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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그릇의 약속

지은이 김시습 · 2026-10-03

김씨는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어 나갔다.

밤 깊어 오경이라 소쩍새 슬피 울고

희미한 은하수는 동쪽으로 기울었네.

애끊는 옥퉁소일랑 다시는 불지 마오

한가로운 이 풍정을 속인이 알까 두려우니.

오정주를 금 술잔에 가득히 부으리니

취하도록 드시고 술 많다 사양 마오.

날 밝아 동풍이 사납게 불어오면

한 토막 봄날의 꿈을 어이하리오.

초록빛 소맷자락 부드럽게 드리우고

풍악 소리 들으며 백 잔 술을 드소서.

맑은 흥취 다하기 전엔 돌아가지 못하리니

새로운 말로 새 노래를 지으소서.

구름 같은 고운 머리 티끌 된 지 몇 해던가

오늘에야 님을 만나 얼굴 한번 펴 보았네.

고당의 신기한 꿈일랑 자랑하지 마소서

풍류로운 그 이야기 인간 세상에 전해질까 두렵나니.

다음은 류씨였다.

류씨는 엷게 화장하고 흰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몸가짐에 법도가 있었다. 말없이 앉아 있던 그녀는 제 차례가 되자 빙그레 웃으며 시를 읊었다.

금석처럼 굳게 정절을 지켜 온 지 몇 해던가

향그런 넋 옥 같은 얼굴 구천에 깊이 묻혔네.

그윽한 봄밤이면 달 속의 항아와 벗하여

계수나무 꽃그늘에서 외로운 잠을 즐겼다오.

우스워라, 복사꽃 오얏꽃은 봄바람을 못 이겨

이리저리 나부끼다 남의 집에 떨어지네.

한평생 내 절개에 쉬파리 하나 앉지 않았으니

곤산옥 같은 내 마음에 티 생길까 두려워라.

연지도 분도 싫어 머리는 헝클어지고

경대엔 먼지 쌓이고 거울엔 녹이 슬었네.

오늘 아침 다행히 이웃 잔치에 끼었으나

머리에 꽂은 붉은 꽃이 보기만 해도 부끄러워라.

아가씨는 이제야 백면 낭군을 만났으니

하늘이 정한 인연, 한평생 꽃다우리라.

월로가 이미 거문고와 비파 줄을 이어 주었으니

이제부터 두 분은 양홍과 맹광처럼 사소서.

류씨의 마지막 시를 들은 여인은 고마워하며 앞으로 나왔다.

“저도 글자는 대강 분별할 줄 압니다. 어찌 저만 시를 짓지 않겠습니까?”

그러고는 칠언율시 한 편을 지어 읊었다.

개령동 골짜기에서 봄 시름을 안고

꽃 지고 필 때마다 온갖 근심 느꼈었네.

초협 구름 속에서 고운 님을 여의고

소상강 대숲에서 눈물을 뿌렸었네.

따스한 날 맑은 강에 원앙은 짝을 찾고

구름 걷힌 푸른 하늘에 비취새가 노니는구나.

님이여, 우리도 동심결을 맺읍시다.

가을 맞은 비단 부채처럼 버림받아 원망하는 일 없게 하소서.

양생 또한 글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인들의 시가 맑고 운치가 높으며 운율까지 또렷하게 울리는 것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고풍 장단편 한 편을 지어 화답했다.

이 밤은 대체 어떤 밤이기에

이토록 고운 선녀를 만났던가.

꽃 같은 얼굴은 어찌 그리 고운지

붉은 입술은 앵두 같구나.

게다가 시마저 더욱 빼어나니

이안도 마땅히 입을 다물리라.

직녀가 베틀 북을 던지고 인간 세상에 내려왔는가

항아가 약방아를 버리고 달나라를 떠났는가.

대모로 꾸민 단장이 자리를 빛내 주니

오가는 술잔 속에 잔치가 즐겁구나.

운우의 즐거움엔 아직 서툴러도

술 따르고 노래 부르며 서로 즐기네.

봉래섬을 잘못 찾아든 것이 도리어 기쁘구나

신선 세계가 여기던가, 풍류객들을 만났구나.

옥잔의 맑은 술은 향그런 술통에 가득하고

서뇌향 고운 내음은 금사자 향로에 서려 있네.

백옥상 앞에는 그윽한 향내 흩날리고

푸른 비단 장막에는 실바람이 살랑이는데,

님을 만나 술잔 나누며 잔치를 베푸니

하늘의 오색구름이 더욱 찬란하여라.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문소와 채란이 만난 이야기를,

장석이 난향을 만난 이야기를.

사람이 서로 만나는 데는 반드시 인연이 있으니

모름지기 잔을 들어 실컷 취해 보세.

님이시여, 어찌 가벼이 말씀하시오

가을바람에 부채 버린다는 서운한 말씀을.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배필이 되어

꽃 피고 달 밝은 아래 끝없이 노닐려오.

술이 다하고 마침내 헤어질 때가 되자, 여인은 은그릇 하나를 꺼내 양생에게 건넸다.

“내일 저희 부모님께서 저를 위해 보련사에서 재를 올리실 것입니다. 저를 버리지 않으시겠다면 보련사로 가는 길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저와 함께 절로 가서 부모님을 뵙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양생이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소.”

이튿날, 양생은 여인의 말대로 은그릇 하나를 들고 보련사로 가는 길가에 서서 기다렸다.

과연 어느 귀족 집안이 죽은 딸의 대상을 치르려고 수레와 말을 길게 늘어세운 채 보련사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 길가에서 한 서생이 은그릇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본 하인이 주인에게 아뢰었다.

“아가씨 장례 때 무덤에 함께 묻은 그릇을, 벌써 누가 훔쳐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이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인이 대답했다.

“저 서생이 들고 있는 은그릇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