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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산채 폐업

지은이 음악의 신 · 2026-08-31

화산까지 하루 반.

무현은 이번에야말로 조용히 가겠다고 다짐하며 큰길을 버리고 산길을 골랐다. 사람이 없으면 소문도 없다. 산길은 험하지만 무현의 발에는 평지나 다름없었고, 하루면 고개 셋을 넘어 화산 어귀에 닿을 수 있었다.

첫 고개를 넘는데 길목에 밧줄이 걸려 있었다.

정확히는, 밧줄을 건 도적 넷이 바위 뒤에 숨어 있었다.

'또냐.'

무현은 한숨부터 나왔다. 약초 영감의 말이 맞았다. 골짜기 싸움 뒤로 세상천지가 도적 반, 양민 반이었다.

밧줄이 당겨지고, 도적 넷이 튀어나왔다.

"게 섰거라! 이 고개를 넘으려면 통행세를…."

앞장선 놈의 말이 거기서 끊겼다. 무현의 행색을 본 것이다. 회청색 무복. 순한 낯짝. 빈손.

도적 넷은 저희끼리 심각한 눈짓을 주고받더니, 그중 하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손님. 혹시… 젓가락, 가지고 계십니까."

"…객잔 젓가락은 두고 왔습니다만."

"그, 그럼 절벽 아래서 오신 건 아니지요?"

무현은 잠시 침묵했다. 산길로 왔는데도 소문이 먼저 와 있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도적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침묵을 긍정으로 알아들은 것이다.

"사, 살려 주십시오!"

넷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무현이 뭐라 하기도 전에 저희끼리 자수를 시작했다.

"소인들은 위 산채 소속인데, 원래는 다 농사짓던 놈들입니다!"

"소인은 밭이 서 마지기 있었습니다! 골짜기 싸움에 끌려갔다 돌아오니 밭이 남의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소인은 소가 두 마리 있었는데 군량으로 끌려갔습니다! 소만 돌려주면 지금이라도 농사지으러 갑니다!"

"소인은 노모가 계신데, 도적질한 쌀은 한 톨도 안 먹었습니다! 노모 드리고 소인은 풀뿌리만…."

"소인은, 소인은… 사실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뭐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자네는 어제 입산해 놓고 뭘 그리 잘못했다는 겐가."

"분위기가 그렇잖은가!"

"거기까지."

무현이 손을 들자 넷이 입을 다물었다. 도적의 자수라기보다 민원에 가까웠다. 넷 다 손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는데, 칼 굳은살이 아니라 괭이 굳은살이었다.

"산채에는 저희 같은 놈이 마흔입니다! 두목만 진짜 흑도고요!"

"두목이 시켜서 나온 겁니다! 저희는 여태 사람 하나 못 찔러 봤습니다!"

무현은 그 와중에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못 찔러 봤다는 말을 자랑처럼 하는 도적이라니.

"…그 산채,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넷은 잠시 굳었다가, 서로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저희를… 치러 가시는 겁니까?"

"봐서요."

"그럼 두목만 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넷 중 하나가 냉큼 말했고, 나머지 셋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하들이 앞장서서 두목을 팔아넘기는 산채라니, 가 보기도 전에 사정이 훤했다.

산채는 두 번째 고개 중턱에 있었다.

목책을 두른 마당에 초막이 여남은 채. 마흔 명이 산다기에는 궁상맞은 살림이었다. 올라오는 길에 곳간부터 들여다보았는데, 산적 소굴의 곳간이라는 것이 절인 무 두 항아리에 좁쌀 세 가마, 그리고 어느 집에서 털어 왔는지 모를 씨암탉 한 마리가 전부였다. 씨암탉은 잡아먹히기는커녕 알 낳는 날만 기다려지는 처지인 듯, 마당을 제집처럼 활보하고 있었다.

마당에서는 도적 몇이 창질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창끝이 허수아비를 자꾸 빗나갔다. 농사꾼의 창질이었다.

무현은 그 꼴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참으려 했다. 정말 참으려 했는데, 창끝이 열두 번째로 허수아비를 빗나가는 순간 입이 먼저 나가 있었다.

"찌를 때 왼발이 늦습니다."

"예?"

"오른손보다 왼발이 먼저 나가야지요. 그리고 어깨에 힘을 빼고."

창 든 도적이 얼떨결에 시키는 대로 했다. 창끝이 처음으로 허수아비 가슴에 똑바로 박혔다. 도적이 저도 놀라 제 창을 내려다보는데, 무현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도적한테 창질을 가르치고 앉았다니. 이놈의 훈수 버릇은 바둑에서 창까지 가리는 것이 없었다.

더 곤란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창질하던 도적들이 하나둘 연장을 들고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저, 손님. 소인 낫질도 좀 봐 주시면."

"소인은 도끼인데."

"봐 드릴 것 없습니다. 다들 농사짓던 솜씨 그대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게 훈수 중에 제일 어려운 훈수인데요."

"어렵지요. 그래도 낫질은 벼한테 하는 게 맞고, 도끼질은 장작한테 하는 게 맞습니다. 사람한테 하라고 만든 연장이 아니에요."

도적들은 제 손의 연장을 새삼스레 내려다보았다.

두목은 달랐다.

곰보 자국이 얽은 얼굴에 대도를 멘 거한으로, 마당에 들어서는 무현을 보자마자 살기부터 뿜었다. 흑도 물을 오래 먹은 살기였다.

"어느 놈이냐."

"지나가던 과객입니다."

"과객이 산채엔 왜 기어들어."

"폐업을 권하러 왔습니다."

"…뭐?"

"이 산채, 오늘 문 닫으시지요."

두목은 어이가 없어 웃다가, 대도를 뽑았다.

"미친놈이 제 발로 관을 짜러 왔구나!"

대도가 바람을 갈랐다. 과연 부하들과는 격이 다른, 사람깨나 베어 본 칼이었다.

무현은 세 수 만에 끝낼 수 있는 것을 서른 수까지 끌었다. 마당의 도적 마흔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목의 대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 자들에게, 그 대도가 맨손의 과객에게 어린애 몽둥이질처럼 받아넘겨지는 광경을 충분히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열 수째에 두목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대도가 스치기는커녕 옷깃 한 번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스무 수째에 두목은 알았다. 이 과객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 주는 것이었다. 제 대도가 지나갈 자리를 미리 비켜 서 있다가, 헛손질이 끝나면 공손하게 다음 것을 기다렸다.

"이, 이놈! 놀리는 것이냐!"

"놀리다니요. 배려하는 겁니다."

"뭐라?"

"부하들 보는 앞이니, 힘껏 해 보시라고."

두목은 이십 년 흑도 인생에서 이보다 정중한 모욕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이십 년 흑도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열여덟에 고향에서 사고를 치고 산에 들었다. 칼 하나로 밥을 벌었고, 밥을 벌수록 돌아갈 길이 멀어졌다. 골짜기 싸움 때는 사파 연합 말단으로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겼고, 흩어진 농사꾼들을 주워 모아 이 산채를 차렸다. 부하 마흔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핑계로 도적질을 시켰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 짓의 끝이 어딘지.

그 끝이 지금 눈앞에서, 어깨에 힘 빼라는 훈수까지 해 가며 제 대도를 받아넘기고 있었다.

서른한 수째에 대도가 허공으로 떠올랐고, 두목은 제 대도가 땅에 꽂히는 소리를 무릎 꿇고 들었다.

"자."

무현은 손을 털며 마당을 둘러보았다.

"폐업합시다."

그날 산채에서는 기묘한 청산 절차가 진행되었다.

곳간의 장물은 세 무더기로 나뉘었다. 뺏은 곳이 분명한 것은 돌려주고, 분명치 않은 것은 아랫마을 관아에 내고, 곡식은 마흔 명이 나눠 지고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무현은 평상에 앉아 그 셈을 봐 주었다. 문지기 시절 객당 물품 장부를 셈하던 가락이 있어, 장물 셈쯤은 일도 아니었다.

셈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이 씨암탉은 어느 마을 것입니까."

"그, 그것이… 기억이 안 납니다."

"장물 장부는 없습니까."

"도적이 장부를 씁니까?"

"쓰셔야지요. 돌려줄 때 곤란하잖습니까."

"돌려줄 생각으로 훔치는 도적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잖습니까. 지금."

말문이 막힌 도적들은 결국 머리를 맞대고 기억을 짜냈다. 씨암탉은 세 달 전 개울 건너 마을 박 과부네 것으로 판명 났는데, 그새 알을 열두 개나 낳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알까지 쳐서 돌려주느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붙었고, 무현이 닭은 돌려주되 알은 그동안의 사룟값으로 친다는 판결을 내리고서야 정리가 되었다. 마흔 명이 이 판결에 진심으로 감복했다. 산채가 생긴 이래 가장 공정한 재판이었다는 평이었다. 하기야 산채가 생긴 이래 재판이 처음이기는 했다.

"저, 대협."

전직 도적 하나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산을 내려가면, 저희는 뭘 해 먹고삽니까. 마을은 결딴났고, 농사지을 땅도…."

"만보상단이라고 아십니까."

"들어는 봤습니다만."

"거기 표두 어르신이 요즘 일손이 모자라 머리를 싸매고 계십니다. 표사가 셋이나 다쳐서요. 힘쓰는 일에는 삯을 후하게 쳐 준다니, 가서 절벽 과객이 보냈다 하십시오."

"저, 절벽 과객이요? 대협이 바로 그…?"

"보냈다고만 하면 됩니다."

마흔 명이 일제히 엎드렸다. 무현은 절 받는 데에도 이제 이력이 붙어서, 담담하게 받았다. 서른 해 전이었으면 저도 맞절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산 행렬은 장관이었다.

앞에는 곡식 진 마흔 명이 줄지어 서고, 가운데에 씨암탉 든 자와 장물 궤짝 진 자들이 서고, 맨 뒤에 스스로 오라를 진 두목 왕덕구가 섰다. 오라는 아무도 안 지웠는데 본인이 굳이 졌다. 형님 앞에서 죗값 치르는 모양새는 갖춰야 한다나.

고갯길에서 마주친 행인들은 도적 마흔의 행렬에 기겁해 풀숲으로 뛰어들었다가, 행렬이 지나가며 일일이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하고 허리를 굽히는 통에 두 번 기겁했다.

아랫마을 관아 앞은 대혼란이 되었다. 도적 마흔하나가 제 발로 몰려와 자수하겠다는데, 옥은 여덟 자리뿐이었던 것이다. 젊은 현령은 반나절을 씨름한 끝에 두목만 가두고 마흔 명은 죄질을 따져 곤장과 사역으로 갈음했다. 그리고 박 과부에게 씨암탉을 돌려주는 일에는 굳이 병졸 둘을 붙여 격식을 갖췄다. 이 고을에서 근래에 벌어진 가장 훈훈한 관아 업무였다.

문제는 두목이었다.

묶어서 관아에 넘길 작정이었는데, 이 곰보 거한이 셈을 마칠 때쯤 슬금슬금 기어 오더니 넙죽 엎드린 것이다.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예?"

"소인, 흑도 밥 이십 년에 이런 무공은 처음 봅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형님!"

"저는 아우를 둔 적이 없습니다만."

"그럼 오늘부터 두시면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제가 스물은 어려 보입니다만."

"무공 앞에 나이가 어딨습니까! 소인 눈에는 형님이 태산처럼 보입니다!"

"관아에 가셔야지요."

"관아는 형님을 뵌 다음에 가도 늦지 않습니다!"

밀고 당기기는 길었다.

"형님! 소인이 형님을 어떻게 알아 모셨는지 아십니까! 그 대도는 소인이 흑도에서 십 년을 구르고 얻은 물건입니다! 그걸 맨손으로, 그것도 배려까지 해 가며!"

"배려라 하지 마십시오. 듣는 제가 민망합니다."

"소인, 형님 밑에서 사람 되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사람 되는 법은 관아가 더 잘 가르칩니다."

"관아에서 배우고 나오면 받아 주시는 겁니까!"

"…만보상단이라고 있습니다."

결국 두목은 제 발로 관아에 자수하되, 죗값을 치르고 나오면 만보상단에서 새사람으로 일하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만보상단 표두는 알지도 못하는 새에 전직 도적 전문 갱생소 소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언젠가 사과할 일이 있겠다고, 무현은 생각했다.

두목은 떠나는 무현의 등에 대고 산이 울리도록 외쳤다.

"형님! 소인 왕덕구,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잊으셔도 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아아!"

"덕구 형님이 우리 두목을 이기셨다아아!"

마지막 것은 부하들 중 누가 얹은 소리였는데, 덕구도 아니고 형님도 아닌 것이 두 가지나 틀렸지만 바로잡으러 돌아가기도 뭣해서 그냥 두었다. 그 메아리가 세 번째 고개까지 따라왔다. 소문이 또 하나 태어나는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훗날 이 근방에는 절벽 과객이 왕덕구라는 대도객과 의형제를 맺었다는 소문이 돌게 되는데, 정작 왕덕구 본인이 옥에서 나와 그 소문을 듣고 제일 크게 화를 냈다. 의형제라니, 감히. 그분은 형님이고 나는 아우라고.

해 질 무렵, 무현은 마지막 고개 마루에 올라섰다.

그리고 걸음을 멈췄다.

노을 너머, 저 멀리 봉우리들이 보였다. 잊을 수 없는 능선이었다. 몇 해를 하루같이 아침저녁으로 올려다보던 산. 서른 해 동안 꿈에서 걷던 산길.

화산이었다.

무현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산문이 불탔다 했다. 객당은 부상자로 가득하다 했다. 그러나 여기서 보는 화산은 그냥 화산이었다. 노을에 붉게 물든, 크고 말 없는 산.

산자락 아래로 마을들의 저녁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저 연기 중 하나가 화산 아래 마을일 것이다. 등불 몇 점이 가물거리던 어둠 속으로 진곤이 내려가던, 그 마을. 늙은 어머니와 열여섯 소녀와 열두 살 사내아이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마을.

목젖이 뜨거워져서, 무현은 한동안 숨을 골랐다.

소문이니 별호니 하며 낄낄거리던 길이었는데, 화산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 모든 것이 저만치 물러났다. 저 산 아래에는 갚아야 할 약조가 있었다. 웃으며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다 왔습니다, 형님.'

내일이면 닿는다. 이 고개만 내려가서 하룻밤 묵고, 아침에 어귀 저잣거리를 지나면 산문 앞이다.

무현은 고개 아래 마을의 불빛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마을 어귀에, 웬 사내가 평상을 놓고 앉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아직 몰랐다. 사내의 무릎 위에는 젓가락 한 벌이 비단 보자기에 싸여 모셔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