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부운(浮雲)
作 ジウンイネ
나장(羅將)의 안내로 연산군이 갇힌 옥으로 걸어갔다. 일반적인 옥사를 지나 담장 하나를 더 넘자, 기괴할 정도의 정적이 흐르는 비밀스러운 구역이 나타났다. 길을 안내하던 금부 나장이 허리춤에 찬 놋쇠 열쇠 꾸러미를 흔들며 이곳부터는 공기가 다르다며 나직이 경고했다. 겹겹이 잠긴 세 겹의 문을 하나씩 열어젖히며 들어갈 때마다 쇳소리가 날카롭게 고막을 긁었고 눅눅한 흙냄새와 곰팡이 섞인 악취가 코끝을 찔렀다. 이윽고 좁고 깊은 병 모양의 옥(獄)이 나타났다. 옥(獄)에 갇힌 연산군은 정좌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하얀 비단 저고리는 흙먼지와 오물로 더러워져 그 색을 잃었고, 허리춤에 찼던 보검 대신 무거운 쇠사슬이 그의 손목을 옭아매고 있었다. 구석진 곳, 헝클어진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앉아 있는 사내는 백성들이 던지는 돌에 맞았는지 광대뼈 한쪽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터져 피가 흐른 자국이 선명했다. 지웅은 나장에게 명하여 옥사의 문을 열게 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연산군이 천천히 눈을 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텅 빈 공허한 눈빛이었다. 놀라지도 동요하지도 않은 담담한 표정도 낯설었다. 지웅이 연산의 눈을 쳐다보자 연산도 눈을 떼지 않고 응시했다. 연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오직 두려워하는 것은 사서(史書) 뿐이다.”
지웅은 여전히 딱한 얼굴로 연산을 바라보며 답을 했다.
“붓 끝에 묻힐 검은 먹물은 두렵고, 당신 손에 죽은 억울한 이들의 무고한 영혼은 두렵지 않으시오?”
“영혼? 그들의 영혼 따위 두렵지 않네. 나는 조선의 임금일세. 9년 전 주먹만한 우박이 떨어지고 대기근이 발생해 수많은 백성들이 죽었다. 재작년엔 경상도 일대에 집이 흔들리고 천둥 같은 소리가 나면서 대지가 뒤집어졌지. 그때도 얼마나 백성들이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의 영혼은 어디에 있느냐? 불과 며칠 전에도 남해안 일대에 폭풍우로 배가 뒤집혀 어부들이 죽었다는 상소가 있었다. 이렇게 죽어 나가는 백성들이 하루에 오십이다. 이들의 죽음이 다 나 때문인가?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난 일을 꾸몄을 뿐이네, 죽고 사는 문제는 하늘이 정하는 법, 날더러 만백성의 어버이라 부르며 칭송하는 이는 누구며 이제와 죽은 이들의 무고를 따지는 건 누구란 말인가?”
연산군의 괴변에 지웅은 말문이 막혔다. 아직도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죽은 폐비가 그토록 원한에 사무쳤소? 계비이신 자순대비 마저 주상을 극진히 키웠고 만백성의 임금이 되어 재위 10년은 역대 선왕들 못지않은 성덕을 쌓았소. 그런데 어째서,,,죽은 폐비 한 명의 목숨 값이 이리도 비싸단 말이오?”
연산군이 잠시 노기를 띠었다.
“죽은 내 어미를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너희들에겐 그저 죽은 폐비일지 모르나 나에겐 열 달을 품고 낳아주신 고귀한 분이시다.”
아직도 포육(哺育)의 정(情)에 메마른 어린 아이가 여기에 앉아 있었다. 어미를 잃은 열 살 아이에게 칼을 쥐어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지웅은 그 결과를 본 것 같아 마음이 어지러웠다.
“이년 전 기억나시오? 사냥터에 가면서 나에게 묻기를, ‘아비가 어미를 내 쫓고 죽였다면 자식 된 입장에서 어찌해야 하는가.’ 라고 물었소. 지금 그 대답을 하겠소. 아비가 비록 부덕하다 해도 아비를 원망하며 스스로를 단련했어야 했소. 비단 무지렁이 백성들도 이러해야 할 진대, 그게 임금이라면 더더욱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 심신을 강건히 하고 정책으로 극복해야 했소. 천륜을 저버리며 살육을 자행한 당신에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소이다.”
가만히 얘기를 듣던 연산군이 조용히 물었다.
“이보게 무극, 자넨 왜 이렇게 화가 나 있는가? 내가 자네의 동생인 우림위장을 죽였다고 이리 복수를 하는 것인가? 난 자네를 벗으로 대했건만, 자넨 나에게 칼을 주었으이.”
지웅은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지웅은 입술을 깨물고 분노를 참아가며 입을 열었다.
“동생의 죽음도 맞소만, 당신이 만든 채홍사에게 끌려 간 내 정혼자(定婚者)가 죽었소이다. 나 하나라고 생각하지 마시오. 당신이 죽인 억울한 영혼들의 외침이 있었기에 이 모든 건 인과응보(因果應報)일 뿐이오.”
갑자기 연산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내가 뜬구름을 잡았던 부운(浮雲)이라면 넌 아지랑이를 잡는 유애(游埃)로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리는 연산을 뒤로 하고 지웅은 몸을 돌렸다. 옥문을 나서려다 지웅이 말했다.
“강화도 교동(喬桐)로 유배를 떠날 것이오. 내세에 다시 태어나면 필부로 태어나 명 대로 살다 가길 바라오.”
지웅이 옥문을 열었다. 연산군이 웃음을 멈추고 처연한 목소리로 지웅을 불러 세웠다.
“이보게 무극, 벗으로써 마지막 청이 있네. 내 아내 신 씨와 딸 휘순공주(徽順公主)를 살려 주시게. 세자 고(𩔇)와 창녕군은 살아남지 못할 걸 알고 있네. 그 둘만은 살려 주시게. 부탁이네.”
지웅은 연산이 조강지처인 신 씨와 장녀 휘순공주를 끔찍이도 아낀 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유일하게 칼을 들고 피를 보는 상황에서도 두 사람에게는 무너지던 연산이었다. 지웅은 말없이 옥문을 닫았다. 연산의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작아져갔다.
연산군은 세자 이고가 만 7세 됐을 때를 생각했다. 성품이 굳세며 침중하고 엄숙하다하여 대신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길 마다하지 않았다. 어느 날 경회루에서 잔치를 치르며 흥청들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도중, 세자 이고를 불러 흥청들을 가리키며 내가 죽은 뒤에도 이들을 잘 돌보겠냐고 물었을 때, 아들 이고는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있었다. 속으론 대견하고 기특하여 이 아비와는 다른 성군(聖君)이 될 자질이 충분하다 생각했었는데, 왜 그땐 그토록 마음에도 없는 화를 냈을까. 왜 마땅히 아비와는 다른 성군이 되어야 한다며 ‘너의 침묵이 옳다‘라고 감싸주지 못했을까. 연산은 후회스러웠다.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웅은 구왈기야 이룸과 함께 말을 달려 아버지의 집으로 향했다. 돌아가면 양주 목사직을 내려놓고 설영과 혼인하여 북방으로 갈 생각이었다. 벼슬도 필요 없고 공신 책봉도 필요 없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래도록 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랴’ 지웅과 이룸은 상체를 바짝 낮추고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등 뒤로 도성의 모습이 아스라이 멀어져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