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界は君を照らさない。ただ記憶するだけ。
作 제이여라
09.
여자는 유리조각을 맨손으로 들어 올렸다. 유리조각에 긁혀 피가 방울방울 떨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유리조각을 치웠다. 서둘러 어딘가로 향하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몇 명의 궁인들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걔네는 아직 못 잡았대? 궁인 몇 명 죽이고 도망간 로지서 애들 말이야.”
“아직 별 소식 없는 거 보니 그런 것 같은데. 하여튼 걔네 생존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 말을 들은 크리스는 홀린 듯 여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틀어 따라갔다. 세라가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그 손길마저 거부하고 여자를 향해 뛰어갔다.
“거긴 수습 궁인 출입 금지인데⋯⋯.”
세라의 마지막 말을 크리스는 듣지 못했다.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여자는 발이 빨랐다. 크리스는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그녀를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여자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로 덜덜 떨었다. 가지런히 모은 손등은 상처가 겹친 채 흉터가 져 있었다. 고개를 살짝 든 얼굴이 정말 아름다웠다.
“저기⋯⋯.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크리스는 얼굴을 벅벅 긁으며 그녀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낮췄다. 여자가 엎드린 채로 말했다.
“그러시면 안 돼요. 저희는 벌레보다 더 천한 존재라서 저흴 위해 시선을 낮추시면 안 됩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자의 목소리가 강경해졌다.
“황실의 법도는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수습 궁인도 그 안에 들어가 있지요. 말을 낮추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주세요. 어서요!”
“그, 그래요?”
크리스는 어설프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크리스가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뭐든 물어봐 주세요.”
잠깐 망설이던 크리스가 천천히 물었다.
“리에라는 이름, 혹시 알고 있어?”
여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커다란 눈동자가 떨렸다. 겁에 질려있던 여자는 아예 낯빛이 새파래졌다.
“그, 그 이름은 궁에서 거의 금기에 가까워요⋯⋯. 다시는 꺼내지 마세요!”
“왜?”
“왜, 왜라뇨⋯⋯. 리에 로지서가 한 짓을 모르시는 건가요?”
크리스의 몸이 굳었다. 리에가 보여주었던 그 아름다운 미소, 도와주러 왔다던 그 말. 그리고 이 여자의 말. 무언가가 모순되어 있었다. 크리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보자 여자가 화들짝 놀라 다시 바닥에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말을 너무 얹었죠⋯⋯. 심지어 무례하기까지 했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숨을 크게 들이마신 크리스는 천천히 생각을 차근차근 분류했다. 이 여자는 로지서 출신 몰락 귀족이며 몰락 귀족은 벌레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 앞서 궁인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던 말들과 몰락 귀족 출신 노예가 리에의 이름을 듣고 화들짝 놀라 언급된 사건을 다시금 말했다는 건⋯⋯.
“수습 궁인.”
뒤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크리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는 출입 금지 구역일 텐데. 왜 여기에 있지?”
치켜뜬 눈이 무겁게 크리스를 바라봤다. 크리스는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그, 그게⋯⋯.”
어떤 말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크리스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순간, 여자가 궁인 앞에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수습 궁인께서는 제가 걱정되어 따라오신 것뿐입니다. 제가 손을 다쳐서⋯⋯.”
궁인이 여자의 손을 바라봤다. 여자의 손에서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궁 안을 더럽히지 마라.”
“죄송합니다!”
궁인의 시선이 크리스에게 꽂혔다. 그가 크리스를 째려보며 말했다.
“황궁은 네 놀이터가 아니다. 조심해라.”
“제가 부족했습니다.”
“네 처소로 돌아가라.”
크리스는 고개를 까딱이곤 걸음을 옮겼다. 궁인과 여자는 무슨 대화를 하는지 그 앞을 떠나지 않았다.
크리스가 다시 돌아오자 세라는 얼굴을 찡그리며 어깨를 후려쳤다.
“그때 네가 했던 말, 그대로 돌려줄게. 너나 눈에 띄지 마.”
“너보단 나아.”
“난 정의를 위해 몸을 날렸을 뿐이야.”
종소리가 울렸다.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뜻이 담긴 소리였다. 세라와 크리스는 헤어져 다시 교육받을 부서로 향했다.
다시금 천장에 닿아있는 책장들이 크리스를 반겼다. 쉼 없이 종이들이 넘겨지고 기록되는 소리가 들렸다. 수십 개의 거울 속에서 낯선 도시들과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해가 능선을 훌쩍 넘겨서야 기록들을 겨우 정리할 수 있었다. 크리스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얼얼한 손을 매만졌다. 한 수습 궁인이 불만을 터트렸다.
“수습 궁인을 이렇게 혹사시켜도 되는 거야?”
“거기, 다 들린다.”
수습 궁인이 흠칫 놀랐다. 다른 아이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카산드라가 말했다.
“많이 해야 많이 늘지. 황궁이란 이런 곳이야.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해. 그러다가 제안이 안 오면 그대로 쫓겨나는 거야.”
카산드라가 크리스를 쳐다봤다.
“크리스는 실력이 있어 보이네. 기록부에 관심이 있다고 했던가?”
“아, 네.”
“잘해봐. 기록부에서 제안이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들어보니 에밀리아님이 널 기록부에 보내려고 한다는 소문이 있어.”
“저를요?”
“응. 어떤 애가 지나가다 들었대. 기록부에 보내야 한다고.”
크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에밀리아는 분명 세라를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그 피 묻은 손도. 여자와 리에. 대체 그들의 연결고리가 뭐일지.
“이제야 오는구나.”
식당 입구 앞에 세라가 벽을 짚고 서 있었다. 크리스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늦었잖아.”
“카산드라 궁인께서 뭐라 말씀하시는 바람에.”
“하여간. 총명한 인재 납셨네. 이리와.”
세라가 천천히 손짓했다. 두 사람은 복도 끄트머리에서 천천히 대화를 시작했다.
“리에의 이름은 금기라 했어. 궁인들을 죽이고 도망친 몰락 귀족 출신 노예가 있다는 말과 연관 지어 말해주더라고. 아까 식당에서 아이들이 했던 얘기도 그렇고.”
“그 아이는 로지서라 그랬지. 그렇다면 그 저택은 도망 이후, 로지서가 마련한 대피처라 보면 되겠네.”
잠시 침묵이 돌았다. 세라가 물었다.
“무슨 생각해?”
“뭔가 이상해서.”
“뭐가?”
“리에 말이야.”
크리스가 말을 이었다.
“리에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쳤다는 게 믿기지 않아. 우리를 구하러 왔잖아. 게다가 정보들까지 넘겨줬고, 그 사람들은 우릴 보살펴줬어.”
“다른 목적이 있는 걸까. 아니면 진심이었을까.”
두 사람 모두 말없이 생각에 빠졌다. 세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그냥 도망가면 안 될까? 역시 우리가 감당하기엔 너무 어려운 문제 같아.”
“난 기억을 찾고 싶어.”
“그러다 죽기라도 하면?”
크리스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찾을 거야.”
생각이 꼬리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지금 상황을 간단히 정리하고 할 일을 찾는다면⋯⋯.
“난 기록부에 들어갈게.”
세라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크리스의 눈이 굳게 빛나고 있었다.
“기록부? 왜?”
“기록은 거짓말을 못 하니까.”
세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떻게 알아보게? 기록 장치들이 너를 알아보지 못한다면서.”
“그러니까 더 이상하지. 모든 게 나와 너에게 뭔가 숨기고 있어. 우린 그걸 알아내야 해.”
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디로 갈까?”
“치안부가 나을 것 같은데.”
“뭐?”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궁인 두 명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세라가 말을 이었다.
“치안부는 왜?”
“밤에도 돌아다닐 수 있잖아.”
“하, 힘든 걸 나한테 다 시키시겠다?”
“나도 노력은 해볼게.”
“가장 나쁜 놈은 너인 거 알지?”
그때,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크리스와 세라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무리에 섞여든 두 사람은 평범하게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갔다.
“⋯⋯.”
마치 불순물 같았다. 자기 자신이.
모든게 완벽하게 돌아가는데, 맞춰지지 않는 퍼즐 조각처럼 쓸모 없는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잃은 기억 속엔, 뭐가 있을까.
그러던 그때, 바닥에 퍼진 커튼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림자가 노인의 형태로 변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에 관한 건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그림자의 목소리였다. 크리스는 천천히 그림자를 응시했다. 크리스의 잇새 사이로 말이 흘러나왔다.
“아직 진전이 없어.”
“느리군.”
크리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자신들의 임무를 잊고 있었다.
“생각보다 복잡하니까.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냐.”
“네 머릿속이 더 복잡한 건 아니고?”
크리스는 아무 말 없이 옷을 털어냈다. 그림자가 이어서 말했다.
“널 위해 조언을 하나 해주지.”
“필요 없어.”
“기록부는 가지 마라.”
크리스가 천천히 시선을 그림자에게 옮겼다.
“왜?”
“기록은 쓰는 사람의 선택이라는 소리다.”
“그렇다면 황궁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소리야?”
“아니, 더 끔찍한 거다.”
그림자의 목소리가 나긋하게 울렸다.
“모두가 진실이라 말하는 거짓이지.”
그림자가 다시 커튼으로 변했다. 크리스는 멍하게 그 자리에 서서 그림자를 바라봤다. 창문 너머로 노을이 흐드러지게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