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젓가락 협객
지은이 음악의 신 · 2026-08-31
상단의 이름은 만보상단이라 했다.
섬서 일대를 도는 중치 상단으로, 약재와 포목을 싣고 화산 방면으로 가던 길이었다. 문제는 앞쪽 숲이었다. 척후로 보냈던 표사가 돌아오지 않았고, 숲에서는 새 한 마리 날지 않았다.
"매복이오."
늙은 표두가 이를 갈았다.
"골짜기 싸움에서 흩어진 사파 놈들이오. 요즘 이 길목에서만 상단 셋이 털렸소. 놈들은 화물만 털면 다행이고, 심사가 뒤틀리면 씨를 말리는 놈들이라."
"돌아가는 길은 없습니까."
무현이 묻자 표두는 고개를 저었다.
"닷새를 돌아야 하오. 약재가 상해 버리지. 게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고."
무현은 잠시 셈을 했다.
숲의 살기는 스물 남짓. 그중 제법 여문 것이 서넛. 혼자라면 그냥 지나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행렬에는 상단 식솔이며 짐꾼이며, 칼 한 번 못 잡아 본 사람이 서른이 넘었다.
저잣거리의 아낙이 떠올랐다. 장바구니의 푸성귀가 핏물에 절어 흩어지던 것도.
"저, 표두 어르신."
"왜 그러시오."
"짐꾼 삯은 얼마나 합니까."
"…뭐요?"
"마침 화산 쪽으로 가는 길인데, 노잣돈이 떨어져서요. 짐이나 나르며 얹혀 가겠습니다."
표두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무현을 훑었다. 이 판국에 삯 얘기를 하는 놈이라니. 그러나 일손은 일손이었고, 어차피 다 죽을 판이면 한 놈 더 죽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하루 두 푼. 죽어도 상단 책임 없음."
"후합니다."
무현은 제일 무거워 보이는 약재 궤짝을 골라 어깨에 얹었다. 표두의 눈이 가늘어졌다. 장정 둘이 마주 들던 궤짝이었다.
행렬 꽁무니에는 열대여섯쯤 된 어린 짐꾼이 하나 있었다. 이름이 덕배라 했다. 사색이 된 채 지게 끈만 쥐어짜는 꼴이, 서른 해 전 낙애곡으로 걸어가던 누구와 똑 닮아 있었다.
"무섭냐."
"…예. 무섭습니다. 아저씨는 안 무섭습니까."
"무섭지."
"거짓말. 얼굴이 하나도 안 무서운데요."
"무서운 거하고 움츠러드는 건 다른 거다."
덕배는 못 알아듣는 얼굴이었다. 무현은 덧붙였다.
"이따 무슨 일이 벌어지면, 수레 밑에 들어가서 눈 꼭 감고 백까지 세라. 백까지 세고 나면 끝나 있을 거다."
"그걸 아저씨가 어떻게 압니까."
"짐꾼 경력이 길다."
행렬이 숲길로 들어섰다.
들어서기 전에, 무현은 표두에게 슬쩍 한마디를 얹었다.
"참, 어르신. 척후로 나가셨다는 분 말입니다."
"…그 사람은 이미 틀렸을 게요."
"글쎄요. 죽이는 것보다 살려서 묶어 두는 쪽이 매복에는 이롭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척후만큼 좋은 미끼가 없으니까요."
표두가 흠칫 무현을 돌아보았다. 짐꾼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네, 병법을 어디서 배웠나."
"바둑을 조금 둡니다."
"바둑하고 매복하고 무슨 상관인가."
"미끼로 쓰는 돌은 잡히기 전까지가 값이지요. 잡히면 그냥 사석입니다. 그러니 아직 살아 있을 겁니다."
매복은 예상대로였다. 반 리쯤 들어갔을 때, 앞뒤로 나무가 쓰러지며 길이 막혔고, 숲에서 사파 잔당들이 쏟아져 나왔다. 스물셋. 무현은 궤짝을 진 채 정확히 셌다.
"화물 놓고 꺼져라! 그럼 목숨은 살려 주마!"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외쳤다. 왼팔 소매에 붉은 실로 꿴 해골 문양이 보였다. 무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낯익은 표식이었다. 저잣거리에서, 혈풍십귀의 옷자락에서 본 것과 같은.
'혈풍십귀는 그날 무당에 잡혔을 텐데. 잔당인가. 아니면….'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표사들이 칼을 뽑았고,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표사들은 용감했으나 수가 밀렸다. 셋이 베이며 물러났고, 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파 잔당들이 낄낄거리며 짐수레로 달려들었다.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달려들던 자들이 자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짐수레 사이를 지나던 놈은 수레바퀴에 발이 끼어 자빠졌고, 포목 더미를 안던 놈은 포목과 함께 말려 자빠졌으며, 약재 궤짝에 손을 대던 놈은 궤짝 모서리에 턱을 찧고 자빠졌다. 어느 놈은 제 칼자루에 제 명치를 찧었는데, 본인도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끝내 알지 못했다. 말 위에서 지휘하던 놈은 말이 갑자기 앉아 버리는 바람에 앞으로 미끄러져 내렸고, 말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길가의 풀을 뜯기 시작했다. 도망치려던 둘은 서로 반대로 뛰다가 정면으로 부딪혀 사이좋게 뻗었다.
표사들은 칼을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싸울 상대가 알아서 줄어드는 싸움은 다들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자빠짐의 언저리에는, 궤짝을 진 짐꾼 하나가 지나가고 있었다.
"뭐,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우두머리가 소리를 질렀다. 눈으로 보고도 알 수 없었다. 짐꾼은 그저 궤짝을 지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것 같은데, 그 곁을 지나는 부하들만 골라서 땅바닥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저놈이다! 저 짐꾼 놈을 쳐라!"
여문 서넛이 무현에게 덤벼들었다.
무현은 한숨을 쉬고, 궤짝을 내려놓았다. 소중한 약재였다. 상하면 삯에서 깐다고 했다.
그리고 젓가락을 꺼냈다.
객잔에서 국밥 먹다 얻어 둔, 대나무 젓가락 한 벌이었다. 부지깽이는 두고 왔고 검은 없으니, 남은 것이 이것뿐이었다. 소문이 젓가락이라 우기던 것이 생각나서, 이왕 이렇게 된 것 소문에 장단이나 맞춰 주기로 했다.
젓가락 한 짝이 허공에 반원을 그렸다.
토독. 톡. 토도독.
혈도 짚는 소리가 빗방울 소리처럼 이어졌고, 여문 서넛이 차례로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으로 우두머리가 칼을 치켜든 채로 굳었다. 목젖 앞에 젓가락 끝이 먼저 와 있었다.
"화물은 두고, 형씨들이 꺼지는 걸로 합시다."
무현이 말했다.
"그럼 목숨은 살려 드리지요. 아까 형씨가 한 말 그대로입니다만."
우두머리는 침을 꿀꺽 삼키고, 칼을 버렸다.
버리고 나서도 미련이 남는지 입을 열었다.
"하, 한 가지만 물읍시다. 댁 같은 고수가 왜 짐꾼 노릇을."
"삯을 받으니까요."
"하루 두 푼 받자고?"
"두 푼이 우습습니까. 국밥이 한 그릇에 세 푼입니다. 이틀 지면 국밥에 수육까지 나옵니다."
우두머리는 제가 방금 국밥 두 그릇 반짜리 사내에게 목이 잡혔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그냥 순순히 묶였다.
무현은 그를 묶기 전에 왼팔 소매를 걷어 보았다. 붉은 실 해골. 가까이서 보니 실이 낡아 해져 있었다.
"이 문양, 어디서 받았소."
"바, 받다니. 그냥 혈풍십귀 흉내를 낸 것뿐이오! 그 이름을 대면 다들 알아서 기니까!"
"흉내라."
"지, 진짜요! 우리 같은 조무래기가 그 어르신들 밑에 어떻게 들어가오!"
"그 흉내는 어디서 배웠소. 문양 모양새가 제법 정확하던데."
"저, 저잣거리에 다 도는 얘기요. 그 문양을 달고 다니면 사파 쪽에서도 안 건드린다고. 혈풍십귀 어르신들 눈 밖에 나고 싶은 놈은 없으니까."
어르신들. 조무래기 도적이 학살자들을 어르신이라 부르는 세상이었다. 무현은 그 말을 새겨 두었다. 낡은 흉내 문양 하나가 이 바닥의 밑바닥을 이름만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그 이름의 임자들은 두 달 전 무당에 꺾였을 텐데도.
스물셋을 새끼줄로 엮는 솜씨는 이제 이력이 붙어 있었다.
엮기를 마치고 무현은 숲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뒤 밧줄에 묶인 사내 하나를 어깨에 메고 나왔다. 행방불명이던 척후 표사였다. 재갈이 물린 채 나무에 묶여 있던 것을 통째로 풀어 온 것이다.
"사, 살아 있었구나!"
표두가 달려와 얼싸안았다. 척후는 재갈을 뱉고 숨을 몰아쉬며 무현을 가리켰다.
"이, 이분이… 대체 어디서…."
"묶여 계시길래 주웠습니다."
"주웠다니, 사람을."
"떨어져 있는 건 줍는 게 도리라 배웠습니다."
수레 밑에서는 그제야 덕배가 기어 나왔다. 눈을 꼭 감은 채였다.
"구, 구십구, 백! 끝났습니까?"
"끝났다."
"…진짜네."
덕배는 그날부터 무현을 아저씨가 아니라 사부님이라 불렀다. 무현이 정색하고 말려도 소용없었다. 말리면 말릴수록 겸손하신 사부님이 되었다. 나중에는 밥 먹는 것까지 따라 해서, 무현이 국에 밥을 마니 덕배도 말았고, 무현이 세 그릇을 먹으니 덕배도 세 그릇을 먹다가 탈이 났다. 사부님처럼 되는 길은 멀었다.
상단은 잔치 분위기가 되었다.
표두는 무현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진 대협! 아니, 진 협객! 뉘신지는 모르나 우리 상단의 은인이시오!"
"짐꾼입니다. 하루 두 푼짜리."
"그 무슨 겸양의 말씀을!"
"참, 궤짝을 잠시 내려놓았는데, 약재는 안 상했는지 봐 주시겠습니까. 삯에서 깐다고 하셔서."
표두는 껄껄 웃다가 무현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그쳤다. 진담이었던 것이다.
행렬은 그날 저녁 무사히 큰 저잣거리에 닿았다. 상단주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사례를 하겠다는 것을, 무현은 이번에도 국밥 한 그릇과 하루 묵을 방, 그리고 밀린 짐꾼 삯 두 푼으로 합의를 보았다. 대신 부탁을 하나 얹었다.
"저 스물셋은 관아에 넘기시되, 두목만 빼고는 초범으로 잘 말씀해 주십시오. 태반이 골짜기에서 흘러온 패잔병입니다. 칼 잡을 데가 없어 칼질을 하는 겁니다."
"…대협은 참 이상한 분이시오."
"자주 듣습니다."
저녁상은 표두와 겸상이 되었다. 상단주가 억지로 차려 준 자리였다. 표두는 술을 권하다 무현이 사양하자 저 혼자 마시며,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풀었다.
"화산 쪽으로 간다 하셨지."
"예."
"화산이… 말이 아니오. 표행으로 몇 번 오갔는데,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집디다. 산문은 불탄 채고, 객당은 부상자 수용소가 됐고. 일대제자가 절반이 죽고, 잡역이며 속가며 동원됐던 사람들은 거의 다 돌아오지 못했다 하오. 그 큰 화산이 문 지킬 사람이 없어서, 요즘은 외부 낭인을 삯 주고 세운다는 소리까지 있소."
무현은 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눌렀다.
"…사람이, 그리 많이 죽었습니까."
"많이 정도가 아니오. 실종자 명부가 책 한 권이라 합디다. 시신도 못 찾은 집이 태반이라, 화산 아래 마을들에서는 아직도 곡소리가 안 그친다오."
시신도 못 찾은 집. 그중 한 집을 무현은 알고 있었다. 열두 살짜리가 있는 집. 술 대신 물을 삼키는데, 목구멍이 좁아져 있었다.
그날 밤, 객잔 아래층이 소란해서 내려다보니 표사들이 술잔을 돌리며 낮의 무용담을 풀고 있었다.
"글쎄 젓가락 한 짝으로! 토독토독! 스물셋이 전부!"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네! 그 어른이 바로 소문의 그 절벽 과객이셔!"
"절벽 과객이 뭔가, 이 사람아. 그런 어른께는 별호가 있어야지."
"별호라. 젓가락을 쓰시니… 젓협(箸俠)?"
"에이, 저협이 뭔가 저협이. 상스럽게. 어감이 꼭 젓갈 장수 같잖나."
"그럼 협객 협 자를 붙여서, 젓가락 협객!"
"길다니까. 줄여서 저선(箸仙)! 젓가락 신선!"
"내 들으니 첫 마을에서는 부지깽이를 쓰셨다던데. 그럼 화협(火俠)은 어떤가. 부지깽이가 불 다루는 물건이니."
"불 화 자는 화산(華山)하고 헷갈려."
"그럼 이건 어떤가. 만병지왕(萬兵之王)! 손에 잡히는 건 뭐든 병기로 쓰시니!"
"부지깽이하고 젓가락 잡으신 걸로 만병은 너무 나갔지."
"그럼… 주방신협(廚房神俠)?"
"자네 그거 어르신이 들으시면 큰일 날 소리야."
무현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저협. 저선. 젓가락 협객. 어느 쪽도 끔찍했다. 서른 해를 배워 돌아온 무공의 이름이 젓가락으로 굳어 가고 있었다. 옥허노모가 들으면 지팡이가 날아올 일이고, 현화진인이 들으면 검을 가르친 것을 물릴 일이었다.
'별호가 붙기 전에 이 동네를 떠야 한다.'
무현은 굳게 결심하고 잠들었다.
떠나기는 다음 날 아침에 떠났다. 다만 조용히 떠나지는 못했다. 상단주가 저잣거리 초입까지 배웅을 나왔고, 표사들이 도열해서 절을 했고, 구경꾼이 백은 모였다.
덕배는 초입을 지나 반 리를 더 따라왔다.
"사부님. 저도 데려가시면 안 됩니까."
"사부가 아니라니까."
"그럼 아저씨. 저도 무공이 배우고 싶습니다. 저도 사부님처럼, 아니 아저씨처럼 되고 싶습니다."
무현은 걸음을 멈추고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형처럼 문지기가 되겠다던 어느 열두 살짜리 이야기가 떠올라, 잠시 말이 늦었다.
"덕배야."
"예."
"어제 수레 밑에서 백까지 센 거. 그거 잘한 거다."
"…그게 뭐가요. 숨은 건데."
"숨을 때를 아는 게 반이다. 나머지 반은 나설 때를 아는 거고. 나설 때가 되면 몸은 저절로 나선다. 어제의 나처럼."
"그럼 저는 언제 나섭니까."
"지게 지는 힘부터 길러라. 지게 못 지는 놈은 검도 못 진다."
덕배는 알 듯 말 듯한 얼굴로 돌아갔다. 무현은 그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제 입에서 나온 말을 곱씹었다. 지게 못 지는 놈은 검도 못 진다. 왕철산이 들으면 코웃음 칠 소리였지만, 어딘가 스승 넷의 말버릇이 섞여 있었다. 가르침이란 받다 보면 새는 모양이었다.
그 백 명이 저녁까지 천 명에게 이야기를 옮길 것이다.
젓가락 협객이 화산 쪽으로 갔다더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