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1
지은이 한용운 · 2026-08-25
“언니 계세요?”
순영이 봉림을 찾아간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집세를 내겠다고 한 기한은 코앞으로 다가왔고, 대철은 주사 맞는 횟수를 줄이겠다고 하면서도 날마다 그대로였다.
병을 고칠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의논을 한마디 나눌 데도 없었다.
게다가 집에 있으면 대철이 때가 될 때마다 주사를 놓아 달라고 야단을 쳐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집에 없으면 대철도 어쩔 수 없이 주사 맞는 횟수를 줄이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친구인 봉림을 찾아간 것이었다.
“거기 누구요?”
봉림은 방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말만 할 뿐 좀처럼 문을 열어 보지 않았다.
“나예요.”
순영은 마루 앞으로 들어서며 안방 쪽을 보고 혼자 웃었다.
“내가 누구게요?”
문을 반쯤 열고 머리만 내밀어 내다보던 봉림이 소리쳤다.
“아이구, 아우님이었어? 하도 만난 지가 오래니까 목소리도 잊어버렸네.”
“나는 누구라고. 어서 들어와요.”
봉림은 우르르 나와 순영의 손을 잡아 끌어올렸다.
“진작 한번 온다는 것이 그만 못 왔어요.”
순영은 봉림이 넘어뜨리다시피 앉히는 아랫목 자리에 앉았다.
“에구, 내가 할 말이지. 한번 가서 본다면서……”
“그런데 들으니까 수복 아버지가 집에 와 있다며?”
“그래요.”
순영의 얼굴이 조금 붉어지려 했다.
“그럼 아우님이 수소문해서 데려온 거요?”
“아니요, 어떻게 알았는지 제가 찾아왔어요.”
“그럼 다시 같이 사는 모양인가?”
“같이 살기는요. 딴 방을 쓰고 있어요.”
“그거야 밤낮 한방에서 뒹굴어야만 같이 사는 건가?”
봉림의 말에는 어딘가 멸시하는 기색이 있었다.
“아니에요. 나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내 몸을 깨끗이 가지기로 결심했어요.”
“나는 그이를 한 사람의 은인으로, 또 불쌍한 사람으로 생각할 뿐이에요.”
“부부의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생각조차 없어요.”
“그래요?”
봉림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전에 만나서 말하던 것처럼, 정말 아편쟁이가 되었습디까?”
“그럼요.”
“어쩌다 그 모양이 되었을까?”
“병이 들어 병을 고치다가 그렇게 되었다는데, 자세히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같이 살던 여편네는 어찌 되고?”
“그것도 모르지요. 그대로 있기는 있다고 하더군요.”
“그럼 병이 차차 나아 가기는 하나?”
“낫기는 뭘 나아요.”
“두서너 달이면 고칠 수 있다기에 그동안이나 뒤를 보아 줄까 했더니, 점점 더해 가는 편이에요.”
“그럼 어떻게 하나?”
“그러게 큰일 났어요.”
“그사이 바느질 품 팔아 모은 돈푼도 다 없어지고, 집까지 쫓겨나게 되었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 병이 좀처럼 고쳐지나요. 그런데 집은 또 왜 쫓겨나게 돼?”
“남의 집이니 세를 내야 하지요. 이달까지 넉 달째나 못 냈으니 되겠어요?”
“모레를 기한으로 하고, 그때 못 내면 집을 내놓기로 했는데, 한 푼도 마련할 데가 없으니 쫓겨나는 수밖에요.”
순영의 얼굴에 근심스러운 빛이 어렸다.
“그러면 안됐구려. 그 집이 한 달에 칠 원씩이라고 했지?”
봉림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
순영은 봉림이 집세를 묻고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자 다소 기대를 품었다.
“그러면 집세가 싼 편이오. 요즘 네 칸 집에 칠 원은 어림도 없어요.”
“그런 집을 놓치게 되면 큰일인데.”
봉림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그 집에서 쫓겨나면 싸든 비싸든 방 한 칸이나 얻을 수 있겠어요?”
“우선 석 달 치만 마련하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차차 갚아 가며 살아 볼 텐데, 이십여 원을 변통할 길이 있어야지요.”
“하도 갑갑하기에 그런 이야기나 할까 하고 언니를 찾아왔지요.”
순영은 봉림의 기색을 살폈다.
“에구, 그렇지. 갑갑할 때는 누구라도 만나 말이라도 하면 속이 시원한 법이지.”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하나. 나라도 돈이 있으면 돌려 드리겠지만 그렇지도 못하고.”
봉림은 눈을 깜박이고 있더니 이윽고 순영을 바라보았다.
“여보, 아우님.”
“네?”
순영은 별로 기대할 것이 없는 줄 짐작하면서도 다시 마음이 부풀었다.
“지금 석 달 치나 넉 달 치를 마련한다 한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작정이오?”
“아우님이 예전처럼 혼자 사는 거라면 이렇게 될 리도 없지요.”
“어쩌다 옹색해진 것뿐이라면 잠시만 버티면 차차 풀릴 테고, 그렇다면 나라도 아무리 돈이 없어도 무엇을 잡혀서라도 돌려 드리겠소.”
“하지만 아편 먹는 사람 뒤를 대려면 안 돼요. 십 년을 가도 마찬가지지.”
“시루에 물 붓기지 뭐요. 끝이 있어야 말이지.”
“그러니 전에도 한 번 말했지만, 그러지 말고 생각을 돌리세요.”
“생각만 돌리면 사글셋집이 다 뭐요. 고대광실에 떵떵거리고 살 텐데……”
봉림은 흥분한 듯 순영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안 보는 체했다.
“생각을 어떻게 돌려요?”
“어떻게 돌리다니? 전에도 말하지 않았소.”
“이러니저러니 할 것 없이 시집을 가요. 무슨 죄를 지었다고 아편쟁이 뒤를 대고 있담.”
“그러다가는 나중에 거적을 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오.”
“아우님이 마음만 있으면 오늘이라도 마땅한 자리를 짚어 줄 수 있어요.”
“그러니 두말 말고 그렇게 하우.”
“그렇지 않고 끝끝내 아편쟁이 뒤를 대려거든 나하고 의를 끊읍시다.”
“나는 아편쟁이라면 말도 하기 싫은 사람이오.”
봉림은 공연히 기를 냈다.
순영도 여기에 이르러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대철을 돌보기 시작할 때는 두세 달이면 병을 고칠 수 있다기에, 그동안만이라도 보살펴 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사이의 경험으로 보면 좀처럼 고칠 수 없을 뿐 아니라 점점 심해 가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구해 낼 가망이 없고, 그러다 보면 제 신세가 어찌 될지도 알 수 없었다.
봉림의 말마따나 끝내는 거적을 쓰게 될 터이니 제 앞날을 돌아보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며칠 안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었으니, 봉림의 말을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다른 데로 다시 시집을 갈 수는 없었다.
자기가 아니면 당장 물 한 모금 얻어먹을 수 없게 된 대철을 내쫓을 수도 없었다.
모르는 체하고 저만 빠져나가 다른 데로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