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장 너머의 이별
지은이 김시습 · 2026-10-03
주인은 마침내 말을 멈추고, 양생에게 그 은그릇을 어디서 얻었느냐고 물었다.
양생이 전날 여인과 약속한 그대로 사실을 털어놓자, 여인의 부모는 크게 놀라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아버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게는 외동딸이 하나 있었네. 왜구의 난리 통에 싸움판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지.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개령사 곁에 임시로 묻어 두었네.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루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고, 오늘이 바로 대상 날일세. 그래서 재라도 올려 명복을 빌어 주려는 길이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양생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정말 그 약속을 지키려거든, 내 딸을 기다렸다가 함께 오게. 놀라지는 말게나.”
말을 마친 귀족은 먼저 절로 떠났다.
양생은 홀로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약속한 시간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 시간이 되자, 과연 한 여인이 계집종을 거느리고 허리를 가볍게 흔들며 걸어왔다. 바로 그 여인이었다.
양생은 반가움에 숨조차 잊었고, 여인도 기쁜 얼굴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함께 절로 향했다.
절 문에 들어선 여인은 먼저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흰 휘장이 드리워진 안으로 들어갔다.
친척들과 절의 스님들은 아무도 양생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 여인은 오직 양생의 눈에만 보였다.
여인이 조용히 말했다.
“함께 저녁이나 드시지요.”
양생이 그 말을 전하자, 부모는 시험해 볼 생각으로 함께 상을 차리게 했다.
사람들의 눈에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수저 움직이는 소리만은 또렷이 들렸고, 밥 먹는 소리도 살아 있는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그제야 부모는 놀라며 깊이 탄식했다. 그리고 양생에게 휘장 곁에서 함께 자도록 권했다.
한밤중이 되자 휘장 안에서 낭랑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몰래 귀를 기울이면 그 소리는 뚝 끊어지곤 했다.
여인이 양생에게 말했다.
“제가 법도를 어긴 것은 저도 잘 압니다. 어려서 『시경』과 『서경』을 읽었으니 예의를 조금은 알지요. 『시경』의 「건상」이 얼마나 부끄러운 노래인지, 「상서」가 얼마나 낯 붉힐 만한 시인지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슬픔이 깊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다북쑥 우거진 들판에 버려져 묻혀 있다 보니, 사랑하는 마음이 한번 일어나자 끝내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번 절에 가서 복을 빌며 부처님 앞에 향을 사르고, 박명한 한평생을 홀로 한탄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삼세의 인연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소박한 아내가 되어 백년의 절개를 바치고 싶었습니다. 술을 빚고 옷을 기우며, 평생 지어미의 길을 걷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애달프게도 업보를 피할 수 없어, 다시 저승길을 떠나야 합니다. 기쁨을 다 누리기도 전에 슬픈 이별이 닥쳐왔습니다.”
양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인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제 제가 떠날 시간입니다. 운우는 양대에서 걷히고, 오작은 은하에서 흩어지겠지요. 한번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 어렵습니다. 막상 헤어지려 하니 마음이 아득하여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여인의 혼을 전송하는 동안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혼이 문밖으로 나가자, 희미한 목소리만 은은하게 들려왔다.
저승길도 기한이 있어
슬프지만 이제 이별이라오.
우리 님께 비오니
저버리지는 마옵소서.
애달파라, 우리 부모
나의 배필을 끝내 못 맺어 주셨네.
아득한 구천에서
마음에 한이 맺히리.
그 소리는 점점 가늘어지더니, 끝내 목메어 우는 소리와 구별할 수 없게 되어 사라졌다.
그제야 여인의 부모는 그동안의 일이 모두 사실임을 알고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양생도 그 여인이 귀신이었음을 분명히 깨닫고 더욱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는 여인의 부모와 머리를 맞대고 오래도록 울었다.
여인의 부모가 양생에게 말했다.
“은그릇은 자네가 가지게. 또 내 딸 몫으로 남겨 둔 밭 몇 마지기와 노비 몇 사람이 있으니, 그것을 신표로 삼아 우리 딸을 잊지 말아 주게.”
이튿날, 양생은 고기와 술을 마련해 개령동 옛 자취를 찾아갔다.
과연 그곳에는 여인을 임시로 묻어 둔 자리가 있었다.
양생은 제물을 정성껏 차려 놓고 그 앞에서 슬피 울었다. 그리고 지전을 불사르고 정식으로 장례를 치러 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제문을 지어 여인의 넋을 위로했다.
아아, 영혼이시여.
그대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순하였고
자라서는 얼굴이 맑고 고왔소.
자태는 서시와 같았고
글솜씨는 숙진보다 뛰어났소.
규문 밖을 나서지 않고
집안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소.
난리를 만나서도 끝까지 정절을 지켰건만
왜구를 만나 목숨을 잃고 말았구려.
다북쑥 속에 홀로 묻혀
꽃 피는 밤, 달 밝은 밤마다 얼마나 마음 아팠겠소.
봄바람에 애가 끊어질 때면 두견새의 피 울음이 슬펐을 것이고
가을 서리에 쓸개가 찢어질 때면 버려진 비단 부채를 보며 탄식했겠지요.
지난번 하룻밤 그대를 만나 큰 기쁨을 얻었소.
이승과 저승이 다른 줄 알면서도
물 만난 고기처럼 기쁨을 다하였소.
장차 백 년을 함께하리라 여겼는데
어찌 하루 저녁 만에 이리 슬피 헤어질 줄 알았겠소.
임이여.
그대는 이제 달나라의 선녀가 되고
무산에 비 내리는 아가씨가 되었구려.
땅은 어두워 돌아오기 어렵고
하늘은 멀어 바라보기도 어렵소.
나는 집에 들어가도 멍하니 말이 없고
밖에 나가도 아득하여 갈 곳이 없소.
휘장을 볼 때마다 흐느껴 울고
술을 따를 때마다 마음은 더욱 슬퍼지오.
그 아름다운 모습 아직도 눈앞에 보이는 듯하고
그 맑은 목소리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하오.
아아, 슬프구려.
그대의 성품은 총명하였고
그대의 기상은 맑고 단정하였소.
몸은 비록 흩어졌다 하나
어찌 혼령마저 사라지겠소.
부디 강림하여 뜰에 오르시고
내 곁에 와 이 슬픔을 돌아보소서.
비록 삶과 죽음이 다르다 하나
그대가 이 글에 반드시 감응하리라 믿소.
장례를 치른 뒤에도 양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그는 밭과 집을 모두 팔아 사흘 밤을 잇달아 재를 올렸다.
그러자 여인이 공중에서 다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당신의 은혜를 입어, 저는 이미 다른 나라에서 남자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저승과 이승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당신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도 이제 다시 바른 업을 닦아, 저와 함께 윤회를 벗어나십시오.”
그 뒤 양생은 다시는 장가들지 않았다.
그는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고,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