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살아남기 위한 한 번의 동작
지은이 음악의 신 · 2026-08-31
"무량천존."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잡역당 앞 공터에 울렸다.
진무현은 하품을 삼켰다.
아침 조회는 늘 지루했다. 잡역당장이 헛기침을 하고, 그날의 배치를 읊고, 다들 흩어져 제자리로 가면 끝. 몇 해를 하루같이 되풀이해 온 순서였다. 그런데 오늘은 처음 보는 얼굴이 조회 앞자리에 서 있었다. 회청색 포에 청색 띠. 속가제자의 복색이었다. 잡역당장은 그 옆에서 평소보다 두 배는 비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나는 화산 외당 소속 속가제자, 유청악이오."
중년인은 양손을 등 뒤로 모은 채 모인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눈빛은 차분했으나, 그 아래 깔린 긴장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매일 같은 화산의 하늘 아래 지내면서도 이렇게 한자리에서 얼굴을 볼 일은 드물었는데, 오늘은 부득이 이 자리에 서게 되었소."
무현은 저도 모르게 등을 폈다.
외당의 속가제자가 잡역당 조회에 직접 내려오는 일은 없다. 적어도 무현이 객당 문지기 노릇을 해 온 몇 해 동안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화산파. 섬서 땅 화산에 뿌리내린 구파일방의 검문. 그 서편 객당은 강호의 낭인부터 이름난 무인, 인근 상단주까지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고, 무현은 그 객당의 문지기였다. 정식 명칭은 잡역당 소속 산문수위. 이름만 들으면 제법 그럴싸하지만, 하는 일은 아침에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정해진 자리에 서 있다가 해가 기울면 퇴근하는 것이 전부였다. 명문 검파답게 수위에게도 검 한 자루씩은 지급되었으나, 무현은 제 허리의 검을 마지막으로 뽑아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당연했다. 검술을 배운 적이 없으니까.
그 객당이, 사흘 전부터 닫혀 있었다.
어제 오후 근무 때 옆자리의 진곤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었다.
"무현 자네, 요즘 객당이 왜 이리 한산해졌는지 아는가?"
"글쎄요. 저 같은 게 그런 사정을 어찌 알겠습니까."
"소문에 의하면 말이야. 정사대전이 머지않았다는군."
정사대전. 강호에서 밥을 먹는 자라면 누구도 가볍게 들을 수 없는 넉 자였다. 정과 사가 정면으로 부딪치면 피바람이 분다. 그리고 그 피바람은 높은 자들보다 가장 낮은 곳에 선 자들부터 먼저 휩쓸어 삼키는 법이었다.
설마 했다. 하루 만에, 그 설마가 눈앞에 서 있었다.
"이미 소문을 들은 이들도 있을 것이오."
유청악이 말을 이었다.
"강호의 정세가 심상치 않소. 정과 사가 오래 쌓아 온 긴장이 더는 감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각 문파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움직이기 시작했소. 화산 또한 예외가 아니오. 장문인께서 문내 경계를 강화하라 명하셨고, 외당과 잡역당 역시 전시 체제에 준해 재편될 것이오."
전시 체제.
공터가 술렁였다. 무현은 마른침 대신 숨을 한 번 깊게 삼켰다.
"객당 출입 규율은 한층 엄격해질 것이며, 산문수위와 각처 경비 인원의 배치가 재조정되오. 상황에 따라 잡역당 인원도 후방 지원과 보급 운반, 부상자 이송에 동원될 수 있소. 그리고."
유청악이 잠시 말을 끊었다. 그 한 박자에 공터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앞으로 한 달간, 잡역당 소속 산문수위 전원은 기본 검 조작과 진형 보조법을 익히게 될 것이오."
여기저기서 당혹한 기색이 번졌다.
검 조작이라니. 그 말은 곧, 정말로 칼을 쥘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무현은 허리춤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늘 장식처럼 차고만 다니던 물건이 오늘따라 유난히 무거웠다.
유청악이 떠난 뒤에도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산문수위들이야 원래 말수가 적었고, 잡역부들도 윗사람 앞에서 떠들 배짱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침묵은 입이 무거워서가 아니었다.
두려움이었다.
정사대전이 더는 남의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 여파가 화산의 말단 잡역들에게까지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잡역당장이 앞으로 나섰다.
"훈련은 오늘부터다. 산문수위 전원, 오전 근무를 마치는 대로 연무장 서편 공터로 집합한다. 외당에서 직접 사람이 온다. 한 사람도 빠져서는 안 된다."
옆에 선 진곤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거, 아무래도 심상치 않구먼."
"예. 설마 검식까지 가르칠 줄은 몰랐습니다."
"후방 심부름만 시키면 다행이겠지."
말끝이 흐려졌다. 무현도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둘 다 알고 있었다. 세상이 어지러워질수록 가장 먼저 값싸게 쓰이는 것은 이름 없는 말단들의 손과 발이라는 것을.
그날 오후, 산문수위들은 하나같이 무거운 얼굴로 공터에 모였다.
평소 같으면 외당 무인들이 몸을 풀던 자리였다. 오늘은 한쪽에 수위들이 줄지어 서고, 반대편에 외당 무인 둘이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현은 괜히 검집을 만지작거렸다. 늘 차고만 다녔지, 제대로 잡아 본 적 없는 검이었다. 손에 익기는커녕, 남의 물건을 빌려 찬 듯 어색했다.
"줄 맞춰라! 삐뚤빼뚤 서서 뭘 하겠다는 게냐!"
우렁찬 호통이 터졌다.
앞에 선 사내는 사십 대 중반의 건장한 무인이었다. 각진 턱, 날카로운 눈매, 미간에 깊게 패인 주름. 한눈에 봐도 성미가 만만치 않았다. 곁의 젊은 무인이 낮게 일렀다.
"외당 교두 왕철산 대협이시다. 오늘 훈련을 직접 맡으신다."
교두가 직접. 수위들이 황급히 허리를 세웠다.
왕철산은 천천히 줄 앞을 거닐며 면면을 훑었다. 그 눈에 기대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좋다. 아주 좋군."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잡역당, 산문수위, 객당 문지기. 이름은 거창한데 꼴을 보아하니 검은커녕 부엌칼도 제대로 못 잡아 봤을 놈들이 태반이군."
몇몇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무현도 별수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왕철산이 대뜸 손을 뻗었다.
"검 뽑아라."
공터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철컥.
철걱.
서걱.
여기저기서 뒤늦게 검이 빠져나오는 소리가 어지럽게 이어졌다. 누군가는 검집에 걸려 버벅였고, 누군가는 반쯤 뽑았다 도로 밀어 넣었다. 힘 조절을 못해 뽑다가 휘청거리는 자까지 있었다.
"이게 검파의 산문을 지키는 놈들의 꼴이냐?"
모두의 어깨가 움찔했다.
무현도 마침내 검을 뽑아 들었다. 낯선 감촉이었다. 날은 생각보다 길었고, 생각보다 무거웠다. 허리에 차고 있을 때와 손에 들었을 때는 아예 다른 물건 같았다.
왕철산이 무현 앞에 멈춰 섰다.
"이름."
"지, 진무현입니다."
"진무현."
그가 무현의 손을 힐끗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검을 쥔 손이 죽은 물고기 같구나. 손목엔 힘이 없고, 어깨엔 잔뜩 힘이 들어갔어. 그렇게 쥐면 사람은 못 베고 네 손목부터 먼저 나가겠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럽고, 억울하고, 그런데 반박할 말이 하나도 없었다.
왕철산이 목소리를 높였다.
"똑똑히 들어라! 너희는 오늘부터 검객이 되는 게 아니다. 애초에 그럴 재목도 아니고, 시간도 없다. 너희에게 가르칠 것은 고작 세 가지다. 첫째, 검을 뽑는 법. 둘째, 앞으로 내지르는 법. 셋째, 남들 틈에 끼어 진형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법."
공터를 둘러보는 목소리가 얼음장 같았다.
"명심해라. 전장에서 대단한 초식 따위는 필요 없다. 너희 같은 놈들이 해야 할 일은 앞줄이 무너지지 않도록 머릿수나 채우는 것이다. 운이 좋으면 산다. 운이 나쁘면 죽는다. 그뿐이다."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들으니 속이 이상했다. 훈련이라기에 뭐라도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고 잠깐이나마 기대했던 자신이 우스웠다. 이 훈련은 저들을 무인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칼끝이 제 편을 향하지 않게 만드는 최소한의 손질일 뿐이었다.
"자세!"
호통과 함께 모두가 허둥지둥 검을 들었다.
"발 넓이부터 틀렸다! 왼발 반 보 앞으로! 어깨 힘 빼! 허리는 곧게! 손목 꺾지 마라!"
지적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서툰 동작으로 검을 겨누던 무현의 팔이 몇 번 지나지 않아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휘두른 것도 아니다. 그저 앞으로 겨눈 채 서 있었을 뿐인데 손바닥이 얼얼하고 팔뚝이 타는 듯했다.
"진무현!"
퍼억.
왕철산의 검집 끝이 팔꿈치를 후려쳤다. 가볍게 친 것일 텐데도 이가 절로 악물렸다.
"팔꿈치를 너무 펴면 부러진다. 죽고 싶지 않으면 힘을 빼고 버텨라."
"예!"
대답은 했지만 자세를 바로잡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옆에서 진곤이 시뻘게진 얼굴로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구먼."
대꾸할 겨를도 없었다. 말 한마디 보탰다간 숨 쉬는 것조차 무너질 판이었다.
"좋다. 찌르기 열 번."
왕철산이 짧게 명했다.
"앞으로 나서며 찔러라!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라. 목이든 가슴이든 배든, 먼저 닿는 곳을 찌른다고 생각해!"
수위들의 검이 엉성하게 앞으로 뻗었다. 발과 손이 엇박자였고, 검끝은 허공을 헤맸다. 앞으로 나서다 제 발에 걸려 비틀거리는 자도 나왔다.
"천치들 같으니!"
고함이 공터를 뒤흔들었다.
"지금 장난하는 게 아니다! 상대는 얌전히 서서 찔려 주지 않는다! 네가 머뭇거리는 순간 목이 날아간다고 생각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왕철산이 직접 나섰다.
아주 짧게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검끝은 이미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쉭.
짧고 단순한 동작.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빨랐다.
무현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대단한 초식이 아니었다. 그저 앞으로 한 번 찌른 것뿐인데, 방금까지 저희가 흉내 내던 몸짓과는 전혀 달랐다. 군더더기가 없었고, 망설임이 없었다.
"봤느냐."
왕철산이 차갑게 말했다.
"너희가 배울 것은 이런 것이다. 화려한 검법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한 한 번의 동작이다."
그 한마디가 가슴 어딘가에 걸렸다.
살아남기 위한 한 번의 동작.
이상하게도, 검법이라는 말보다 더 무겁게 들렸다.
"다시! 열 번이 아니라 백 번이다! 해 지기 전까지 제대로 된 찌르기 한 번 못 보이면, 내일부터는 오전 근무가 끝나기도 전에 여기 끌려올 줄 알아라!"
절망 섞인 신음이 새어 나왔지만, 대놓고 불평하는 자는 없었다.
무현은 검을 고쳐 쥐었다. 손바닥은 쓸려 따끔거렸고 팔은 무거웠고 어깨는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런데도 조금 전과는 어딘가 다른 감각이 있었다. 검이 낯설고 두려운 것은 그대로였다. 다만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이 검은 장식이 아니라는 것을. 머지않아 정말로 사람을 향해 뻗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왕철산이 보인 대로 왼발을 반 보 내디뎠다. 검끝이 미약하게나마 앞으로 곧게 뻗었다. 서툴고 느렸지만 아까보다는 나았다.
왕철산이 그 모습을 힐끗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다음 사람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칭찬도 욕도 없었다. 그 무심한 침묵이 오히려 더 무거웠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에야 훈련이 끝났다. 끝났다기보다, 왕철산이 더 가르칠 가치도 없다는 얼굴로 손을 내저은 것에 가까웠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내일부터는 찌르기 백 번, 발놀림 백 번으로 시작한다. 자세가 또 흐트러지면 손목부터 부러뜨릴 줄 알아라."
교두와 외당 무인들이 자리를 뜨자, 공터 여기저기서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무현은 검을 겨우 검집에 밀어 넣고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붉게 쓸린 피부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굳은살 없는 손가락 마디가 욱신거렸다.
"허어. 이거 정말 사람 잡겠구먼."
진곤이 허리를 두드리며 신음했다.
"형님은 그래도 좀 나으시지 않습니까. 저는 팔이 제 팔 같지도 않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일세. 지금 누가 뒤에서 툭 치기만 해도 그대로 고꾸라질 것 같구먼."
둘은 다른 수위들과 함께 공터를 빠져나왔다. 막 저문 해가 화산의 능선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산길 아래로 서늘한 저녁 바람이 불었다.
한동안 말없이 걷던 진곤이 입을 열었다.
"아까 왕 교두 말, 들었지."
"예. 우리를 검객으로 만들 생각은 없다고 했지요."
"그래. 검객은커녕, 앞줄 안 무너지게 세워 둘 머릿수 정도로 보는 게지."
쓴웃음이 나왔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오늘 배운 것도 결국 검을 멋있게 쓰는 법이 아니라, 최소한 제 편 등에 칼을 꽂지 않는 법에 가까웠으니까.
진곤이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나도 처음엔 그냥 겁주려고 이러나 보다 했네. 기초 훈련 조금 시키고 말겠지, 후방에서 짐이나 나르게 하겠지 하고."
"저도 그랬습니다."
"헌데 오늘 보니 아닌 것 같아. 저건 준비하는 눈빛이야. 정말 사람을 내보낼 생각이 아니고서야, 우리 같은 것들한테 저런 식으로 검을 쥐게 할 이유가 없지."
대꾸 대신 손바닥만 내려다보았다. 걷는 내내 얼얼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왕철산의 그 말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한 번의 동작.
짧은 말이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자네는, 무섭지 않은가?"
진곤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다가 솔직히 답했다.
"무섭습니다. 형님 말대로 저 같은 건 전장에 나가면 정말 머릿수 채우다 죽겠지요. 검이 손에 맞지도 않고, 찌르라는 것 하나 제대로 못 하니."
"…"
"근데 이상하게도, 아예 아무것도 안 하고 죽는 것보단 낫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무슨 말인가?"
"오늘 찌르기 배울 때 말입니다. 정말 별것 아닌 동작이었는데, 그래도 한 번쯤은 살려고 버둥거려 볼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진짜 죽을 때 죽더라도, 가만히 서서 목 내밀고 죽고 싶진 않습니다."
진곤이 걸음을 늦추며 돌아보았다.
"자네, 생각보다 독한 구석이 있구먼."
"독하다기보단, 그냥 겁이 많아서 그런 겁니다."
"하하. 겁이 많은 놈이 더 오래 사는 법이지."
따라 웃었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산 아래 갈림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곤은 화산 아래 마을, 식구들이 있는 집으로 내려가야 했고, 무현은 객잔 뒤편 허름한 초가로 돌아가야 했다.
갈림길 앞에서 진곤이 발을 멈췄다.
"무현 자네."
"예, 형님."
진곤은 잠시 망설이다가, 주변을 한번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도망가게."
"…예?"
"그냥 내일부터 나오지 말게. 화산을 떠나는 거야. 멀리, 아주 멀리."
무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진곤이 씁쓸하게 웃었다.
"솔직히 말해 보세. 자네도 느꼈지 않은가. 저건 기초 훈련이 아니라 사람을 전장에 밀어 넣기 전 마지막 손질이네. 자네 같은 놈, 나 같은 놈은 막상 때가 되면 제일 앞줄에 세워질 게야."
"형님은, 그럼 왜."
"나는 못 가지."
대답은 짧았다.
"집에 사람이 있네. 늙은 어머니가 계시고, 어린 동생들이 있어. 내가 사라지면 그 아이들까지 화를 입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네는 다르지 않은가."
무현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아비와 어미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거두어 키워 준 할머니마저 지난해 눈을 감았다. 붙잡을 처자식도, 돌아가 안부를 물을 식구도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내일 새벽 짐 하나 둘러메고 화산을 내려갈 수 있었다. 산문수위 하나쯤 사라진다고 아쉬워할 사람도 없을 터였다.
진곤이 무현을 똑바로 보았다.
"살 수 있으면 살아야지. 이런 데서 개죽음당할 이유가 자네한테 어디 있나."
도망.
그 두 글자가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가슴에 박혔다.
그런데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화산은 무현에게 문파라기보다 삶 그 자체에 가까웠다. 제자는 되지 못했으나 이곳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하루하루를 버텨 왔다. 떠난다는 건 자리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지금껏 살아온 삶을 통째로 끊어 내는 일이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참 만에 나온 말은 그것뿐이었다.
진곤은 더 재촉하지 않았다.
"그래. 오늘 밤 안에 잘 생각해 보게. 이런 일은 망설이다 늦으면, 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