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부운(浮雲)
作 ジウンイネ
지웅은 한양으로 올라 와 우선 해란의 어머님을 만나 뵈었다. 그간 어려움이 없도록 때가 되면 사람을 보내 쌀이며 면포를 보냈었다. 그리고 매달 서찰을 보내 안부를 묻곤 하였다. 그 사이 머리 위엔 하얀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살도 빠졌는지 전 보다 더 왜소해 보였다. 하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했다. 지웅이 절을 했다.
“그동안 무탈하셨습니까. 어머님?”
지웅은 어머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죽은 해란 대신에 아들임을 자처한 것이었다. 이미 주고받은 서찰에 어머님이라 생각하고 평생 모시겠노라 천명한 상태였다. 해란의 어머니는 그럴 수 없다고 만류했지만, 작정하고 다가오는 사람 말릴 재주가 없었다.
“일 년 만이지요? 구차한 목숨 이미 버렸어야 했지만, 아들임을 자처하는 사람 때문에 여태 죽지 못하고 삽니다. 매번 보내주신 식량과 약재 덕분에 아픈 곳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목사께서도 강녕하시지요?”
“네 어머님, 아픈 곳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입니다.”
“어머님, 소자 이제 곧 큰 일을 하러 갈 것입니다. 제 처(妻)의 기일이 지나면 시작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어머님을 뵈러 못 올지도 모릅니다.”
수련은 지웅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 있었다. 그간 서찰을 통해 지웅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아니 정국계가 반정을 계획하고 있음을 사실 그대로 알려준 것이었다. 혹시라도 실패하면 죽은 목숨이기에 마지막 인사를 하는 지웅에게 수련은 웃으며 대답했다.
“내 아들이라고 하시니, 아들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위지즉진(爲之則盡) 부진즉폐(不盡則廢), 할려거든 제대로 다 하시고 그렇지 않거든 물리세요. 나야 두 번 역모의 칼을 썼으니 세 번 쓴다 해도 무섭지 않습니다. 다만 느즈막히 얻은 귀한 아들 잃고 싶지 않습니다.”
지웅은 해란 어머님의 진심을 듣고 참았던 눈물이 다시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해란 어머님도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을 것이었다. 지웅은 일어섰다.
“옥체 만강 하시옵소서. 어머님, 소자 이만 물러 가옵니다.”
지웅은 절하고 방을 나왔다. 아란카가 유모 단심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새 친해진 모양이었다. 지웅은 유모에게도 살짝 목례를 하고는 대문을 나섰다. 해란이 죽던 날 밤, 성균관 반수 앞에서 지웅에게 칼을 맞은 이계동이 아직도 정신 줄을 놓은 채 일어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아마도 칼을 맞고 뒤로 넘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다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계동의 정신이 온전했다면 해란의 어머님 또한 제 명에 못 살았을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내금위 권열을 통해 해란의 집을 철저히 감시하라 일렀었다. 일 년이 지나도록 별 일이 없는 걸 보면 이계동이 아직도 못 일어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반정에 성공하면 어차피 다 죽을 위인들이었다. 지웅의 눈에 핏빛 살기가 어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정국계 계원들이 반가웠다. 지웅은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손을 맞잡고 인사를 했다. 작년에 비명횡사한 김처선과 이공신만 없을 뿐 나머지는 그대로였지만, 한 사람 익숙한 얼굴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로 넷째 아들 구문경(具文璟)을 연산군의 딸인 휘순공주(徽愼公主)와 혼인시켜 연산군의 사돈이 되어 장악원 제조로써 운평과 흥청을 관리하는 구수영(具壽永) 대감이었다. 뒤늦게 반정 모임에 합류했다더니 오늘 지웅과는 정국계에서 첫 대면이었다. 서로 어색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오늘따라 집 주인인 박원종 대감이 늦었다. 내금위장을 사돈인 변준(邊濬)에게 넘기고 거사 당일 일정을 점검하느라 둘의 만남이 잦은데다, 점점 연산군이 싸놓은 똥을 치우느라 바쁠거라는 농(弄)이 흘러 나왔다. 직급은 제일 낮은 종9품 부사용(副司勇)이지만 계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성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박원종 대감이 없으니 제가 회합을 주도하겠습니다. 급하게 회합을 소집하게 된 것은 이번에 우리 정국계와 함께하기로 한 구수영(具壽永) 대감 때문입니다. 이번에 명나라 사신단을 모시고 연회를 베풀 때 주상의 명에 따라 경강(京江) 변 수영대회를 진행하였지요. 거기에서 임사홍이 구수영 대감을 향해 했던 한 마디가 주상의 의심을 키웠어요. 그래도 핏줄은 소중한지 주상이 휘순공주를 끔찍이도 아끼니 대감의 목이 남아 있는 겁니다. 하지만 잘못하면 큰 일 나지 싶습니다. 거사일을 빨리 정해야 합니다. 오늘은 그걸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이니 기탄없이 의견을 내어 주시기 바랍니다.”
지웅도 양주에 있지만 조정의 일은 다 듣고 있었다. 4년 전 연산군의 아들 이고(李𩔇)를 세자로 책봉하였고, 명나라에서 이번 책봉사(冊封使)로 사신단을 보낸 것이었다. 사신단의 정사(正使)로 한림원 학사(翰林院 學士) 소함(蘇含)이 부사(副使)로 한림원 편수(編修) 장신(張新)이 왔으며, 태평관에서 시문(詩文)을 짓고 술을 마시는 걸 즐기고자 했지만, 연산군이 자신의 위세를 보이기 위해 사냥을 데리고 나가거나 기생들을 불러 음주 가무를 강요했으며 경강에서 수영대회를 열어 조선 금군들의 실력을 보여주려 애썼다는 소식이 있었다. 특히 경강의 물살이 거세어 금군들이 맞은편까지 가는 데 힘들어하자 힘을 내라며 재촉하더니 급기야 화살을 쏘아 금군들을 독려했다는 믿지 못할 얘기도 들렸다. 금군들이 화살을 맞지 않으려 젖 먹던 힘을 다해 강을 건너는 걸 본 연산군이 즐거워했다는 대목이며 그걸 본 사신단의 정사와 부사가 눈살을 찌푸렸다는 대목에선 모두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경강 수영대회를 연산군에게 건의하고 준비한 임사홍에게 구수영이 말하길, 금군들을 어떻게 선발하고 훈련 시켰길래 명의 사신단 앞에서 주상 전하의 체통을 깎고 성덕을 훼손시키냐고 핀잔을 주자, 복수심에 불탄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조아려 ‘일전에 박원종과 구수영이 서로 밀담을 주고받는 걸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 배는 가라 앉는다고 표현하는 걸 들은 적이 있어, 필시 주상 전하를 향한 역심이 의심 된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연산군은 대노를 하며 구수영에게 근신하고 울타리를 높게 쌓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를 명하고, 날을 잡아 친히 국문한다는 어명을 내린 상태였다. 아마도 박원종 내금위장은 연산군에게 이 내용에 대해 사실이 아님을 간(諫) 하느라 늦는 모양이라고 누군가 덧붙였다.
“설마 사돈인데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강귀손이 말하자 김계창이 말을 받았다.
“대감, 주상은 대왕대비 마마께도 불충을 저지른 자입니다. 비위가 상하면 사돈인들 무사하겠습니까?”
“맞습니다. 작년에 이기동의 처(妻)가 주상에게 겁탈 당하여 자결을 하자 슬퍼하기는커녕 그 시신에게 차마 못할 짓을 하려던 자입니다. 정상이 아니에요.”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날을 잡아 실행하시지요. 대감.”
각자 한마디씩 하자 눈을 감고 얘기를 듣고 있던 성희안이 지웅에게 물었다.
“대감은 어떠시오? 준비는 되었소?”
모두들 지웅을 쳐다보았다. 성희안의 말뜻을 알기에 그들도 궁금한 것이었다. 지웅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돌격대로 일당백의 무사 30여 명이 있고, 친위부대 500명이 있습니다. 지원부대로 양주목 정규군 1,000명이 그 뒤를 따를 겁니다. 이미 기동 훈련까지 마친 상태입니다. 거사일이 되면 모두들 오른쪽 가슴에 하얀색 천을 표식으로 달아 주십시오. 저희 반정군(反政軍)은 모두 그날 하얀색 천을 가슴에 달 겁니다. 그런데, 각 궁궐의 수문장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암군호야 우리가 만들어 하달하면 되겠지만, 수문장들이 섣불리 궁문을 열어주진 않을 겁니다.”
성희안이 걱정말라며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그건 걱정마시오. 병조판서는 임사홍이지만, 그 밑에 병조참판과 참의, 정랑과 좌랑 모두 우리 쪽 사람들이니 임사홍은 지금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안심할 만 했다. 수문장이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소속이고 지금이야 우림위가 없어졌지만 내금위와 겸사복 등 내삼청은 오위도총부와 함께 병조의 관할이었다. 임사홍이야 밤늦게까지 연산군에게 채홍을 바치느라 바쁜 몸이어서 병조가 어떻게 굴러가는 지도 모를 것이었다.
“그럼 거사일을 잡읍시다. 언제가 좋겠소?”
이조참판 유순정이 손가락을 접어 무언가를 세더니 입을 열었다.
“8월 초 아흐레가 어떨까 하오만,,,그 날이 대체로 손(損) 없는 날이오.”
지웅이 가만히 생각하다 반대 의견을 내었다.
“그날은 안됩니다. 대감,”
“어찌 그러시오? 이유라도 있소이까?”
“우선, 8월은 여름 무더위가 지나갈 무렵으로 말들이 기운이 없습니다. 게다가 들판에 풀이 무성하여 기마부대가 기동하기에 좋지 않습니다. 무더위에 지친 군사들이 자칫 해이해지기 쉬운 것도 이쯤이니 제 생각에 다음 달 9월 초 이틀이 제일 적합합니다.”
가만히 얘기를 듣던 성희안이 무릎을 치며 지웅의 말에 힘을 실었다.
“맞소. 양주목사의 말이 옳소. 9월 초하루가 무슨 날 이오이까? 9월 초하루면 주상이 임진강 장단(長湍) 석벽(石壁)에서 석전(石戰) 놀이를 즐기지 않습니까? 석전이 끝나면 편전(片戰)을 즐겨 하루 종일 궁을 비우게 되니 거사를 준비하기 수월할 것이오이다.”
석전(石戰), 즉 석척희(石擲戈)는 돌을 던지는 돌팔매 놀이로 그 위험성과 잔인성으로 인해 연산군이 즐겨 구경하는 놀이였다. 돌 던지기 놀이가 끝나면 백성들이 편을 갈라 편싸움을 하는 게 연산군의 포악한 성격과 제일 잘 맞아 떨어지는 놀이였다. 지웅이 생각하는 바를 잘 이해하는 성희안이 역시 반정을 주도하는 핵심 세력답게 눈치가 빨랐다. 지웅이 성희안의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그날이 최적의 날입니다. 그리고 제가 볼 때,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군자시부정(軍資寺副正) 신윤무(辛允武),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洪景舟) 등을 포섭해야 합니다. 그들은 무기와 물자, 말을 관리하니 우리에게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군자감 신윤무(辛允武)는 걱정 마시오. 군기시와 사복시도 이미 손을 써놨소. 신윤무는 나와 박원종 대감을 이어 준 무관으로 이미 뜻을 같이하기로 했소이다.”
성희안이 대답했지만, 계원들은 지웅의 용의주도한 성격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웅의 마지막 한마디 말로 계원들의 감탄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게 있습니다. 거사가 성공하여 반정(反政)을 해도 명나라에는 필연적인 사유가 있어야 합니다. 세자의 책봉사로 온 사신들이 돌아가자마자 임금이 죽었다면 당연히 세자인 이고(李𩔇)가 왕위를 이어 받는 줄 알겁니다. 우리가 추존하는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왕위에 오르게 하려면 지금 조선에 있는 명나라 사신단을 만나야 합니다.”
“역시 문무에 출중한 천재답소이다. 모든 문제점을 궤뚫고 있구려. 사신단을 만나서 우리 뜻을 전달해야 하는 것에 동의하오. 허나, 우리에겐 역관(譯官)이 없소이다. 명나라 언어에 능통한 임사홍이 그들과 밀담을 주고받으며 좌지우지하고 있지 않소? 그리고 사신단 정사와 부사는 시문(詩文)을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그들의 기세 먼저 꺾어야 할 것이오.”
“대감, 명나라 언어에 능통한 이는 임사홍만 있는 게 아닙니다. 제 아버님과 저도 무리 없이 대화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상단(商團)을 통하여 사신단에게 뇌물을 쓰겠습니다. 금권공작이 좋은 것은 아니나,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 했으니 웃는 얼굴에 침 뱉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손해 날 게 전혀 없기에 우리가 밑지는 장사는 아닙니다.”
“조정에 호조(戶曺) 산하의 판고(板庫)가 비었습니다. 왕실의 내탕고(內帑庫)에 거미줄 친지는 오래되었지요. 멸문지화를 당한 대신들의 가산을 몰수하여 그걸로 흥청을 관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목사께서 어떻게 뇌물을 쓰실지 모르겠으나 지금 우리가 도와 줄 여력이 없으니, 만일 거사가 성공한다면 이번에 힘을 써주는 상단에게 명나라 무역의 전권을 주겠다는 약속을 드리지요. 대감들 동의하십니까?”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