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설탕 하나
지은이 일곱날의빛 · 2026-10-28
화약총 훈련이 끝난 오후, 휴게실의 난로는 장작이 반쯤 타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있었다. 손바닥에서 올라오는 온기가 손목의 멍까지 천천히 번졌다. 창가의 겨울 꽃은 어느새 꽃잎을 활짝 열어 놓았다.
어깨는 아직 욱신거렸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불편하지 않았다.
난로 불빛이 찻잔 속에서 작게 일렁였다. 손바닥을 데우는 열이 손목의 멍을 지나 팔꿈치까지 천천히 올라왔다.
이 방에는 서두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게 아직도 낯설었다.
제복 주머니 속에는 각설탕 하나가 들어 있었다. 누군가 아침 쟁반의 찻잔 받침에 얹어 두고 간 것을 쓰지 않고 아껴 두고 있었다. 달면 조금 나아진다는 걸 아는 날이 아직 오지 않은 것처럼.
손가락 끝으로 포장지 위를 문질러 보았다. 거칠거칠한 설탕 알갱이가 만져졌다. 이 작은 알갱이 하나가 누구의 손을 거쳐 내게 왔는지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다.
벽난로 불빛이 닿지 않는 구석에서는 카론이 말없이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이쪽에는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한 번도 눈을 떼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팀원들이 하나둘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줄리앙이 안경을 올려 쓰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셀레네 양. 마력을 개방하고 대개 3년이 지나면 마력이 안정되어, 타고난 속성과 거의 일치하게 됩니다. 사람마다 다르지요.”
그가 회중시계를 손끝으로 짚었다.
“안정되기 전까지는 목걸이가 필요합니다. 신엘 양이 말씀드린 대로요. 그리고 대륙의 마력은 크게 다섯 가지, 물과 불, 흙, 식물, 그리고 어둠으로 나뉩니다.”
지크가 손바닥 위에서 바위를 찰흙처럼 주무르고, 루체가 허공에 물방울을 띄우며 은근히 자랑을 해 보였다.
바위 부스러기가 탁자 위로 가루처럼 흘렀고, 물방울은 난로 불빛을 받아 작은 무지개를 만들었다. 마력이 이렇게 사소하고 따뜻하게 쓰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루체 군처럼 유연한 물. 화력을 극대화하는 불. 지크처럼 단단한 흙. 신엘 양처럼 생명력으로 파동을 넓히는 식물. 카론처럼 시야를 가리고 정신을 갉아먹는 어둠.”
줄리앙이 잠깐 말을 멈췄다.
“수장님의 속성은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지크가 슬쩍 고개를 돌렸고, 루체는 입을 다물었다. 이 방에서 그것을 묻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수장님의 속성. 그 한마디에 온 방이 숨을 죽이는 게 이상했다. 가장 강한 사람이 가장 감춰진 사람이라니.
나는 그 비밀이 어쩐지 그의 손목에 감긴 낡은 리본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소매 안쪽에 묶어 두는 것이 하나쯤은 있는 모양이었다. 내게는 풀리지 않는 매듭이, 그에게는 빛바랜 리본이.
“참고로 마도총을 다루는 사수들은 대부분 마력 개방이 평균보다 늦었습니다. 보통은 여덟 살 무렵 열리지만, 늦게 열린 마력은 그릇이 깊은 대신 자리 잡는 데 오래 걸리지요.”
“저는 열한 살에야 열렸어요. 그래서 아직도 제 물이 덜 자란 기분이고요.”
루체가 입을 삐죽였다가 이내 씩 웃었다.
“근데 줄리앙 님 말로는, 늦은 만큼 제가 앞으로 제일 많이 자랄 거라던데요?”
“자랄 여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보여 드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고요.”
줄리앙이 회중시계를 손끝으로 짚었다.
“셀레네 양은 열네 살에 열렸으니, 그 기준으로도 이례적으로 늦은 개방이지요.”
쭉정이라 불리던 이유가 다른 얼굴로 돌아왔다. 늦었다는 말이 처음으로 흠이 아니라 여지처럼 들렸다.
늦게 열린 아이라고 했다. 늦게 핀 꽃이 더 오래 간다는 말을 어머니가 했던가.
어머니는 늘 내 마력이 열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줄리앙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돌아왔다.
“사수는 자기 속성을 얼마나 깊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탄환의 살상력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셀레네 양의 마력은, 이 다섯 가지 어디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난로 속에서 장작이 탁 터졌다.
잿빛 눈동자가 깊어졌다.
“빛을 오묘하게 반사하며 몽환적인 궤적을 그리는 오팔빛. 지금까지 나타난 적 없는 특수 속성입니다. 속성이 명확하지 않다는 건, 어떤 속성으로도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말이 이상하게 외롭게 들렸다.
그런데 외롭다는 느낌은 곧 다른 모양으로 바뀌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면, 어디든 새로 속할 수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자 가슴 한쪽이 조금 가벼워졌다. 가벼워진 만큼 어딘가가 간지럽고 불안했다. 기댈 곳이 생기면 잃을 것도 생긴다는 걸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름조차 붙지 않은 빛이라니.
찻잔 속 홍차에 내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4년 동안 나는 아무 데도 속하지 못한 아이였다. 쭉정이라는 이름 하나를 빼면.
내가 신기해 눈을 반짝이자 지크가 껄껄 웃으며 어깨에 팔을 걸쳤다. 큼직한 팔이 무겁고 뜨끈했다.
“맞아! 근데 너는 링 하나로 한 번에 각성했다며? 부럽다, 진짜! 나는 마력 링 목걸이를 다섯 개나 잃어버렸거든! 그거 하나 사겠다고 광산에서 피똥 싸며 일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 눈물이!”
“아저씨, 징그럽게 왜 과거사를 꺼내요.”
루체가 투덜거리자 웃음이 터졌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올라간 걸 깨닫고 서둘러 찻잔 뒤로 숨겼지만 이미 늦었다.
뺨이 화끈거렸다. 웃는 얼굴이 이렇게 쉽게 들키는 것인 줄 몰랐다. 저택에서는 웃음이 늘 약점으로 쓰였으니까.
구석의 카론이 책장을 한 장 넘겼다. 아주 느리게.
웃음을 들킨 쪽은 나인데, 어쩐지 그가 먼저 눈을 피한 것 같았다.
신엘이 다가와 내 헝클어진 은금발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손끝이 귀 뒤로 넘어가는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가위가 아니라 빗이었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가 내 머리를 풀어 주고 있었다.
“고생 많았어, 셀레네. 이제 밥 걱정도, 총 때문에 울 일도 없을 테니까 편하게 있어.”
“총 쏠 때 아저씨라고 불러도 된다! 이 아저씨가 다 가르쳐 줄 테니까!”
“저는 아저씨라고 안 불러요.”
“뭐라고?”
“지크 님이라고 부를게요.”
지크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루체가 배를 잡고 웃었고, 신엘의 손이 내 머리 위에서 가볍게 떨렸다.
루체가 쓰러진 지크 곁에 쪼그려 앉아 속삭였다. 장례는 빵으로 치러 드릴게요.
웃음이 또 한 번 터졌다. 웃음이 이렇게 여러 번 연달아 나올 수 있다는 걸, 나는 오늘 처음 알았다.
굳어 있던 얼굴 위로 작은 온기가 번졌다.
얼굴 근육이 낯설게 움직였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기계가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삐걱거리는 만큼 뻣뻣했지만, 부러지지는 않았다. 쓰지 않던 근육도 쓰다 보면 풀린다는 걸 몸이 먼저 배우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저택에서는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식구의 온기였다.
그때, 비밀 문이 열렸다.
복도의 찬 공기가 휴게실 바닥을 훑고 지나갔다. 웃음소리가 꺼졌다.
문턱에 레이너가 서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 난로 불꽃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바깥의 눈 냄새가 그의 외투에서 훅 끼쳐 왔다.
눈 속을 오래 걸어온 사람의 차가운 냄새였다.
외투 어깨에 눈 녹은 물자국이 짙게 남아 있었다. 방금 어딘가에서 돌아온 사람의 얼굴이었다. 묵빛 눈동자가 가장 먼저 내게 닿았다가, 신엘의 손으로, 지크의 팔로 미끄러졌다.
문틈으로 들어온 찬 기운이 난로 불빛에 부딪혀 흩어졌다. 방 안의 온도가 한 겹 내려가는 것을 피부로 알 수 있었다.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다녀오셨습니까, 대장.”
줄리앙이 곧장 다가가 낮게 보고를 올렸다.
“황제가 뭐라 합니까? 오스티아의 소문이 우리라는 걸 알아챈 건 아닙니까?”
“의심은 깊지만 확실한 물증은 없다. 마탄사를 관리하는 자들에게 신경이 쏠려 있더군. 당분간 근위대의 동태를…….”
말을 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줄리앙에게 있지 않았다.
나는 숨을 삼켰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보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것 같았다. 내가 여기 있는지, 웃고 있었는지, 다치지 않았는지.
그러다 레이너는 줄리앙의 보고를 툭 끊고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줄리앙. 셀레네는 오늘 어깨를 너무 혹사했다. 일찍 쉬게 해. 오늘 밤 사격장 정비는 지크와 신엘에게 맡기고.”
배려라기에는 이유가 급했고, 명령이라기에는 목소리가 낮았다. 이 사람은 마음을 표현하는 법이 아니라 숨기는 법만 배운 사람 같았다.
“예? 갑자기 왜……”
“이유가 필요한가.”
아무것도 모른 채 웃던 팀원들 위로 서늘한 눈길이 떨어졌다. 그러나 곧 레이너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줄리앙이 회중시계를 닫으며 낮게 덧붙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맘몬의 정찰병이 이 무기상점 일대 반경을 좁히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사흘 안에 이곳을 찾아냅니다.”
휴게실의 웃음이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찻잔 속의 홍차가 아주 작게 일렁였다. 내 손이 떨고 있었다.
사흘.
겨우 세 번의 밤이었다. 어머니가 갇힌 지 열흘이 넘었는데, 나는 그 열흘을 따뜻한 방에서 보냈다.
이제 사흘 뒤면 같은 길이 이 문 앞에 닿는다.
나는 고개를 들어 레이너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 눈 속에서 무엇이 일렁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입술이 무언가 말하려다 천천히 다물렸다.
“내일 아침.”
한참 만에 나온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마도총을 다시 시험한다. 어젯밤 본 그것이 우연이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그 말을 하는 목소리가, 우연이 아니라고 말해 주길 바라는 사람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