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9

지은이 제이여라 · 2026-10-28

09.

​

여자는 유리조각을 맨손으로 들어 올렸다. 유리조각에 긁혀 피가 방울방울 떨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유리조각을 치웠다. 서둘러 어딘가로 향하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몇 명의 궁인들이 말했다.

​

“그러고 보니 걔네는 아직 못 잡았대? 궁인 몇 명 죽이고 도망간 로지서 애들 말이야.”

“아직 별 소식 없는 거 보니 그런 것 같은데. 하여튼 걔네 생존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

그 말을 들은 크리스는 홀린 듯 여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틀어 따라갔다. 세라가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그 손길마저 거부하고 여자를 향해 뛰어갔다.

​

“거긴 수습 궁인 출입 금지인데⋯⋯.”

​

세라의 마지막 말을 크리스는 듣지 못했다.

​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여자는 발이 빨랐다. 크리스는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그녀를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여자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로 덜덜 떨었다. 가지런히 모은 손등은 상처가 겹친 채 흉터가 져 있었다. 고개를 살짝 든 얼굴이 정말 아름다웠다.

​

“저기⋯⋯.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

크리스는 얼굴을 벅벅 긁으며 그녀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낮췄다. 여자가 엎드린 채로 말했다.

​

“그러시면 안 돼요. 저희는 벌레보다 더 천한 존재라서 저흴 위해 시선을 낮추시면 안 됩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

여자의 목소리가 강경해졌다.

​

“황실의 법도는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수습 궁인도 그 안에 들어가 있지요. 말을 낮추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주세요. 어서요!”

“그, 그래요?”

​

크리스는 어설프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크리스가 말했다.

​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뭐든 물어봐 주세요.”

​

잠깐 망설이던 크리스가 천천히 물었다.

​

“리에라는 이름, 혹시 알고 있어?”

​

여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커다란 눈동자가 떨렸다. 겁에 질려있던 여자는 아예 낯빛이 새파래졌다.

​

“그, 그 이름은 궁에서 거의 금기에 가까워요⋯⋯. 다시는 꺼내지 마세요!”

“왜?”

“왜, 왜라뇨⋯⋯. 리에 로지서가 한 짓을 모르시는 건가요?”

​

크리스의 몸이 굳었다. 리에가 보여주었던 그 아름다운 미소, 도와주러 왔다던 그 말. 그리고 이 여자의 말. 무언가가 모순되어 있었다. 크리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보자 여자가 화들짝 놀라 다시 바닥에 엎드렸다.

​

“죄,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말을 너무 얹었죠⋯⋯. 심지어 무례하기까지 했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

숨을 크게 들이마신 크리스는 천천히 생각을 차근차근 분류했다. 이 여자는 로지서 출신 몰락 귀족이며 몰락 귀족은 벌레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 앞서 궁인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던 말들과 몰락 귀족 출신 노예가 리에의 이름을 듣고 화들짝 놀라 언급된 사건을 다시금 말했다는 건⋯⋯.

​

“수습 궁인.”

​

뒤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크리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여기는 출입 금지 구역일 텐데. 왜 여기에 있지?”

​

치켜뜬 눈이 무겁게 크리스를 바라봤다. 크리스는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

“그, 그게⋯⋯.”

​

어떤 말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크리스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순간, 여자가 궁인 앞에 엎드렸다.

​

“죄, 죄송합니다! 수습 궁인께서는 제가 걱정되어 따라오신 것뿐입니다. 제가 손을 다쳐서⋯⋯.”

​

궁인이 여자의 손을 바라봤다. 여자의 손에서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

“⋯⋯궁 안을 더럽히지 마라.”

“죄송합니다!”

​

궁인의 시선이 크리스에게 꽂혔다. 그가 크리스를 째려보며 말했다.

​

“황궁은 네 놀이터가 아니다. 조심해라.”

“제가 부족했습니다.”

“네 처소로 돌아가라.”

​

크리스는 고개를 까딱이곤 걸음을 옮겼다. 궁인과 여자는 무슨 대화를 하는지 그 앞을 떠나지 않았다.

크리스가 다시 돌아오자 세라는 얼굴을 찡그리며 어깨를 후려쳤다.

​

“그때 네가 했던 말, 그대로 돌려줄게. 너나 눈에 띄지 마.”

“너보단 나아.”

“난 정의를 위해 몸을 날렸을 뿐이야.”

​

종소리가 울렸다.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뜻이 담긴 소리였다. 세라와 크리스는 헤어져 다시 교육받을 부서로 향했다.

​

다시금 천장에 닿아있는 책장들이 크리스를 반겼다. 쉼 없이 종이들이 넘겨지고 기록되는 소리가 들렸다. 수십 개의 거울 속에서 낯선 도시들과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

해가 능선을 훌쩍 넘겨서야 기록들을 겨우 정리할 수 있었다. 크리스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얼얼한 손을 매만졌다. 한 수습 궁인이 불만을 터트렸다.

​

“수습 궁인을 이렇게 혹사시켜도 되는 거야?”

“거기, 다 들린다.”

​

수습 궁인이 흠칫 놀랐다. 다른 아이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카산드라가 말했다.

​

“많이 해야 많이 늘지. 황궁이란 이런 곳이야.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해. 그러다가 제안이 안 오면 그대로 쫓겨나는 거야.”

​

카산드라가 크리스를 쳐다봤다.

​

“크리스는 실력이 있어 보이네. 기록부에 관심이 있다고 했던가?”

“아, 네.”

“잘해봐. 기록부에서 제안이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들어보니 에밀리아님이 널 기록부에 보내려고 한다는 소문이 있어.”

“저를요?”

“응. 어떤 애가 지나가다 들었대. 기록부에 보내야 한다고.”

​

크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

에밀리아는 분명 세라를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은데.

​

그리고 그 피 묻은 손도. 여자와 리에. 대체 그들의 연결고리가 뭐일지.

​

“이제야 오는구나.”

​

식당 입구 앞에 세라가 벽을 짚고 서 있었다. 크리스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

“늦었잖아.”

“카산드라 궁인께서 뭐라 말씀하시는 바람에.”

“하여간. 총명한 인재 납셨네. 이리와.”

​

세라가 천천히 손짓했다. 두 사람은 복도 끄트머리에서 천천히 대화를 시작했다.

​

“리에의 이름은 금기라 했어. 궁인들을 죽이고 도망친 몰락 귀족 출신 노예가 있다는 말과 연관 지어 말해주더라고. 아까 식당에서 아이들이 했던 얘기도 그렇고.”

“그 아이는 로지서라 그랬지. 그렇다면 그 저택은 도망 이후, 로지서가 마련한 대피처라 보면 되겠네.”

​

잠시 침묵이 돌았다. 세라가 물었다.

​

“무슨 생각해?”

“뭔가 이상해서.”

“뭐가?”

“리에 말이야.”

​

크리스가 말을 이었다.

​

“리에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쳤다는 게 믿기지 않아. 우리를 구하러 왔잖아. 게다가 정보들까지 넘겨줬고, 그 사람들은 우릴 보살펴줬어.”

“다른 목적이 있는 걸까. 아니면 진심이었을까.”

​

두 사람 모두 말없이 생각에 빠졌다. 세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우리 그냥 도망가면 안 될까? 역시 우리가 감당하기엔 너무 어려운 문제 같아.”

“난 기억을 찾고 싶어.”

“그러다 죽기라도 하면?”

​

크리스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

“그래도 찾을 거야.”

​

생각이 꼬리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지금 상황을 간단히 정리하고 할 일을 찾는다면⋯⋯.

​

“난 기록부에 들어갈게.”

​

세라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크리스의 눈이 굳게 빛나고 있었다.

​

“기록부? 왜?”

“기록은 거짓말을 못 하니까.”

​

세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

“어떻게 알아보게? 기록 장치들이 너를 알아보지 못한다면서.”

“그러니까 더 이상하지. 모든 게 나와 너에게 뭔가 숨기고 있어. 우린 그걸 알아내야 해.”

​

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어디로 갈까?”

“치안부가 나을 것 같은데.”

“뭐?”

​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궁인 두 명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세라가 말을 이었다.

​

“치안부는 왜?”

“밤에도 돌아다닐 수 있잖아.”

“하, 힘든 걸 나한테 다 시키시겠다?”

“나도 노력은 해볼게.”

“가장 나쁜 놈은 너인 거 알지?”

​

그때,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크리스와 세라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무리에 섞여든 두 사람은 평범하게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갔다.

​

“⋯⋯.”

​

마치 불순물 같았다. 자기 자신이.

​

모든게 완벽하게 돌아가는데, 맞춰지지 않는 퍼즐 조각처럼 쓸모 없는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

잃은 기억 속엔, 뭐가 있을까.

​

그러던 그때, 바닥에 퍼진 커튼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림자가 노인의 형태로 변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황제에 관한 건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

그림자의 목소리였다. 크리스는 천천히 그림자를 응시했다. 크리스의 잇새 사이로 말이 흘러나왔다.

​

“아직 진전이 없어.”

“느리군.”

​

크리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자신들의 임무를 잊고 있었다.

​

“생각보다 복잡하니까.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냐.”

“네 머릿속이 더 복잡한 건 아니고?”

​

크리스는 아무 말 없이 옷을 털어냈다. 그림자가 이어서 말했다.

​

“널 위해 조언을 하나 해주지.”

“필요 없어.”

“기록부는 가지 마라.”

​

크리스가 천천히 시선을 그림자에게 옮겼다.

​

“왜?”

“기록은 쓰는 사람의 선택이라는 소리다.”

“그렇다면 황궁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소리야?”

“아니, 더 끔찍한 거다.”

​

그림자의 목소리가 나긋하게 울렸다.

​

“모두가 진실이라 말하는 거짓이지.”

​

그림자가 다시 커튼으로 변했다. 크리스는 멍하게 그 자리에 서서 그림자를 바라봤다. 창문 너머로 노을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