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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으로

지은이 일곱날의빛 · 2026-10-28

철벅, 철벅.

장대비 속에서 내 발소리만 유난히 컸다.

늦가을 비는 얼음 조각처럼 뺨을 때렸고, 발밑에서는 젖은 낙엽이 미끄러졌다.

진흙 바닥에는 방금 쓰러뜨린 두 사내가 식어 가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다리가 내 것 같지 않았다. 한 걸음 뗄 때마다 무릎이 꺾이려는 것을,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려 간신히 세웠다.

발목에 감긴 진흙이 신발 속까지 스며들어 걸음마다 철벅거렸다. 그 소리가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 같아서, 멈추지 않고 걸었다.

몇 년을 두들겨 맞은 열네 살의 몸은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총을 쥔 손만은 풀리지 않았다. 목에 걸린 링이 빗물에 젖어 가슴께에서 달그락거렸다.

“……살아야 해.”

‘엄마는 저택에 있는데.’

내가 도망친 걸 알면 볼트는 어머니를 어떻게 할까.

그 생각이 갈비뼈보다 더 아프게 가슴을 눌렀다.

지하 창고에서 어머니는 지금 어떤 얼굴로 나를 부르고 있을까. 그 상상만으로 입안이 바싹 말랐다.

귓가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끊겼다 이어지기를 되풀이했다.

이 총은 말이야, 적을 향해 쏘라고 주는 게 아니라……

그 뒤의 말은 빗소리에 묻혀 끝내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돌아간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나는 이제 막 총을 쏠 줄 알게 된 아이일 뿐이었고, 저택에는 철제 가면을 쓴 사병이 수십이었다.

그때 빗소리를 가르고 서늘한 파동이 스쳤다.

방금 터져 나온 오팔빛 마력을 맡고 몰려드는 기척이었다.

악마의 뿔과 톱니바퀴 문양이 박힌 흉갑, 철제 가면. 맘몬의 추격대가 가스등 불빛을 흩뿌리며 골목을 훑고 있었다.

나는 벽돌 담에 등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갈 곳이 없었다.

벽돌의 냉기가 젖은 옷을 뚫고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그 소리가 추격대에게 들릴까 봐 가슴을 눌렀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빗물이 입술 사이로 흘러들었다. 짜고 비릿한 맛이 났다. 피와 빗물이 섞인 맛이라는 걸, 나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지난겨울 창고 구석에서 들은 볼트의 고함이었다.

“이 개 같은 아르카눔 놈들이 또 수송대를 건드렸어!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찾아내서 찢어 죽여!”

볼트는 바닥에 내던진 총 한 자루를 군홧발로 짓밟았다.

개머리판에 새겨진 문양이 불빛에 번뜩였다. 매의 눈, 그 뒤로 엇갈린 총 두 자루.

나는 그 문양을 알고 있었다.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매의 눈을, 나는 4년 전 어떤 소년의 총에서 보았다.

* * *

4년 전, 첫눈이 내리던 밤이었다.

공기에서는 숯과 쇠 냄새가 났고, 막 내리기 시작한 눈송이가 속눈썹 위에서 녹았다.

아버지를 땅에 묻은 지 사흘째였다.

나는 어머니 몰래 집을 빠져나와 아스테리아 공방의 불탄 터로 갔다.

외할아버지가 일군 공방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화재로 무너졌고, 아버지는 가끔 나를 그곳에 데려와 숨바꼭질을 해 주곤 했다.

허리춤에는 어머니의 서랍에서 몰래 꺼내 온 낡은 은빛 마도총이 있었다. 쏘는 법도 모르면서, 그것을 쥐고 있으면 아버지가 곁에 있는 것 같았다.

손끝으로 총신을 쓸면 차가운 쇠 아래에서 어렴풋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아버지의 손바닥이 닿았던 자리라고 믿고 싶었다.

그을음 냄새가 밴 눈 속에서 낯선 소리가 들렸다.

개 짖는 소리와 군홧발 소리. 그리고 불탄 기둥 사이로 누군가 쓰러지듯 뛰어들었다.

나보다 훨씬 큰 소년이었다.

고급스러운 검은 외투는 피와 눈에 젖어 있었고, 왼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허리춤의 작은 권총 손잡이에 매의 눈이 새겨져 있었다.

소년은 나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 사흘 전 거울 속에서 본 내 눈과 똑같았다.

소년의 숨은 짧고 거칠었다. 달려와서 거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두고 도망쳐 온 사람의 숨이었다.

외투에서는 묵은 향유 냄새가 났다. 눈에 번진 피 냄새도. 그 피가 소년의 것만은 아니라는 걸, 어린 나는 어렴풋이 알았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소년의 손을 잡았다.

피가 묻어 미끈거리는, 얼음처럼 차가운 손이었다. 손등에는 녹지 못한 눈 알갱이가 얼어붙어 까슬거렸다.

그 차가움이 내 손바닥으로 번져 오자 이상하게도 떨림이 조금 줄었다. 무서운 밤도 둘이 겪으면 덜 무섭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이쪽이에요.”

개 짖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소년을 끌고 무너진 기둥 사이로 달렸다. 이 터의 구석구석은 아버지와 숨바꼭질을 하며 외워 둔 길이었다.

눈이 발목까지 쌓였고 숨이 하얗게 부서졌다.

소년은 반쯤 넋이 나간 채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달리는 내내 점점 더 세게 쥐었다.

꼭 매달리는 것 같아서, 나도 놓지 않았다.

우리는 무너진 지하 작업실 안쪽에 숨었다. 군홧발이 머리 위를 지나갔다.

나는 두 손으로 마도총을 문 쪽에 겨눴다. 팔이 덜덜 떨렸다.

마력이 없어 쏠 수도 없는 총이었는데.

어둠 속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저격수네.”

돌아보니 소년이 아주 조금 웃고 있었다. 우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발소리가 멀어진 뒤에야 나는 소년의 손을 살폈다.

손바닥이 깊게 베여 있었다. 유리를 쥐고 있었던 사람처럼.

나는 머리를 묶고 있던 은빛 리본을 풀어 상처를 감았다.

“아파도 참아요. 아빠가 풀리지 않는 매듭이라고 가르쳐 줬어요. 아무리 뛰어도 안 풀려요.”

매듭을 꽉 조이자 소년이 숨을 들이켰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각설탕 하나를 꺼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쥐여 준 것이었다.

“먹어요. 달면 조금 나아져요. 저도 그랬어요.”

소년은 한참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입에 넣었다.

“……달다.”

그 한마디 뒤에 소년은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붕대 감긴 손을 한참 잡고 있었다.

사흘 전 아무도 내 손을 잡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이 틀 무렵 나는 소년을 큰길까지 데려다주었다. 순찰대의 가스등이 보이는 곳이었다.

“저기로 가면 돼요.”

소년이 돌아섰다가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야?”

“다음에 만나면 알려 줄게요.”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 모르겠다. 이름을 말하면 이 밤이 끝나 버릴 것 같았다.

“다시 만나면 물어봐요. 그럼 우연이 아니니까.”

소년은 한참 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땐 내가 먼저 물을게.”

눈 속으로 걸어가던 그가 한 번 돌아보았다.

“안녕, 작은 저격수.”

그것이 전부였다.

며칠 뒤 서랍이 열린 것을 알아챈 어머니는 마도총을 숨겼고, 그해 겨울이 가기 전에 우리는 볼트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를 잃은 지 몇 달 만이었다.

소년의 이름도 얼굴도 4년 동안 흐려졌지만, 풀리지 않는 매듭과 그 목소리만은 이상하게 남아 있었다.

* * *

빗소리가 다시 귀를 채웠고, 코끝에는 젖은 낙엽과 석탄 연기 냄새가 다시 번졌다.

나는 젖은 담벼락에서 몸을 떼었다.

‘찾아야 해. 그 매의 눈을.’

살아 있다면 그 소년의 총에 새겨진 문양이 이 도시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빗줄기 너머로 보이는 거리는 온통 잿빛이었다. 그 어딘가에 같은 문양이 나를 기다린다고 믿어야만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아르카눔이 어떤 곳인지도, 그 소년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다만 볼트를 이빨 갈게 만드는 자들이라면 적어도 볼트의 편은 아니었다.

나는 골목 깊은 곳으로 몸을 던졌다. 뒤에서 철제 가면들의 발소리가 갈라졌다가 다시 모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모퉁이를 꺾을 때마다 추격의 기척이 한 박자씩 어긋났다.

마치 누군가 내 뒤의 길을 하나씩 막아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골목 어귀마다 젖은 가스등이 하나씩 먼저 꺼졌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가지런하게.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빈 물통 뒤로 몸을 구겨 넣은 순간 철제 가면 하나가 바로 앞을 지나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나는 숨을 멈췄다. 갈비뼈가 비명을 질렀지만 입을 틀어막고 삼켰다.

소리를 죽이는 것만큼은 누구보다 오래 연습해 온 일이었다.

가면이 물통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사내는 멈칫하더니, 누군가 어깨를 건드린 사람처럼 반대편 골목으로 방향을 틀어 버렸다.

암시장의 가장 어두운 막다른 골목에서 걸음이 멈췄다.

빗물에 젖은 붉은 벽돌 사이로 낡은 무기 상점이 하나 있었다. 문은 닫혀 있고 간판은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가게 옆 샛길 안쪽, 가스등 불빛이 겨우 닿는 비밀 철문 한가운데에 그것이 새겨져 있었다.

매의 눈. 그 뒤로 엇갈린 총 두 자루.

“찾았다…….”

다리가 풀렸다. 나는 피투성이 주먹으로 철문을 두드렸다.

쿵! 쿵! 쿵!

“누가…… 안에…….”

빗소리에 묻힐 만큼 갈라진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철판의 울림은 문 너머로 묵직하게 퍼져 갔다.

한참 뒤에야 발소리가 다가왔다. 빗장이 풀렸다. 덜컥—

끼이익, 하고 문이 열렸다.

마른 장작 타는 냄새와 함께 쏟아져 나온 따뜻한 불빛이 피와 빗물로 얼룩진 내 얼굴을 비췄다.

문틈으로 번진 불빛이 빗줄기를 금빛 실처럼 물들였다. 오랜만에 보는 따뜻한 빛깔이었다.

그 온기를 본 순간, 억지로 버티던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뭐야, 어린애잖아……? 잠깐, 저 손에 든 거 마도총 아니야? 마력이 서려 있어!”

경악에 찬 목소리들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무릎이 꺾였다.

바닥에 닿기 전에 누군가의 손이 내 어깨를 받쳤다. 가죽 장갑을 낀 손이었다.

비 냄새와 가죽 냄새, 희미한 쇠 냄새가 났다. 차갑고, 아주 조심스러웠다.

어깨에 닿은 손길은 처음인데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은 온도였다.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쓰러지는 몸이 처음으로 차가운 바닥이 아닌 곳에 닿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