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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와 문서번호로 말하는 사람

지은이 장지호 · 2026-10-26

D+59 · 11:40

백진우가 회의실로 올라왔다. 십오 년 전 건은 본부 소관이 아니었다.

최민기가 화면으로 이백서른한 건을 넘겼다. 백진우는 끝까지 보고 나서 물었다.

"원부 원본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서고에요."

"몇 권입니까."

최민기가 답을 못 했다. 이송 목록은 있는데 권수는 세어본 적이 없었다. 백진우는 자기 수첩을 펴서 숫자를 확인하고 말했다.

"어제까지 들어온 게 사천이백 권입니다. 아직 오는 중이고요."

"그게 전부 증거물입니까." 정 사무관이 물었다.

"이관 전 기록이 원본이면 그렇습니다."

방이 조용해졌다. 다인은 그 숫자를 들으면서 자기 노트를 생각했다. 열일곱 필지를 옮겨 적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 사천이백 권이면 그런 게 몇 배인지 셈이 되지 않았다.

"저기," 다인이 말했다. "제가 어제 서고에서 적어둔 게 있는데요."

노트를 꺼내 펼쳤다. 필지 번호와 이름과 연도가 줄을 맞춰 적혀 있었다. 열일곱 개.

"그건 개인 메모잖아요." 정 사무관이 말했다. 나무라는 말투는 아니었다. "증거 목록에 못 올립니다."

"원본이 있으면요."

"네."

"원본이 없어지면요."

정 사무관이 대답하지 않았다. 백진우가 노트를 자기 쪽으로 돌려놓고 한 장을 넘겼다. 그러고는 말했다.

"증거입니다. 지금은 아니고, 원본이 없어지면요."

"그럴 일이 있습니까." 황인선이 물었다.

"없어야죠."

백진우는 노트를 다인 쪽으로 밀어놓았다. 가져가지는 않았다.

D+59 · 21:30

다인은 그날 밤 노트에 오래 적었다. 맨 위 숫자는 D-21이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이제 무엇을 향한 카운트다운인지, 다인은 확신하지 못했다.

적다가 멈추고, 두 달 전 목록의 맨 첫 줄로 돌아갔다.

삭제 목록 첫 줄은 두 달 동안 처리가 안 된 채로 남아 있었다. 조회가 되지 않는 지번이라 담당이 배정되지 않았고, 배정이 안 되니 아무도 열지 않았다. 실재하지 않는 주소였다. 첫 회의에서 그 줄을 배정에서 빼겠다고 했을 때 다인도 아무 말 안 했다.

지금 그 줄을 열었다.

지번은 없는 지번인데 등기부는 있었다.

[등기사항증명서 · 백업 조회]

【표제부】 소재지번: ○○시 ○○구 ○○동 0-0 / 대 100㎡

【갑구】 소유자: 홍길동 (000000-0000000)

【을구】 근저당권자: ○○은행 / 채권최고액 금 100,000,000원

※ 본 등기부는 교육용 예제입니다. 실제 권리관계와 무관합니다.

십이 년 전 시스템 신규 구축 때 만들어진 연습용 등기부였다. 진짜 사람에게 손대기 전에 시스템이 처음 연습해본 집. 등기소마다 그런 게 하나씩 있고, 다인도 교육받을 때 그 화면을 봤다. 면적이 딱 백 제곱미터고 채권최고액이 딱 일억인 집은 세상에 잘 없다.

"교육용 예제."

다인은 그 다섯 글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그게 그날 밤 첫 번째로 지워진 필지였다.

다인은 계정 생성 기록을 다시 열었다. 십이 년 전, 외주 업체 계약직 명의로 발급. 발급 당일에 최초 로그인 기록이 하나 있었다. 신규 계정이 정상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시험 접속이었을 것이다. 스물여섯 살이었을 것이고, 첫 출근 무렵이었을 것이다.

시각은 02:40이었다.

다인은 볼펜을 놓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 다시 들어, 노트에 숫자만 적었다.

하나. 열둘. 사천십이.

십이 년.

두 숫자를 나란히 적어놓고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쓸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쓰면 그게 답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사건의 이름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다. 두 달 동안 이것은 삭제 사건이었다. 원본이 있고, 누군가 원본을 훼손했고, 원본으로 되돌리면 끝나는 일. 그런데 훼손된 줄 알았던 그 상태가 둘 중 하나를 고른 결과라면, 되돌린다는 말은 갈 곳을 잃는다.

어느 시점으로 복원할 것인가.

두 달 내내 그 질문의 답을 골랐다. 이월이냐 오월이냐, 삭제 직전이냐 문건 시점이냐. 전부 전산 안의 시점들이었다. 홍길동은 처음부터 다른 시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산이 시작되기 전, 종이의 마지막 순간. 이 장부가 아직 편집되기 전.

그런데 그 시점으로는 아무도 돌아갈 수 없었다. 이백서른한 명의 지워진 사람들을 복원하려면 십오 년을 무효로 만들어야 했고, 십오 년을 지키려면 그 사람들이 계속 지워져 있어야 했다.

다인은 노트를 덮었다가 다시 폈다. 두 달 전에 붙여둔 것이 뒤쪽에 있었다.

D+20 새벽에 커뮤니티 세 곳에 동시에 올라온 성명. 관공서 공문 서식을 하고 있던 그것. 본부는 그 문서를 조항별로 쪼개 대응 문안을 만들었고, 세 가지 요구를 놓고 두 달을 회의했다. 요구 아래에 붙어 있던 마지막 한 줄은 아무도 회의에 올리지 않았다. 협상 조건이 아니어서였다.

우리가 한 일 두 가지를 나란히 적어두었다. 그중 하나는 십오 년 전에 당신들이 한 일이다.

두 달 동안 그 줄은 허세로 읽혔다. 도둑이 국가와 자기를 같은 자리에 놓으려고 부리는 수사. 홍보 담당은 그 문장을 인용하지 말자고 했고 다인도 동의했다.

지금 읽으니 문장이 아니었다. 목록이었다.

지운 것 사천십이 건과 되돌린 것 이백서른한 건. 그 밤에 그가 한 일은 둘이었고, 그는 그것을 나란히 놓았다. 지우는 손이 어느 쪽이었는지 보라고. 두 달 동안 나라 전체가 그중 하나만 세면서 범인을 찾았다.

다인은 마지막 줄을 적었다.

"어느 거짓말 위에서 계속 살 것인가."

적어놓고 보니 질문이 잘못된 것 같아서 다시 폈다. 지우지는 않았다. 지우지 않기로 한 것은 이제 다인의 원칙이기도 했다. 그 아래 한 줄을 보탰다.

정정한다. 거짓말을 고를 수 있다고 믿는 것부터가 틀렸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골라져 있었다.

노트를 덮고 나서 다인은 임 주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여섯 번 갔고 받지 않았다.

[수사 발표 (D+63)]

확인서 231건 관련, 당시 입력 검수 책임자 등 3인 소환 조사. 개발 법인 관계자 2인은 이미 사망, 1인은 해외 체류.

보증인 77명 중 생존 확인 19명. 나머지는 사망 또는 소재 불명.

공소시효 완성 여부 검토 중.

└ 그러니까 15년 전 도둑질을 이번 해커가 고발한 거네

└ 해커가 고발자면 그동안 등기부 믿고 집 산 우리는 뭐가 되냐

└ 장물 위에 지은 신도시라는 거잖아 지금

└ 시효 지났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거 아님?

└ ㄴ 그래서 지운 거겠지

[○○구 공인중개사 단톡방 (37)]

김실장: 사장님들 오늘 계약 하나라도 쓰셨어요?

정사장: 두 달째 0건입니다 ㅋㅋㅋ

박대표: 저는 사무실 뺐어요. 집에서 전화만 받습니다

김실장: 손님이 자꾸 물어봐요 그 231건이 우리 동네냐고

정사장: 아니라고 하세요

김실장: 아닌 거 맞아요?

정사장: 몰라요

정사장: 근데 아니라고 하세요

박대표: 25년 하면서 등기부 못 믿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

D+64 · 14:00

노경환의 집은 지방 소도시의 오래된 주공아파트였다.

수사 대상이라 접촉이 제한됐지만, 대책본부는 수사와 별개로 이관 당시의 기술 증언이 필요했다. 백업 구조를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방문 허가가 났고, 수사관이 동석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다인이 가겠다고 했다. 아무도 다투지 않았다. 갈 사람이 없는 자리였다.

같이 간 사람은 백진우였다. 기차에서 두 사람은 각자 자기 서류를 봤다. 백진우는 내릴 역을 알려줄 때 한 번 말했다.

노경환은 일흔이 다 된 남자였고, 문을 열어주며 신발장 위의 서류 더미부터 가리켰다.

"올 줄 알고 꺼내놨어요. 앉아요."

백진우가 명함을 내밀었다. 노경환은 두 손으로 받아서 서류 더미 위에 올려놨다.

거실 벽에 손주 사진이 걸려 있었다. 노경환은 커피를 타 오더니 서류를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다인이 질문을 꺼내기도 전이었다.

"그해 삼월부터 시월까지 입력분이에요. 내가 검수한 게 사만 이천 건. 그중에 그 이백서른한 건이 있고. 여기, 여기, 여기."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십오 년 전 서류에 새 포스트잇이었다. 최근에 꺼내서 정리한 것이다.

"어르신." 다인은 준비한 질문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때 아셨어요?"

"알았지."

너무 빨리 나온 대답이라 다인이 오히려 말을 잃었다. 노경환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종이랑 입력본이 다르면 검수에서 걸러야지. 걸렀어요, 처음엔. 반려 올리니까 위에서 재입력 지시가 내려와. 원인 서류가 새로 왔다면서. 확인서가."

"서식은요."

"완벽했어요. 그게 문제야." 노경환은 서류 한 장을 다인 앞으로 밀었다. "이 법은 원래 좋은 법이었어요. 전쟁 끝나고 종이가 다 타서, 자기 땅인데 증명을 못 하는 사람이 나라에 수십만이었어. 그 사람들 구제하려고 만든 거야. 동네 사람 셋이 저 사람 땅 맞다고 서주면 등기를 내주는 거지. 얼마나 인간적인 법이야."

"그런데요."

"그 셋을 아무나 할 수 있게 해놨지."

다인은 밀려온 종이를 봤다. 확인서 사본이었다. 아래쪽에 보증인 서명란이 셋 있고 셋 다 채워져 있었다.

"내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필지가 아니에요." 노경환이 말했다. "이름이었어요."

"보증인이요?"

"세 번째 반려를 올릴 때 내가 백 몇 건을 나란히 놓고 봤어요. 같은 이름이 계속 나와. 서로 다른 동네 서류에서."

다인은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숫자를 적었다.

이백서른하나 곱하기 셋.

"서명이 육백구십세 개예요." 다인이 말했다.

"그래요."

"이름은 몇 개였어요?"

노경환은 대답 대신 서류 더미 맨 아래에서 낱장 하나를 꺼냈다. 십오 년 전 손글씨로 정리한 목록이었다. 한 줄에 이름 하나, 옆에 숫자 하나. 다인은 줄을 세었다. 일흔일곱 줄이었다.

한 사람이 아홉 번씩 서명한 셈이었다.

백진우도 수첩에 그 숫자를 적었다.

"보증인은 그 땅을 아는 사람이어야 하는 법이에요." 노경환이 말했다. "일흔일곱 명이 전국 열일곱 개 동네를 다 알 수는 없지."

"이 목록 그때 올리셨어요?"

"올렸어요. 이게 내 세 번째 반려였고." 그는 커피잔을 내려놨다. "그다음에 인사평가 얘기가 나왔고, 네 번째는 없었어요. 내가 서명했으니까."

노경환은 변명하지 않았다. 자기가 무엇을 언제 알았고 무엇을 언제 했는지를 날짜와 문서번호로 말했다. 화를 낼 자리를 다인은 몇 번이나 지나쳤는데, 화가 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화를 받을 사람이 눈앞에 없어서였다.

"어르신. 종이에는 뭐가 적혀 있었어요?"

"뭐가 적혀 있었냐니."

"입력본하고 다르다고 하셨으니까, 종이는 보셨을 거잖아요. 저는 그 글씨를 못 읽어요."

"봤지. 매일 봤어요." 노경환은 낱장을 손끝으로 짚었다. "갑구가 길게 내려간 것도 있었어. 삼대가 물려받은 땅이라는 뜻이야. 밭이 많았고, 집이 딸린 것도 있었고."

"그 집들은 새 등기부에 어떻게 적혔어요?"

"안 적혔어요." 노경환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새 등기부는 첫 줄부터 그 법인 이름이야. 삼십 년이 한 줄도 안 넘어와."

"어르신은 왜 지금 이걸 다 꺼내놓으세요."

노경환은 대답 대신 베란다 쪽을 봤다. 화분이 빼곡했고 전부 잘 가꿔져 있었다. 다인은 그 서류 더미가 고백의 준비였는지 방어의 준비였는지 궁금했다.

"정년까지 잘 다녔어요. 연금 받고. 손주 크고. 그런데 작년에 그 동네 지날 일이 있었어. 신도시 된 데. 길이 잘 뚫렸데. 내가 서명한 종이 위로 차가 잘도 다녀." 그는 커피잔을 내려놨다. "잊고 살 수 있어요, 사람이. 근데 잊었다는 걸 기억은 해."

다인은 마지막으로 하나를 물었다. 그 봉투를 어르신한테 내려보낸 사람은 누구였냐고. 노경환은 다시 화분 쪽을 봤다.

"그건 내가 말할 자리가 아니야." 그러고는 백진우 쪽으로 한 마디를 보탰다. "근데 이런 일은 말이지, 시킨 사람 하나보다 알고도 가만있던 사람이 훨씬 많아요. 그 사람들은 아무 서류에도 이름이 없어. 지금도 다 현직이고."

일어설 때 백진우가 낱장을 가리켰다.

"어르신, 이건 원본으로 받아 가겠습니다."

"가져가요. 사본은 내가 뒀어요."

백진우가 봉투와 인수증을 꺼냈다. 다인이 자기 대장을 내줄 때 받은 것과 같은 서식이었다. 노경환은 인수증을 서류 더미 위에 올려놨다. 명함 위였다.

백진우는 관할서에 들를 데가 있다고 했다. 역 앞에서 헤어졌다.

돌아가는 기차에서 다인은 노트 뒤쪽을 폈다.

성명 붙임의 숫자 여섯 줄이 거기 붙어 있었다. 성명이 나온 뒤로 아무도 뜻을 몰라서 홍보 자료에도 안 실린 종이였다. 다인은 그 여섯 줄 옆에 오늘 알아낸 숫자를 적어 넣었다.

4012 · 3944 · 9348

231 · 693 · 77

위 세 줄은 국가가 만든 목록이었다. 인정과 불인정과 유보. 아래 세 줄은 국가가 지운 목록이었다. 필지와 서명과 이름.

성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가 한 일 두 가지를 나란히 적어두었다. 그중 하나는 십오 년 전에 당신들이 한 일이다.

그건 비유가 아니었다. 종이 한 장에 여섯 줄을 위아래로 적어 보낸 것이었고, 위 세 줄은 첫날부터 읽을 수 있었다. 아래 세 줄을 읽는 데 한 달 반이 걸렸다.

다인은 여섯 줄을 한참 봤다. 이 숫자를 적어 보낸 사람은 아래 세 줄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필지 수를 알고, 서명 수를 알고, 이름 수까지 알고 있었다. 세어본 사람만 쓸 수 있는 숫자였다.

세어본 사람. 다인은 그 표현에서 멈췄다.

그리고 알고도 가만있던 사람들을 세어봤다. 세다 보니, 아는 얼굴이 하나 걸렸다.

감찰 조사가 한 차례 더 있었다.

조사관은 청문회 진술 경위를 물었고, 다인은 준비한 대로 답했다. 문답이 삼십 분쯤 이어졌다. 조사관이 서류를 덮었다. 덮고 나서 물었다.

"증인 본인 소유 부동산이 유보 목록에 있는 걸 아십니까."

"압니다."

"그러면 이해관계가 있는 사안에 관여하신 것 아닙니까."

다인은 그 질문의 모양을 알아봤다. 창구에서 수없이 본 모양이었다. 답을 들으려는 질문이 아니라 상대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확인하는 질문이다.

"이거 기록에 남습니까."

"참고 조사입니다."

다인은 가방에서 볼펜을 꺼냈다가 도로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