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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찻잔

지은이 일곱날의빛 · 2026-10-28

황궁 접견실의 서늘한 대리석 위로 레이너의 구둣발 소리가 낮게 울렸다.

외투 어깨에는 마차에서 내릴 때 묻은 눈 녹은 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 그는 털어 내지도 않고 걸어 들어갔다.

젖은 외투 자락이 대리석에 끌리며 희미한 자국을 남겼다. 그 자국을 치우게 될 하인의 얼굴이 잠깐 떠올랐지만, 지금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높은 천장 아래, 황제 에드워드가 놋쇠 찻잔을 홀짝이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스등 불빛에 번들거리는 눈동자에는 경계와 묘한 탐욕이 섞여 있었다.

“왔는가, 레이너.”

“부르셨습니까, 폐하.”

레이너는 가볍게 턱을 숙였다. 인사였지만 복종은 없었다.

“요즘 수도 오스티아 밑바닥에 흥미로운 소문이 돌더군.”

에드워드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맘몬의 사냥개를 상대로 어린 여자아이가 마도총을 쏘아 잿더미로 만들었다지.”

황제는 가늘어진 눈으로 레이너의 표정을 살폈다.

“그 총구에서 터져 나온 마력이 어찌나 영롱한지, 거리의 쥐새끼들은 그 아이를 ‘숨겨진 빛의 저격수’라 부른다더군. 혹시 아는 바가 있나?”

“글쎄요.”

레이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싱긋 웃었다. 완벽한 모르쇠였다.

“별명 따위야 시장통에서 늘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들은 건 다른 쪽 소문입니다. 맘몬의 수송선 이야기라면, 폐하께서도 이미 들으셨겠고요.”

에드워드의 눈썹이 꿈틀했다.

“들었지. 방금도 그 개가 이 바닥에 이마를 찧고 갔으니. 아르카눔이 맘몬의 수송선을 둘이나 털었다더군. 짐 한 줌 안 남기고. 내 허락도 없이.”

“털지 않았습니다. 막았습니다.”

레이너는 소매 속에서 접힌 장부 한 장을 꺼내 찻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수송선에 실린 건 맘몬이 신고한 화물이 아니었습니다. 마력이 깨어난 아이들이 궤짝에 담겨 있었고, 황실 인장이 없는 마도총이 이백 정이었지요. 아이들에겐 값이 매겨져 있었고, 총은 근위대의 눈을 피해 남쪽으로 빠지는 중이었습니다.”

“…….”

“제국의 법이 금한 거래입니다. 황실 직속 기관이 그것을 막은 일이 월권입니까, 폐하.”

에드워드는 장부를 훑어보지도 않고 손끝으로 밀어냈다.

“아이들이라…… 상인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아이들이라는 말에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 듣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알고도 모른 척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찻잔 가장자리를 두드리던 손톱이 멈췄다. 이백 정. 근위대 몰래 이백 정의 마도총이 남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는 것은 황제에게도 가볍지 않은 숫자였다.

“그 장부, 맘몬이 알고 있나? 아르카눔의 이름이 거기 적혀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요. 수송선을 열고 나올 때 문장을 지우지 않았으니까요.”

“일부러?”

“경고입니다. 다음에는 열기 전에 멈추라는.”

에드워드가 낮게 웃었다. 맘몬과 아르카눔이 서로의 목을 무는 판이라면, 구경하는 쪽이 이득이다.

“표적지 위에서는 자네를 앞선 사수가 제국에 없다지. 허나 사람에게 방아쇠를 당겨 본 적은 손에 꼽는다더군.”

“어릴 때부터 총 연구와 연습은 하루도 거른 적이 없습니다. 실전이 모자라는 건 알고 있고요.”

“그 빈칸은 시간이 메워 주겠지. 자네가 살아 있다면.”

레이너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좋아, 장부는 두고 가게. 맘몬이 구린 짓을 했다면 내가 직접 묻지. 그리고…… 그 아이 말일세. 나이는 열네댓쯤 되었다더군.”

웃음이 입가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소매 속, 왼쪽 손목에 감긴 낡은 리본이 갑자기 차갑게 살갗을 파고들었다.

“대륙의 마탄사는 모두 이 황실의 통제 아래 있거늘, 어디서 그런 괴물 같은 계집이 튀어나왔는지 참으로 흥미롭단 말이지.”

황제의 눈빛이 붉게 번들거렸다.

그 눈을 보는 순간, 레이너의 묵빛 눈동자 위로 오래된 장면이 스쳤다.

어린 시절, 황궁 정전.

황제 부부 앞에 난입해 무릎을 꿇고 울부짖던 한 정부의 비명.

“폐하! 제 아들에게도 엄연히 황실의 피가 흐릅니다! 저 아이에게도 계승의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나 부부는 레이너만을 정식 후계자로 승인하며 그 하소연을 차갑게 쳐냈다.

그때 어머니의 치맛자락 뒤에 숨어, 레이너의 왕관과 권력을 핏빛 어린 눈으로 노려보던 어린 에드워드의 눈빛.

‘빼앗고 싶다. 저자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세월이 흘러 제국을 쥔 지금도, 그 눈에는 같은 욕망이 남아 있었다. 남의 것을 빼앗고 싶어 하는 기형적인 욕망이.

레이너는 입꼬리에 살기를 숨긴 채 낮게 말했다.

“폐하께서 그리 탐내실 만큼 비범한 자라면, 맘몬이나 황실의 손길이 닿기 전에 제가 먼저 찾아내겠습니다. 아르카눔의 이름으로 거두든, 목을 꺾든.”

에드워드가 찻잔을 내려놓고 기괴할 만큼 깊은 미소를 지었다.

“그거 참 아르카눔다운 서늘한 제안이군. 하지만 명심하게, 레이너. 이 제국의 모든 마도와 그 힘을 가진 자는, 결국 짐의 발밑에 꿇려야 하는 법이니.”

“그 뜻이 과연 대륙의 정답일지는 두고 봐야겠지요, 폐하.”

두 사내의 시선이 공중에서 칼날처럼 맞물렸다.

대리석 위에서 팽팽한 살기와 주도권 싸움이 불꽃처럼 튀었다. 향로의 백단 연기만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천히 흩어졌다.

연기가 흩어지는 사이로 두 사람의 얼굴이 번갈아 나타났다 사라졌다. 닮은 윤곽 위에 전혀 다른 표정을 얹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기묘하게 느껴졌다.

물러나려는 레이너를 에드워드가 찻잔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톡 치며 불러 세웠다.

“참, 선황 폐하께서 요즘 자네를 자주 찾으시더군. 막내도 형 얼굴을 잊겠다고 투정이고.”

레이너의 발이 멈췄다.

“가끔은 얼굴을 비추게. 가족이란 그런 것 아닌가.”

가족이라는 단어가 대리석 위로 느릿하게 떨어졌다.

그것은 안부가 아니었다. 목줄의 길이를 일러 주는 말이었다.

레이너는 그 목줄이 어디에 매여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황궁 지하의 어둠 속, 이름을 불러 줄 수조차 없는 곳에.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레이너는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아주 조금, 복종처럼 보이게.

* * *

접견실을 나서는 동안 레이너는 한 번도 소매를 건드리지 않았다.

복도의 창마다 성에가 끼어 있었다. 손끝으로 훔쳐 낸 자리에 바깥 안뜰이 흐릿하게 비쳤다. 진창이 된 눈 위에 근위병들의 장화 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황제가 나이를 말했다.

아직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기를 바랐다.

이름을 아는 날이 오면, 그날부터 저 아이는 황제의 사냥감이 된다. 그러니 그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소망이 아니라 계산이어야 했다.

마차가 덜컹이자 소매 속의 리본이 손목을 한 번 조였다. 놓지 않겠다는 약속처럼, 혹은 놓지 못하는 사람의 버릇처럼.

마차에 오르자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바퀴가 진창을 가르는 둔탁한 진동 속에서 그제야 오른손이 왼쪽 소매를 더듬었다.

어젯밤 사격장 난간에서 본 장면이 눈꺼풀 안쪽에 겹쳐 올랐다.

화약 연기 속에서 아이의 눈동자 위로 오팔빛이 가라앉듯 번지던 순간. 반동을 뼈로 씹어 삼키던 열네 살의 어깨.

그리고 마도총 앞에서 소리도 없이 꺼지던 빛.

‘그 빛을 본 사람이 우리만이 아니라면.’

입단속을 시킨 것이 늦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는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댔다. 차가운 판벽이 관자놀이에 닿았다.

소매 속에서 빛이 바래 회색이 된 은빛 리본은 4년 전 그날처럼 매듭 하나 풀리지 않은 채 거기 있었다.

‘빚이다.’

그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입김이 차창에 하얗게 번졌다가 사라졌다.

빚은 갚으면 끝난다. 끝나는 것에는 이렇게까지 마음이 쓰이지 않는다는 걸, 그는 모르는 척했다.

모르는 척하는 일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황궁에서 자란 소년이 가장 먼저 배운 기술이었다.

‘그저 빚이다. 그 이상의 이름은 붙이지 않는다.’

그는 총을 만지며 자랐다. 도면을 그리고, 약실을 깎고, 해가 지도록 표적지에 구멍을 냈다. 사격장 기록으로는 아르카눔 안에서도 그를 앞서는 이가 드물었다.

모자라는 것은 오직 실전이었다. 표적은 숨을 쉬지 않았고, 사람은 총구 앞에서도 움직였다.

그 빈칸은 언젠가 전장에서, 아주 긴 시간을 들여 채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차가 오스티아의 뒷골목으로 접어들 무렵, 레이너는 자기가 같은 문장을 세 번째 되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 *

무기상점으로 위장한 아르카눔의 입구에 닿았을 때는 해가 기울어 있었다.

눈 녹은 처마 아래로 가스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맞은편 지붕 위, 굴뚝 곁에서 무언가가 한 번 움직였다가 멈췄다. 레이너는 고개를 들었다. 바람에 흩어지는 연기 한 줄기뿐이었다. 이 근방 굴뚝 가운데 오늘 불을 땐 집은 없었는데도.

비밀 문을 지나 지하 복도로 내려서자, 석벽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장작 냄새와 홍차 향이 짙어졌다. 황궁의 향로 연기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사는 집의 냄새였다.

휴게실이었다.

레이너는 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틈 사이로 따뜻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불빛은 문턱에서 끊어져 그의 구두 끝에 얇게 걸렸다. 그 한 뼘 너머가 이렇게 멀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신엘의 손이 은금발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지크의 단단한 팔이 마른 어깨를 호탕하게 감싸 안았다. 그 사이에서 작게, 아주 작게, 셀레네가 웃고 있었다.

황제 앞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던 그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남의 것을 빼앗고 싶어 하던 눈빛을 그토록 경멸했으면서도, 지금 자신의 속에서 치미는 낯선 불안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저 웃음이 또 꺼질까 봐.

그리고 그것을 지킬 자격이 자신에게 있는지조차 알 수 없어서.

레이너는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