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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정이

지은이 일곱날의빛 · 2026-10-28

죽어야 비로소 틔우는 싹이 있다.

마력이 시들어 가는 시대였다.

사람들은 석탄 연기 속에서 옛 마도의 시대를 전설처럼 입에 올렸다. 나는 그 전설의 가장 밑바닥, 새아버지 볼트의 지하 창고에서 열네 살을 맞았다.

늦가을이었다. 지하 창고의 돌벽에는 서리 같은 습기가 하루 종일 맺혀 있었고, 숨을 내쉬면 입김이 허옇게 흩어졌다.

새아버지 볼트는 군수 조직 ‘맘몬’의 수장이었다.

마력은 여덟 살 무렵 깨어난다고 했다.

나는 그 나이를 한참 지나도록 손끝에 불씨 하나 틔우지 못했다.

볼트에게 나는 쓸모없는 덤이었고, 저택 사람들은 나를 ‘쭉정이’라고 불렀다.

처음 몇 달은 달랐다. 볼트는 다정한 새아버지의 얼굴로 웃었다.

어머니의 마력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기 전까지는.

그 뒤로는 울면 더 맞았다. 반항하면 어머니가 대신 맞았다.

그래서 나는 소리를 내지 않는 법부터 배웠다.

숨소리도 줄이고, 눈물도 삼키고, 아프다는 말은 입안에서 녹여 버렸다. 그렇게 하면 맞는 시간이 조금 짧아진다는 걸 몸이 먼저 알았다.

소리를 삼킨 자리는 늘 목 안쪽이 쓰라렸다. 그 쓰림이 하루가 끝났다는 신호처럼 느껴질 만큼, 나는 그 지하에 익숙해져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 셀레네. 엄마가 어떻게든 할게.”

어머니는 매번 내 귀에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지켜지지 않을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매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거짓말은 그 지하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것이었으니까.

전날 밤도 같았다.

볏짚과 먼지,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매캐한 창고 바닥이었다.

환기구로 스며든 늦가을 찬바람에 촛불이 흔들렸다.

온몸이 피멍투성이가 된 어머니가 볼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안 돼요, 제발…… 셀레네는 죄가 없어요. 때리지 마세요……!”

퍽, 퍽. 어머니의 비명이 구두발 아래 짓밟혔다.

나를 감싸다 함께 맞은 어머니는 부러진 갈비뼈를 움켜쥔 채 헐떡였다.

나는 바닥에서 그 어깨가 떨리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맞는 것보다 그게 더 아팠다.

내 몸의 상처는 하루면 굳었지만, 어머니가 대신 맞는 모습은 굳지 않고 계속 덧났다.

그 덧난 자리에 손을 뻗으려다가 나는 도로 거두었다. 내가 움직이면 어머니의 몫이 늘어난다는 걸 알았으니까. 손끝이 허공에서 오래 떨렸다.

쓰러진 시야 끝에서 어머니의 손이 옷깃 속을 더듬었다.

지난 4년 동안 볼트의 눈을 피해 숨겨 온 마도총. 외할아버지가 아스테리아 공방에서 만든 최초의 마도총이었다.

어머니는 그 총을 가슴에 품고 잠드는 밤이 많았다. 총신에 손을 얹고 있으면 잃어버린 사람들이 곁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마력을 잃은 어머니의 손끝에서는 공허한 마찰음만 났다.

마력만 돌아온다면 이 지옥을 끝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머니는 끝내 총을 꺼내 들지 못했다.

볼트가 그런 어머니를 차갑게 쏘아보다가, 헌 구두짝처럼 널브러진 나에게 내뱉었다.

“내게는 마음 한 조각 안 주던 여자가, 제 아비를 쏙 빼닮은 저 눈깔에는 온정을 다 쏟는군. 저 계집을 치워 버려야 이 여자도 제 처지를 알겠지. 내일 암시장에 헐값으로 팔아 버려.”

그림자 속에 서 있던 부하가 고개를 숙였다.

“예, 볼트 님. 쥐새끼도 모르게 처리하겠습니다.”

어머니의 절규가 이어졌지만, 매질의 잔향 속에서 내 의식은 거기서 끊겼다.

* * *

이튿날 새벽, 환기구 너머로 젖은 낙엽과 석탄 연기, 쇠 냄새가 한데 섞인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곧 빗소리가 뒤따랐다. 낯선 사내들의 발소리와 낄낄거리는 웃음에 정신이 들었다.

“어이, 일어나, 꼬맹이.”

“시, 싫어…….”

갈라진 목소리로 파닥거려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맘몬의 부하들은 내 여린 팔목을 움켜쥐고 창고 바닥 위로 질질 끌었다.

“셀레네! 안 돼……!”

어머니가 처절하게 달려들어 나를 붙들었지만, 그 필사적인 손은 구둣발 한 번에 힘없이 무너졌다.

바닥에 쓰러진 어머니가 퉁퉁 부은 얼굴로 울부짖었다.

“셀레네, 내 아가…… 살아남아야 해! 엄마가 꼭 찾으러 갈게……!”

“엄마! 엄마—!”

목에서는 쇳소리만 났다. 손을 뻗어도 닿는 것은 빗방울뿐이었고, 어머니의 얼굴은 문틈 너머로 점점 작아졌다.

“상품에 흠집 너무 많이 내지 마라.”

“상관없어. 피멍투성이인데도 이목구비가 곱군. 천한 집 핏줄이 아니라는 티가 나니, 흠집이 나도 사 가겠다는 놈들은 따로 있을 거다.”

쿵! 사내들이 나를 암시장 수레 위로 내팽개쳤다.

처박히는 통증 속에서도 헐렁한 옷 속 허리춤을 찌르는 묵직한 쇳덩이와 목에 걸린 작고 단단한 링의 감촉이 또렷했다.

어젯밤 쓰러진 내게 어머니가 기어 와 밀어 넣어 준 것들이었다.

그때 귓가에 닿던 숨결이 있었다.

“셀레네. 잘 들어. 이 총은 말이야, 적을 향해 쏘라고 주는 게 아니라……”

피 맛이 섞인 목소리는 거기서 끊겼다. 뒷말은 끝내 듣지 못했다. 그보다 먼저 내 의식이 꺼졌으니까.

어머니가 오래도록 숨겨 온, 오각 별 모양의 링 목걸이.

지니고만 있어도 잠든 마력의 문을 열어 준다고 했다. 저택 한 채 값이 넘는다고, 어머니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수레가 덜컹거렸다.

바퀴에 젖은 낙엽이 들러붙어 질척이는 소리를 냈고, 늦가을 비가 목덜미로 파고들어 얼음물처럼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수레 바닥의 널빤지 틈으로 진흙물이 올라와 무릎을 적셨다. 바퀴가 한 번 구를 때마다 저택은 조금씩 멀어졌고, 그만큼 어머니의 숨소리도 멀어지는 것 같았다.

장대비 속에서 손잡이를 끄는 사내들이 흥얼거렸다.

“억울해할 것 없다, 꼬맹이. 마력이 소멸해 가는 시대에 너처럼 마력도 못 틔운 쭉정이 핏줄은 이렇게라도 쓰이는 게 세상을 돕는 일이야.”

비웃음이 빗소리에 섞였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해 봐야 달라질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허리춤의 쇳덩이와 목의 링이, 심장보다 먼저 뛰는 것처럼 뜨거웠다.

‘엄마를 두고 가는구나.’

그 생각이 들자 텅 비어 있던 눈동자에 균열이 일었다.

죽어야 한다.

짓밟히고 웅크린 채 울기만 하던 어린 나는 바로 이 자리에서 죽어야 한다.

그래야만 비워진 그릇 속에 살아남겠다는 열망과, 저들을 끝장내겠다는 의지를 채워 넣을 수 있다.

어금니를 악물고 피 묻은 손을 허리춤으로 밀어 넣었다.

동시에 다른 손으로 목의 링을 움켜쥐었다.

링이 맑게 울렸다.

미세한 마력이 손끝을 타고 심장 밑바닥까지 파고들었다.

불에 달군 쇠꼬챙이가 핏줄을 거슬러 오르는 듯한 격통이 온몸을 갈랐다.

정신을 놓으면 끝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의식을 붙들었다.

그때, 심장을 때리는 울림과 함께 아련한 기억이 피어올랐다.

다섯 살 무렵, 까맣게 저물어 가던 밤.

숨바꼭질을 하다 길을 잃고 풀밭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는데, 달빛 아래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칼의 아버지와 버건디빛 머릿결의 어머니가 달려와 안아 주던 온기.

아버지가 나를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셀레네 너의 이름은 달빛이라는 뜻이란다. 어두운 밤일수록 주변을 더 밝게 빛나게 해 주는 달빛.”

“그러니 길을 잃어도 괜찮아. 아빠가 그 빛을 보고 찾아낼 테니까.”

그 따스한 기억이 회로가 되어 심장에서 눈동자로 번졌다.

마력은 보통 손끝에 작은 불씨를 맺는 것으로 처음 깨어난다고 했다.

그런데 내 마력은 손끝을 건너뛰고, 쥐고 있던 총으로 곧장 쏟아져 들어갔다.

짓눌려 있던 살고 싶다는 열망이 껍질을 깨고 터져 나왔다.

웅—

깊어진 밤하늘을 담은 내 흑청색 눈동자 위로 무언가가 고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붉은 불꽃, 대지의 황금빛, 서늘한 하늘빛.

서로 다른 세 빛이 가장자리부터 스며들듯 어우러지더니, 눈동자 위로 오팔의 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눈 안쪽이 뜨거웠다. 눈물이 아니라, 오래 눌려 있던 무언가가 둑을 넘어 쏟아지는 열기였다.

달빛이 물결에 부서지듯 영롱한 오색이 빛을 수놓으며 눈에서 번져 나갔다.

어머니의 마력이 붉은 불꽃이었다면, 내 마력은 모든 빛을 품은 달빛이었다.

총열에 새겨진 아스테리아 공방의 문양, 고리를 꿰뚫는 별 위로 룬 각인이 차례로 점등되고 약실의 마정석이 달아올랐다.

별 아래에는 필기체로 이어 쓴 두 개의 L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어머니가 잠들기 전이면 손끝으로 쓸어 보던 자리였다.

최초의 마도총이 마침내 제 주인을 알아본 듯, 빛이 눈이 멀 만큼 부풀어 올랐다.

“뭐, 뭐야?! 이 마력은……!”

“처음엔 손끝에 불씨 하나 맺는 게 고작인데, 저 꼬맹이는 총 한 자루를 통째로 채웠어!”

빛에 놀라 돌아본 사내들의 눈에 비친 것은 수레 위에서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는 소녀와 그 손에 쥐어진 총이었다.

손은 머리보다 먼저 움직였다.

볼트의 눈을 피해 누군가 몰래 쥐여 주던 낡은 총의 무게, 반동을 흘려보내라던 낮은 목소리가 손끝에 남아 있었다.

탕—!

첫 번째 탄환이 어둠을 꿰뚫고 앞선 사내의 이마에 박혔다.

연이어 터진 두 번째 탄환이 나머지 사내의 심장을 꿰뚫었다.

오팔빛 마탄이 기묘한 궤적으로 꺾여 들어가는 순간, 사내들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진흙 바닥에 고꾸라졌다.

빗물이 바닥의 피를 씻어 내렸다.

숨을 쉴 때마다 갈비뼈가 비명을 질렀고, 총신은 아직 오팔빛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방아쇠를 당긴 손가락이 뒤늦게 떨렸다.

그 떨림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처음으로 내 손으로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낯설어서였다.

총성의 여운이 귓속에서 오래 웅웅거렸다. 비 냄새 사이로 룬이 달구어진 쇠 냄새가 얇게 번졌는데, 이상하게도 그 냄새가 싫지 않았다.

숨겨진 빛이 비로소 세상에 방아쇠를 당긴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총성을 들은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빗소리 너머 어둠 속에서, 수많은 발소리가 이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