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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얼만데

作 영우 · 2026-10-27

저녁 일곱 시. 연무는 소속사 건물 5층, 여화네 집 현관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한우 선물 세트, 다른 손에는 꽃다발. 꽃은 어머님 드릴 거였다. 누나한테 꽃을 내밀었다가는 "이걸 왜 사 와. 돈 아깝게." 소리부터 들을 게 뻔했다.

휴대폰이 연달아 울렸다.

[형 오늘 저녁 스케줄 뺀 거 대표님한테 걸렸어요ㅠㅠ]

[강연무. 너 내일 아침 일곱 시까지 사무실로!! 😡]

연무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내일 일은 내일의 강연무가 알아서 할 것이다.

1층부터 4층까지가 소속사였으니, 연무는 데뷔하고 거의 매일 이 건물로 출근했다. 엘리베이터 버튼 5층은 누를 일이 없는 숫자였다. 박 대표를 따라 명절에 인사드리러 올라온 적은 있었다. 누나가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식에 괜히 4층 비상계단에서 서성인 적도 있었다. 그런데 누나가 직접 오라고 한 건 처음이었다.

뭐라고 하면서 들어가지. 안녕하세요, 어머님. 누나가 밥 먹으러 오라고 해서요. 아니, 그건 너무 들떠 보인다. 그냥 지나가다가…… 는 이미 범이 놈한테 박살 난 핑계였다.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초인종을 눌렀다.

"어머, 우리 연무 왔어?"

문을 열어 준 건 여화 엄마였다. 연무가 내민 꽃다발을 받아 들더니 소녀처럼 웃었다.

"아유, 뭘 이런 걸 다. 우리 딸은 꽃 한 송이 사 오는 법이 없는데."

"누나는 아직……?"

"자. 또 자. 해가 졌는데 아직도 자. 들어와, 들어와. 밥 다 됐어."

* * *

여화는 삼십 분 뒤에야 나타났다.

편안한 롱 니트 티 한 장에 대충 빗어 넘긴 머리. 공사장에서 보았던 날카로운 카리스마는 온데간데없었다. 하품을 하며 식탁 의자를 끄는 그 무방비한 모습에, 연무는 젓가락을 쥔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가 시선을 아찔하게 붙잡았다. 연무는 침을 삼키며 서둘러 고기 접시로 눈을 돌렸다. 어머님 앞인데 이성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었다.

"진짜 혼자 왔네?"

여화가 의자에 앉으며 나른하게 툭 던졌다.

"누나가 혼자 오라면서……."

"엄마, 연무가 사 온 한우 오늘 다 구워. 남기지 말고."

연무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졌다. 비싼 걸 사 왔다고 타박할 줄 알았는데, 누나는 그저 이 비싼 고기를 다 먹어 치울 생각뿐이었다.

그때 현관문이 쾅 열리며 운동복 차림의 남동생이 들이닥쳤다. 연무의 남동생과 학창 시절부터 붙어 다니던 친구라, 연무에게도 동생 같은 녀석이었다. 연무를 발견한 동생의 눈이 누나와 연무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음흉하게 호선을 그렸다.

"아아. 형, 우리 누나 보러 왔구나?"

연무의 귀가 순식간에 화끈해졌다.

"밥 먹으러 온 거야. 내가 오라고 했어."

여화가 고기 한 점을 입에 쏙 넣으며 평온하게 대꾸했다.

"잘생긴 애랑 먹어야 소화가 잘된다고 했잖아."

"……누나 그거 진심이었어?"

"응."

남동생이 연무를 보며 소리 없이 입 모양을 만들었다. 형, 힘내. 연무는 못 본 척 고기를 뒤집었다.

남동생이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 왔다. 한 캔을 연무 앞에, 다른 한 캔을 무심코 누나 앞에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얘!"

엄마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그 캔을 낚아챘다.

"누나 앞에 맥주 놓지 말랬지."

"아, 맞다. 깜빡했다."

여화는 아무 말 없이 물을 마셨다. 연무는 그 짧은 소동을 눈에 담았다. 누나가 술을 못 하나? 아니었다. 술이라면 나 못지않게 세다는 얘기를 박 대표한테 몇 번이나 들었다. 그런데 맥주는 안 된다니.

모르는 게 또 하나 있었다. 인생의 반을 봐 왔는데, 여전히 누나에 대해 모르는 비밀이 너무 많았다.

* * *

엄마는 연무 밥그릇에 고기를 자꾸 얹어 주었다.

"연무 동생은 잘 있고? 우리 막내랑 아직도 잘 다니나? 근데 걔는 왜 한 번도 안 와? 다음엔 꼭 데리고 와."

"네, 어머님. 어제도 둘이 피시방 갔대요."

"서른 넘은 것들이 아직도 피시방이야."

남동생이 억울하다는 듯 입을 삐죽였다. 여화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 하나에, 연무는 한우 열 근을 더 사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기가 반쯤 줄었을 때, 연무가 슬쩍 말을 꺼냈다.

"누나. 광고 말인데."

"응."

"감독은 정했어? 아는 데 없으면 내가 소개해 줄까 해서."

"정했어."

여화가 상추에 고기를 얹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학교 선배. 홍시라고."

연무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홍시? 설마 홍시 스튜디오?"

"응. 아는구나."

아는 정도가 아니었다. 업계에서 홍시 스튜디오에 광고 한 편 맡기려면 반년은 줄을 서야 했다. 까다롭기 짝이 없는 업계의 거물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모델이면 톱스타라도 돌려보낸다는 소문이 있었다. 연무 소속사의 배우들도 두 번이나 문을 두드렸다가 두 번 다 거절당했다.

그런 거물이 누나의 첫 광고를 맡아 준다고?

"진짜? 그분이 해 주신대?"

"내가 부탁하면 해."

쌈을 오물오물 씹는 여화의 얼굴에는 그 흔한 자랑 한 톨 없었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 얼굴이었다.

연무는 새삼 누나를 보았다. 15년 만에 돌아온 사람이 클럽 사장을 친구로 두고, 업계 최고 감독을 선배로 두고 있었다. 대체 그녀의 주변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 걸까.

그 거대한 의문의 답은, 아주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딩동.

"아, 태진이 왔나 보다."

엄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현관으로 나갔다.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는 여화의 미간이 귀찮다는 듯 좁아졌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낮고 단정한 목소리였다. 현관에 선 남자는 마흔 후반쯤 되어 보였다. 짙은 회색 정장에 넥타이까지 반듯하게 맨, 어딘가 공무원 같은 차림새. 그런데 연무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세웠다. 남자의 눈이 집 안을 한 바퀴 훑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 1초 동안, 연무는 자기가 낱낱이 읽힌 기분이 들었다.

"태진아, 이거 가져가. 멸치볶음이랑 장조림이랑, 이건 범이 좋아하는 오징어채. 너 요즘 또 라면만 먹지?"

엄마가 커다란 쇼핑백 두 개를 남자 품에 안겼다. 반찬통이 족히 열 개는 넘어 보였다.

"아닙니다, 어머니. 잘 챙겨 먹고 있습니다."

"거짓말. 얼굴이 반쪽이야."

남자는 반찬통을 공손히 받아 들었다. 쇼핑백 손잡이를 쥔 손등에 희미한 흉터가 길게 나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서류만 넘기는 공무원의 손은 아니었다. 그리고 엄마 어깨 너머로, 식탁의 여화를 힐끗 보았다. 여화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사부라는 사람이 왔는데 인사는커녕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귀찮다는 듯 고기만 뒤집고 있었다.

연무는 그게 이상했다. 남의 집 어른 앞에서도 할 건 하던 누나였다. 그런데 저 사람한테만은, 대놓고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남자 쪽이 슬쩍슬쩍 누나 눈치를 살폈다. 어른이 아랫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아쉬운 게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

"연무야, 인사해. 우리 여화 어릴 때 호신술 가르쳐 준 사부님이야. 범이네 둘째 형."

"아, 안녕하세요. 강연무입니다."

"압니다."

남자가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 눈이 연무의 얼굴에 잠깐 머물렀다. 아주 잠깐이었는데, 연무는 그 눈 속에서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반가움인지 안도인지, 부채감이 섞인 복잡한 눈빛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왜 날 저렇게 보지.

"어머니, 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여화야."

"응."

여화가 그제야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배웅하러 나가는 누나의 뒷모습을, 연무는 현관 중문 유리 너머로 끝까지 눈으로 따라갔다.

그런데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 반찬 쇼핑백을 든 남자가 앞장서고, 누나가 그 뒤를 따라 옥상 계단으로 올라갔다. 철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다음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배웅을 왜 옥상으로 가.

범이 형에, 홍시 감독에, 이제는 사부님.

누나 곁에는 왜 이렇게 남자가 많은 거야.

"형. 질투하는 거 다 티 나요~"

남동생이 연무 옆에 붙어 서서 키득거렸다. 연무는 못 들은 척했다.

* * *

옥상. 엄마의 상추 텃밭 너머로 도시 불빛이 번져 있었다.

태진은 반찬 쇼핑백을 발치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옥상 철문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문틈 아래로 아무 그림자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쟤가 그렇게 들락거려도 돼?"

"밥 먹으러 온 거야."

"너, 쟤가 그때 일 모르는 거 알지?"

"알아. 평생 모를 거고."

태진이 씁쓸하게 피식 웃었다.

"많이 컸더라. 그때는 정신도 못 차리고 축 늘어져 있더니."

여화는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연무의 시선이 닿았던 목덜미가 또다시 화끈거려, 괜히 팔짱을 고쳐 꼈다. 여기에도 카메라는 없었다.

태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안주머니에서 얇은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쉬는 거 방해하려는 건 아니다."

여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표정, 저 말투. 15년 동안 수백 번 들은 시작이었다.

"나 은퇴했어."

"알아. 그래서 쉬엄쉬엄 하라고 가져왔다. 총 들 일은 없어."

여화가 대꾸 없이 차갑게 돌아서며 철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 등 뒤로, 태진이 미끼를 툭 던졌다.

"동기들 월급, 네 퇴직금 헐어서 줄 생각이냐? 보수는 섭섭지 않게 쳐 주마."

철문을 밀던 여화의 하얀 손가락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편의점 야간 알바를 뛰던 동기들의 얼굴이 스쳐 갔다. 그리고 한 푼 두 푼 줄어들 제 통장 잔고도.

여화가 고개만 살짝 비튼 채, 나른하면서도 예리하게 눈을 빛냈다.

"……얼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