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지은이 제이여라 · 2026-10-28
10.
진실이란 무엇인가. 질문에 그림자는 사람이 믿고 싶은 거짓이라 답했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지금까지 믿고 있던 것들이 부정당하고 새로운 게 들이차는 기분.
그것마저도 덤덤히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는 상당히 괴롭다.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잠식하던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기록부 여자 선배가 서 있었다.
“내일 치안부 첫번째 견학이지?”
“네.”
“넌 기록부로 와.”
크리스가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에밀리아님의 명령이야. 앞으로 모든 견학을 무시하고 기록부에서 쭉 일하래. 축하한다. 정식 궁인이 되었구나.”
여자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 밖으로 나갔다.
크리스는 아무 말 없이 멍하게 자리에 서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
“뭐? 기록부 정식 궁인이 되었다고?”
세라가 큰 소리로 외쳤다.
크리스는 뺨을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렇게나 빨리? 난 아직 견학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나저나 너 말이야. 조용히 못 해? 목소리 진짜 크다니까.”
세라는 목을 가다듬고 몸을 낮췄다.
“무슨 일 있었어?”
“기록장치들이 날 거부하는 것 빼곤 정말 아무 것도 없었는데.”
“그렇게 들으니까 더 이상한데?”
크리스는 팔짱을 꼈다.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
계속 거울이 깨지고 책이 망가지는데 에밀리아는 왜 자신을 기록부에 넣었을까?
세라가 천천히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역시 이 황궁은 뭔가를 숨기고 있어.”
“동감이야.”
세라가 빵을 힘차게 입으로 뜯었다.
“나도 최대한 치안부에 들어갈 테니 넌 기록이나 뒤져봐.”
“얌전히 들어가. 얌전히.”
“뭐어, 노력해볼게.”
크리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일 진척이 너무 빠르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길이 드러나고 있다.
방심한 걸까? 함정은 아닐까?
에밀리아의 정체와 그녀의 의도는 뭐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던 그때, 그림자가 졌다.
“어이, 흑발. 정식궁인이 됐다면서?”
“비브. 이온.”
비브가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에밀리아님한테 뇌물이라도 준 거야?”
“나도 의도를 모르겠어.”
이온이 세라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뭔가 조급해지네. 나도 성과를 내야 하는데 말이지.”
“이온은 할 수 있을 거야.”
“비브 넌 성격 좀 죽여라.”
“세라, 네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싸우지 들마. 이온이 천천히 두 사람을 갈라놨다.
이온을 천천히 바라보던 크리스가 물었다.
“이온은 어디 들어가고 싶어?”
“나?”
이온이 천천히 미소 지었다.
“나는 받아주는 것만으로 감사하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해야지. 몰락 귀족 출신 주제에 생글생글 잘 웃고 다닌다, 너?”
그 순간 이온의 표정이 굳었다.
아주 찰나 그의 얼굴에 감정이 비춘 것 같았다.
이온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운이 좋았을 뿐이야. 마침 황제 폐하께서 은혜를 내려주신 덕분에 궁인이 될 수 있었어.”
이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갈게. 우리는 곧 치안부 견학이야.”
C조 아이들에게 향하는 이온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세라가 중얼거렸다.
“이온이 몰락 귀족 출신이었어? 그런데 궁인이 됐네.”
“이번에 시행되는 정책이래. 원래는 노예 신분이지만 모범의 자세를 보이는 노예들에게만 궁인으로 다시 태어날 기회를 주는 거지. 황제 폐하께선 마음이 너무 여리시다니깐.”
“그럼 비브, 넌 왜 궁인이 된 건데?”
“당연히 관리부 취직이지. 관리부가 돈을 얼마나 버는지 알아?”
세라와 비브의 말다툼 소리가 이어졌다.
크리스는 천천히 스프를 떠서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액체가 입 안에서 뭉개졌다.
*
일주일 후.
크리스는 다시 비장한 각오로 손거울 앞에 섰다.
거울을 들고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비췄다.
주변에 서 있는 궁인들 사이로 긴장이 흘렀다.
크리스의 얼굴이 선명하게 표면에 떠오른 순간.
선이 그어지듯 거울에 금이 가더니 그대로 깨져버렸다.
궁인들 사이에서 탄식과 짜증이 섞인 소리가 들렸다.
“또 고장 났네.”
“벌써 몇 개째지?”
“에밀리아님께선 저런 애를 기록부에 왜 보냈담.”
열불이 터지는 건 크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왜 기록 장치들이 자신을 거부하는지 알 수 없었고, 에밀리아의 특별 발령도 이해 할 수 없었다.
원래라면 이온이나 캐롤리안과 치안부에 견학을 가야 하는 게 맞았지만 에밀리아의 특별 명령이 있었다.
크리스을 기록부에서 일하게 하라는 이상한 명령.
“안 되겠다. 넌 서고 청소나 해라. 마침 적임자가 없었는데 딱 나타나셨네.”
여자 간부가 쳐다보지도 않고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열쇠는 저기 있어.”
구석에 걸린 커다란 열쇠가 보였다.
크리스는 괜히 울컥해 여자 선배를 노려봤다.
“뭘 노려봐.”
여자 선배의 날카로운 말이 크리스를 관통했다.
크리스는 한숨을 내쉬고 창고에서 빗자루를 꺼냈다.
서고는 낡고 폐기 직전인 기록들이 모인 곳이어서 넓은 데다 청소를 해도 해도 끝이 안 보이는 곳이다.
기록부 뒷문을 열자 뜰 너머에 낡은 건물 하나가 보였다.
서고였다.
선배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신입. 여유 부리지 말고 얼른 가서 해. 어서!”
“예.”
서고의 자물쇠에 열쇠를 넣어 풀자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크리스는 천천히 문을 옆으로 밀어 안으로 들어갔다.
낡은 종이 냄새가 코끝을 찡하게 울렸다.
책장과 책상에는 책들과 신원 미상의 거울들이 마구잡이로 널려 있었다.
“대체 얼마나 정리를 안 한거야.”
게다가 어떻게 정리하는지도 안 알려줬다.
크리스는 울상을 지으며 일단 널려 있는 물건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기로 했다.
널브러진 종이들과 거울은 한 아름 품에 안고 천천히 정리하던 그때.
구석에 있던 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책들과는 달리 멀쩡한 책이었다.
형태가 익숙해 보이기도 했다.
크리스가 천천히 책을 들어 올렸다.
“시호와 운호.”
크리스의 눈이 커졌다.
분명 레베카의 서재에서 봤던 책이다.
크리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을 꿀꺽 삼킨 크리스는 천천히 종잇장을 넘겼다.
책은 크리스를 거부하지 않았고 페이지를 넘기게 해주었다.
“앨범? 아냐, 가계도인가?”
사람들의 사진이 연달아 이어졌다.
남성, 여성, 아이들이 단정한 포즈로 앞을 바라보고 있는 사진.
사진들은 세 개의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첫 번째 가지.
두 번째 가지.
그리고 먹칠 된 세 번째 가지.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운 것 같이.
“⋯⋯?”
마지막 페이지엔 한 사람의 사진밖에 없었다.
흑발에 속눈썹이 긴 어떤 남자였다.
크리스는 천천히 엄지손가락으로 남자를 쓰다듬었다.
사진 밑에는 남자의 이름으로 보이는 글씨가 적허 있었다.
“설 아르티나.”
그의 이름이 나지막하게 창고에 울렸다.
크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마치 어디서 본 것 같은⋯⋯.
“뭘 봤다고?”
“으악!”
크리스가 황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여자 선배가 크리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정리하는 법을 안 가르쳐서 왔는데 놀고 있네?”
“죄, 죄송합니다.”
여자 선배가 한숨을 푹 내쉬며 책을 쳐다봤다.
크리스가 책을 황급히 닫았다.
“그 책은?”
“구석에 떨어져 있길래 주웠는데⋯⋯.”
“뭐야. 이젠 서고 책들까지 널 거부하는 건가?”
여자가 책을 뺏어가 책 페이지를 가리켰다.
“아예 백지인데?”
“예? 거부 안하는 것 같은데요. 여기에 사진들 안 보이세요?”
크리스가 페이지를 넘겨 사진이 잔뜩 그려져 있는 페이지를 보여줬다.
여자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다 백지인데 너 뭘 보고 있는 거니? 일하기 싫어서 딴청 피우는 건 아니고?”
“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여자가 손짓했다.
“하여튼 책 거기 놓고 와. 정리하는 법을 알려줄게.”
크리스는 천천히 책을 닫고 책상 구석에 두었다.
닫히기 전, 마지막 페이지에 문장 하나가 적히는 것도 모른 채.
“운명, 아직 정해지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