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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전의 변론

지은이 허균 · 2026-10-03

“네 아무리 불충불효한 놈이라 한들, 위로는 성상께서 친히 나와 계시고 아래로는 아비가 있다. 지척의 어전에서 임금과 아비를 희롱하니 그 죄가 더욱 크다.”

“어서 형벌 앞에 나아가 하늘의 뜻을 따르라. 그러지 않으면 네 눈앞에서 내가 먼저 죽어, 성상의 노여움을 만분의 일이라도 덜겠다.”

그러고는 임금께 아뢰었다.

“신의 천한 자식 길동은 왼편 다리에 붉은 점이 일곱 개 있사옵니다. 이것을 증거로 가려내소서.”

그러자 여덟 길동이 일시에 다리를 걷어 올렸다. 저마다 붉은 점 일곱 개를 자랑하듯 내보였다.

승상은 끝내 진위를 가리지 못하고, 근심을 이기지 못해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임금이 놀라 급히 좌우에 구완하라 명했으나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그때 여덟 길동이 저마다 주머니에서 대추만 한 환약을 두 알씩 꺼냈다. 다투어 승상의 입에 넣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승상이 깨어났다.

여덟 길동이 울며 아뢰었다.

“신의 팔자가 기구하여 홍모의 천한 종의 배를 빌려 태어났습니다. 그러하여 아비를 아비라, 형을 형이라 마음대로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집안에 시기하는 자가 있어 목숨을 보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산속에 몸을 붙여 초목과 함께 늙으려 하였는데, 하늘이 미워하시어 도적의 무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재물은 터럭 하나도 손댄 적이 없습니다. 수령의 뇌물과 의롭지 못한 자의 재물만 빼앗았을 뿐입니다.”

“간혹 나라의 곡식을 가져오기도 하였으나, 임금과 아비는 한가지입니다. 자식이 아비의 것을 먹었다 하여 어찌 도적이라 하겠습니까. 어린 자식이 어미의 젖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모두 조정의 소인들이 성상의 총명을 가리고 없는 죄를 꾸며 낸 것이지, 신의 죄가 아니옵니다.”

임금이 진노하여 꾸짖었다.

“네가 까닭 없는 재물은 취하지 않았다 하였느냐. 그렇다면 합천사의 중들을 속여 재물을 훔치고, 능에 불을 놓고 무기를 훔쳐 간 것은 무엇이냐. 이보다 큰 죄가 어디 있느냐.”

길동들이 엎드려 아뢰었다.

“불도란 세상을 속이고 백성을 홀리는 것입니다. 중들은 밭 갈지 않고 백성의 곡식을 가져가며, 베 짜지 않고 백성의 옷을 속여 얻습니다.”

“부모가 물려준 몸과 머리카락을 상하게 하여 오랑캐의 모양을 따르고, 임금과 아비를 저버리며 세금을 피해 달아나니 이보다 더한 불의가 없습니다.”

“무기를 가져간 것은, 신들이 산중에 머물며 병법을 익히다가 만일 난세를 만나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임금을 도와 태평을 이루고자 함이었습니다. 불을 놓되 능에는 옮겨 붙지 않게 하였습니다.”

“신의 아비는 대대로 나라의 녹을 받아 충성을 다하고도, 성은의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할까 걱정하는 사람입니다. 그 자식인 신이 어찌 외람되이 분수를 넘는 마음을 품겠습니까.”

“죄를 따진들 죽음에 이를 일은 아니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신하들의 없는 말을 들으시고 이토록 진노하시니, 신은 형벌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먼저 죽어 그 노여움을 덜어 드리겠나이다.”

말을 마치자 여덟 길동이 한데 엉겨 쓰러져 죽었다. 좌우에서 괴이히 여겨 자세히 살펴보니, 진짜 길동은 간 곳이 없고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일곱뿐이었다.

임금은 길동에게 속은 것에 더욱 노하여, 경상감사에게 조서를 내려 길동을 잡으라고 거듭 재촉했다.

한편 경상감사는 길동을 잡아 올려 보낸 뒤로 마음 둘 곳이 없었다. 공무를 모두 접어 두고 서울 소식만 기다리던 차에, 문득 교지가 내려왔다.

북쪽 대궐을 향해 네 번 절한 뒤 봉함을 뜯으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길동을 잡지 않고 허수아비를 보내어 형부를 어지럽혔으니, 임금을 속인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아직 그 죄는 논하지 않을 테니, 열흘 안으로 길동을 잡으라.’

그 말이 몹시 엄했다. 감사는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고, 사방에 지시를 내려 길동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달 밝은 밤이었다. 감사가 난간에 기대어 있는데, 선화당 들보 위에서 한 소년이 내려왔다.

소년이 엎드려 두 번 절하기에 자세히 보니 바로 길동이었다. 감사가 꾸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