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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제이여라 · 2026-10-28
05.
일주일이 지났다. 크리스와 세라는 긴 로브를 입고 황궁 앞에 모였다. 구석에 아들이 삼삼오오 모여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기엔 아이도 있었고 늙은 노인도 있었다. 속삭임이 형태가 되어 들렸다.
“⋯⋯그래서 전부 죽였대? 학생들을?”
”응.”
“근데 그 사람은 살았잖아. 이번에 시행하는 정책도⋯⋯.”
세라가 곁눈질로 그 아이들을 바라봤다.
“별 얘기를 다하네.”
“쉿.”
크리스와 세라는 적당히 무리에 들어갔다. 간단한 대화를 하고 있는데, 웬 아이 하나가 다가왔다. 길게 늘어뜨린 로브 아래로 하늘색 머리카락이 출렁였다.
“너희, 흑발이네?”
“그게 중요해?”
아이가 에, 하는 소리를 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흑발이면 혈통 검사에서 떨어질 게 뻔한데? 괜한 걸음 한 거 아니야?”
크리스와 세라가 서로를 바라봤다. 몇몇 아이들이 신기한 눈빛으로 세라와 크리스를 쳐다보거나 고개를 휙 돌리기도 했다.
“몰락한 귀족 가문들은 대부분 흑발이었던 거 몰라?”
“그, 그걸 여기서 말해도 되는 거야?”
“애초에 너희, 제대로 배정받은 거 맞아? 그냥 무턱대고 온 건 아니고? 그 브로치 가짜지?”
“사람 말을 안 듣네.”
세라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아이가 흠칫, 놀란 듯 몸을 움츠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입 조심해.”
“사실을 말한 것뿐인걸.”
“그러고 보니 책 속에서 악당들은 다 흑발이었던 것 같아.”
“크리스, 너는 조용히 해. 지금 우리한테 싸움을 걸고 있잖아. 맞서 싸워야지.”
“우와. 무서워라.”
아이가 조롱의 의미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여튼, 나는 사실만 얘기한다고. 알아서 나쁠 게 없지. 통성명이나 하자고. 내 이름은 센틀리야.”
“⋯⋯난 세라. 이쪽은 크리스.”
“모쪼록 잘 부탁해.”
센틀리가 손을 내밀었다. 세라가 그 손을 쳐냈다.
“거기, 싸우지 말아요. 곧 에밀리아님께서 오실 텐데 이런 모습을 보였다간…….”
베일을 쓰고 있는 남자 청년이 다가왔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베일을 약간 걷어 눈을 보이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흑색 머리카락이 슬며시 어깨에 떨어졌다.
“이온이라고 합니다. 성은 없어요.”
“크리스에요. 이쪽은 세라.”
크리스도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에밀리아님이라면⋯⋯. ”
“관리부의 수장님이세요. 모든 궁인들을 통솔하죠.”
“에밀리아님께선 무려 20년 동안 이 궁을 지켜오셨지. 개인적으로 엄청나게 존경스러워. 애정이 남다르시다니까.”
센틀리의 설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누군가가 크게 박수를 쳤다. 모두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갈색 드레스에 프릴이 달린 모자를 깊게 눌러쓴 중년 여성이 단상 위에 올랐다.
“반갑습니다. 에밀리아 크트로켄이라고 합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에밀리아는 천천히 시선을 옮겨 사람들을 쓸었다. 세라와 크리스를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훑은 그녀는 말을 이었다.
“화려한 겉치레는 버티고 살아남아 정식 궁인이 되었을 때 한 번 더 해드리도록 하지요.”
아멜리아가 고갯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뒤에 서 있는 남녀 궁인 다섯 명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수습 궁인이 되려면 먼저 혈통 검사를 거쳐야 합니다. 지금부터 저를 포함한 정식 궁인들에게 눈동자를 보이면 됩니다. 눈동자는 많은 걸 알려주니까요.”
세라가 조용히 속삭였다.
“누구한테 받을 거야?”
“음.”
크리스는 천천히 에밀리아를 쳐다봤다.
“저 사람한테 보이자.”
“진심이야? 그러다 잡혀가기라도 하면?”
“신원이 확실하잖아.”
“모험을 선택하시겠다? 난 네가 제일 이해 안 돼.”
에밀리아 앞으로 기다란 줄이 이어졌다. 한 번에 통과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누군가는 성질을 내며 끌려갔다.
“우리가 통과할 수 있을까? 아까 흑발 얘기가 신경 쓰여.”
“몰락 귀족에서 흑발이 많을 뿐이야. 궁인에선 좀 보이는 것 같아.”
“듣고 보니 그러네.”
줄이 빠르게 줄었다. 세라 바로 앞 사람이 난동을 부리며 끌려나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세라는 한걸음 앞으로 가 에밀리아의 앞에 섰다.
“눈동자를 보여주세요.”
세라가 로브를 걷어 눈을 보였다. 세라의 눈동자에 에밀리아가 한가득 담겼다. 눈썹을 꿈틀거리던 에밀리아가 물었다.
“이름과 성을 얘기해주세요.”
“세라입니다. 성은 없, 없어요.”
에밀리아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 찰나, 에밀리아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왜 그러십니까?”
그녀를 보좌하던 궁인 한 명이 그녀에게 물었다.
에밀리아는 천천히 세라와 뒤에 서 있던 크리스를 쳐다봤다.
그러곤 깊은 한숨을 내쉬고 손짓했다.
궁인 두 명이 책을 들고 왔다.
“기록 일치를 보겠습니다.”
에밀리아가 책을 뒤적였다. 두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에밀리아는 책을 닫고 고갯짓했다.
“지나가세요.”
한 궁인이 고개를 기울였다.
“에밀리아님. 아직 완벽하게 혈통 검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법이나 출생도 봐야…….”
“그냥 평범한 시민입니다. 보내야 합니다.”
에밀리아가 크리스를 쳐다봤다.
“빨리 지나가세요. 줄이 기네요.”
“알겠습니다.”
크리스와 세라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누군가가 호통을 쳤다.
“뭐야? 난 안 되고 저 녀석들은 왜 보내는 건데?”
누군가가 초록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에밀리아에게 달려들었다.
“내가 더 출생이나 눈동자가 좋잖아! 저런 흑발에 흐리멍텅한 눈동자를 지닌 애새끼들을 궁에 들여서 뭐 하려고?”
“끌고 나가세요.”
궁인 두 명이 누군가의 팔을 붙잡았다.
누군가가 천천히 끌려나갔다.
소란이 커진 틈을 타 크리스와 세라는 궁 안으로 들어갔다.
에밀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끝까지 주시했다.
*
혈통 검사엔 반나절이 걸렸다.
통계로는 500명 중에 15명만이 통과했으며 약 20명이 조사를 받았다.
“뭐야, 너희도 통과한 거야? 평범하게 생겨서 그런가? 아니면 뒷돈이라도 줬나?”
센틀리가 얼굴을 찡그리며 세라를 쳐다봤다. 세라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걸 크리스가 말렸다. 센틀리에게 다가간 크리스가 물었다.
“혈통검사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뭐? 나한테 물어서 어쩌게. ”
“우리보다 아는 게 많은 것 같아서. 우린 시골에서 와서 수도 문화를 잘 모르거든. 알려줄 수 있어?”
“그렇게 내 설명을 원한다는 거야? 귀찮게 구네.”
센틀리가 로브를 아주 살짝 들어 올려 눈동자를 가리켰다.
“눈동자.”
“눈동자?”
“눈동자엔 많은 게 담겨있지. 이름을 밝히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해야할 게 눈동자야. 이런 말 들어본 적 있지? 인간은 하나의 세계이며 그 창은 눈동자다.”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당연한 사실이지. 세계는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
”그래서 수도에 사는 사람들은 눈동자를 친한 사이가 아니면 공유하지 않아. 하나의 세계를 보는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 가볍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근데 이것도 몰라? 얼마나 깡촌에서 살다 온 거야.”
“너 말이야, 입 좀 조심해. 그렇게 뚫린 입이라고 나불거리다간⋯⋯.”
“너희야말로. 황궁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것 같은데 여긴 단어 하나로도 사람 목이 날아가는 곳이야.”
크리스는 세라를 진정시키고 아주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알려줘서 고마워.”
“당연한 상식인데 모르는 너희가 이상한 거야. 이런 애들이 궁인이 된다고? 너무 끔찍하네.”
다시 한번 박수 소리가 났다. 에밀리아가 단상에 올라오는 게 보였다.
“수습 궁인 여러분들. 축하합니다. 여기까지 살아남으셨군요.”
세라는 아무 말 없이 로브를 꾹 눌러썼다. 크리스는 빤히 에밀리아를 쳐다봤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세 명씩 다섯 그룹으로 나뉘어서 생활하게 될 겁니다. 그룹마다 상급 궁인들과 관리자들이 붙어 여러분이 무슨 소질이 있는지 평가합니다. 그 평가에 따라 총 아홉 개의 부에서 제안이 올테죠. 제안은 안 올수도 있습니다.”
에밀리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손목에 문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 손목에 그룹명을 적어 드렸습니다. 소속 그룹의 상급 궁인에게 가면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겁니다. 행운을 빕니다.”
크리스와 세라는 서로의 손목을 쳐다봤다. 크리스의 손목에는 C, 세라의 손목에는 A.
“다르게 나왔네.”
“잠시만, 다르면 안 되는 거 아냐? 같이 할 수는 없는 거야?”
세라가 근처에 서 있던 상급 궁인에게 다가갔다.
“일행과 떨어지게 되었는데 그룹을 바꿀 수 있나요?”
상급 궁인이 안경을 고쳐썼다.
“이미 정해진 걸 바꿀 순 없어. 이게 황궁의 법칙이지.”
“정말 답답하네.”
“거기, 너. 말조심해.”
“네.”
세라는 한숨을 내쉬며 크리스를 쳐다봤다. 크리스가 다가와 속삭였다.
“어쩔 수 없어. 받아들이자.”
“그래도 말이야. 혼자 하려니까 너무 답답한데. 정보 공유는 어쩌게.”
“ 정보 공유는 모든 궁인이 모이는 점심시간에 하자. 우리의 목적을 잊으면 안 돼.”
“휴, 알겠어.”
결국 크리스와 세라는 서로 다른 상급 궁인에게로 갔다. 상급 궁인들은 각자 상자를 가져왔다. 그 안에는 궁인 용 파란 로브가 들어있었다. 몸에 걸치자 등 쪽에 그룹 별로 다른 글자가 나타났다.
“수습 궁인은 파란색으로, 정식 궁인은 자주색으로 분류될 거야. 앞으로 이 로브는 너희의 애인이나 마찬가지니까 잃어버리지 않도록. 자 다들 담당 궁인을 따라가. 방 배정을 해줄게.”
A 그룹의 상급 궁인이 말했다. 황실의 문이 쾅, 하고 닫혔다.
*
“15명?”
집무실에서 황제가 물었다. 에밀리아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두 명 더 많군. 신기하네. 에밀리아, 그대의 예상이 깨진 게 말이야.”
황제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더니 천천히 서류를 넘겼다.
“그래, 계속해. 이상 사항이 있으면 내게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에밀리아가 고개를 숙이고 방 밖으로 나갔다.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내가 이길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