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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부운(浮雲)

作 ジウンイネ

지웅은 한 달에 한 번 한양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성희안 박원종을 중심으로 조직된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이름 하여 ‘정국계(靖國契)‘, 나라를 평온하게 바로잡는 모임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조직원들만 아는 이름이었고 외부 발설을 일체 금지했다. 지웅은 한양 가는 길 호위를 하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혜명과 만복을 뿌리치고 몸종으로 돌석 한 명만 대동했다. 제법 눈치가 빠르고 명민하여 시키는 일을 곧잘 해내어 지웅이 평소 맘에 들어하던 관노(官奴)였다. 이름은 신돌석이라는 것만 알뿐, 거창 신씨인지 고령인지 평산인지 아는 바가 없다했다.

지웅이 한양으로 올라오는 시각, 연산군은 또다시 한차례 피의 광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선왕이신 성종대왕이 윤씨를 폐출하려 할 때 찬성했던 윤필상, 이극균, 김굉필, 이세좌, 성준, 권주(權住), 이주(李胄) 등 10여 명을 처형했고, 이미 사망한 남효온,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한치형, 어세겸(魚世謙), 심회, 이파(李坡) 등은 부관참시에 처했으며, 그 제자와 가족들도 처벌하였다. 송흠, 이파, 윤필상, 이세좌는 시체가 능지되어 사방에 돌려 보여졌고, 이극균은 머리가 백관이 모두 보게 한 뒤 팔도에 돌려졌으며, 이극균의 서자인 이연명(李延命)은 '그 아비로 하여 자리잡은 세력을 믿고 무사를 많이 모아 군상(君上)에게 오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이세좌는 머리와 사지가 능지된 뒤 머리에 찌가 달려 저잣거리에 매달렸다. 이미 죽은 한명회는 부관참시를 당하고 저잣거리에 효시되었다. 윤필상은 시체를 태워 뼈를 부수어서 바람에 날리게 하였으니 이를 쇄골표풍(碎骨漂風)이라 하였다. 이외에도 송흠(宋欽), 한치형(韓致亨), 이파(李坡), 윤채 등 여러 사람의 뼈가 부수어져 바람에 날려졌다. 나중에는 죄인을 벌하고 형장을 가할 때 옆에서 보며 탄식하고 슬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한편, 세자 시절 갈등을 빚기도 했던 문신이자 그의 스승이기도 한 조지서 역시 주살하기도 했다.

연산군은 이미 이성을 잃고 잔인한 처벌을 집행했다. 죽은 시신을 꺼내 부관참시 하는 건 기본이었고, 쇄골표풍, 능지처참 후 시체를 백관이 모두 보게 하고 사방에 돌려 보이는 등 참혹한 형벌들이 연일 진행되었다. 이외에도 죄인의 집을 파 연못을 만드는 파가저택(破家瀦澤)을 하거나 돌에 죄명을 새기게 하였다. 싱그러운 봄바람 대신 역겨운 피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도성 밖 북촌에는 고관대작들의 대궐 같은 집의 기와가 노송(老松)과 어울려 달빛이 그린 한 폭의 묵화(墨畫) 같았다. 술시(戌時)가 조금 지난 시각, 박원종의 집엔 정국계(靖國契)의 계원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들고 있었다. 아까부터 마당을 서성이며 대문 밖만 주시하던 아란카는 자꾸 요동치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며칠 동안 후원에서 검술 연습을 하며 마음을 진정 시켜왔지만 막상 베이러(남편)가 될 사내가 오는 날이 되자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이참에 아예 묶어서 북방으로 데려가야겠어.’

아란카는 혼자서 중얼거렸지만 지웅이란 사내는 나타날 줄 몰랐다. 보름달이 어느새 솟을 대문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애꿎은 시간만 자꾸 갔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아란카는 가볍게 몸을 날려 지붕으로 올라갔다. 달빛이 뜨거울 정도로 밝아 저 멀리서 말을 타고 누가 오는 지 훤히 보였다. 마침 말 한 마리를 끌고 오는 사람이 보였다. 몸종으로 보이는 자가 고삐를 쥐고 말 위에 앉은 이는 아란카가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지웅이 틀림없었다. 지웅이 담장을 끼고 돌 무렵 아란카는 지붕에서 날아 지웅을 향해 검을 날렸다.

“타핫!”

갑작스런 공격이었지만 지웅은 칼집으로 아란카의 검을 쳐내고 오른 손으로 기운을 모아 상대의 오른 쪽 어깨를 가격했다. 그 충격으로 상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상대는 아란카였다. 아란카는 기절한 듯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지웅은 재빨리 말에서 내려 아란카를 불렀다.

“아란카, 이보시오 아란카, 정신 차리시오.”

지웅은 순간적인 공격으로 아란카가 내상(內傷)을 입지 않았는지 진맥을 살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뺨을 여러 번 때려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아란카를 번쩍 안아 대문으로 향하였다. 대문 앞에서 돌석이에게 말했다.

“호문(呼門) 하거라.”

대문이 열리고 가노들과 박원종이 나와 지웅을 맞았다. 박원종은 지웅의 품에 안겨있는 아란카를 보고 의아해 했지만 지웅의 설명을 듣고는 아란카가 기거하는 사랑채를 가리켰다. 지웅은 아란카를 안고 사랑채 안으로 들어갔다. 뒤 따라오는 나이 든 여종에게 물을 가져오라 이르고는 아란카를 요에 눕힌 뒤 다시 자세히 아란카의 손목을 잡고 맥을 살폈다. 이상했다. 정상이었다. 숨소리도 고르고 맥도 정상이었다. 그 순간 아란카의 눈이 떠졌다. 푸른 안광이 빛났다. 지웅이 놀라며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자 아란카가 지웅의 목을 두 손으로 잡고는 재빨리 입을 맞추었다. 아란카의 혀가 지웅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겨우 아란카의 두 손을 떼고 상체를 세운 지웅은 이 무슨 짓이냐며 화를 냈지만 아란카는 싱글싱글 웃기만 할 뿐 통하지 않았다.

“얼마만인지 알아요? 장차 나의 베이러가 될 사내가 알아서 입맞춤을 해 준다면 좋겠지만 당신이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내가 하는 수 밖에요.”

“아란카 낭자, 조선에 왔으면 조선의 법도를 따르시오. 대명 천지에 이런 법도는 없소.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혼인을 약속한 처자가 있소. 알겠소?”

아란카가 입을 삐죽 내밀고 두 손을 저으며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을 했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말뜻을 모르는 거요? 그건 우리가 맺어질 수 없다는 뜻이오.”

“왜 안 되는데요?”

지웅은 기가 막혔다.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지웅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고 하자 아란카가 말했다.

“우리 북방의 여인들은 달라요. 한 번 찍은 사내는 절대 포기하지 않아요. 그리고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 몰라요? 형이 죽으면 형수에게 장가드는 제도에요. 우리 북방은 생존을 위해 그렇게 살아왔다구요. 명심해요. 당신은 나와 꼭 결혼하게 될 거에요.”

아란카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지웅은 박원종을 따라 별채로 들어갔다. 안에는 모두 와 있었다. 김처선 대감을 비롯하여 이공신, 김계창, 성희안, 유순정, 박원종, 그리고 모르는 얼굴이 두 명 더 있었다. 한 명은 지웅도 잘 아는 강귀손(姜龜孫)으로 현재 이조판서였다. 그리고 한 명은 얼굴이 험상궂고 모양도 조선인과는 다른 사람으로 옷차림을 보았을 때 북방의 야인같았다. 역시 소개를 받으니 아란카의 친오빠였다. 아란카처럼 푸른 눈은 아니었지만 광대뼈가 튀어 나오고 턱선이 굵어 한 눈에 봐도 북방인이었다. 정수리 뒷부분만 남긴 머리카락이 특징인 변발(辮髮)에 수염이 가득했다. 매서운 눈매에 구릿빛 피부, 얼굴과 손 등에 자잘한 흉터들이 훈장처럼 새겨진 사내였다. 등에는 칼을 차고 있었다. 그는 아란카를 통해 지웅의 얘기를 들었는지 첫눈에 보자마자 이름을 말하더니 악수를 청해왔다.

“구왈기야 이룸이오.”

“신 지웅입니다.”

이룸의 손에 악력이 느껴졌다. 지웅의 손을 부수기라도 하려는 듯 강한 악력이 있었지만 지웅의 내공을 당할 수는 없었다. 지웅이 반대로 손에 힘을 주자 이룸의 표정이 당황에서 놀람으로 서서히 바뀌어 갔다. 지웅은 손을 놓았다. 그리곤 얼굴을 돌려 강귀손에게 인사를 했다.

“전 내금위장 무극입니다. 대감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반갑소, 내금위장, 지금은 양주목사로 가 계신 거 아니오? 문무에 능하시니 어딜 가나 잘 할 것으로 믿습니다.”

강귀손은 성희안과 호형호제 할 정도로 사이가 좋고 우애가 깊은 인물이었다. 성품이 곧고 호방하여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연산군의 총애도 있어 이조판서까지 승승장구한 인물이기도 했다. 박원종과도 친하여 정국계에 들어오는 게 어쩌면 시간문제였을지도 몰랐다. 지웅의 이직으로 박원종이 신 내금위장으로 보직이 바뀌었고 유순정은 이조참판으로 한 단계 내려갔다. 강귀손을 영입하면서 보직 이동이 있었던 것이었다. 양주목 권도평의 두 아들 벼슬 문제는 별 어려움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인사권을 쥔 두 대감이 여기에 있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지웅과 강귀손의 대화가 끝나자 김처선이 입을 열었다.

“모두들 와 주어 고맙소. 오는 길에 뒤따르는 자가 있는지 항상 유념해 주시기 바라오.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 정국계에 귀하신 분이 오셨소이다. 이판 대감의 한 말씀 청해 듣겠소.”

“여러 대감들, 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뜻을 차마 입 밖에 내기도 참담하나,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으니 어찌 함구하고만 있을 수 있겠소? 지금 주상은 종묘사직의 위엄을 망각하고 여색과 주흥에 빠져 백성의 고혈을 짜고 있소. 간신들의 아첨만 대궐에 가득하고 충직한 선비들은 목이 잘리거나 유배를 떠나니 조정은 이미 빈 껍데기일 뿐이오. 채홍사를 전국 팔도에 보내 양가의 규수들을 겁탈하고 신성한 서원을 짐승들의 놀이터로 만드니, 이것이 어찌 한 나라의 군주가 할 짓이란 말이오. 하늘이 노하고 땅이 울고 있소. 백성들은 손가락질하여 이 나라가 언제 망할지 탄식하는 실정이니 더 이상 묵과할 순 없소이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면 임금이 아니라 필부에 불과한 법이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나라의 근간을 지탱하던 동량들 아니오. 대의(大義)를 위해 칼을 뽑는 것은 반역이 아니라, 썩은 살을 도려내어 사직을 보존하는 방벌(放伐)일 뿐이오. 내 늙은 몸이나마 기꺼이 거사의 선봉에 서겠소. 주저하면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니 일어나 만세의 공신이 되십시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김처선이 아란카의 오빠를 소개했다.

“구왈기야 이룸이오. 조선말은 잘 못하오. 허나 칼은 자신있소. 삼촌을 따라 여러분이 원하는 건 모두 도울 것이오.”

박원종이 아란카 말고도 오빠를 한 명 더 데려온 것이었다. 지웅은 조선의 일에 북방 야인을 개입시키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라도 힘이 되면 합쳐야 했다. 박원종이 말했다.

“이룸은 아란카의 오빠로 북방에서 최고의 전사였소. 거사일에 임사홍과 신수근 등 간신들을 처결하는 데 앞장 설 거요.”

성희안이 말을 받았다.

“지금 주상은 도성 밖 30리 안에 있는 가옥들을 헐어버리고 있소이다. 명분이 사냥을 위해서라고 하오. 대명 천지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임금의 사냥을 위해 백성들의 주거지를 헐어버린다니. 모두 헐고 금표(禁標)를 세우라고 지시했소.”

“어디 그 뿐입니까? 간신 임숭재(任崇載)와 이계동(李季仝)를 통해 전국에 있는 미녀와 준마를 징집하라는 징집령이 내려졌어요. 이름 하여 채홍준사(採紅駿使)라 합디다. 역모를 핑계로 가산이 몰수된 자들의 재산을 차지하고 임금의 황음(荒淫)과 유흥을 위해 탕진하고 있다고 하니 진정 망국(亡國)으로 가는 게 아니겠소?”

채홍준사(採紅駿使)란 연산군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 전국 각지의 미녀와 준마를 강제로 징집하기 위해 파견했던 관직이었다. 채홍(採紅)은 붉은 꽃(미녀)을 꺾는다는 뜻으로 전국의 젊은 여성을 선발하는 것이오, 준사(駿使)란 빠른 말을 구하는 사신이라는 뜻으로 말을 징집하는 것을 의미했다. 채청사(採靑使)라 하여 소녀를 징집하는 건 덤이었다. 채홍준사는 대체로 구분이 엄격하여 흥청(興淸)·운평(運平)·광희(廣熙)라는 이름을 가진 기녀 조직이 새로 만들어졌는데, 가장 서열이 높은 흥청은 ‘사악한 더러움을 깨끗이 씻는다’라고 하여 탕척사예(蕩滌邪穢)라 했고 운평은 ‘태평한 운수를 만났다’라는 운제태평(運際太平)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흥청은 왕과 동침한 천과(天科)와 그렇지 못한 지과(地科), 동침했으되 만족스럽지 못한 반천과(半天科)로 다시 세분되었으며, 흥청과 운평 사이에는 가흥청(假興淸)이라는 중간 단계가 있었다. 맑은 기운을 일으킨다는 흥청은 300명, 운평은 700명, 광희는 1천 명이 선발되었으나 흥청은 300명 중 93명 밖에 선발되지 못했다. 채홍사 등으로서 파견되어 좋은 성과를 올린 자에게는 관직을 올려주고 토지와 노비를 주었는데, 이로 인하여 채홍사 등은 공을 탐하여 경쟁과 불법을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한편 흥청·운평·광희 등에는 기녀는 물론 양가 처녀도 징발하였는데, 선발된 양가 처녀의 집에는 봉족(奉足)과 잡역(雜役)을 면제해주었다. 연산군은 기생 대신 운평이나 흥청 등 고상한 이름을 붙임으로써 연산군 자신의 유흥을 단순한 쾌락이 아닌 국가의 기운을 북돋는 행위로 둔갑하려 했던 것이었다.

저마다 한 마디씩 하고 보니 연산군의 부덕함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계원들은 모두 분통이 터지는 듯 울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렸다. 김처선이 지웅에게 물었다.

“내금위장, 아니 이제 양주목사로 가셨지. 대감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소이까?”

김처선은 사병(私兵)의 모집과 훈련 상황이 궁금했는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웅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대답했다.

“현재, 은밀히 모집 중에 있습니다. 장소도 물색해 두었습니다. 약 두 달 동안 산채를 짓고 다 지어지면 그 안에 사병 모집을 완료하여 훈련에 돌입 할 생각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먹을 식량과 병장기입니다. 다행히 관아에 문제가 있던 호장을 구워삶아 두 달치 식량은 확보할 듯 하나 그 이후가 문제이지요.”

“그건 걱정 마시오. 여름 장마가 오기 전에 식량과 병장기 문제는 해결하겠소. 그보단 주상이 양주 쪽으로 사냥을 자주 나갈 듯 하니 보안에 신중하셔야 할 것이오.”

박원종이 걱정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이공신이 입을 열었다.

“금일, 주상께서 지난 폐비 윤씨의 사사에 관여했던 훈구 공신들을 부관참시한 결과에 대해 물으셨습니다. 영상대감께서 대답하시기를, 생전 이극균과 임사홍의 관계가 남다르고 교분이 두터워 조정의 대소사를 논함에 있어 늘 머리를 맞대고 은밀히 왕래해온 것을 온 조정이 다 아는 사실이라며, 이극균의 불순한 속내를 알고도 묵인했다면 그 또한 죄가 없다 할 수 없지 않겠냐는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임사홍의 처신이 위태로워졌습니다.”

숙직이었던 이공신이 연산군과 영상대감 유순(柳洵)의 대화 내용을 말한 것이었다. 유순은 새롭게 제수된 영의정으로 어려운 상황에도 처세가 능했다. 중립을 지키는 듯 하면서도 늘 힘 있는 쪽에 붙어 권세를 이어오는 자로 연산군이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 대신 중에 한 명이었다. 연산군의 의심병은 한 번 도지면 걷잡을 수 없는지라 이렇게 한 번 임사홍을 걸고 넘어져야 하는 상황에 고맙게도 영의정 유순이 대신 해 준 것이었다.

“희명(希明)이 그랬다니 서쪽에서 해가 뜰 노릇이군, 늘 경계심이 충만하여 돌다리도 두들기고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던 인사가 아니던가. 고마운 노릇이로고.”

희명(希明)은 유순의 자(字)였다. 임사홍의 세치 혀에 자신의 이름도 오를까 염려하여 미리 공격한 것으로 보였다. 임사홍의 아들 임숭재가 채홍준사로 팔도에 내려 간 지금 혼자인 임사홍을 공격하여 손발을 묶어 두려는 작전임을 눈치 챈 김처선이 오래 살고 볼 일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한 때 세조대왕의 장량(張良)이라며 일세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묘도 파헤쳤습니다. 시체를 꺼내 목을 자르고 그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니 이런 무도함이 어디 있습니까? 죽은 사람과 산 사람 가리지 않고 맘에 안 들면 죽여 버리니 이 정도면 반정(反政)의 명분으로 충분합니다. 어서 거사일(巨事日)을 잡읍시다.”

성희안이 답답한 듯 침을 삼키며 말했다.

“명분이야 차고 넘칩니다. 내시 주제에 김자원이 하는 행태도 보십시오. 목불인견입니다. 주상이 정사는 팽개치고 여색만 탐하니 김자원과 장녹수, 임사홍이 삼정승이라는 소문이 도는 현실입니다. 그건 그렇고 거사일도 중요하지만 누구를 다음 임금으로 추대할지 먼저 고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아니오이까?”

지웅이 말하자 박원종이 고민할 필요가 있느냐는 듯 단언을 했다. 진성대군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지만 성종대왕의 적자(嫡子)였기에 사실상 유일한 대안이기도 했다.

“제안대군(齊安大君)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항렬이나 순서로 보면 오히려 예종대왕의 적자이신 제안대군이 더 적합할 수도 있습니다.”

“조카가 왕위에 오르고 숙부가 다시 왕위에 오르는 건 법도에 맞지 않습니다. 이미 세조대왕께서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사례가 있지 않습니까? 한 번으로 족합니다.”

김계창의 말에 박원종이 이의를 달았다. 그러자 이공신이 말했다.

“제안대군은 주상의 폭정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습니다. 오히려 미친 광인(狂人)인 양 저잣거리를 들쑤시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 뜻이 큰 그릇에 있지 않고 자기 일신을 보존하기 위한 작은 그릇일 뿐이니 왕재를 찾을 수 없음이옵니다.”

“그렇다면 진성대군이 유일하군요. 문제는 신수근 대감인데, 사위 보다는 처남인 주상을 위시(爲始)하니 훗날 진성대군을 옹립한다 해도 신수근 대감의 거취 문제로 시끄러울 것입니다.”

“죽여야지요. 임사홍과 신수근은 죽여야 합니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는 없는 자들입니다.”

이곳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성대군으로 사실상 옹립을 결정했다. 그러려면 한 사람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지웅이 김처선에게 물었다.

“대감께서 자순대비(慈順大妃)를 만나 보시지요. 왕실 최고 어른의 교지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다음 달 보름에 있을 명나라 사신 접대가 끝나면 일간 찾아 뵐 것이외다.”

2년 전, 연산군은 세자 이고(李𩔇)를 책봉했다. 이를 승인하는 명나라 사신단의 책봉사(冊奉仕)가 내달 유월에 내려 올 예정이었다. 연산군은 자신이 저지른 갑자년의 사화로 조정을 피바다로 만들었기에 자신의 아들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정식 후계자로 인정받는 것에 굉장히 큰 집착을 보였다. 이는 자신의 권력이 정당하며, 아들에게까지 이어질 것임을 대내외에 선포하는 행위였기에 문제없이 이루어져야 할 중차대한 행사였다. 또한 선왕의 계비인 자순대비를 공식적으로 왕대비로 인정받고자 했다. 몇 달 전만 해도 선왕의 후궁들을 죽이고 자순대비마저 위협하던 연산군이 효심을 다하는 척 왕대비의 고신(告身)을 받으려 하는 연극을 하는 셈이었다.

“내일은 주상이 뜬금없이 대소신료들을 모시고 연회를 베푼다 하니 걱정입니다. 연일 국고를 탕진하는 것도 모자라 대신들에게 술자리까지 강요하니 참으로 걱정입니다. 내일은 부디 주상의 눈이 대신들의 안방에까지 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김계창이 눈을 감고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또 어떤 대신들의 부인을 음흉한 시선으로 점찍어 놓았다가 보쌈해 갈지 모를 일이었다.

“다음 달 보름이면 왜(倭)의 사절들이 오는 달 아닙니까? 명나라 천사(天使)들과 왜의 사절(使節)들이 동시에 모이게 되겠군요. 엎친 데 덮친다더니 주상이 행여 실수라도 하지 않을 까 걱정입니다.”

성희안이 마침 생각이 난 것처럼 김처선의 말을 받았다. 왜의 사절은 명나라의 사신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명나라가 상전(尙傳)이라면 왜는 그저 장사꾼에 불과했다. 하지만 왜의 국왕인 쇼군이 보낸 공식 사절이었기에 예우는 해야 했다. 하필 명나라 책봉사와 왜의 사절이 동시에 오는 기묘한 일정이 생긴 것이어서 주상의 취기와 변덕으로 어떤 변고가 생길지 벌써부터 걱정되는 것이었다. 일행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정(人定)이 울리고도 한참 후에야 사랑채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지웅은 밖으로 나와 돌석에게 내일 있을 일정을 알려주고는 방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움직였다. 오랜만에 내금위에 있는 동생들인 권열과 신위대를 만나 회포를 풀고 내려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뒤통수에 느껴지는 아찔한 살기에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작은 단도(短刀)가 얼굴을 스치고 문설주(門楔柱)에 박혔다. 뒤이어 날아오는 단도 또한 지웅이 급하게 칼을 뽑아 막아냈다. 단도를 던진 사람은 아란카의 오빠인 구왈기야 이룸이었다. 그 옆에는 당돌한 표정의 아란카가 서 있었다.

“아구(오빠)! 보았어요? 보통 무예가 아니라구요.”

옆에서 싱글거리며 웃고있는 아란카가 오빠인 이룸에게 지웅의 자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웅은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을 장난으로 치부하는 데 화가 났다. 간만에 부아가 치민 지웅은 목을 좌우로 풀면서 아란카를 노려보았다.

“아란카, 계속 이렇게 막무가내면 나도 용서할 수 없소.”

“용서하고 안하고는 그대 자유지만, 내 동생을 혼내려면 나를 꺾어 자격을 입증해라.”

구왈기야 이룸이 두꺼운 칼을 뽑아 들고 지웅에게로 달려들었다. 예고도 없고 인사도 없이 거칠게 덤비는 건 북방 야인들의 오랜 습관이었다. 지웅은 살짝 옆으로 피해 칼을 천천히 뽑았다. 스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며 오랜만에 칼의 쇠비린내가 맡아졌다. 기분이 좋아졌다. 달빛에 칼날이 반짝이며 흥을 돋았다. 아무런 자세도 없이 칼을 오른쪽으로 길게 늘어뜨렸다. 상황과 상대에 따라서는 상대방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보일 수 있었다. 빈틈없는 공격자세로 한 호흡이나 눈 한 번 깜박임 조차도 고수들의 세계에서는 큰 차이를 만들어 내는 법이었다. 하지만 지웅은 그저 무심하게 상대를 얕잡아 보는 듯 칼을 늘어뜨리고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지웅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쏟아졌다. 구왈기야 이룸이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공격을 주저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망설이고 있다는 걸 깨닫고 어이가 없는 듯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찌르고 베고 위아래로 종횡무진 휘둘렀다. 빠르기도 하거니와 위력도 강해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미 칼을 놓쳤을 것이었다. 하지만 늘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법이었다. 구왈기야 이룸의 모든 공격을 부드럽게 흘려보낸 지웅이 반대로 공격을 개시했다. 단 한 번으로 끝낼까 하다가 정석으로 투명한 공격을 했다. 검법도 바둑처럼 외길이 있었다. 구왈기야 이룸의 실력이 궁금하기도 했다. 예상 외로 지웅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고 뒤로 크게 밀리지도 않았다. 연이은 지웅의 거센 공격에 구왈기야 이룸은 기둥에 단도를 하나 던지더니 그 단도를 밟고 지붕으로 뛰어 올랐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지웅 또한 가볍게 단도를 밟고 지붕으로 따라 올라갔다. 높이 솟아올라 정면 공격을 했다. 지웅의 내공이 실린 칼이 내려 쳐지자 가까스로 막은 이룸은 밀린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돌려 기와지붕 아래로 내려섰다. 지웅 또한 사뿐하게 내려섰다. 이룸의 숨소리가 많이 흔들리지 않는 걸로 보아 기본이 잘 되어있는 실력이었다. 지웅은 공격을 멈추었다. 이미 아란카의 오빠는 지웅의 실력을 인지한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지웅이 칼을 칼집에 넣자 구왈기야 이룸도 칼을 등에 꽂더니 두손을 허리에 얹고 호탕하게 웃었다.

“미니 아지가 눈후(나의 소중한 동생아)!, 신랑감을 제대로 골랐구나. 하하하, 나 구왈기야 이룸을 이토록 긴장시킨 상대가 없었다. 조선 왕의 호위대장이었다더니 과연 명불 허전이로다.”

“당신도 대단한 실력입니다. 허나 앞으로 이런 장난은 삼가 해 주시오.”

구왈기야 이룸은 성큼성큼 걸어와 지웅의 어깨를 잡더니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에페(매제), 이제 그대는 나의 에페요. 그대도 나를 에페라고 부르시오. 우리 여진은 매제와 매형을 모두 에페라고 부르오. 우리의 가족이 되는 걸 허락하겠소. 하하하.”

설상가상(雪上加霜)이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 먼저 마시는 꼴이 가관이었다. 그렇다고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웅은 조곤조곤 달래서 알아듣게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이룸이 말했다.

“에페, 들어가서 술 한 잔 합시다. 내 오늘은 에페의 무용담을 들어야겠소. 하하하.”

김처선 대감 댁 집사에게 청하여 주안상을 들였다. 아란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지웅의 곁에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란카의 오빠 이룸은 연신 술을 따르고 건배를 청해왔고 지웅이 술을 마시면 소고기 육포나 꿩고기로 만든 치포(雉脯)를 하나씩 입에 먹여주는 아란카였다. 고개를 돌리고 손짓을 하며 막아 보았지만 그럴수록 집요했고 싫다며 정색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 모습을 보는 이룸은 더 호탕하게 웃으며 아란카를 독려했다. 지웅 자신은 얼마든지 술의 취기를 조절할 수 있었지만 구왈기야 이룸도 대단한 애주가였다. 벌써 몇 동이째 술을 마셨는데도 전혀 취기가 없이 처음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룸은 북방에서 있었던 커다란 맹수 곰과의 사투를 들려주었다.

“에페, 그거 아시오? 곰은 한 번 싸움에서 졌다 하여 그대로 물러나지 않소. 멀리서 지켜보다가 상대가 약해진 틈을 타 다시 공격해 오지요. 우리네 전쟁도 그렇소. 쉽게 포기하질 않지. 하지만 그 전쟁이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소?”

“옳으신 말씀입니다. 전쟁이 없고 모두가 평등한 대동세계(大同世界)가 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이제 당신의 무용담을 들려주세요. 오빠는 작은 것도 크게 부풀리니 재미가 없어요.”

아란카가 말하자 이룸도 눈을 번뜩이며 어서 들려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웅은 잠시 멈칫하다가 오래 전 연산군과 사냥을 나갔을 때 호랑이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가 막 내금위장에 올랐을 때 처음으로 임금을 모시고 사냥을 나갔었지요. 산신(山神)이라는 호랑이도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프면 민가로 내려 오더이다. 공교롭게도 임금과 호랑이가 맞닥뜨렸지요. 임금은 활을 놓쳤고 칼만 들고 있었기에 사실상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애깃살을 다섯 발 연속으로 쏘아 호랑이의 급소를 명중하여 위험을 벗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애깃살이라는 소리에 구왈기야 이룸의 표정이 바뀌었다. 아버지 구왈기야 투먼이 오래 전 박원종 대감에게 애깃살 사용법을 배운 적이 있다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이룸은 지웅의 애깃살 실력이 궁금했다. 이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더니 몸을 한층 숙여 지웅에게 말했다.

“에페, 조선인들이 애깃살을 무척 잘 다룬다고 들었소. 에페가 사용법을 알려주면 안되겠소?”

지웅이 가만히 듣자하니 애깃살을 만들어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면 혹여 여진과의 전쟁이 발발할 때 저들을 이롭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게 뻔했다. 지웅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이룸이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에페, 걱정마시오. 나 구왈기야 이룸은 그대 지웅을 내 에페로 삼으며 방법을 알려주어도 나 혼자만 알고 있겠소. 우리 북방인들은 가족의 비밀을 지키는 걸 목숨보다 더 중하게 여기오.”

지웅은 가만히 생각했다. 애깃살 만드는 거야 평안도에 있는 웬만한 부장들은 다 알고 있었다. 굳이 나라의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북방의 야인들뿐만 아니라 명나라와 왜나라까지도 알려면 얼마든지 알수 있을 것이었다. 지웅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구왈기야 이룸이 옆에 내려놓은 칼과 그 옆 화살통에 담겨 있던 화살 하나를 뽑아 들었다. 그리곤 한 손으로 부러뜨렸다. 여진의 활은 그 기세가 웅장하여 길이가 5척(尺)에 달했다. 화살도 세 자 세 치(3자 3촌)에 달하고 화살촉 무게만도 두 냥이 넘으니 가히 쟁기날이라 할만했다.

“단도를 주시오.”

이룸의 가슴을 가로지르는 패용줄에 단도가 다섯 개 꽂혀있었다. 그중에 하나를 빼 지웅에게 건넸다. 지웅은 한 자에 달하는 크기로 화살대를 잘라 빠르게 깎아 애깃살을 만들어 나갔다. 앞은 두껍고 뾰족하게 하고 뒤는 얇고 가볍게 하여 무게중심이 앞으로 오게 했다. 그리곤 품에서 대나무가 반으로 잘려진 작은 통아(筒兒)를 꺼내더니 자신의 각궁(角弓)에 걸치고 애깃살을 걸었다.

“방문을 열어 주시오”

호기심이 강한 눈으로 지웅을 바라보던 이룸이 방문을 열자 감나무가 보였다. 마침 달빛이 강해 밖은 대낮처럼 밝았다. 아란카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 뻔히 지웅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마침내 지웅이 시위를 당겼다. ‘피잉‘ 소리가 나면서 애깃살이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본 이룸이 재빨리 달려 나갔다. 잠시 후 그의 손에 들려온 건 족제비 한 마리였다. 애깃살이 족제비의 가슴을 뚫고 감나무에 박혀 있었다고 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일다경(一茶頃)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룸은 진심으로 탄복해 마지않았다. 애깃살을 만들어서 목표물에 쏘기까지 겨우 반각(半刻)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빠르기는 일반 화살보다 두 배는 되었고 위력 또한 상당했다. 지웅의 움직임은 마치 장인(匠人) 같았다. 이룸은 지웅이라는 사내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운 사람임을 직감했다. 아란카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저런 사내를 남편으로 둔다면 우리 구왈기야 족이 천하를 평정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에페, 정말 훌륭한 기술이요. 조선이 그동안 수차례의 외침(外侵)에도 강성한 이유가 있었구료.”

“아까 경공술(輕功術)도 보셨잖아요. 아구는 허리를 굽히고 기와지붕에 겨우 올라갔지만, 이 사람은 단 한 번의 무릎만 굽히고도 올라갔어요. 천하제일검이 분명해요.”

아란카의 오빠는 에페라며 아예 대놓고 매제라 부르는가 하면 아란카는 아주 자신의 서방인양 태연하게 말했다. 지웅은 이쯤에서 술자리를 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해란을 만나러 갔어야 했는데, 아까 거절하지 못한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혼인을 약속한 정인(情人)이 다른 여인과 술을 마시고 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상심이 클지 짐작이 되어 더욱 심란했다. 지웅은 일어섰다.

“즐거운 술자리였습니다. 해가 뜨면 중요한 일이 있으니 이만 잠을 청하러 가야겠습니다. 두 분 모두 편안한 밤 되시오.”

지웅은 환도와 각궁을 들고 방을 나갔다. 그 모습을 뻔히 바라보는 아란카의 눈에 실망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려우니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쉬웠으면 오히려 더 실망했을 거라 여겼다.

“화살을 쏘기 전에는 백 번을 고뇌하는 법이다. 허나, 너의 화살이 이미 그의 등을 향했으니 기다리거라. 덤불 속에 숨어 있다고 호랑이가 늑대 되는 건 아니다. 말은 달려봐야 알고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법, 저 사내를 더 겪어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라.”

아란카는 오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았다. 하지만 안 보면 보고 싶고 볼수록 갖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정혼(定婚)한 여인이 있다고 하니 더 우울해졌다. 처음 만났던 날이 잊혀 지지 않았다. 칼을 아란카 자신의 목에 겨누며 바라보던 그의 검은 눈동자, 살짝 맺힌 땀방울, 귀를 달래며 흔들리던 머리칼, 굳은 입술, 그 뒤로 비치던 햇살까지 그 모든 게 매일 밤마다 아란카를 괴롭혔다. 아란카는 문득 그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여인이 길래 저 사내의 마음을 빼앗았는지 알고 싶었다. 날이 밝으면 지웅의 뒤를 밟아 여인의 집이 어디인지 알아내리라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