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여덟 길동

지은이 허균 · 2026-10-03

감사는 부임한 뒤로 공무를 접어 두었다. 전하의 근심과 아버지의 병세를 걱정하며 시름 속에 날을 보냈고, 혹시라도 길동이 오지 않을까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인이 아뢰었다.

“어떤 소년이 밖에 와서 뵙기를 청합니다.”

들라 하니, 그 사람이 들어와 섬돌 위에 엎드려 죄를 청했다. 감사가 이상히 여겨 까닭을 묻자 그가 대답했다.

“형님께서는 어찌 아우 길동을 알아보지 못하십니까?”

감사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엉킨 채 길동의 손을 잡았다. 방으로 이끌어 좌우를 물리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무상한 아우야. 네가 어려서 집을 떠난 뒤 이제야 만나니, 반가운 마음이 도리어 슬프구나.”

“그런 풍채와 재주를 지니고 어찌 이토록 헤아릴 수 없는 일을 저질러, 아버지와 형의 정을 끊으려 하느냐.”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도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비에게 효도할 줄은 안다. 너는 성정이 총명하고 재주가 남달라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니, 마땅히 충효를 더욱 받들어야 할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몸을 그릇된 곳에 던져, 충효로 말하자면 도리어 보통 사람만도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느냐.”

“아비와 형은 그처럼 뛰어난 자식을 두었다고 속으로 홀로 기뻐하였는데, 너는 도리어 근심만 안겨 주는구나.”

“네가 충의를 좇아 죽을 자리로 간다 해도 아비와 형은 애처로울 것이다. 하물며 역적의 이름을 쓰고 죽게 되었으니 그 마음이 어떻겠느냐.”

“나라의 법에는 사정이 없으니, 아무리 구하고자 한들 구할 수 없다. 너를 위해 서러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는 아비와 형의 낯을 보아 죽기를 각오하고 왔으나, 나는 너를 보기 전보다 두렵고 슬픈 마음이 더하구나.”

“너야 스스로 지은 죄이니 하늘도 사람도 원망하지 못하겠지만, 아버지와 나는 눈앞에서 너를 죽게 하는 것이니 그저 운명을 탓할 뿐이다.”

“어찌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이토록 분수를 넘는 죄를 지었느냐. 천추를 거슬러 올라간들, 산 이별과 죽은 이별이 오늘 밤만 하겠느냐.”

길동이 눈물을 흘리며 아뢰었다.

“불초한 아우 길동이 본디 아버지와 형님의 가르침을 듣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닙니다. 팔자가 기박하여 천한 몸으로 태어난 것을 평생의 한으로 품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집안에서 저를 시기하는 사람을 피해 정처 없이 떠돌다가, 꿈에도 생각지 못하게 도적의 무리에 빠져 잠시 목숨을 붙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죄명이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내일 아우가 스스로 잡혀 온 연유를 장계로 올리시고, 저를 결박하여 나라에 바치십시오.”

두 사람은 이야기로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자 감사는 길동을 쇠사슬로 묶어 서울로 올려 보냈다. 그 얼굴빛은 참담했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이때 팔도에서 저마다 길동을 잡았노라 장계를 올렸다. 사람마다 어리둥절하고 길마다 소란스러웠으며,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 길을 메워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전하께서 친히 나오시어 여덟 명의 길동을 국문하셨다. 그런데 여덟 길동이 서로 다투며 외쳤다.

“네가 무슨 길동이냐? 내가 진짜 길동이다!”

그러고는 서로 팔을 걷어붙이며 한데 엉겨 뒹구니, 도리어 한바탕 구경거리가 되었다. 조정의 신하들도, 좌우의 나졸들도 누가 진짜인지 가려내지 못했다.

신하들이 아뢰었다.

“자식을 알아보는 데는 아비만 한 이가 없습니다. 홍모를 부르시어 그 서자 길동을 가려내게 하소서.”

임금이 옳게 여겨 즉시 홍모를 불렀다. 승상이 명을 받들어 땅에 엎드리자 임금이 말했다.

“경이 일찍이 길동 하나를 두었다 하더니 이제 여덟이 되었다. 어찌 된 까닭인지 자세히 가려내어 국문을 어지럽히지 말라.”

승상이 눈물을 흘리며 아뢰었다.

“신이 행실을 삼가지 못하여 천한 첩을 가까이한 죄로 천한 자식을 두었습니다. 그로 인해 전하께 근심을 끼치고 조정을 어지럽혔으니, 신의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옵니다.”

그러고는 백발이 성성한 얼굴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길동을 꾸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