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아, 여자가 되다
지은이 외인 · 2026-09-01
약속 당일 새벽.
바깥세상은 막바지 한파로 꽁꽁 얼어붙었지만, 내 방 안만큼은 한여름처럼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쇼핑 나가기 전, 핏을 살리기 위한 막판 펌핑이랄까.
설아: 흡! 으으으으… 랏차!
나는 이 악물고 마지막 스쿼트를 끝냈다.
거울 속에 비친 백설아의 몸은 더 이상 '나무젓가락'이 아니었다.
아직 가녀리긴 했지만, 허벅지에는 제법 탄탄한 근육이 붙었고, 앙상했던 갈비뼈 위로도 살집이 올랐다.
'좋아. 이 정도면 개학하고 체육 시간에 꼴찌는 면하겠어.'
김철수의 영혼이 깃든 지 3개월.
영양제란 영양제는 다 털어 넣고, 이모가 해주는 보양식을 꾸역꾸역 먹어가며 만든 결과물이었다.
뿌듯한 마음에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샤워실로 향하려는 찰나였다.
찌르르.
설아: 윽?
아랫배 깊은 곳에서 낯선 통증이 느껴졌다.
처음엔 근육통인 줄 알았다. 하체 조진 날은 원래 좀 뻐근하니까.
하지만 통증은 순식간에 날카로운 칼날처럼 변해 내장을 휘젓기 시작했다.
설아: 으윽…! 뭐, 뭐야. 왜 이래?
나는 배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느낌이 쎄했다. 이건 단순한 근육통이 아니다.
혹시… 무리하게 운동하다가 탈장이라도 된 건가? 아니면 맹장? 그것도 아니면… 그동안 먹은 보약이 잘못돼서 위장이 꼬였나?
설아: 흐으… 젠장…….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일단 찬물로 세수라도 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변기에 앉으려던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설아: ……피?
바지에 피가 배어 있었다. 그것도 선명한 선혈이었다.
순간, 김철수의 36년 인생 경험이 머릿속에서 경고등을 울렸다.
하혈(下血).
이건 내장이 파열됐거나, 어딘가 심각한 장기에 구멍이 뚫렸다는 신호다.
'미친… 운동 좀 했다고 내장이 터져?'
눈앞이 캄캄해졌다. 공포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죽는 건가? 나 빙의한 지 1년도 안 돼서, 이제 좀 살만해지니까 이렇게 죽는 거야?
이 억울함을 어디 가서 호소해!
설아: 사, 살려줘…….
비틀거리며 화장실 문을 열었다.
누군가를 불러야 했다. 119를 부르든, 최 실장을 부르든 해서 응급실로 튀어가야 했다.
그런데 막상 입을 떼려니, 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 꼴을 남자인 최 실장에게 보일 순 없었다.
그때, 복도 끝에서 청소 도구를 든 서진 언니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설아: 어… 언니…! 저기요…!
내 다급한 목소리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서진: 설아 학생?! 왜 그래요! 얼굴이 백지장이에요!
설아: 피… 피가… 나 죽나 봐요… 배가 찢어질 것 같고… 피가 안 멈…….
나는 공포에 질려 횡설수설했다.
서진 언니는 사색이 되어 내 부축을 받으며 화장실 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상황을 목격했다.
서진: !!!
나는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119에 신고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놀란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이내 안도와 감격이 섞인 묘한 표정으로 바뀌는 게 아닌가.
서진: 아… 설아 학생…….
설아: 빨리… 구급차 좀… 나 장 파열인 것 같…….
서진: 잠깐만 기다려요! 제가 이모 모셔올게요! 움직이지 마요!
그녀는 구급차가 아니라 이모를 부르러 튀어 나갔다.
아니, 사람이 죽어가는데 이모를 왜 불러!
잠시 후, 쿵쿵거리며 달려오는 발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이모: 설아야!
이모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뒤따라온 서진 언니의 손에는 구급상자가 아니라, 웬 뽀송뽀송한 핑크색 파우치와 수건, 그리고 따뜻한 물이 들려 있었다.
나는 화장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울먹였다.
설아: 이모… 나 운동하다가 어디 터졌나 봐요… 피가…….
이모: 세상에…….
이모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런데 이모의 눈에 맺힌 건 걱정의 눈물이 아니라, 감동의 눈물이었다.
이모: 우리 설아… 드디어… 드디어 건강해졌구나.
설아: ……네?
서진 언니가 말했다.
서진: 터진 게 아니에요. 시작한 거예요. 월경이 돌아온 거라고요!
설아: ……?
나는 순간 멍청한 표정으로 이모를 올려다봤다.
월경? 생리? 그… 여자들이 한 달에 한 번 한다는 그거?
'아.'
그제야 잊고 있었던 상식이 뇌를 강타했다.
백설아는 여자다. 그리고 건강한 여자는 매달 마법에 걸린다.
지난 몇 달간 설아가 너무 쇠약해서 멈춰 있던 생체 리듬이, 내 피나는 노력 덕분에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설아: 아…….
죽을병이 아니라는 안도감. 그리고 남자로서 겪어본 적 없는 이 적나라한 상황에 대한 수치심.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밀려와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서진: 축하해요, 설아 학생.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이모는 훌쩍이며 내 등을 쓸어내렸고, 서진 언니는 능숙하게 뒷수습을 준비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차라리 맹장염인 게 덜 부끄러웠을 것 같다.
하지만 안도감과 수치심이 지나간 자리에, 더 거대하고 끔찍한 쓰나미가 몰려왔다.
월경을 한다는 것. 그건 의학적으로… 배란이 시작됐다는 뜻이다.
그리고 배란이 된다는 건…….
'임신이… 가능하다는 소리잖아.'
머릿속에서 핵폭탄이 터졌다.
나 김철수, 대한민국 건아로 태어나 조폭들도 함부로 못 건드리던 상남자였다.
그런데 이제… 아기를 가질 수 있는 몸이 됐다고?
상상해 버렸다.
내 배가 남산만 하게 불러오고, 내가 입덧을 하고, 내가 산부인과 검진대에 눕는 모습을.
'으아악! 안 돼! 멈춰! 그딴 상상 하지 마!'
온몸에 소름이 돋다 못해 닭살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건 성별이 바뀐 걸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신체 기관이 나에게 정식으로 통보를 날린 것이다.
[알림 : 님은 이제 공식적으로 엄마가 될 수 있습니다.]
'웃기지 마! 난 아빠라고! 내 정체성은 아빠 쪽에 가깝다고!'
하지만 야속한 내 몸은 묵묵부답이었다.
오히려 쿡쿡 쑤시는 통증으로 '응, 아니야. 받아들여.'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나는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사라져 버린 나의 남성성에 대한 조의를 표하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병원 화장실에서 세웠던 규칙 세 가지가 떠올랐다.
이 몸은 내 게 아니다. 보지 않는다. 필요한 것만 한다.
……규칙 넷째를 추가해야겠다.
넷째. 이 몸은 나한테 물어보지 않고 자기 일을 한다. 받아들여라.
화장실에서 나오니 도우미 언니들과 이모의 전광석화 같은 대처 덕분에, 나는 '사회적 존엄성'을 간신히 지킬 수 있었다.
침대 시트는 뽀송뽀송한 새것으로 교체되었고, 나는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눕혀졌다.
하지만 내 멘탈은 여전히 너덜너덜했다.
'이게… 여자의 삶이라고?'
배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은 여전했다. 아니, 아까보다 더 심해진 것 같았다.
허리는 끊어질 듯 아프고, 기분은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오르락내리락했다.
누군가 뱃속에 손을 집어넣고 장기를 빨래 짜듯이 비틀어 짜는 기분.
남자였을 땐 군대 행군보다 힘든 게 어디 있냐고 큰소리쳤었는데, 취소다.
이건 다른 차원의 고통이다.
링 위에서 보디블로 맞을 땐 적어도 언제 끝나는지는 알았다. 라운드 종료 공이 울리니까.
이건 공이 없다.
설아: 으으으…….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이모는 내 배 위에 따뜻한 찜질팩을 올려주고는,
이모: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어라. 팥죽 쒀 올게.
라며 나갔다.
방 안에는 적막과 나의 신음 소리만 남았다.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대답할 기운도 없어 끙끙대고 있는데, 문이 스르르 열렸다.
설아: …….
유리였다.
나갈 채비를 다 마친 외출복 차림.
아, 맞다. 오늘 2시에 쇼핑 가기로 했었지.
녀석의 표정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유리: ……약속 시간 다 됐는데, 뭐 하자는 거야?
유리가 날 선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평소 같으면 "누가 늦으래?" 하고 화를 냈겠지만, 지금 내 꼴을 보더니 미간을 더 찌푸렸다.
창백하게 질린 내 얼굴, 배 위에 올려진 찜질팩, 그리고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진통제 껍질.
나는 끙끙대며 이불을 코까지 끌어 올렸다.
설아: 미안하다…. 오늘 못 가겠다.
유리: 하. 기가 막혀서. 사람 준비 다 하게 해놓고.
유리는 짜증스럽게 한숨을 푹 쉬었다.
쾅.
문을 강하게 닫고 나간다.
화났다는 의지 표현일 것이다.
그러더니 조금 있다 다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뭐야. 약속 깼다고 멱살이라도 잡으러 왔냐?'
방금 전의 쪽팔림과 생리통 때문에 예민함이 극에 달해 있어 잔뜩 경계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녀석은 손에 들고 있던 머그컵을 협탁 위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달그락.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컵.
진하고 알싸한 생강과 대추 향이 코끝을 찔렀다.
유리: ……마셔.
유리가 툭 내뱉었다.
설아: 뭐야, 이거… 독 탔냐? 약속 깬 벌칙이야?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농담 반 진담 반 쏘아붙였다.
유리의 눈썹이 꿈틀했다.
유리: 사람 성의를 뭘로 보고. 독은 무슨. 생강차야. 꿀 많이 넣었어.
설아: …….
유리: 이모가 바빠 보여서 내가 타 온 거니까, 남기지 말고 마셔. 식으면 맛없어.
녀석은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문고리를 잡고 잠시 멈칫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한마디를 툭 던졌다.
유리: ……유난 떨지 말고 그거 마시고 자. 쇼핑은 다음에 가주면 되잖아.
설아: 어?
유리: 그거, 배 따뜻하게 하면 좀 나아져. 나도 그러니까.
달칵.
문이 닫혔다.
방 안에는 다시 정적과, 은은한 생강차 향기만 남았다.
나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머그컵을 집어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 왔다.
한 모금 마시자, 달콤하고 알싸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 꼬여 있던 뱃속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맛있네…….'
독은커녕, 기가 막히게 잘 탄 생강차였다.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저거, 저거. 일부러 화난 척하면서 들어온 거 봐라.'
약속 펑크 낸 건 핑계고, 사실은 아프다니까 걱정돼서 차 들고 올라온 게 뻔하다.
엄마, 아빠 앞에서는 세상 착한 딸인 척 연기하면서, 정작 진짜 챙겨주는 건 아무도 안 보는 이런 때라니.
백유리, 이 녀석도 참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크리스마스 라면도 그렇고.
설아: 후우…….
따뜻한 차가 들어가니 확실히 통증이 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비록 내 몸은 여자로서의 신고식을 혹독하게 치르는 중이지만, 마음 한구석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이 집구석, 처음엔 시베리아 벌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츤데레들의 집합소였나 보다.
나는 찜질팩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설아: 그래… 쇼핑은 다음에 가서 왕창 뜯어주마. 김철수, 아니 백설아. 잘하고 있어.
창밖에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오늘 밤은 왠지 춥지 않을 것 같았다.
* * *
닷새 뒤. 약속대로 백화점.
유리: 이거. 이거. 이거도.
유리는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옷걸이에서 옷을 척척 뽑아 내 팔에 걸었다.
니트 원피스, 플리츠 스커트, 하늘하늘한 블라우스.
나는 그것들을 다시 옷걸이에 척척 되돌려 놓았다.
유리: 야.
설아: 어.
설아: 이거 다 치마잖아.
유리: 너 여자잖아.
설아: ……겨울이잖아.
유리가 이마를 짚었다.
유리: 그래서 뭘 사고 싶은데.
나는 매장 반대편을 가리켰다. 스포츠 브랜드 매장. 검은색, 회색, 남색의 향연.
설아: 저기. 트레이닝복 상하의 다섯 벌. 사이즈별로.
유리: 다섯 벌을 다 똑같은 걸로 산다고?
설아: 색이 다르잖아. 검정, 진회색, 회색, 연회색, 남색.
유리: 그게 같은 거야!
유리가 소리를 질렀고, 지나가던 손님이 우리를 쳐다봤다.
결국 타협했다.
트레이닝복 다섯 벌은 내 뜻대로. 대신 유리가 고른 옷 한 벌은 군말 없이 산다.
유리는 한참을 고르더니, 하얀색 니트 원피스 하나를 내밀었다.
유리: 이거. 안 입어도 돼. 옷장에 걸어만 놔.
설아: 안 입을 거면 왜 사.
유리: ……그냥 사.
녀석은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카드를 긁으며 생각했다.
'옷장에 걸어만 놓으라는 옷이라니. 사람 참.'
그 원피스가 언제 옷장 밖으로 나오게 될지는, 그때의 나는 상상도 못 했다.
폭풍 같은 겨울방학이 끝나 가고 있었다.
그리고 2월 말, 전신 거울 앞에 선 나는 내 눈을 의심하게 된다.
설아: ……이게 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