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는 숲》 제1부 — 죽은 친구의 남자 제6화. 초대받지 않은 불안
지은이 SEINE · 2026-10-20
비가 내리는 밤이면 김준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잠들기 직전에 찾아오는 정적을 견디기 어려웠다.
낮에는 괜찮았다.
논문을 읽고, 연구실에 앉아 자료를 정리하고, 교수의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에는 생각이 일정한 방향으로 흘렀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고, 다음에 어떤 일을 해야 할지도 분명했다.
하지만 밤이 되면 달랐다.
불을 끄고 누우면 낮 동안 밀어 두었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유진의 웃음소리.
휴대전화 너머로 들리던 시끄러운 음악.
별것 아닌 일에도 자신을 찾던 목소리.
그리고 마지막 메시지.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내일 해.
준은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새벽 세 시 사십이 분.
방 안은 어두웠다.
커튼 틈으로 들어온 가로등 불빛이 천장에 가느다란 선을 만들고 있었다.
준은 옆으로 돌아누웠다.
베개 옆에 놓인 휴대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유진의 번호는 여전히 연락처에 저장되어 있었다.
삭제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준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대화창을 열자 마지막으로 나눈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녀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
내일 해.
단 네 글자.
그때는 정말 내일이 올 줄 알았다.
유진은 늘 그랬다.
밤늦게 전화를 걸어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준이 바쁘다고 하면 서운해하다가도 다음 날이면 다시 연락했다.
그래서 준은 기다리라고 말했다.
유진이 기다려 줄 거라고 생각했다.
준은 화면을 끄지 않은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그 사실이 오히려 이상했다.
장례식장에서도 울지 않았다. 유진의 어머니가 손을 잡고 흐느낄 때도, 영정사진 앞에 섰을 때도, 누군가 유진의 이름을 부르며 울음을 터뜨릴 때도.
준은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슬퍼할 자격이 없는 사람처럼.
“……미안해.”
작은 목소리가 방 안에 흩어졌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유진에게.
아니면 아직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게.
준은 휴대전화를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그때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부모의 장례식이었다.
어린 준은 검은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른들은 그녀를 보며 울었다.
누군가는 안아 주었고, 누군가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많이 슬프지?”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울어도 돼.”
하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도 그랬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아무도 없는 집에서 엄마가 쓰던 컵을 발견하고 울었다.
컵 안쪽에 남아 있던 희미한 커피 자국.
손잡이에 붙어 있던 작은 흠집.
그런 사소한 것들이 갑자기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팠다.
준은 눈을 감았다.
유진이 죽었다는 사실도 언젠가는 그렇게 찾아올까.
예고 없이.
도망칠 틈도 없이.
다음 날 오전, 대학원 연구실.
“김준.”
한서윤 교수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준은 노트북에서 시선을 들었다.
“네, 교수님.”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
“네.”
서윤은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준의 책상에는 논문과 출력물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옆에는 마시다 만 커피가 놓여 있었다.
“식사는 했어?”
“아직요.”
“몇 시인데.”
준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한 시 십 분이었다.
“조금 있다가 먹으려고 했습니다.”
서윤은 한숨을 쉬었다.
“넌 항상 조금 있다가 먹는다고 하더라.”
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이번 주말 음악회 말인데.”
“네.”
“초대한 분께 동반인이 있다고 말씀드렸어. 참석 가능하다고 하시더라.”
“감사합니다.”
“그런데 준아.”
서윤은 말을 멈췄다.
준은 교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겠니?”
“무슨 말씀이세요?”
“유진 씨가 다녀갔다는 장소라서 가고 싶은 거잖아.”
준은 잠시 침묵했다.
“네.”
“혹시 그곳에 가면 유진 씨가 왜 죽었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준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기대가 있었다.
그림 속 저택.
유진이 이상하다고 말했던 장소.
그리고 강태신이 반복해서 언급한 집.
그곳에 가면 무언가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을 찾고 있는지는 준 자신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준이 말했다.
서윤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왜 가고 싶어?”
준은 책상 위에 놓인 펜을 손끝으로 굴렸다.
“유진이가…….”
말이 멈췄다.
서윤은 기다렸다.
“유진이가 마지막으로 저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어요.”
“응.”
“그런데 제가 내일 하라고 했습니다.”
준은 펜을 내려놓았다.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서윤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준은 시선을 내렸다.
“저는 유진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요. 평소에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고요.”
그녀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항상 전화를 했거든요. 별일이 없어도요. 저는 가끔 그게 귀찮았습니다.”
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대로 듣지 않은 적도 많아요.”
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그러나 펜을 쥔 손끝에는 조금씩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물어볼 수가 없으니까.”
준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서윤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준아.”
“네.”
“네가 마지막 전화를 받았더라도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알 수 없어.”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건 다르지.”
그 말에 준은 고개를 들었다.
서윤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너는 지금 유진 씨의 죽음에 이유를 찾고 싶은 것 같아. 그 이유를 찾으면 네가 그날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는지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고.”
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윤은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떤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그 친구를 잃었다는 슬픔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준은 손에 쥔 펜을 내려놓았다.
“……네.”
서윤은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음악회에는 같이 가자. 다만 네가 불편하면 언제든 돌아와도 돼.”
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서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문 앞에서 돌아보았다.
“그리고 김준.”
“네.”
“오늘은 꼭 밥 먹어.”
준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네.”
서윤은 그제야 안심한 듯 연구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준은 책상 위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유진이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또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준아, 밥 먹었어?
응.
거짓말하지 마. 너 맨날 안 먹잖아.
준은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가 너무 선명했다.
같은 시각.
강태신은 검찰청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가 지나가자 몇몇 직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검사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태신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사람의 이름을 잘 기억했다.
누가 어느 부서에서 일하는지, 누구의 아이가 아픈지, 어떤 직원이 최근 승진했는지.
상대방이 관심받고 싶어 하는 부분을 알아차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김 주무관님, 아이는 좀 괜찮아졌어요?”
“아, 네. 검사님. 이제 열도 내리고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이네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직원의 얼굴이 밝아졌다.
태신은 미소를 지으며 지나갔다.
그런 대화는 익숙했다.
상대방이 어떤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파악하고, 적절한 순간에 건네는 것.
그에게는 특별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예의 바르고, 배려심이 깊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
태신은 그런 평가가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자신을 신뢰하면 많은 일이 쉬워졌다.
설명을 길게 할 필요도 없었고, 사소한 실수를 해도 쉽게 용서받았다.
그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자 미소가 사라졌다.
혼자가 된 순간 굳이 표정을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휴대전화를 꺼냈다.
김준과의 대화창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는 어젯밤 것이었다.
길이 복잡하니까 조심해서 오세요.
준은 답하지 않았다.
태신은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여기서 관심을 끊었을 것이다.
반응이 없는 사람에게 시간을 쓰는 건 비효율적이었다.
하지만 김준은 이상했다.
장례식장에서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랬다.
그녀는 예뻤다.
그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창백한 피부와 짧은 검은 머리, 크고 어두운 눈.
작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무심한 표정.
태신은 처음에 단순히 외모가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김준은 그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부러 반항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에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게 묘하게 신경 쓰였다.
태신은 대화창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점심은 드셨어요?
메시지를 입력했다.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웠다.
너무 평범했다.
다시 입력했다.
이번 주말에 뵙겠습니다.
이번에도 지웠다.
태신은 짧게 웃었다.
자신이 여자에게 보낼 메시지 하나를 두고 이렇게 오래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그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강 검사님.”
동료 박현우가 그를 불렀다.
“무슨 좋은 일 있어요?”
태신은 고개를 들었다.
“왜요?”
“혼자 웃고 계시길래.”
태신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랬나요?”
“네. 요즘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태신은 잠시 생각했다.
“그런가 봅니다.”
그는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왜 웃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
준은 유진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장례식장 근처의 작은 찻집을 찾았다.
유진의 어머니는 며칠 사이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준은 맞은편에 앉으며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어머니.”
“왔니, 준아.”
“많이 피곤하시죠.”
“괜찮아.”
어머니는 웃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제대로 올라가지 않았다.
준은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김이 천천히 사라졌다.
“유진이 작업실은 다녀왔니?”
어머니가 먼저 물었다.
“네.”
“어땠어?”
준은 잠시 생각했다.
“그대로였어요.”
어머니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렇겠지.”
그녀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 애는 물건 하나 버리는 것도 싫어했어. 다 추억이라고.”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은 그랬다.
영수증도 모아 두었고, 여행지에서 주운 작은 돌멩이도 버리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받은 편지는 날짜별로 정리해 두었다.
준이 생일에 선물한 값싼 머리핀도 몇 년 동안 간직했다.
“준아.”
“네.”
“유진이가 너를 참 좋아했어.”
준은 고개를 들었다.
“네.”
“네가 무슨 말만 해도 좋아했어. 그림 잘 그렸다고 한마디 해 주면 하루 종일 신나 있었고.”
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눈물을 닦았다.
“그런데 가끔은 네가 부럽다고 하더라.”
준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저를요?”
“응.”
“왜요?”
“넌 혼자서도 잘 지내잖아.”
어머니는 쓸쓸하게 웃었다.
“유진이는 누가 자기를 좋아해 주지 않으면 견디질 못했어. 어릴 때부터 그랬지.”
준은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유진은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친구가 많았고, 웃음도 많았고, 사랑받고 싶어 했다.
준은 그런 유진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왜 그렇게 두려운지.
누군가 답장을 늦게 하면 왜 불안해하는지.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유진은 단순히 사람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혼자가 되는 순간을 견디기 어려워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남자친구분은…….”
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강 검사님?”
“네.”
“참 좋은 사람이었어.”
준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랬나요?”
“예의도 바르고, 우리한테도 잘했지. 유진이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직접 연락해 줬어.”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가 많이 좋아했겠네요.”
“그럼.”
어머니는 잠시 웃었다.
그러다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좀 힘들어했어.”
준의 손이 멈췄다.
“어떤 점에서요?”
“자세히는 말 안 했어.”
어머니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냥…… 그 사람 마음을 모르겠다고.”
준은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언제쯤 그런 말을 했나요?”
“한 달쯤 됐을까.”
한 달.
유진이 숲속 저택 사진을 보냈던 시기와 비슷했다.
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유진이가 어디 다녀온 뒤에 달라졌다는 느낌은 없으셨어요?”
어머니는 잠시 생각했다.
“어디?”
“모임 같은 곳이요.”
“아…….”
어머니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그런 얘기는 했어.”
준은 몸을 바로 세웠다.
“무슨 이야기였나요?”
“남자친구 친구들이랑 별장에 다녀왔다고.”
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에는 좋은 곳에 다녀왔다고 자랑했어. 그런데 며칠 뒤에는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
준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왜요?”
“그건 말 안 했어.”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물었더니 그냥 사람들이 불편했다고만 했지.”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준아.”
“네.”
어머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시 유진이한테 무슨 일 있었던 걸까?”
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눈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딸이 왜 죽었는지 알고 싶은 마음.
그러면서도 무서운 진실은 듣고 싶지 않은 마음.
준은 그 표정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자신도 똑같은 얼굴로 의사들을 바라보았으니까.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준이 말했다.
“하지만 유진이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조금 더 알아보고 싶어요.”
어머니는 준의 손을 잡았다.
“부탁할게.”
준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차갑고 마른 손이었다.
“무리하지는 마.”
어머니가 덧붙였다.
“유진이도 네가 다치는 건 싫어할 거야.”
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토요일 오후 다섯 시.
준은 옷장 앞에 서 있었다.
음악회는 일곱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서윤 교수와는 학교 앞에서 다섯 시 삼십 분에 만나기로 했다.
준은 검은색 원피스를 꺼냈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단정한 디자인이었다.
화려한 장식은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섰다.
짧은 검은 머리카락이 목선을 따라 가볍게 흘렀다.
준은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화장은 평소처럼 옅게 했다.
피부가 워낙 희어서 립스틱을 조금만 발라도 얼굴이 선명해 보였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유진이 살아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아마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다.
“준아, 너 진짜 예쁘다니까.”
그리고 웃으며 덧붙였을 것이다.
“너는 왜 그렇게 예쁜 얼굴로 맨날 무표정이야?”
준은 거울에서 시선을 돌렸다.
화장대 위에는 작은 은색 귀걸이가 놓여 있었다.
유진이 몇 년 전 생일 선물로 준 것이었다.
“넌 이런 게 잘 어울려.”
유진은 귀걸이를 건네며 말했다.
“너무 화려한 건 싫어하잖아.”
준은 한동안 귀걸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귀에 걸었다.
차가운 금속이 귓불에 닿았다.
그 순간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준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작은 은색 귀걸이가 움직일 때마다 빛을 반사했다.
유진이 골라 준 물건이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귀걸이를 만졌다.
“……잘 다녀올게.”
아무도 없는 방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말을 하고 나서야 준은 자신이 유진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후 다섯 시 사십 분.
서윤의 차는 서울 외곽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심의 건물들이 점점 멀어지고, 창밖 풍경은 낮은 산과 나무들로 바뀌었다.
“멀지?”
서윤이 물었다.
“생각보다요.”
“나도 이렇게 깊은 곳인 줄은 몰랐어.”
준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로 양옆으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숲속은 빠르게 어두워졌다.
“교수님.”
“응?”
“이 음악회는 누가 주최하는 건가요?”
“서림문화재단 쪽에서 준비했다고 들었어.”
“재단과는 오래 알고 지내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