 팔짱을 끼고 소파에 앉아 감시 모드에 들어갔다.
그리고 계단 난간 위로 삐죽 나온 머리통 하나.
백유리다. 언니 망신당하는 꼴 구경하러 나온 게 분명하다. 팝콘만 없지 극장 관객 자세다.
선생님: 설아 학생, 기록을 보니 1학년 출석 일수도 부족하고… 기초가 많이 없겠네요. 고등 진도는 무리입니다. 중학교 과정부터 다시 훑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중학교 수학 문제집을 꺼냈다.
'일차방정식' 페이지를 펴며 나를 본다.
마치 '이 정도는 알죠? 아니, 이것도 모르나?' 하는 무시가 깔린 눈빛.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봐요, 선생님. 나 이래 뵈도 왕년에 물리학도 지망생이었어. 생활고 때문에 글러브 꼈지만, 뇌세포는 안 굳었거든?'
나는 샤프를 빙글 돌렸다.
설아: 선생님.
선생님: 네?
설아: 시간 아까우니까 그냥 진도 나가시죠. 수1, 수2 다.
선생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안경 너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새엄마의 미간도 찌푸려졌다.
한지수: 설아, 선생님 말씀 들어. 고집 피우지 말고. 선생님은 전문가셔.
계단 위에서 '풉'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백유리, 너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설아: 테스트 한번 해보실래요?
나는 선생님이 가져온 고난도 문제집, 소위 '블랙라벨'이라 불리는 책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설아: 거기서 아무거나 찍어보세요. 제가 풀면, 제 방식대로 진도 나가는 걸로 하죠.
선생님은 기가 차다는 듯 팔짱을 끼며 문제집을 펼쳤다.
가장 뒷장, 수능형 킬러 문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선생님: 좋아요. 패기는 좋네요. 이거 한 문제라도 풀면 인정해 드리죠. 못 풀면 군말 없이 중학교 과정부터 합니다. 딴말하기 없기예요?
설아: 콜.
새엄마가 '콜?' 하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아, 또 아저씨 말투.
나는 문제를 쓱 훑었다.
미분과 적분이 섞인 복합 문제. 그래프의 개형을 추론해야 하는 까다로운 녀석이다.
보통 학생이라면 식 세우다 포기할 문제.
하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숫자들의 흐름이. 그래프의 곡선이.
전생에 편의점 알바하면서 손님이 버리고 간 과학 잡지를 보며 풀던 물리 공식들이 머릿속에서 춤을 췄다.
사각, 사각, 사각.
거침없는 샤프 소리가 거실의 정적을 깼다.
복잡한 풀이 과정? 그런 거 안 쓴다. 핵심 포인트만 툭툭 짚어서 수식을 전개했다.
3분 뒤.
설아: 여기요. 정답은 4번. a값은 3입니다.
선생님: ……!!
선생님이 정답지를 확인했다.
도도하던 표정이 무너지고,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선생님: 이… 이 풀이 과정은… 정석이 아닌데… 논리적으로 완벽해. 아니, 오히려 더 빠르잖아? 이건 마치 물리학적 직관으로 푼 것 같은데…….
계단 위의 머리통이 사라졌다. 도망갔냐, 백유리.
선생님: 한 문제로는 못 믿겠네요.
선생님이 안경을 고쳐 쓰더니, 가방에서 다른 책을 꺼냈다.
물리 문제집이다. 이 양반, 수학만 가르치는 게 아니었나?
선생님: 이건 물리 II 범위예요. 포물선 운동. 설명해 봐요. 풀지 말고, 말로.
오호. 시험 방식을 바꿨다. 답이 아니라 이해를 보겠다는 거군.
나는 문제를 읽었다. 비스듬히 던진 물체의 최고점과 도달 거리.
설아: 쉽네요. 훅이잖아요.
선생님: ……네?
설아: 라이트 훅이요. 주먹이 어깨에서 출발해서 턱까지 가는 궤적이 딱 이거예요. 처음엔 올라가다가, 힘이 빠지는 지점에서 잠깐 멈추고, 그다음부터 떨어지죠. 그 잠깐 멈추는 순간이 최고점이고, 거기서 속도의 세로 성분이 0이에요. 그래서 이 문제는 세로만 보면 돼요. 가로는 어차피 등속이니까.
나는 허공에 주먹을 슥 그어 보였다. 진짜 훅 궤적으로.
거실이 조용해졌다.
새엄마가 와인잔을 든 채 굳었고, 선생님은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선생님: ……설아 학생. 방금 그거, 어디서 배웠어요?
설아: 유튜브요. 병원에서 심심해서 격투기 영상이랑 물리 채널을 번갈아 봤더니 섞였나 봐요.
(물론 뻥이다. 그냥 몸이 아는 거다. 김철수의 유일한 유산이랄까.)
선생님이 한참 나를 보더니, 갑자기 영어로 물었다.
선생님: Then tell me, in English, why you think you don't need the middle school course.
새엄마의 눈썹이 올라갔다. 이건 명백히 압박 면접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설아: Because it's a waste of time, ma'am. You saw the fight. I didn't tap out.
선생님: ……tap out?
설아: 항복이요. 링에서 바닥 두 번 치는 거.
선생님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선생님: 발음이… 미국 동부 사람이 아니라 무슨 라스베이거스 복싱장 심판 같네요.
설아: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마이클 형, 고마워요. 형 영어가 대치동에서 통했어요.
선생님은 안경을 벗고 눈을 비볐다.
그리고 새엄마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선생님: 사모님… 따님이… 천재과인 것 같습니다. 직관력이 대단해요. 기초가 없는 게 아니라, 그냥 남들이랑 푸는 방식이 다른 거예요.
새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왔다.
한지수: 선생님? 설아가 푼 게 맞나요?
선생님: 제가 확인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요.
새엄마는 잠시 나를 내려다봤다.
그 눈빛이 병원에서 봤던 것과 미묘하게 달랐다.
'아픈 애'를 보는 눈이 아니라, 뭔가를 계산하는 눈.
한지수: 알겠어요. 설아 방식대로 하세요.
그리고 새엄마는 계단 쪽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한지수: 백유리.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내려와.
쿵쿵쿵. 유리가 마지못해 내려왔다. 얼굴이 벌겋다.
유리: 엄마, 나 왜…….
한지수: 너도 이 선생님한테 같이 배워. 설아랑 같은 시간에.
유리: 뭐?! 싫어! 내가 왜 쟤랑…….
한지수: 설아 성적이 이 정도면 이제 네가 뒤처지는 거야. 알아?
유리가 나를 노려봤다.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기세다.
'……야, 나 아무것도 안 했어. 문제 푼 것밖에.'
나는 무고한 표정으로 샤프를 돌렸다.
선생님은 흥미롭다는 듯 나를 보며 안경을 다시 썼다.
선생님: 재밌네요, 설아 학생. 좋아요. 오늘부터 바로 고등 과정 갑시다. 대신, 못 따라오면 봐주는 거 없어요?
설아: 네, 잘 부탁드립니다. 쌤.
선생님: 그리고 유리 학생도. 내일부터 두 사람 같이 봅니다.
유리가 "으으으" 하고 신음했다.
[시스템 : 과외 선생 '윤 선생'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시스템 : 동생 '백유리'의 적대도가… 상승했습니다.]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뭐, 인생이 다 그렇지.
그날 저녁. 새엄마가 퇴근한 아버지에게 보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지수: 여보, 설아가… 머리가 비상해요. 그 깐깐한 선생님이 놀라서 입을 못 다물더라고요.
백도훈: ……그래?
한지수: 그냥 아픈 애인 줄만 알았는데. 지원을 좀 제대로 해줘야겠어요.
아버지는 짧게 대답했지만, 그날 저녁 식사 메뉴에 [버터구이 랍스터]가 추가되었다.
나는 랍스터 집게발을 뜯으며 생각했다.
'합격이다. 이제 밥값 하는 식구로 인정받았어.'
유리는 맞은편에서 랍스터를 노려보며 깨작거리고 있었다.
저 랍스터가 무슨 죄냐.
* * *
밤 11시.
문제집을 덮고 스트레칭을 하는데,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백유리였다. 잠옷 차림에 팔짱.
유리: 야.
설아: 어.
유리: 너 일부러 그랬지.
설아: 뭘.
유리: 선생님 앞에서 잘난 척. 엄마 보란 듯이. 그래서 나까지 엮이게.
나는 스트레칭을 멈추고 녀석을 봤다.
평소 부모님 앞에서 짓던 '착한 동생' 미소는 온데간데없다. 일기장에 적혀 있던 그대로다. 둘만 있을 땐 '야', '너'.
그런데 이상하게, 이쪽이 더 사람 같았다.
설아: 일부러는 아니고. 문제를 냈으니까 푼 거지. 너도 봤잖아, 계단에서.
유리: …….
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방 안을 훑어봤다.
바닥에 깔린 러그, 그 위에 놓인 아령(이모 몰래 인터넷으로 산 3kg짜리), 벽에 붙여 둔 운동 일지.
유리: 너 원래 이런 애 아니었잖아.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유리: 맨날 누워만 있고, 말도 안 하고, 밥도 반도 안 먹고. 근데 병원에서 나오더니… 뭐야. 새벽에 뛰고, 이상한 거 마시고, 선생님한테 대들고.
설아: 죽다 살아나면 사람이 좀 바뀐다.
유리: 그렇게 바뀌는 사람이 어디 있어.
설아: 여기.
나는 내 얼굴을 가리켰다.
유리가 입을 다물었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표정인데, 삼킨다.
그러더니 문고리를 잡고 돌아서며 툭 던졌다.
유리: 내일 8시. 선생님 오기 전에 예습해야 하니까 거실로 나와. 늦으면 나 먼저 한다.
설아: ……같이 하자고?
유리: 누가 같이 하재.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있는 거지. 어차피 엄마가 시켰잖아.
쾅.
문이 닫혔다.
나는 닫힌 문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거 봐라. 말은 저렇게 하면서 결국 '같이 하자'잖아.
'승부욕이 붙었구나, 백유리.'
그리고 그건, 나쁜 일이 아니다. 사람은 이겨 먹고 싶은 상대가 있을 때 제일 빨리 큰다.
전생의 체육관에서 지훈이 놈이 그랬듯이.
'좋아. 그럼 내가 네 샌드백이 되어 주지. 대신, 봐주는 건 없다.'
* * *
크리스마스이브.
백산그룹 회장 댁의 크리스마스는, 김철수의 상상과는 아주 달랐다.
트리는 있었다. 2층 높이짜리가 현관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아버지는 연말 행사로 출장, 새엄마는 계열사 송년회. 이모와 도우미 언니들은 오후에 퇴근했고, 최 실장은 아버지를 수행하러 갔다.
넓은 집에 남은 건 나와 유리 둘뿐.
전생의 크리스마스는 체육관 관원들이랑 링 위에 신문지 깔고 치킨 뜯는 날이었다. 시끄럽고, 기름지고, 따뜻했다.
이 집은 조용하고, 대리석이고, 넓다.
설아: ……배고프다.
밤 10시. 나는 결국 주방으로 내려갔다.
이 집 냉장고엔 없는 게 없다. 한우, 연어, 치즈, 이름 모를 소스들.
하지만 내 손은 정확히 찬장 맨 아래 칸으로 갔다.
라면. 주방 아주머니가 야식용으로 숨겨 둔 게 분명한, 봉지라면 다섯 개 묶음.
'죄송합니다, 아주머니. 하나만.'
물 550ml. 스프 먼저. 면은 반으로 쪼개서. 계란은 마지막에 휘젓지 않고 얹기.
김철수 인생 36년 중 30년을 함께한 레시피다.
보글보글.
냄새가 주방을 채웠다. 아, 이 냄새. 이게 크리스마스지.
유리: ……뭐 해?
뒤를 돌아보니 유리가 서 있었다. 후드 티에 슬리퍼. 손엔 스마트폰.
설아: 라면.
유리: 엄마가 집에서 라면 먹는 거 싫어해. 나트륨이 어쩌고.
설아: 엄마 없잖아.
유리는 잠시 서 있더니, 식탁 의자에 앉았다. 냄새를 킁킁 맡는다.
유리: ……하나 더 끓여.
설아: 응?
유리: 둘이 먹기엔 그거 양이 적잖아. 하나 더 끓이라고.
나는 웃음을 참으며 냄비에 물을 더 부었다.
10분 뒤. 냄비째 식탁에 올렸다. 젓가락 두 벌.
유리는 젓가락을 들다 말고 나를 봤다.
유리: 너 라면 끓이는 거 언제 배웠어? 너 라면도 못 끓였잖아. 작년에 이모가 끓여 줬는데 '짜다'고 안 먹었잖아.
설아: ……병원에서 유튜브로.
유리: 넌 유튜브로 안 배운 게 뭐냐.
유리는 툴툴대면서 면을 한 젓가락 집어 후루룩 먹었다.
그리고 잠시 멈췄다.
유리: ……맛있네.
설아: 그치.
유리: 엄마한테 말하면 죽어.
설아: 공범이잖아.
우리는 말없이 라면을 먹었다. 후루룩, 후루룩. 넓은 주방에 그 소리만 울렸다.
국물까지 다 비운 뒤, 유리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창밖을 봤다.
정원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유리: ……작년 크리스마스엔 너 병원에 있었어.
설아: 그랬어?
유리: 엄마랑 아빠는 파티 갔고. 나 혼자 집에 있었어. 트리만 켜 놓고.
유리는 그 말만 하고 일어났다.
유리: 냄비 네가 씻어. 흔적 남기지 말고.
설아: 예, 예.
녀석이 올라간 뒤, 나는 냄비를 씻으며 생각했다.
이 집에 신데렐라가 하나가 아니었구나.
데려온 딸. 이 큰 집에서 혼자 트리를 켜 놓고 앉아 있던 열일곱.
설아의 일기장엔 유리가 가해자로만 적혀 있었다. 하지만 유리 쪽 일기장이 있다면, 거기엔 뭐라고 적혀 있을까.
'……쯧. 콩가루 집안인 건 맞는데, 콩가루끼리 뭉치면 뭐가 되긴 되겠네.'
* * *
시간은 흘러 민족 대명절 설날.
친척들은 오지 않았다. 재벌가는 원래 그런 건지, 아니면 아픈 나 때문에 조용히 보내는 건지.
우리 넷끼리 조촐하게 아침 식사를 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국.
전생의 김철수는 명절마다 혼자 편의점 도시락에 소주를 까거나, 체육관에서 샌드백이나 쳤는데.
이렇게 따뜻한 떡국을 가족과 먹다니.
괜히 코끝이 찡했다.
설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버지. 어머니.
감정이 북받친 나는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90도로 배꼽 인사를 했다.
설아: 올해도 만수무강하시고, 하시는 사업 대박 나십시오!
식탁이 울릴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
가녀린 열여덟 소녀가 할 법한 인사는 전혀 아니다.
아버지가 숟가락을 멈칫했다. 새엄마는 눈을 깜빡거렸다.
보통의 재벌가 딸내미라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애교 있게 말했을 텐데, 이건 뭐 조폭 신년 하례회 수준이니.
한지수: ……그래. 너도 건강하고.
백도훈: 오냐. 앉아라.
새엄마가 내 앞에 봉투를 내밀었다.
세뱃돈이다. 근데 두께가… 백과사전급이다.
한지수: 필요한 거 사라. 맨날 트레이닝복만 사지 말고, 예쁜 옷도 좀 사고. 너 이제 2학년이야. 꾸미고 다녀.
새엄마의 말투가 묘하게 부드러워졌다.
과외 사건 이후로, 나를 보는 눈빛이 '한심한 애'에서 '가능성 있는 투자처'로 바뀐 게 확실하다.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선 능력을 보여줘야 대우가 달라진다.
설아: 감사합니다! 어머니 안목 믿고 백화점 한번 털고 오겠습니다.
내가 넉살 좋게 받아치자, 새엄마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 웃었다. 냉미녀가 웃으니까 분위기가 확 산다.
한지수: 넌 어쩜 그렇게 말투가 아저씨같이 바뀌어 버렸냐. 성격도 아저씨 같아지고.
요즘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이모한테도, 윤 선생한테도, 유리한테도.
내면에 아저씨가 들어 있으니 당연하다. 안 그러고 싶어도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그렇다고 그렇게 말할 수도 없다. 그래서 항상 이렇게 대답한다.
설아: 노력의 산물입니다, 어머니!
그러면 대부분 사춘기 소녀의 변덕 정도로 이해해 주는 것 같다.
옆에서 유리가 뾰로통한 얼굴로 떡국을 깨작거리고 있다.
나는 식탁 밑으로 유리 발을 툭 쳤다.
유리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째려봤다.
나는 눈썹을 까닥이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너도, 많이, 먹어라, 꼬맹아.')
유리는 "흥" 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잠시 후 자기 떡국에 있던 고기 고명들을 내 그릇에 슬쩍 옮겨주었다.
유리: ……난 고기 싫어해. 언니 너나 많이 먹고 살 좀 쪄. 보기 싫으니까.
거짓말. 너 크리스마스에 라면 국물까지 다 마셨잖아. 지난주엔 야식으로 갈비 뜯는 것도 봤다.
나 챙겨준답시고 자기 고기 양보하는 거 봐라. 이 귀여운 츤데레 녀석.
나는 유리가 준 고기를 씹으며 생각했다.
'호랑이 굴이라더니, 생각보다 살 만한데?'
이 집구석 사람들, 겉으론 쌀쌀맞아도 속은 은근히 물렁하다.
어쩌면 내가 백설아의 일기장만 믿고 지레 겁먹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설날의 분주함이 가라앉은 2월의 어느 날.
나는 새엄마에게서 받은 난감한 숙제-두툼한 세뱃돈으로 백화점 가서 네 물건 좀 사 오기-를 해결하기 위해 거실을 기웃거렸다.
마침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유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슬금슬금 다가가 툭, 말을 걸었다.
설아: 야, 동생.
유리가 고개를 돌려 나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설아: 내일 나랑 백화점 쇼핑 좀 가자.
유리: ……뭐라고?
설아: 엄마가 숙제 내주셨잖아. 옷 좀 사 입으라고. 근데 내가 그동안 매일 골골거리기만 했더니 요즘 트렌드를 알아야지. 네가 좀 골라줘.
유리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리: 내가 왜? 친구들이랑 가.
설아: 친구 없잖아. 왕따인 거 알면서.
유리: …….
내 당당한 대답에 유리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딱 벌렸다.
나는 쐐기를 박았다.
설아: 맛있는 거 사줄게. 그리고 내 짐꾼도 좀 하고.
유리: 참나…….
유리는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다시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리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유리: 내일 2시. 늦게 나오기만 해 봐. 그냥 갈 거니까.
오케이. 낚였다.
겉으로는 까칠해도 옷 고르는 거 좋아하는 녀석이라 거절 안 할 줄 알았다.
겨울방학 3개월. 몸도 만들었고, 공부도 인정받았고, 동생 하나도 반쯤 넘어왔다.
[메인 퀘스트 : 생존을 위한 피지컬 & 정치력 확보] - 거의 클리어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내일은 백화점이다. 좋은 날이 될 거다.
……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새벽, 나는 죽는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