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너머의 총성
지은이 뮤즈 · 2026-10-11
“조금만…… 조금만 더 가자.”
이진천은 앞서 걷는 동료의 등에 대고 말하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언덕 위 밭고랑 너머에는 지난밤 그들에게 밥을 내어 준 마을이 있었고, 연기 한 줄 올라오는 낮은 지붕 아래에서는 지금쯤 아침상을 차리고 있을 터였다. 낯선 사내 셋에게 문을 열어 준 사람들이 그 일 때문에 무슨 일을 당할지는, 배를 채울 때까지만 해도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다리를 다친 동료가 풀밭에 주저앉았다. 진천과 다른 사내가 양쪽에서 팔을 받쳤지만 젖은 군복 아래의 몸은 생각보다 무거웠고, 일으키려고 힘을 줄 때마다 이 사이로 새는 신음만 더 길어졌다. 일본군의 옷을 입고 조선말로 아파하는 사내를 내려다보며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 있으면 안 돼. 저 마을에서는 더 멀어져야 해.”
동료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진천이 다시 몸을 숙이려는 순간 언덕 위에서 풀 밟는 소리가 났고,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이미 네 개의 총구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병사 하나가 소총을 겨누자 장교가 손을 들었다.
“총알 낭비하지 마라. 마을로 데려간다. 숨겨 주면 어떻게 되는지 저놈들에게도 보여 줘야지.”
진천은 총구보다 먼저 지붕 위의 연기를 보았다. 밥을 지어 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떼어 준 밥이 아직 자기 배 속에 남아 있는데, 그 밥을 지은 사람들은 오늘 아침상을 받지 못할지도 몰랐다.
* * *
박한 중위는 어깨를 움직여 보다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바닥에 부딪친 자리가 욱신거렸지만 팔은 올라갔고 손가락도 움직였으므로, 우선 자기 몸에 관한 보고는 그 정도로 끝내기로 했다. 내무반에는 뒤집힌 관물대와 떨어진 물건 사이로 병사들이 서로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머리부터 확인해.”
김 중사가 넘어져 있는 병사의 어깨를 눌렀다. 지장원 중사는 꺼진 전등을 올려다보다가 문밖으로 나갔는데, 잠시 뒤 돌아온 얼굴에는 부상자를 보았을 때와는 다른 당혹감이 떠 있었다.
“밖은 어때? 불이 난 건가?”
박한이 묻자 지장원은 문 쪽을 한번 돌아보았다.
“불은 안 보입네다. 그런데 밖이 좀 이상합네다.”
“뭐가?”
“울타리 너머가 전부 숲입네다.”
박한은 직접 나가 보려다 멈추고 먼저 인원을 셌다. 서른 명의 목소리가 차례로 돌아왔고, 다친 사람은 있어도 의식을 잃은 사람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총기 보관함과 의무병 배치까지 점검했다. 궁금한 것을 먼저 보는 일은 소대장이 아닐 때 해도 되는 일이었다.
밖으로 나서자 운동장과 행정동은 어제의 모습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담장 너머였는데, 비탈을 깎아 만든 작업장이 보이던 자리를 나무들이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고 가지 끝은 철조망에 닿을 만큼 가까웠다.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고 하기에는 나무가 너무 굵었으며, 공병대가 옮겨 심었다고 하기에는 공병대에 대한 믿음이 지나쳤다.
뒤따라 나온 김 중사가 그 숲을 한동안 보더니 중얼거렸다.
“밤새 조경 공사를 했나 봅니다.”
평소라면 누군가 받아 주었을 말이었다. 아무도 웃지 않자 김 중사도 더 말하지 않았고, 박한은 위병소로 걸음을 재촉했다. 문밖에 있어야 할 포장도로는 칼로 자른 듯 끊겨 풀과 흙에 맞닿아 있었다. 도로가 사라졌다기보다, 자기들이 아는 풍경의 가장자리가 거기서 끝난 것처럼 보였다.
지휘관 집결을 알리는 영내 방송이 울리는 동안 박한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에는 부모의 이름이 평소와 다름없이 떠 있었으나 연결 중이라는 글자는 바뀌지 않았다. 집에서도 이만큼 흔들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어머니가 전화를 받으면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물을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는 끝내 연결되지 않는 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회의실로 향했다.
* * *
서로 다른 군복과 표지를 단 장교들이 긴 탁자를 둘러쌌다. 인사를 생략한 임영옥 준장은 부상자 보고부터 받았고, 골절과 타박상은 있으나 현재까지 사망자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체 발전과 지하수 공급은 작동하고 있었다. 물과 불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큰 위안이 될 줄은, 전날까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통신대대장 이참 소령이 화면을 띄웠다.
“외부 유선망과 이동통신망이 끊겼습니다. 위성통신도 응답이 없고, 위성항법 수신기는 신호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전기는?”
“직접 통신은 정상입니다. 영내 유선망과 자체 서버도 살아 있습니다. 바깥과 연결된 망들이 응답하지 않습니다.”
전황판의 부대 표시는 마지막으로 확인된 좌표 위에 멈춰 있었다. 임영옥이 위치를 묻자 이참은 관성항법장치에 큰 이동이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그것만으로 현재 좌표를 확정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움직인 기록이 없는데 풍경은 달라져 있었다. 기계가 거짓말을 하는지 세상이 거짓말을 하는지, 어느 쪽도 선뜻 택하기 어려웠다.
경계부대장 진하원 대위가 북쪽 외곽 주둔 구역의 사진을 올렸다. 11대대 주둔지로 이어지던 길이 숲 한가운데서 끊겨 있었으며 무전 호출에도 대답이 없었다. 어제 그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장교들이 있었다. 임영옥은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정찰조 편성을 명령했다.
“다섯 방향, 우선 반경 일 킬로미터다. 사람이나 도로가 발견되면 보고하고 연장 승인을 받아. 부상자는 남겨 두고 전원 방탄장비 갖춰.”
그가 현장 영상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묻자 이참은 숲과 능선에서 직접 연결이 끊길 수 있으므로 중계기와 설치 인원을 붙이겠다고 했다. 드론은 충격을 받은 뒤라 센서와 항법을 점검 중이었고, 낯선 숲으로 보내기 전에 가까운 구역에서 시험 비행부터 해야 했다.
“먼저 정찰대를 내보낸다. 목적은 부대 밖의 상황을 확인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으니 현장 지휘관에게 판단과 대응을 맡기겠다. 숲이 울창한 만큼 야생동물도 주의하고. 대원들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본부의 승인을 기다리지 말고 대응해.”
박한은 수첩 맨 위에 동남쪽이라고 적었다. 어제까지는 부대 약도 한 장으로 설명되던 방향이었으나, 이제 그 두 글자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 * *
정찰조는 한 분대 열 명에 통신대 지원병 두 명을 더해 꾸렸다. 안호영 하사가 영상 단말로 본부 연결을 확인하는 사이, 중계기와 배터리를 나누어 멘 지원병들은 허리끈을 조여 맸다. 설치 담당 최 하사는 자기 배낭과 숲을 번갈아 보더니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길만 뚫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전파 길도 뚫어야겠습니다.”
“전화선 끌고 가는 것보다는 낫지.”
김 중사가 배낭을 두드리자 최 하사가 바로 받았다.
“전화선은 배터리가 안 떨어집니다.”
김 중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써 보지도 않은 최신 장비가 낡은 전화선에게 한 번 지고 들어가는 셈이었다.
지장원이 앞장서 풀을 걷어 내자 잎에 맺혔던 물이 바짓단으로 쏟아졌다. 나무 사이로 들어갈수록 햇빛은 가늘어졌고, 박한은 나침반과 단말의 이동 추정을 번갈아 확인했다. 화면에 그어지는 선은 누군가 먼저 닦아 둔 길이 아니라 그들이 방금 걸은 방향을 기계가 짐작해 남기는 흔적이었다.
첫 능선에서 영상이 멈췄다. 최 하사가 손을 들어 대열을 세운 다음 동료와 함께 자리를 옮겨 가며 신호를 측정했다. 장비를 달았던 나무에서 조금 물러나 다시 시험하자 멎어 있던 김 중사의 얼굴이 움직였다.
“본부, 두 번째 중계 지점 연결했습니다.”
박한은 설치 위치와 배터리 잔량을 적는 손을 지켜보았다. 앞으로 걸어가려면 뒤에 두고 갈 물건이 있어야 했고, 돌아올 때에는 그 물건을 챙길 사람도 있어야 했다. 수색 범위는 발이 닿는 데까지가 아니라 통신과 귀환이 함께 가능한 데까지였다.
“이거 완전히 원시림 아닙니까. 호랑이도 있겠습니다.”
김 중사가 낮게 말하자 지장원이 돌아보았다.
“기렇게 자꾸 부르면 나오겠습네다.”
김 중사는 입을 다물었다. 박한은 웃음을 삼키며 전방을 보았다. 농담 한마디에 모두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지만, 총구까지 내려가지는 않았다.
최초 수색 범위에 도달했을 때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박한은 본부의 연장 승인을 받고 남은 장비 수량을 확인했으며, 중계기를 모두 쓰면 영상 전송을 보장할 수 없다는 최 하사의 말을 듣고 지도에 귀환 한계를 표시했다. 숲이 넓다는 사실보다 자기들이 가져온 배터리의 수가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 더 분명한 기준이었다.
두 시간 가까이 걸은 끝에 오솔길이 나타났다. 눌린 풀과 잘린 가지를 따라 밭이 보였고, 앞서 고갯마루를 살핀 지장원이 돌아왔을 때에는 얼굴에서 농담의 기색이 사라져 있었다.
“마을이 있습네다. 군복 입은 자가 스무 명가량입네다. 사람 셋을 묶어 놓았습네다.”
“어느 쪽 군복?”
“우리 것이 아닙네다. 일본군 옛 군복 같습네다.”
박한은 영화 촬영이라는 말을 떠올렸다가 지장원의 다음 보고를 듣고 지웠다. 주민들이 쓰러져 있는데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관측 인원을 보내 확인하는 동안 안호영은 영상의 화질을 낮추었고, 마지막 중계기가 연결되자 끊기던 화면 안에 마당의 모습이 드러났다.
한복 입은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묶인 남자 셋은 몸을 웅크린 채 그들을 보고 있었고, 총을 든 자들은 사람이 쓰러진 마당에서 제 집처럼 움직였다.
* * *
박한은 현장 상황과 접촉 의사를 보고했다. 신중하게 접근하라는 본부의 답을 받은 뒤 대부분의 인원을 숨긴 채 지장원을 앞으로 보냈다. 가까운 엄폐물을 확인한 그가 조선말로 불렀다.
“거기 계신 분들, 잠시 말씀 좀 묻겠습네다.”
대답보다 소총이 먼저 올라왔다. 두 발이 잇달아 울리고 세 번째 총성이 나무 사이를 때릴 때, 몸을 숨기던 지장원의 어깨가 움찔했다.
“괜찮나?”
“어깨를 스쳤습네다. 실탄입네다.”
박한은 엄폐한 채 자신들도 조선말을 하는 군인이며 왜 총을 쏘느냐고 외쳤다. 마당의 장교가 일본어로 명령을 내렸고, 곧 서툰 조선말이 들려왔다.
“대한제국의 잔당이냐? 내려와 무기를 버려라.”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말이었으나 총구가 묶인 남자에게 돌아가는 동작만은 분명했다. 박한은 본부에 인질에 대한 위협을 보고하고 교전을 선언했다. 화면 너머의 지휘관에게 판단을 맡기기에는 지금 자기 눈에 들어오는 것이 더 많았고, 그것들을 설명할 시간은 더 적었다.
박한은 조준경 너머로 장교의 손을 보았다. 권총이 묶인 사내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무슨 시대의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의문은 남아 있었으나, 저 손이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에는 의문이 없었다.
“이진호 하사.”
“예.”
“장교 보이나?”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이라는 인명부의 기록이 떠올랐다. 이 하사는 대답하는 동안에도 총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확인했습니다.”
“인질 쪽으로 총구가 돌아가 있다. 즉시 제압할 수 있겠나?”
“가능합니다.”
박한은 곁의 사격수들을 보았다. 무릎을 괴고 몸을 내민 일본군들 뒤로 다른 병사들의 모자가 보였다. 고갯마루에서 마을까지는 수백 미터였다. 상대는 그 거리가 자기들을 지켜 준다고 믿는 듯했으나, 박한의 병사들은 이미 조준을 마치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 중사, 나머지 사격수들 준비 확인해. 인질 있는 쪽 사선 주의하고.”
짧은 응답이 돌아왔다. 박한은 다시 장교를 보았다. 사람이 아니라 종이 표적을 겨누던 사격장과 같은 동작을 하고 있었지만, 그 뒤에 올 결과는 같지 않았다.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장교가 묶인 사내의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사격.”
탕!
장교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총을 겨눈 팔이 옆으로 떨어지고 몸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곁의 병사가 무슨 일인지 몰라 장교를 보려다가 두 번째 총성에 뒤로 넘어졌다. 이 하사는 확인하는 말 한마디 없이 다음 표적으로 총을 옮겼다.
탕, 탕!
왼쪽 담장에 소총을 걸쳤던 병사의 모자가 벗겨졌다. 옆에 엎드려 있던 자는 고개를 들다가 몸을 꺾었고, 마당 가운데로 달리던 하사관은 두어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저마다 다른 방향에서 쏘아 온 총알이 같은 마당 안의 사람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있었다.
일본군은 처음 몇 발이 어디서 오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병사 하나가 고갯마루 쪽으로 소총을 들었으나 노리쇠를 당기는 동안 곁의 두 사람이 먼저 쓰러졌다. 그는 총을 어깨에 붙이지도 못한 채 가슴을 움켜쥐었다.
탕!
진천은 얼굴을 땅에 댄 채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자기들을 죽이는 줄 알았다. 그런데 머리 위로 지나가던 고함이 하나씩 끊겼고, 줄을 잡고 있던 일본군의 손이 힘없이 어깨를 쳤다. 그는 몸을 움츠린 채 옆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칼집으로 동료를 때리던 병사가 얼굴을 돌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동료가 입술만 움직였다. 진천은 대답하지 못했다. 장교는 이미 쓰러졌고 담장 옆의 병사들도 차례로 몸을 떨군 뒤였다. 자기들 셋은 여전히 그 한가운데 묶여 있는데, 주위의 총 든 자들만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창고 모퉁이의 일본군이 몸을 숨겼다. 곧 소총부터 내밀고 고개를 들었으나 김 중사는 그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다. 총성이 한 번 더 울리자 소총이 먼저 마당으로 떨어졌다. 처마 밑에서 겨누던 병사도 같은 자리에서 총을 놓쳤다.
일본군이 쏘아 대던 소리는 길고 어지러웠다. 국군의 사격은 그 사이를 끊어 놓듯 짧게 이어졌다. 총성을 듣고 다음 동작을 정하려 할 때에는 이미 옆 사람이 쓰러져 있었고, 어디를 향해 쏘아야 하는지 찾는 동안 다시 한 사람이 줄었다.
마지막으로 총을 들고 있던 자가 엎어진 물독 뒤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이 보이는 순간 이 하사의 총이 다시 울렸고, 병사는 물독에 기대듯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표적 제압.”
“좌측, 추가 움직임 없습니다.”
보고가 차례로 들어왔다. 예비 사격수 하나는 방아쇠에 손을 올린 채 끝내 쏘지 못했다. 앞의 사격수들이 적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박한은 총구를 내리지 않고 마당과 건물 입구를 다시 살폈다. 조금 전까지 스무 명의 일본군이 차지하고 있던 곳에는 고함도 총성도 없었다.
진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용해진 마당을 보고도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들을 구한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아직 보이지 않았다.
“인질 세 명, 움직입니다.”
보고를 들은 뒤에야 박한은 접근을 지시했다. 경계 인원이 먼저 마당으로 내려가고 나머지가 건물 입구를 확인했다. 그가 묶인 사내에게 다가갈 때까지 총구는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그중 한 명은 이미 총에 맞았다고 생각했던지 살아 있는 자기 얼굴을 두 손으로 더듬고 있었다.
“조, 조선인이오?”
“그렇습니다. 상처부터 보겠습니다.”
박한이 무릎을 꿇자 사내의 입술이 떨렸다. 고맙다는 말이 나오려다 울음으로 바뀌었는데, 그는 울면서도 소리를 크게 내지 않으려고 이를 물었다.
마당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본부의 화면에는 닿지 않을 냄새였다. 생존자를 찾으러 집집이 들어가던 김 중사는 욕을 삼켰고, 다른 병사는 문턱에 놓인 작은 신발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엎어진 밥그릇 옆에 쌀알이 흩어져 있었다. 박한은 무심코 그릇을 세우려다 손을 거두고 의무병이 부르는 쪽으로 갔다.
포박이 풀리자 진천은 부어오른 손목을 만지며 마당을 보았다.
“우릴 숨겨 줬소. 밥도 줬고…… 그래서 놈들이…….”
끝까지 듣지 않아도 되는 말이었다. 박한은 질문을 멈추고 물을 건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것보다 지금 이 사람이 말을 계속해도 되는지 아는 일이 먼저였고, 사내의 얼굴은 이미 충분히 대답하고 있었다.
지장원은 처치를 받으면서도 마지막 집을 확인하러 갔다. 돌아오라는 명령에 손을 들어 보인 뒤 문 앞에서 다시 한번 사람을 불렀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본부는 추가 인원과 구호 물품을 보내겠다고 했고 박한은 구조자부터 데리고 돌아가겠다고 보고했다. 현장 수습과 기록은 후속조가 맡기로 했다.
안호영은 영상을 저장하며 주민들의 얼굴이 가까이 잡히지 않도록 카메라를 낮췄다. 처음에는 낯선 군복을 확인하려고 켠 카메라였으나 이제는 끄고 싶은 것을 보존해야 하는 카메라가 되어 있었다.
“중위님, 귀환할 때 전부 회수합니까?”
최 하사가 중계기 목록을 내밀었다.
“마지막 인원 지나간 뒤에 뒤쪽부터 거둬. 구호조에 필요한 지점은 본부와 확인해서 남기고.”
다리를 다친 사내는 병사들이 번갈아 부축했다. 몸을 맡기는 것이 미안한지 자꾸 자기 힘으로 버티려 하자 김 중사가 팔을 더 깊이 받쳤다.
“그렇게 걸으시면 제가 더 힘듭니다. 저 좀 도와주십시오.”
사내는 그제야 체중을 실었다. 부축을 받는 사람이 부축하는 사람을 도울 수도 있다는 설명이, 그에게는 자신이 아직 쓸모없는 짐은 아니라는 말처럼 들렸던 모양이었다.
* * *
귀환 길에 비가 내렸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숲에서는 잎을 두드리는 소리가 먼저 왔고, 그 소리를 따라 걸어가는 동안 맨 뒤의 지원병이 중계기를 하나씩 거두었다. 본부로 이어지는 길은 짧아졌으며 배낭은 차츰 무거워졌다. 박한은 설치 지점과 인원을 번갈아 확인하면서 구조자들의 걸음에 대열의 속도를 맞췄다.
진천은 철조망 안에 불 켜진 건물들이 보이자 멈춰 섰다. 어제까지 자기가 알던 산에는 이런 것이 없었는데, 오늘은 자기를 구한 사람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모르는 곳에 들어가지 말라는 경계심보다 더는 걸을 수 없다는 피로가 먼저 그의 발을 움직였다.
의무실 문 앞에서 박한은 이름과 출신을 물었다. 사내는 이진천이라고 했고, 만주로 가던 일본군 부대에서 셋이 함께 도망쳤다고 덧붙였다. 말을 꺼낼 때마다 군복과 신발을 번갈아 보는 눈에는 아직 망설임이 있었지만, 적어도 자기를 붙들고 온 손이 끌고 가던 손과 다르다는 것은 아는 듯했다.
박한은 다음 질문을 고르다가 결국 가장 이상한 것을 먼저 물었다.
“지금이 몇 년입니까?”
진천은 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살폈다. 머리를 다친 사람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소화 육 년이오.”
복도 끝에서 안호영이 정찰 영상을 서버로 넘기는 동안 박한은 의무실 문을 붙든 채 서 있었다. 벽시계 아래의 날짜는 여전히 2046년 8월 25일이었고, 진천은 자기가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 몰라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