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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의 꿈

지은이 허균 · 2026-10-03

조선 세종대왕 즉위 15년, 홍희문 밖에 한 재상이 살았다. 성은 홍, 이름은 문이었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강직하여 명망이 매우 높았으니, 당대의 영웅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한림에 올랐고, 조정에서 명망이 으뜸이 되자 임금은 그의 덕을 높이 사 이조판서에 이어 좌의정까지 맡겼다.

홍 승상은 나라의 은혜에 감복하여 충성을 다해 국정을 돌보았다. 그 덕에 사방이 평온하고 도적이 사라지니, 나라에는 화평한 바람이 불어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어느 날, 승상이 난간에 기대어 잠시 졸고 있었다. 그런데 서늘한 바람이 길을 이끌 듯 불어오더니, 어느새 낯선 곳에 이르렀다.

푸른 산은 깊고 그윽하며, 맑은 물은 넓고 길게 흘렀다. 수없이 늘어진 버들가지는 녹음이 짙었고, 황금빛 꾀꼬리는 봄기운을 희롱하며 날아다녔다.

기이한 꽃과 풀이 만발한 사이로 청학과 백학, 공작과 비취새가 봄빛을 뽐냈다. 승상은 그 경치에 감탄하며 점점 더 깊이 들어갔다.

높은 절벽은 하늘에 닿았고, 굽이굽이 흐르는 물은 골짜기마다 폭포가 되어 쏟아졌다. 오색구름이 엉켜 흐르는 그 길은 어디로 이어지는지 끝을 알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청룡 한 마리가 물결을 가르며 솟아올랐다. 청룡이 머리를 들고 울부짖자 산이 무너지는 듯했다.

청룡은 입을 벌려 기운을 토해 냈고, 그 기운이 그대로 승상의 입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승상은 꿈에서 깨어났다.

승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틀림없이 큰 인물을 낳게 될 꿈이다.’

그는 곧장 내당으로 들어가 시녀들을 물리고, 부인과 잠자리에 들려 했다. 그러나 부인은 낯빛을 바꾸며 말했다.

“승상께서는 나라의 대신이십니다. 체통이 이토록 높으신 분이 대낮에 정실에 들어와 이러시니, 체면이 어찌 되겠습니까?”

승상은 잠시 생각했다. 부인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꿈을 헛되이 흘려보낼까 두려워, 그 까닭은 말하지 못한 채 거듭 청했다.

그러자 부인은 옷자락을 떨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승상은 크게 탄식했다. 부인의 완고함을 원망하며 한참을 한탄하다가, 결국 외당으로 나왔다.

마침 시녀 춘섬이 상을 들고 들어왔다. 주변이 고요한 틈을 타, 승상은 춘섬을 불러들여 정을 나누었다.

울화는 조금 풀렸지만, 마음속의 한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춘섬은 비록 천한 신분이었으나 성품이 온순하고 바른 사람이었다. 뜻밖에 승상의 위엄에 눌려 거절하지 못하고 몸을 허락했지만, 그날 이후로는 바깥출입을 삼가고 몸가짐을 더욱 조심했다.

그 달부터 태기가 있었다.

어느 날, 춘섬이 머무는 방에 오색구름이 감돌고 향기가 가득하더니 마침내 아이가 태어났다. 사내아이였다.

사흘 뒤, 승상이 와서 아이를 보았다. 기쁜 마음도 있었지만, 아이가 천한 몸에서 태어난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아이의 이름은 ‘길동’이라 지었다.

길동은 자라면서 점점 비범한 기질을 드러냈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치고, 한 번 본 것은 모르는 것이 없었다.

어느 날, 승상이 길동을 데리고 안채로 들어가 부인을 보며 탄식했다.

“이 아이가 비록 영웅의 자질을 타고났으나, 천한 몸에서 났으니 어디에 쓰겠소. 원통하구나, 부인의 고집이여. 지금 생각하면 후회스럽소.”

부인이 까닭을 묻자, 승상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날 내 말을 들었더라면 이 아이는 부인의 몸에서 태어났을 것이오. 어찌 천한 신분이 되었겠소.”

그리고 그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니, 어찌 사람의 힘으로 되겠습니까.”

세월이 흘러 길동은 여덟 살이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칭찬했고, 승상도 그를 아꼈다.

그러나 길동의 마음속에는 깊은 한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처지. 그는 스스로 제 출생을 원망했다.

어느 가을밤, 보름달이 밝게 떠 있었다. 길동은 뜰을 거닐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바람은 쓸쓸히 불고, 기러기 울음소리가 외로움을 더했다. 길동은 홀로 탄식했다.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공맹의 도를 배우고, 벼슬길에 올라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 천하를 호령하고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것이 사내의 길이다. 왕후장상이라 해서 씨가 따로 있단 말인가.”

“그런데 나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이게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칼을 뽑아 들었다. 달빛 아래 춤을 추듯 칼을 휘둘렀지만, 솟구치는 기운을 누를 길이 없었다.

그때 승상이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다가 그 모습을 보았다. 깜짝 놀란 승상이 외쳤다.

“밤이 깊었거늘, 무슨 일로 이러느냐?”

길동은 칼을 던지고 엎드렸다.

“소인은 대감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사내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천한 자라 부르며 손가락질합니다. 이보다 더 원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길동은 울음을 터뜨렸다. 승상은 마음이 아팠지만, 혹시 그 말이 밖으로 퍼질까 두려워 엄하게 꾸짖었다.

“재상가에 천한 몸으로 태어난 자식이 너 하나뿐이더냐. 쓸데없는 생각은 버려라. 다시 그런 말을 입에 올리면 용서하지 않겠다.”

길동은 그저 눈물만 흘렸다. 잠시 뒤 물러난 길동은 어머니를 붙잡고 통곡했다.

“어머니, 저는 반드시 출세하여 이름을 떨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몸은 천하게 태어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산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잊고 살려 합니다. 부디 저를 막지 마십시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너 하나만 그런 처지가 아니다. 어찌 어미의 마음을 이리 아프게 하느냐. 조금만 더 기다리면 길이 열릴 것이다.”

그러나 길동은 단호했다.

“세상 사람들의 말이 제 마음에 깊이 박혔습니다. 게다가 요즘 곡산모의 태도를 보니, 우리를 해칠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화를 피할 수 없습니다. 제가 떠난 뒤에는 어머니께 해가 미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곡산모는 어질고 인자한 사람이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길동은 다시 말했다.

“세상일은 믿을 수 없습니다. 제 말을 헛되이 여기지 마시고, 앞으로를 지켜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