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2
지은이 한용운 · 2026-08-25
“미안하지만 나 주사 한 대만 주세요.”
“주사가 어디 있어요? 우리도 사기가 모자라는데요.”
순영은 너무도 뜻밖의 청에 놀랐다.
“그러시겠지요. 쓰고 남은 주사약이 있을 리가 없겠지요.”
“남으면 두었다 쓰는 것이니 남에게 줄 것까지야 없지요.”
“또 남의 주사약을 달라는 것도 염치없는 일이고요.”
“하지만 나는 주사를 맞고 더 살려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나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신에게 꼭 해야 할 말이 몇 마디 있어요.”
“이 꼴로는 말을 할 수가 없으니, 주사를 한 대 맞아야 말이 나오겠습니다. 휴.”
그 여자는 더 말할 기운이 없는 듯 머리를 숙였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하실 말씀이 있거든 그대로 하세요.”
“주사는 드릴 것이 없어요. 그리고 내가 무슨 들을 말이 있을까요?”
순영은 더욱 이상하게 여겼다.
“아니에요. 나는 당신에게 평생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지은 일이 있어요.”
“그대로 죽으면 죽은 혼이라도 원혼이 될 터이니, 속에 있는 말이나 하고 죽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우셔도 한 대만 주십시오.”
“말을 못 하고 죽으면 죽어서도 지옥으로 가겠어요.”
그 여자의 얼굴에 진정으로 애걸하는 빛이 드러났다.
“평생 알지도 못하는 분이 나에게 하늘에 사무치는 죄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순영은 그 얼굴을 들여다보며 혹시 미친 사람이 아닌가 하여 꺼림칙했다.
“아닙니다. 당신은 모르시겠지요.”
“속는 셈 치고 한번 들어나 보세요. 아이구, 죽겠네.”
“내가 이 말을 못 하고 죽으면 어쩌나. 에구, 에구.”
그 여자는 입에 거품을 흘리며 쓰러지려 했다.
“아이참, 이게 웬일일까.”
순영은 그 말을 들어 보겠다는 생각보다, 거기서 죽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게 해서 어디로든 보내야겠다는 마음에, 간직해 두었던 주사약을 꺼내어 부랴부랴 한 대를 놓아 주었다.
“후유.”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그 여자가 말했다.
“에구, 고마워라. 죽는 마당까지 또 신세를……”
그러고는 조금 진정하더니 다시 순영을 불렀다.
“여보세요.”
“네.”
순영은 새삼스러운 낯빛으로 마주 보았다.
“나를 모르시겠소?”
“알다니요? 어떻게 알겠어요.”
“그러시겠지요. 이 꼴이 되었으니 더구나 몰라보시겠지요. 조금도 모르시겠소?”
“도무지 모르겠는데요.”
순영은 그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목소리도 모르시겠소?”
“목소리도 모르겠는데요.”
“목소린들 제대로 남아 있을 수가 있나요.”
그러고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더니 물었다.
“당신이 순영 씨지요?”
그 여자는 힘없는 입술로 괴롭게 웃으려 했다.
“어떻게 아세요?”
눈을 크게 뜬 순영이 대답을 기다렸다.
“네, 알지요. 그런데 나를 정말 조금도 몰라보시겠소?”
“조금도 모르겠어요. 누구세요?”
“후유!”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 여자가 침을 삼키더니 말했다.
“운옥이라면 아시겠소?”
“운옥이라니요?”
순영은 놀라면서도 다시 의심했다.
무덥던 날씨가 다시 선들선들해졌다.
“운옥이를 모르세요? 하도 오래되니까 이름도 잊어버리셨군요.”
“당신을 꾀어 송씨 집으로 데려가던 김운옥이를 모르세요?”
그 여자는 순영이 저를 몰라보는 것이 야속하다는 듯 말했다.
“네, 그 운옥이야 알고말고요. 그런데 운옥이가 어떻단 말이에요?”
“운옥이가 어떻다니요? 내가 당신을 꾀어 데려가던 그 김운옥이라는 몹쓸 년입니다.”
그 여자는 눈물을 흘리다가 흐느껴 울었다.
“당신이 운옥이라니요?”
순영은 그 얼굴을 들여다보면서도 곧이듣지 않았다.
“나를 보고서는 모르실 겁니다.”
“병으로 얼굴이 변한 데다 지금은 귀신이 다 되었으니 알아보실 수가 있나요.”
“나는 당신을 알아봅니다. 이쁘장스럽고 착해 보이는 얼굴 모습이 그대로 있군요.”
“당신인 줄 안 지가 오래되었어요. 나도 초여름부터 이 위에 있었어요.”
“당신은 나인 줄 몰랐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당신인 줄 알았어요.”
“진작 아는 체하고 내가 지은 죄를 말하려 했으나 차마 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그러다 이제 곧 죽게 되니 뉘우치는 마음이 점점 더하고,”
“말조차 하지 않으면 다음 생에 더 큰 죄를 받을까 싶어 죽기 전에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가쁜 숨을 돌렸다.
“아! 그러면 당신이 정말 운옥 씨예요?”
순영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네, 운옥이니까 운옥이라 하지요. 내가 운옥이가 아니면 어떻게 당신을 알겠어요.”
“그러면 운옥 씨가 어쩌다 저 지경이 되었소? 가엾기도 하여라.”
순영은 얼굴을 찡그렸다.
“당신에게 쌓은 죄로 앙갚음을 받아 이렇게 되었지요.”
“당신은 그동안 나를 얼마나 원망하셨겠소.”
그 여자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당신이 내게 무슨 죄를 지었으며, 내가 왜 당신을 원망하겠어요?”
순영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운옥이 저를 이끌어 송씨에게 가게 한 일을 말하는 것이려니 짐작했다.
“네, 차차 말하지요. 내 죄악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말하지요.”
그 여자는 다시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을 꾀어 송씨에게 데려간 것은 아시겠지요?”
“그거야 꾀어서 데려갔다고 할 것까지야 있나요.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지요.”
“그렇게도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내가 꾀지 않았다면 그런 데로 가게 되었을 리가 있나요.”
“그때 일은 전부가 내가 꾸민 것입니다.”
“송씨가 당신에게 가게 된 것도 내가 한 일이요, 당신이 가게 된 것도 내가 꾀어서 그리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 말이야 피차 아는 일이니 더 할 것이 없고,”
“내가 어째서 당신을 꾀어 데려가게 되었는지는 모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