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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박자

지은이 와우산 · 2026-10-25

빛이 꺼진 자리를 오래 보고 있었다.

목 아래는 캄캄했다. 늘어뜨린 줄이 난간에서 어둠 속으로 곧게 내려가 있었다. 손을 대 보면 줄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바람인지, 내 손인지, 다섯 잔짜리 머리가 지어낸 건지 알 수 없었다.

민규가 내 팔을 쥐고 있었다.

“올라가요?” 그가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올라가요. 표대로.”

그 깊이의 공기는 묵직했다. 이끼 빛이 위층보다 짙어서 벽이 숨을 쉬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선가 낮은 울림이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짐승인지 바위인지, 아니면 내 머릿속인지. 다섯 잔에서는 그 셋을 가를 수 없다.

줄에서 손을 떼는 데 시간이 걸렸다. 잠수판을 꺼내 랜턴 빛 아래 들자 위에서 적어 온 줄이 거기 있었다. 다섯 잔짜리 머리로는 아무것도 셈하지 않고, 적어 온 것만 읽는다.

첫 정지는 26층. 거기서부터 짝수 층마다 서고, 위로 갈수록 길게. 맨 위는 74. 마지막 두 정지는 영감의 공기가 닿으면 반.

“민규 씨. 손목.”

민규가 띠를 들어 보였다. 나는 거기 적힌 숫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게 맨 위에서 나갈 분이에요. 그 전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나가요. 내가 이상한 소리를 해도.”

“아저씨가 이상한 소리를 하면요?”

“그 띠만 봐요.”

첫 정지까지는 서지 않고, 한 층에 1분 넘게 천천히 올랐다. 층을 오를 때마다 머리가 조금씩 개어 다섯 잔이 네 잔으로, 네 잔이 세 잔으로 내려왔다.

그 바위가 선 홀을 지날 때 바위는 그냥 바위였다. 꼭대기가 둥글고 허리가 잘록한. 나는 짚어 보지 않고 지나갔다.

첫 정지에서 베젤을 돌려 2분을 섰고, 다음 짝수 층에서 또 2분을 섰다. 층을 오르는 시간이 다음 정지 안으로 들어가서 목 어귀에 닿으면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됐지만, 그래도 짝수 층마다 목 어귀 천장 아래에서 섰다.

민규는 처음 몇 층 동안 자꾸 위를 봤다. 목 위쪽 어둠을. 그러다 중간쯤부터 내 손목을 보기 시작했다. 베젤의 야광 눈금이 돌아가는 걸. 그다음 층에서는 내가 말하기 전에 그가 먼저 물었다.

“이제 2분 됐어요?”

“30초 남았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남은 시간을 기다렸다.

“우린 서면 안 되는 팀이었어요.” 다음 층으로 오르며 그가 말했다. “속공팀은 기록 줄일 때마다 수당이 붙어요. 초 단위로. 서는 사람은 다음 달 명단에서 빠지고요.”

“원청 계약서가 다 그래요.”

“원청이요?”

“빨리 하면 돈 주고, 다치면 해지하고.”

민규가 피식 웃다가 목이 메었다. 그는 사다리를 붙든 채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올랐다. 천천히.

통화선을 묶어 둔 층에서 그 끝을 다시 찾았다. 이어폰을 꽂았다.

“영감님.”

“들린다.”

영감 목소리였다. 숨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민규 찾았습니다. B급. 표 마지막 줄로 올라가는 중입니다.”

잠깐 조용하더니 영감이 말했다.

“철이는.”

“50층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부팀장 찾으러요. 줄 하나 묶어서 늘어뜨려 놨습니다.”

이어폰 너머가 오래 조용했다. 버튼이 눌린 채였다. 바람 소리가 났다. 강가의 바람이었다.

“알았다.”

그게 다였다. 버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10층을 서고, 8층을 섰다. 바위 턱에 걸어 둔 갈래 밸브에서 쉭 소리가 났다. 영감의 공기였다. 6층에서 민규에게 예비 마스크를 씌웠다.

“위에서 흘려보내는 공기예요. 이걸 물면 여기서부터 반으로 줄어요.”

민규가 마스크 안에서 길게 숨을 쉬었다. 그 층을 마치고 맨 위 정지로 올랐다.

입구 밑 마지막 정지였다. 굴뚝 네 층을 오르면 문턱이고, 그 위는 물, 그 위는 보트와 둔치였다. 이어폰으로 위의 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들어왔다. 사람들 목소리, 확성기, 드론 날개 소리.

“지금 위에서 자막 띄웠다.” 영감이 말했다. “민규 이름하고 시간.”

강가의 전광판에 지금 이 숫자가 떠 있을 것이다. 그저께까지 저 화면은 귀환 기록을 초 단위로 띄웠다. 지금은 민규가 이 벽 앞에 서 있어야 할 분이 거꾸로 줄어들고 있을 것이다.

맨 위의 74분은 공기로 37분이 된다. 공기를 문 지 30분이 차자, 토요일 서하에게 한 대로 민규의 마스크를 잠깐 벗겼다.

마스크가 벗겨지자 위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확성기가 민규의 이름을 불렀다. 둔치의 함성이 굴뚝을 타고 내려왔다. 민규의 눈이 위를 향했다. 문턱이 바로 저기였다.

“다 왔잖아요.” 그가 중얼거렸다. “문 바로 위잖아요. 여기서 왜……”

그가 사다리를 잡았다. 속공팀은 4층에서 서지 않는다. 그렇게 배운 몸이 사다리를 한 칸 올랐다.

나는 사다리를 쥔 그의 손등에 내 손을 얹었다. 누르지 않고 얹어만 두었다. 민규의 손이 사다리 칸에서 한참 떨다가 풀렸다. 그가 미끄러지듯 내려와 내 앞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예요.” 내가 말했다. “토요일에 윤서하가 30분 선 데가 여기예요. 이 벽에 등 대고.”

민규가 벽을 봤다. 분필 글씨가 있었다. 입구까지 4. 둘째 나감.

“S급이 기다린 데예요. B급도 기다려요.”

민규가 벽에 등을 붙였다. 그리고 다시 제 손목의 띠를 봤다.

“그 사람.” 얼마 뒤에 그가 말했다. “아래로 내려간 사람. 살아 있을까요.”

“줄 늘어뜨려 놨어요.”

“그게 다예요?”

“지금은요.”

민규는 더 묻지 않았다. 나도 더 할 말이 없었다. 줄 하나를 매달아 두고 올라오는 것이 그 깊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걸로 모자라다는 건 나도 알았다.

쉬는 시간이 지나고 마스크를 다시 씌웠다. 남은 시간은 말없이 섰다. 이어폰으로 영감이 남은 분을 불러 주었다.

10분. 5분. 1분. 영감은 숫자만 말했다. 나는 그 목소리에 맞춰 베젤을 봤다. 영감의 숫자와 내 눈금이 맞았다.

“0.”

민규가 띠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나를 봤다.

“나가요.”

민규가 사다리를 올랐다. 이번에는 천천히, 한 칸씩.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물 위로 머리를 내밀었을 때 드론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내려왔다. 보트 뱃전에서 곽 영감이 생명줄을 거두고 있었다. 영감은 민규를 보고, 나를 보고, 그다음에 내 뒤의 물을 봤다.

한 사람이 더 올라올 자리를. 물은 잠잠했다. 영감이 눈을 내리고 줄을 마저 사렸다.

민규가 뱃전을 잡고 올라섰다. 둔치 쪽 전광판에 0이 떠 있었다. 그 옆에 민규의 이름.

PD가 마이크를 내밀기도 전에 민규가 입을 열었다. 젖은 얼굴로 카메라를 봤다. 드론의 빨간 불을.

“팀장이 우리를 두고 올라갔어요.”

둔치가 조용해졌다.

“무전 끊긴 거 알면서요. 부팀장님은 아직 아래 있어요. 이 아저씨가 아니었으면 저도 거기 있었어요.”

보트 옆에서 그의 동기가, 새벽에 컨테이너 문을 두드린 그 사내가 민규를 끌어안았다. 강 건너 태성 바지선은 불이 꺼진 채였다. 그 갑판 끝에 사람 그림자가 하나 서 있었다. 선글라스를 벗어 손에 든 채로.

선글라스를 벗은 그 얼굴은 멀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둔치에 모인 사람들 손에서 휴대폰 화면들이 켜졌다. 어젯밤 기자회견 영상 아래로, 지금 이 장면이 겹쳐 퍼지고 있었다.

저녁이 되기 전에 협회장이 둔치에 섰다.

연단은 없었다. 청솔 길드 보트 옆, 압축기가 덜덜거리는 자리에서 그는 지팡이를 짚고 섰다. 서정모가 옆에 있었다. 둘 앞에 카메라가 모여들었다.

“오늘부터 4층보다 깊이 내려간 헌터는 나올 때 표대로 섭니다. 임시지만 의무입니다. 서면서 나온 귀환도 공인 기록으로 칩니다.”

협회장이 서정모를 봤다. 서정모가 한 걸음 나섰다. 손에 그 닳은 수첩이 들려 있었다.

“협회 판정표에 칸을 하나 더 만듭니다. 귀환 시간. 그리고 지난 3년의 체질 탈락 판정 42건을 다시 봅니다.”

그가 잠깐 말을 멈췄다.

“체질 탈락이라는 이름은 오늘부터 쓰지 않습니다. 귀환 감압병입니다. 다시 내려가면 낫습니다. 늦었어도 듣습니다.”

그가 수첩을 덮었다.

“태성 1공대 하준 씨부터 다시 내려갑니다. 내일 아침에.”

기자 하나가 손을 들고 태성의 입장을 물었다. 협회장이 대답 대신 휴대폰 화면을 들어 보였다. 태성길드 공식 계정의 짧은 공지였다. 어젯밤 기자회견 내용은 사실관계를 확인 중입니다.

둔치가 술렁였다. 누군가 박수를 쳤다가 멈췄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들어 협회장을 찍었다. 청솔 길드 조끼를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D급 청년이 손목을 들어 올렸다.

아직 그 띠가 감겨 있었다. 옆 사람이 그 손목을 보고, 제 손목을 봤다. 띠를 떼지 않은 사람이 그 하나가 아니었다.

협회 공지에 표가 하나 붙었다. 귀환 감압표 1판. 사진은 내 잠수판이었다. 연필로 진하게 적은 줄 넷.

줄마다 옆에 올려 본 사람 이름을 작게 적어 두었다. 서하, 유건, 청솔, 민규. 마지막 줄 아래는 비어 있었다.

서하가 보트로 건너왔다. 손에 접힌 종이를 들고 있었다. 펴 보니 해지 통보서였다. 나흘 전 그녀가 휴대폰 화면으로 내게 보여 주던 그 문서를 출력한 것이었다. 사유, 체질 탈락.

해지 조항이 굵은 글씨로 박혀 있었다. 종이 귀퉁이가 손때에 눅눅했다. 나흘 동안 주머니에 넣고 다녔을 것이다. 그녀는 그 종이를 뒤집어 보트 뱃전에 대고 볼펜으로 맨 위에 적었다.

정지조.

그 아래에 이름을 적었다. 윤서하. 그리고 볼펜을 내게 내밀었다.

“최장 귀환 기록, 그거 내가 처음 할 거야.” 그녀가 말했다. “45층. 이번엔 서면서.”

나는 볼펜을 받아 그녀 이름 아래에 내 이름을 적었다. 곽 영감이 옆에서 손을 내밀었다. 영감은 내 이름 아래에 곽만수라고 적고, 그 아래 한 칸을 비워 두었다.

누구 칸인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서하가 그 빈칸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쓸고, 종이를 접어 내 가슴 끈의 잠수판 뒤에 끼워 넣었다.

그날 밤 나는 혼자 강가로 나갔다.

둔치 산책로에는 아직 사람이 있었다. 낮의 구경꾼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 사이로 풍선 장수가 수레를 밀고 지나갔다. 수레 손잡이에 은박 풍선 다발이 매여 있었고, 바퀴 옆에 회색 가스통이 끈으로 묶여 덜컹거렸다.

아이들 풍선을 띄우는 가스였다. 나는 그 통을 한참 봤다. 왜 보는지는 나도 몰랐다. 수레가 멀어질 때까지 봤다.

보트는 둔치에 묶여 있었다. 압축기가 덜덜 돌고 있었고, 뱃전에는 생명줄이 사리째 풀려 물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이었다.

영감은 트럭 운전석에서 담요를 덮고 눈을 감고 있었다. 앞 유리 와이퍼에 영감 글씨로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8층까지 풀었음. 곽.

줄 잡는 사람이 하나면 안 된다고 한 건 나였다. 오늘 밤 둘째 줄잡이는 50층 아래에 있었다.

잠수판을 꺼내 마지막 줄 아래에 연필로 선을 하나 그었다. 그 아래는 비워 두었다. 1판에는 없는 줄이었다.

마스크를 쓰는데 트럭 문 여는 소리가 났다. 영감이 담요를 어깨에 두른 채 내려와 뱃전의 줄을 집어 들었다. 잠든 얼굴이 아니었다.

영감은 줄을 두 손에 쥐고, 내 장갑 낀 손바닥을 엄지로 한 번 눌렀다. 나도 영감의 손등을 한 번 눌렀다.

밤의 강물은 낮보다 검었다. 문턱의 희미한 빛이 아니었으면 바닥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문턱을 넘으며 숨을 뱉었다.

굴뚝 사다리는 차가웠고, 칸을 디딜 때마다 고관절이 낮보다 더 깊게 울렸다. 오늘만 두 번째였다. 몸이 그걸 세고 있었다.

8층까지는 영감의 줄이 따라왔고, 갈래 밸브에서 바람이 쉭쉭거렸다. 영감은 압축기를 끄지 않았다. 그 아래로는 내 숨이 던전 공기였고, 잔은 층을 따라 늘었다.

청솔이 머물던 막다른 홀에는 그들이 두고 간 야영 등 하나가 꺼진 채 굴러 있었다. 보스 층 바닥의 그을음은 낮에 본 그대로였다. 헛것을 봤던 바위를 지나며 손목을 봤다. 보이는 것 믿지 마.

50층 목 어귀에 닿았을 때는 다섯 잔이었다. 녹슨 쇠 난간에 낮에 묶은 줄이 한 바퀴 더 돌려 끼운 매듭째 그대로 감겨, 목 아래 어둠으로 곧게 내려가 있었다.

나는 난간 옆에 앉아 줄을 두 손에 쥐었다. 고관절이 욱신거리고 머리가 둥둥 떴다. 다섯 잔째부터는 내 말을 믿으면 안 되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줄을 쥔 채 기다렸다.

동수의 마지막 신호가 떠올랐다. 남해 바닥에서 올라오던 한 번. 괜찮다는 뜻. 그 한 번을 받고 위에서 우리는 안심했고, 동수는 정지를 반만 하고 올라왔다.

괜찮지 않은 사람이 보낸 괜찮다였다. 나는 그 뒤로 7년 동안 줄 끝의 한 번을 곧이곧대로 믿어 본 적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는지는 베젤만 알았다.

줄이 당겨졌다.

한 번. 괜찮다는 뜻이다. 그 신호는 7년 전 죽은 내 동료의 버릇대로, 끝이 반 박자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