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탈영은 사형이다
지은이 음악의 신 · 2026-08-31
그날 밤, 무현은 단 한순간도 깊이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진곤의 말이 떠올랐다.
도망가게. 그냥 내일부터 나오지 말게.
그 말은 옳았다. 옳다기보다, 살기 위한 유일한 길에 가까웠다. 화산 땅에 붙들려 잡역과 훈련을 반복하다가는 정말로 목숨을 잃을지 몰랐다. 왕철산의 그 눈빛, 사람을 사람으로 세지 않고 머릿수로 세던 그 말투를 떠올릴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떠날 수 없었다.
평생 섬서와 화산 언저리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것은 붉은 흙길과 척박한 밭, 산 아래 마을이 전부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낯선 땅에서 무엇을 해 먹고 살아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남들 같으면 가진 것 하나 없으니 오히려 훌쩍 떠났을지도 모른다. 무현은 그런 사람이 못 되었다. 마음 한켠에서는 당장 달아나라고 외치는데, 몸은 끝내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할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얼굴을 이불에 묻었다. 당신은 굶어도 손주 입에 들어갈 죽 한 숟갈을 먼저 챙기던 사람. 그 사람이 지난해 눈을 감은 뒤로, 무현에게 남은 것은 화산의 밥과 화산의 잠자리뿐이었다.
그렇게 뒤척이다 보니 동이 텄다.
충혈된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천근 같은 몸. 바짝 마른 입안. 씻고 나와도 부은 얼굴은 가라앉지 않았다. 형장으로 걸어가는 죄수처럼 무거운 걸음으로 출근길에 올랐다.
일터에 도착하자 진곤이 힐끔 돌아보았다. 붓기 어린 얼굴과 퀭한 눈을 본 순간, 그는 모든 사정을 알아차린 듯했다. 애잔하면서도 어딘가 체념이 밴 웃음이 그 얼굴에 잠깐 스쳤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현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었다. 도망치지 못했다는 것도, 이제 와서는 늦었다는 것도.
화산의 분위기는 하루 사이에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객당은 아예 폐쇄되었다. 마당마다 제자들이 떼지어 검을 휘두르고 구보를 돌았고, 고함과 구령이 사방에서 쉼 없이 울렸다. 객당이 닫혔으니 오전엔 한숨 돌리겠거니 했던 기대는 완전한 오해였다. 사람이 몰린 만큼 잡일은 오히려 늘었다. 물을 나르고, 무기를 옮기고, 훈련에 쓸 물품을 정리하고, 여기저기서 떨어지는 지시를 따라 뛰다 보니 허리 펼 틈이 없었다. 몸은 어제의 훈련에서 회복되지 못한 채였다. 팔과 어깨, 허벅지와 종아리까지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다. 손에 힘을 주기만 해도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힘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한 번이라도 굼뜨면 감독하는 자들이 눈을 부라렸고, 대꾸라도 잘못하면 욕설이 쏟아졌다. 이를 악물고 움직였다. 오늘 하루만 무사히 넘기자. 그 생각뿐이었다.
오전 일이 끝나고 숨 돌릴 틈도 없이 공터로 불려 갔을 때였다.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상함을 느꼈다.
사람이 적었다.
기분 탓인가 싶어 다시 세어 보았다. 아니었다. 어제 그 공터를 메우던 인원의 절반 남짓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이 많은 축 몇이 어제 훈련을 못 이기고 몸져누웠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 수를 감안해도 지나치게 적었다.
벌써 그만큼이 도망친 것이다.
어제까지 함께 욕을 먹고, 함께 넘어지고, 함께 신음하던 얼굴들이 사라져 있었다. 무사히 달아났는지, 어디선가 붙잡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술렁임이 바람처럼 번졌을 때, 앞으로 나선 것은 왕철산이 아니었다.
마르고 키가 큰 사내였다. 긴 얼굴에 입꼬리가 비웃듯 올라가 있고, 눈빛이 사냥꾼 같았다. 손에는 긴 장대 하나. 그가 장대 끝으로 흙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왕 교두께서는 오늘부터 본산 제자들 훈련으로 돌아가셨다. 너희는 이제 내가 맡는다. 외당 교련관, 주명수다."
교련관. 교두보다 아래, 그러나 무현 같은 자들 위에서는 생살여탈권을 쥔 자리였다.
주명수는 천천히 줄 앞을 걸었다. 짚신이 흙바닥을 짓밟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렸다.
"사람 수가 줄었다고 수군거리는 놈들이 많구나."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도망간 놈들이 있다. 그래, 있을 수 있지. 벌레 새끼들이 겁을 먹고 구멍으로 기어드는 건 흔한 일이다."
그가 멈춰 서서 좌중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착각은 하지 마라. 화산에서 도망쳐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긴장 어린 숨소리가 퍼졌다.
"너희는 어제부로 화산의 군편에 편입되었다. 더는 잡역부도 아니고 품팔이꾼도 아니다. 지금부터는 전시에 동원된 군병이다."
몇몇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었다. 주명수는 그 반응이 우스운 듯 냉소를 흘렸다.
"전시에 군병이 대열을 이탈하는 것을 무엇이라 하는지 아느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탈영이다."
낮았으나 또렷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전시에 탈영한 자의 죄는 사형이다. 화산만의 규율이 아니다. 무림맹에 속한 모든 문파와 세가, 무관과 표국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전시 군율이다."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이제 그것은 도망치면 맞는다는 수준의 겁박이 아니었다.
"혹여 이 산만 벗어나면 살 수 있으리라 여기는 놈이 있을까 하여 미리 일러 두마. 오늘 밤 이 산을 빠져나간다 해도 끝난 것이 아니다. 무림맹의 격문이 뜨는 순간 너희는 탈영병으로 기록된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비웃듯 덧붙였다.
"탈영병은 어느 고을 객잔에서도 몸을 숨길 수 없고, 어느 상단에서도 품삯을 받을 수 없으며, 어느 문파의 땅에서도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다. 무림맹의 눈 밖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곧 강호 전체를 적으로 돌린 채 숨어다닌다는 뜻이니라."
누군가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산속으로 숨어들면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름을 감추고 떠돌면 끝일 것 같으냐. 천하의 길목마다 무림맹의 눈과 귀가 퍼져 있다. 너희 같은 놈들이 얼마나 멀리 달아나겠느냐. 결국 굶어 죽거나, 잡혀 와 군율에 따라 목이 달아날 뿐이다."
입꼬리가 서늘하게 올라갔다.
"어제 도망친 놈들도 끝까지 쫓아가 잡아 올 것이다. 살아서 끌려오든 반쯤 죽어 질질 끌려오든 상관없다. 놈들의 말로를 네놈들 눈앞에 세워 두마. 그때 가서 후회하면 늦다."
정적.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었다. 그 짧은 정적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그러니 똑똑히 새겨 들어라. 지금부터 너희에게 도망이란 없다. 여기서 버티다 죽든, 칼을 들고 나가 죽든, 선택지는 그것뿐이다. 살아남고 싶다면 버텨라. 쓰러지면 버려지고, 도망치면 잡혀 와 맞아 죽는다. 그뿐이다."
그 말과 함께 훈련이 시작되었다.
훈련에 앞서 허리의 규격 검부터 회수되었다. 대신 손때에 전 목검이 하나씩 쥐여졌다.
"날붙이는 전장에서나 다시 받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지 네놈들 손에 들려 봐야 제 편 발등이나 찍을 테니."
주명수의 말에 반박하는 자는 없었다. 목검은 진짜 검보다 한결 가벼웠으나, 그 가벼움이 오히려 서글펐다.
그날의 훈련은 전날보다 가혹했다.
기본 자세를 유지한 채 쪼그려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했고, 목검을 쥔 채 수백 번씩 찌르는 동작을 되풀이했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욕설이 날아들었고, 동작이 느려지면 장대가 허벅지나 등을 후려쳤다. 햇볕은 이글이글 내리꽂혔고 땀은 눈으로 흘러들었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 안쪽이 탔다.
사람들이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팔에 힘이 풀려 목검을 떨어뜨렸고, 누군가는 다리에 경련이 일어 주저앉았다. 더러는 그대로 토했고, 어떤 이는 새파랗게 질린 채 정신을 잃었다. 공터는 비명과 헐떡이는 숨소리로 가득 찼다.
그 와중에도 무현은 꾸역꾸역 버텼다.
힘들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팔은 이미 제 것이 아닌 듯 떨렸고, 다리는 땅에 뿌리라도 박힌 듯 무거웠다. 그런데도 쓰러지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한 번 더, 또 한 번 더 동작을 이어 갔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여기서 멈추면 정말 끝장이라는 막연한 공포가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진곤이 헐떡이며 다가왔다.
"자네, 대체 어떻게 아직 서 있나?"
고개를 드니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고 얼굴은 땀과 먼지 범벅이었다.
"형님도, 버티고 계시잖습니까."
"나는 원래 막일로 다져진 몸이라 그렇다 쳐도, 자네는."
진곤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옆에는 몇 사람이 바닥에 널브러진 채 신음하고 있었다. 그 광경과 견주면, 무현이 아직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상해 보일 법했다.
문득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자신에게 무술에 소질이 있는 건 아닐까.
태어나 처음 해 보는 훈련인데도 남들처럼 맥없이 나가떨어지지는 않았다. 동작은 엉망일지언정 몸이 아주 못 따라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자신에게도 뭔가 있을지 모른다는, 작고도 어이없는 기대가 아주 잠깐 가슴속에서 싹텄다.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훈련이 다시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명수가 성큼 다가왔다. 그는 무현의 자세를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자세냐?"
고쳐 잡으려 했으나 늦었다. 발길질이 종아리를 걷어찼고, 무현은 비틀거리며 무릎을 굽혔다.
"허리는 죽었고, 어깨엔 힘이 들어갔고, 손목은 삐뚤어졌고, 찌르기는 느려 터졌구나. 이런 꼴로 검을 잡고도 버틴다고 스스로 대견했느냐?"
방금 전까지 피어오르던 작은 희망이 순식간에 꺼졌다.
입을 다문 채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괘씸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제 동작은 형편없었다. 남들보다 잘해서 버티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포기하는 법을 몰라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 것뿐인지도 몰랐다.
훈련이 끝났을 때, 남은 자들 대부분은 시체나 다름없는 몰골이었다.
해는 뉘엿뉘엿 기울고, 공터 위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사람들은 말없이 주저앉거나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손바닥이 까져 피가 밴 자, 종아리를 부여잡고 이를 가는 자. 얼굴마다 지친 기색과 공포, 그리고 보이지 않는 앞날에 대한 막막함이 어른거렸다.
무현은 진곤과 함께 물을 마시며 공터 한쪽에 주저앉았다. 같은 조의 사내 몇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집에 돌아갈 기운도 없는 자들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왼뺨에 멍이 든 중년 사내였다.
"이러다 사람 죽겠소."
아무도 웃지 않았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 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오늘 빠진 놈들, 진짜 도망친 거겠지?"
"그랬겠지."
"붙잡히면 어쩌려고."
"안 붙잡히면 사는 거고, 붙잡히면 죽는 거겠지."
말끝마다 자조가 묻어났다. 다른 사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난 어제까지만 해도 며칠 버티면 좀 나아질 줄 알았소. 그런데 이건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잖소."
"길러서 뭘 시키려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무슨 좋은 일에 쓰려고 이러겠나. 다 우리 같은 것들 소모품 취급하는 거지."
침묵이 흘렀다.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도, 언젠가 나아질 거라는 말도 여기서는 공허하게 들릴 뿐이었다.
한 사내가 무현을 힐끔 보며 말했다.
"그래도 자네는 꽤 버티더군."
"버틴다기보다, 그냥 쓰러질 틈이 없을 뿐입니다."
"그것도 대단한 거요. 난 오늘 두 번이나 정신이 아찔했소."
진곤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 친구는 원래 우직하오.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직하다는 말이 칭찬인지 답답하다는 뜻인지 저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그 우직함이 지금 저를 살리고 있는지, 아니면 더 깊은 구렁으로 밀어 넣고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
그리고 몇 주가 지났다.
처음 끌려왔을 때는 하루하루가 끝없는 고통 같았는데, 사람 몸이라는 것은 이상하리만치 금세 익숙해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온몸이 뻐근했고 팔과 어깨, 허벅지는 늘 묵직한 통증을 품고 있었지만, 그 통증조차 시간이 흐르자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처음엔 물집 잡힌 손으로 목검도 제대로 못 쥐었는데, 이제는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도 어찌어찌 버텨 냈다. 고된 노동과 오후 훈련, 욕설과 매질과 협박이 이어졌으나, 무현은 어느새 그것을 견디는 법부터 배우고 있었다.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두려운 것은 오히려 그것이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이 주명수의 장대인지, 화산의 억압인지, 아니면 이런 삶에 차츰 무뎌져 가는 자기 자신인지.
그날도 해 질 무렵에야 모든 일이 끝났다.
땀과 먼지에 절어 진곤과 함께 산문을 나섰다. 몸은 무거웠지만, 화산 바깥 저잣거리로 내려서는 순간만큼은 늘 조금 숨통이 트였다. 장사꾼들이 목청껏 물건을 팔고, 아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객잔과 찻집에서 사람 냄새가 나는 풍경. 화산 안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어딘가 이상하리만치 소란스러웠다.
평소의 저잣거리라면 장사치들의 외침과 수레 소리, 손님들 웃음소리가 섞여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안에 다른 소리가 끼어 있었다.
비명. 놀란 외침. 우르르 흩어지는 발소리.
그리고 쇠붙이가 맞부딪히는, 섬뜩한 금속음.
진곤이 걸음을 멈췄다.
"저 소리."
무현도 고개를 들었다.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물러선 원 안쪽에서, 누군가들이 싸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