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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부운(浮雲)

作 ジウンイネ

며칠 후 인수대비께서 승하(昇遐) 하셨다는 소식이 들렸다. 왕실의 최고 어른이 죽은 것이다. 온 백성이 눈물을 흘렸다. 음력 사월 스무 이렛날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팔도에 금혼령(禁婚令)은 내렸으나 정작 할머니의 장례는 간소히 하라는 명을 내렸다. 왕실의 장례는 3년 상을 치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군주에게는 오직 나랏일이 중요하다’면서 삼년상을 치르는 대신 날짜를 달(月)로 계산하는 이일성월(以日成月)을 적용하여 25일 만에 상복을 벗어 던졌다. 또한 ‘슬픈 마음은 밖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면서 신하들이 모여 곡(哭)하는 것을 금지했고, 국상 중에 고기와 술을 멀리 해야 하나 이 또한 보란 듯이 고기와 술을 먹고 연회를 즐겼다. 통곡을 마치는 의식인 졸곡(卒哭)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고 서둘러 끝냈다. 또한 인수대비의 시호를 정할 때도 죽은 자신의 생모는 제헌(齊獻)이라는 장엄한 시호를 올리면서도 할머니인 인수대비는 자신의 어미를 죽였다 하여 최대한 깎아내린 소혜(昭慧)라고 지어 올렸다. 민심이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국상이 끝나자 더 이상 눈치 볼 것 없던 연산군은 본격적으로 죽은 어미의 복수를 시작했다. 유배 간 이세좌와 홍귀달, 안양군 이항에 사약을 내렸다. 사냥에 방해가 된다 하여 도성 밖 30리안에 있는 가옥들을 헐고 금표를 세우고 ‘금표 안에 들어오는 자는 제서(왕명)를 헐고 거역한 죄로 처참한다’는 내용의 금표비(禁標碑)를 세웠다. 그리고 대책 없이 주민들을 내쫒았다.

지웅은 양주 목사로 부임했다. 우림위가 철폐되어 윤혜명과 서만복은 양주로 들어왔고 권열과 신위대는 박원종 대감을 보좌하며 내금위에 남아있었다. 동생들과는 반정의 계획을 이미 공유한 뒤였다. 연산군의 폭정에 이를 갈고 있는 동생들은 환영의 뜻을 표현하며 기꺼이 궐에 남아 기회를 보고 뜻을 펼치겠다고 했다. 지웅은 윤혜명과 서만복을 통해 뜻이 있는 젊은 장정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벚꽃이 지고 곳곳에 수국, 장미, 찔레꽃 등 꽃들이 향그럽게 피기 시작했다.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오자 조금씩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

지방관은 중앙의 요직과 달랐지만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오기 전 들었던 것과 달리 양주목은 더 넓고 거대한 고을이었다. 양주목은 가구수가 약 일만 호(戶)로 백성 수는 유랑민과 사찰의 승려, 숨겨진 인구까지 합치면 6만 명 가량 육박했다. 성인 남성 중 군역(軍役)을 질 수 있는 장정만 해도 수천 명이었다. 양주 목사로 부임한 첫날, 지웅은 노련한 육방관속(六房官屬)을 불러 놓고 기선을 제압했다.

지방 군현에는 조정의 육조(六曺)처럼 실무를 관장하는 육방(六房)이 있어 각각 인사, 재정, 의례, 군사, 법률, 공사 업무를 담당했다. 호장(戶長)이 육방의 우두머리, 즉 수리(首吏)로 있으며 그 아래 각 방의 책임자인 색리(色吏)들이 있어 목사를 보조했다. 회계를 담당하는 호방, 인사와 행정을 담당하는 이방과 재판과 소송을 맡는 형방이 중요하게 여겨져 이방, 호방, 형방을 통틀어 삼공형(三公兄)이라 하여 향리의 실세로서 자리 잡기 시작했으며 대대로 세습되는 특징이 있었다.

보통 지방관을 임명할 때에는 자기 고향에는 부임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수도에서 온 수령은 부임지에 대해서 잘 몰랐고 경우에 따라선 육방관속이 수령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바람쯤으로 여기고 중간에서 다 해먹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사실상, 이들 육방관속은 품계를 받지 못해 관료라고 할 수도 없고 벼슬아치도 아니었다. 즉, 말단 미관직인 종9품 능참봉보다도 아래인 것이다. 다만 지역에서 방귀 꽤나 뀐다는 중인들로 육방이 지방관을 사칭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관아에는 국왕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가장 신성시되는 객사(客舍)가 있고, 중앙 관리가 내려오면 머무는 숙소로 쓰였다. 향청(鄕廳)이라 하여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향리들의 비리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지방 양반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가 있었다. 아전들이 모여 실무를 보던 작청(作廳)이 있고, 군사들의 훈련과 무예 연습을 담당하던 훈련원이 있었다. 죄인을 가두던 형옥(刑獄)과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의 숙소인 교방(敎妨)이 있었다.

지웅은 지방 관리로 임명되면 임금 앞에 나아가 수령칠사(守令七事)를 암송해야 함에도 연산군은 재미도 없고 시간만 끌어 들어봐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하여 신임장인 유서(諭書)와 마패(馬牌), 유엽전(柳葉箭)과 물소뿔로 만든 각궁(角弓)을 받고 양주로 온 터였다. 수령칠사는 지방 고을의 수령으로 가는 이에게 반드시 명심해야 할 목민관의 행동강령으로 농상성(農桑盛), 호구증(戶口增), 학교흥(學校興), 군정수(軍政修), 부역균(賦役均), 사송간(詞訟簡), 간활식(姦猾息)이 그것이었다.

농상성(農桑盛)은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여 백성의 먹거리를 풍족하게 함이요. 호구증(戶口增)은 정치를 잘해 백성이 살기 좋아지면 인구가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학교흥(學校興)은 향교 등을 통해 유교 교육과 예절을 널리 퍼뜨리라는 것이고 군정수(軍政修)는 군대 명부인 군적(軍籍)을 관리하고 군사 훈련을 철저히 하라는 것이며 부역균(賦役均)은 세금과 노동력을 백성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부과할 것이고 사송간(詞訟簡)은 재판을 공정하고 신속하게 처리하여 억울한 백성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간활식(姦猾息)은 교활한 아전이나 토착 세력의 비리와 횡포를 엄하게 다스려 없애라는 뜻으로 이 일곱가지 덕목은 임금 앞에서 암송해야 하기도 했지만, 지방 수령들의 평가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기도 했다.

한 달 전, 지웅은 양주목사로 부임해 와 전임 양주목사였던 이한직에게서 장부와 관인(官印)을 인계 받는 해유(解由)의 절차를 거친 후 육방관속의 면면을 살폈다. 호장(戶長)인 최만호(崔萬戶)가 나이와 연륜이 있어 실세 중의 실세였고 나머지 색리들은 모두 그의 눈치를 살폈다. 지웅은 도착하자마자 임금께 부임의 보고를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를 올리기 위해 객사를 먼저 찾았다. 이곳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展牌)가 모셔져 있는 가장 신성한 공간이었다. 전각 구석구석에 거미줄 천지였고, 전패를 모신 정청(正廳)을 중심으로, 좌우 익실(翼室) 모두 퀘퀘한 냄새와 먼지로 가득 쌓여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참형 감이었다. 보통 고을 경계에 들어서면 영접례(迎接禮)가 이루어지는 게 정상이었다. 축석령(祝石嶺)을 넘어 오면서 소동패(小童牌)라 불리는 아이들이 기를 들고 나타나 행차를 알리고 육방관속을 필두로 고을의 치안을 담당하는 군관들이 무장을 하고 도열했다. 최만호는 미리 준비한 가마를 가리키며 먼 길에 고생하셨으니 가마에 오르라며 생색을 냈다. 지웅이 어떤 성향인지 파악하려는 의도였다. 지웅은 본체만체 말의 채찍을 휘두르자 이번엔 동헌(東軒) 앞에서 기생들의 화려한 춤사위가 이어졌다.

“이 무슨 무례한 행동인가? 아직 망궐례도 하지 않았거늘!”

지웅의 호통에 좌중은 혼비백산했다. 내금위장 출신이 양주 사또로 온다는 소식에 가뜩이나 긴장해 있던 육방관속은 지웅이 어떤 성향인지 대번에 파악을 했다. 최만호는 계획을 바꿔 지웅의 손발을 묶으려는 시도를 했다. 관인과 병부를 인계 받으면서 아전들이 장부를 조작해 허위보고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웅을 얕본 처사였다. 지웅은 이미 윤혜명을 통해 한 달 전 이곳으로 정탐을 보내 이미 모든 조사를 마친 후였다. 양주에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 등 9기가 있었고 세조대왕의 광릉(光陵)도 있었다. 왕릉을 보수한다는 핑계로 백성들에게 ‘능침 수호세(陵寢守護稅)’를 억지로 거둬들인 뒤, 그중 절반 이상을 호장 최만호와 전임 목사 이한직이 가로채 한양의 권세가들에게 뇌물로 바치는 ‘능침 수포 비리’가 있었던 것이었다. 단위가 꽤 커서 이들을 비호하는 조정의 세도가들을 믿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백성들은 굶주려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는데, 최만호의 창고에는 쌀이 썩어 나가고 있었다. 부임한 첫날 최만호는 육방의 색리들을 줄지어 서게 한 뒤 각종 보고를 하게 하면서 자신이 이곳의 가시미(숨은 실세)임을 은근히 내세웠다. 양주에서만 5대째 호장(戶長)을 지낸 집안이었다. 목사는 이삼 년이면 떠나지만, 자신은 영원히 이 땅의 주인이라는 그릇된 믿음을 갖고 있는 자였다. 최만호가 행정세력의 주축이었다면 자치세력인 유향소의 실세는 권도평(權道平)이라는 자였다. 안동 권씨의 방계이나 양주에 뿌리 내린 지 오래된 토착 양반이었다. 전직 정5품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냈다는 명분을 내세워 지역 유림을 장악하고 있었다. 매우 고상한 척 하며 유교적 가치를 내세우고 논하지만, 실제로는 권력을 탐하는 탐관오리의 표상이었다. 새로 부임하는 목사를 고을 양반들의 예법인 ‘향례‘를 들이밀며 기죽이기를 즐겨하는 자였다. 최만호가 자금을 빼돌리면 그 돈으로 중앙 정계의 인맥을 관리하는 자가 권도평이었다. 전임 목사도 ’사또가 선비들을 탄압한다‘는 상소를 올려 결국 수족처럼 부렸다는 풍문이 있었다.

지웅은 이들을 탄압할 목적은 없었다. 이런 자들이야말로 약점을 잡아 관리하면 오히려 수월할 터였다. 다만 기선 제압에선 다시는 고갤 들지 못하도록 확실히 보여줘야 했다. 지웅은 부임 첫날 최만호의 보고를 받고 바로 옥에 가두라 명했다. 또한 권도평이라는 자도 포박하여 옥에 가두었다. 지역 양반들이 들고 일어났다. 날이면 날마다 동헌 앞에 와서 사또 뵙기를 청했고 육방관속들이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쩔쩔매며 향리들의 전언을 여쭙기에 바빴다. 하지만 지웅은 집무실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장부를 들여다 보았고 열흘 동안 어느 누구도 만나주지 않았다.

서서히 없던 소문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새로 온 목사는 임금의 내금위장으로 천하의 간신 임사홍도 어쩌지 못한 실세였다는 말과 문무에 급제한 천하제일 문장과 검으로 명나라의 재상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고 명의 장수 일백 명을 단칼에 도륙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퍼졌다. 어디서 들었는지 양주목사는 본인이 자청해서 왔다는 사실이 돌고 있었고 그 이유가 최만호와 권도평을 처벌하라는 임금의 명으로 왔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소문이란 한 번 퍼지면 걷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순진한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바로 이 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니 모두들 신임 목사를 보면 긴장하여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열흘째 되던 날, 지웅은 형방을 통해 최만호와 권도평을 집무실로 불렀다. 최만호는 다소 기가 꺾여 있었으나 권도평은 그러질 못했다. 여전히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웅에게 대들었다.

“사또, 정녕 미친게요? 이 무슨 망동이오? 대명률 형률(刑律)에 이르길, 범죄를 지은 관리나 유학자는 그 신분을 존중하여 형조의 정식 판결이 있기 전까지는 함부로 옥에 가두거나 신체에 형을 가할 수 없다 하였소. 사대부는 팔의(八議)에 해당하여 임금의 승인 없이 수령이 독단으로 구속할 수 없거늘, 무식한 무관 나부랭이가 어찌 감히 내 몸에 손을 댄단 말이오”

옆에 도열해 있던 육방들이 술렁였다. 권도평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수령이 양반을 함부로 옥에 가두는 일은 사헌부의 탄핵을 면치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현재 사헌부는 사라졌고 있었다 해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정3품의 품계를 지닌 고을 현감에게 무식한 무관 나부랭이는 과한 표현이었다. 그만큼 지방의 유향들이 강력한 위세를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지웅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권도평 앞에 한 권의 책자를 던졌다.

“대명률이라,,,권 좌수, 글줄이나 읽었다더니 법을 제 입맛대로 해석하고 있군, 네놈이 말한 대명률에는 ‘조정의 성물(聖物)을 훔치거나 왕실의 능침을 수호하는 물자를 가로챈 자는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즉시 체포하여 다스린다’는 조항은 없더냐? 네놈이 최만호와 짜고 빼돌린 목재는 단순한 목재가 아니라 이 나라 뿌리이신 태조대왕의 건원릉을 모시는 능침 성재(聖材)니라. 대역죄에 해당하는 중죄이거늘 무슨 팔의를 논하고 신분을 따진단 말이냐?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게냐?”

지웅의 쩌렁쩌렁한 호통에 최만호와 권도평은 움찔했다. 최만호와 권도평은 눈 앞에 던져진 책자를 보았다. 익숙한 책이었다. 그것은 바로 최만호의 비망기(備忘記)였다. 어떻게 이것을 찾았을까. 최만호는 눈을 감았다. 그곳엔 목재를 빼돌린 날짜와 수량, 기상악화로 인한 소실(消失)을 이유로 밝힌 글귀, 이에 서명한 최만호와 색리들의 서명, 그들이 가짜로 사용한 목재와 실제 목재의 행방 뿐 아니라 다른 종류의 비리 내용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지웅이 계속 큰 소리로 말했다.

“건원릉 정자각 보수를 위해 강원도에서 공수한 최고급 황장목(黃腸木) 50그루를 받아, 그 중 25그루는 권 좌수의 개인 별장으로 들어가고 10그루는 최만호가 팔아 사익을 챙겼고, 나머지 15그루와 양주 인근 산에서 벤 썩은 잡목에 붉은 칠을 하여 공사를 단행하였다고 아주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구나. 이것뿐이더냐. 능침 주변 석축 공사를 위해 동원된 인부 200명에게 일당을 지급하는 내용 중에 실제 동원된 인부는 50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150명은 이미 사망했거나 고을을 떠난 자들의 이름을 올리는 식으로 조작해서 쌀 300석이 최만호 개인 창고에 들어갔음이 확실 하렸다. 조정에서 이미 공사 예산이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조상을 모시는 정성이라는 해괴한 명분으로 양주 백성 가구당 수호미(守護米) 2말씩 강제로 징수하여 거둬들인 쌀 500석 중 100석은 한양의 공조판서 댁에 뇌물로 보내고 나머지는 권도평과 최만호가 나누어 가진 걸로 되어있다. 이런 비리의 내용들이 저 책자로 가득이다. 이래도 더 할 말이 있더냐?”

최만호는 고개를 땅에 박아대며 연신 살려달라며 울었다. 권도평은 여전히 눈만 커다랗게 뜨고 울분을 삭일 뿐 죄를 지은 표정이 아니었다. 수령은 독자적으로 태형과 장형까지 집행할 수 있었다. 비교적 가벼운 죄라면 종아리를 때리는 태형 10대에서 50대까지 매질할 수 있었고, 아전들의 비리나 중죄가 있을 시 곤장을 치는 장형 60대에서 100대까지 적용할 수 있었지만 사실상 80대 이상은 목숨이 위태로워 죽음에 이르는 수준이었다. 수령의 권한으로 가능했지만 사후보고가 원칙이었다. 또한 도(徒), 유(流), 사(死)라 해서 징역, 유배, 사형은 수령이 독단으로 결정할 수 없었고 관찰사를 거쳐 중앙의 형조나 왕의 승인을 받아 처벌이 가능했다. 최만호와 권도평의 죄는 국고횡령과 백성 수탈이 겹친 중죄로 의금부에 보고하여 교수형(絞首刑)까지 집행할 수 있었다. 아무리 운이 좋아 살아난다 해도 도성 한복판에 칼을 차고 구경꺼리가 되거나 양반의 직첩을 거두고 평민으로 내리는 강제 파직의 결과를 가져오는 가혹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극단적이지만 만약 지웅이 양주목사의 권한으로 비격식으로 처벌한다면 권도평의 목을 먼저 치고 나중에 보고하는 선참후계(先斬後啓)의 권한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지웅이 다소 누그러진 음성으로 쐐기를 박았다.

“권 좌수, 이래도 할 말이 있소? 내일 당장 의금부와 형조에 보고하여 지엄한 국법으로 처결할 테니 그렇게 알고 돌아가시오. 오늘 방면할 테니 야반도주라도 하려거든 좋을 대로 하시구려. 모두들 나가거라.”

지웅은 말을 마치고 돌아앉았다. 육방관속들이 허리를 굽히고 방문을 열고 나갔다. 이제 권도평이 얼마나 간땡이가 큰 지 지켜 볼 차례였다. 대역죄인으로 의금부에 끌려가는 상상을 하던 최만호가 먼저 사또를 연신 불러가며 잘못했다고 빌었다. 자신의 늙은 부모와 자식들을 팔아 연민을 구걸했다. 하지만 지웅이 꿇려야 할 무릎은 권도평이었다. 잠시 후 권도평이 무릎을 꿇더니 말했다.

“사또, 내가 졌소. 시키는 건 뭐든 할 터이니 금부까지는 가지 말아 주시오.”

그제야 지웅은 돌아앉았다. 지웅의 나이가 젊다하여 60 초로의 권도평이 우습게 알았던 것도 있었지만, 최만호의 비망기가 있을 리 만무하다 여긴 권도평이 어떠한 증좌도 없이 끝까지 몰아세우진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버틴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하지만 버젓이 증좌가 있는 이상 이 사실이 의금부에 들어가는 순간 9족을 멸하는 대역죄로 목이 잘릴 게 뻔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후일을 도모하는 게 최선이었다. 지웅은 여기 오기 한 달 전부터 윤혜명을 보내 매수할 수 있는 사람은 매수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양주목의 모든 비리와 부정을 파악하고 그 증좌를 모으라 지시했었다. 윤혜명은 관군으로 들어와 하나씩 비리를 파악해 왔고, 급기야 최만호가 아끼는 애첩의 집 뒷마당 땅속 묻어 놓은 항아리 안에 비망기가 있음을 알아낸 것이었다. 대부분의 모든 관원들과 육방관속들의 집안 살림까지 파악한 후 지웅은 내려온 것이었다. 지웅은 흐느끼며 고개를 땅에 박은 최만호와 무릎을 꿇고 고개 숙인 권도평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머리는 풀어헤치고 수염은 가다듬지 않아 제멋대로 였다.

잠시 침묵을 즐긴 지웅은 혜명을 불렀다. 최만호와 권도평이 보기에 이제 한 달 차 하급 군관이었다. 하지만 지웅과 하급 군관의 사이가 보통이 아니었다. 최만호와 권도평은 그제야 조금씩 사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하급 군관이 양주목사가 미리 보낸 밀사였다면 자신들의 죄상을 낱낱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좀 전보다 더 고개가 꺾였다. 지웅이 고개를 들라며 명을 내리자 두 사람은 고개를 들었다.

‘쉬익’

지웅의 칼이 한 번 허공을 가르는가 싶더니 이내 칼집에 들어갔다. 그 순간 비망기가 반으로 잘려 두 권이 되었다. 최만호와 권도평이 놀란 눈으로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지웅은 잘린 반 권을 최만호와 권도평 앞으로 던졌다. 그리곤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말 잘 들으시오. 나는 그대들의 죄나 묻자고 여기 온 게 아니외다. 나는 이 나라 조정과 왕실을 위해서 더 큰 일을 하려고 온 사람이오. 수령칠사의 덕목을 모두 지켜야 하는 게 우선이오만, 그 보다 앞으로 있을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해서 이곳 양주목의 흑마들을 군마로 훈련시키는 것과 군사들을 늘려 정예군으로 만드는 게 임금께서 내리신 어명이외다.”

최만호와 권도평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지웅은 더 쉽게 접근했다.

“내가 미리 내 수하를 시켜 이곳 양주목의 실정을 파악한 바, 그대들이 저지른 비리뿐만 아니라 그동안 전임목사들이 손 놓고 방치한 일들이 태산 같았소. 내가 양주목의 발전과 조정의 명을 동시에 무리 없이 수행하려면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하오. 이 비망기의 절반은 그런 뜻으로 주는 것이오.”

최만호와 권도평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뜨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양주목사는 지방 행정관인 동시에 해당 지역의 군(軍) 지휘관이었다. 정식 직함은 ‘양주진관 병마단련사(楊州鎭管 兵馬團練使)’, 그리고 그 휘하로 양주보군(楊州步軍)이 있었다. 지휘관인 양주목사 아래 수령을 직접 보좌하는 실무 장교인 군관(軍官)들이 있었고 군적과 군량미 보급, 무기 관리 등을 하는 아전 병방(兵房)이 있었다. 병사들을 훈련시키거나 치안을 담당하는 실무 간부인 교관(敎官)과 기찰(譏察)이 있었고 죄인 체포와 관아 경비를 담당하는 무력 집단인 군교(軍校)가 있었다. 포교(捕校)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지역에서 제일 활동 비중이 큰 집단이었다. 그 아래론 평소에 농사를 짓다가 유사시에 소집되는 지방 상비군인 일반 백성들, 즉 장정이 있었다. 지웅은 윤혜명을 군관의 우두머리인 중군장(中軍長) 겸 직속 호위대인 별무사(別武士)에 임명하고 서만복을 기찰군관으로 임명하면서 보군(步軍) 일천 명을 통솔하게 했다. 그동안 관군의 동태를 보아 온 혜명 군관의 보고를 취합하여 사리에 밝고 총명한 자를 추천받아 좌관과 우관, 수문군관과 별군관에 각각 임명했다. 최만호와 권도평은 자신들의 생각보다 더 높은 곳에서 넓게 바라보고 있는 사또임을 깨닫고 있었다. 지웅은 일부러 시간을 두고 혜명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 넌지시 권도평에게 말했다.

“권 좌수, 그대는 정5품 사헌부 지평으로 조정의 녹을 잠시 먹었으나 아직 출사(出仕)하지 못한 아들이 둘이나 있지 않소? 내 권 좌수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까 하는데 어떻소? 정7품 승문원(承文院) 박사(博士)와 종7품 전의감(典醫監) 직장(直長) 자리를 두 아들에게 천거(薦擧) 하리다. 자세한 건 묻지 말고 내가 천거하면 따 놓은 당상이니 잔치나 벌일 준비하시오.”

권도평은 눈이 빠질 만큼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승문원이면 조정의 외교 문서를 관리하고 작성하는 부서였다. 명나라와의 외교 실무를 관장하는 일로 유생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직이었다. 더구나 정7품이라니, 이건 거의 공신에게 허락되는 특급 대우였다. 전의감은 어떤 자리인가. 궁중에서 사용하는 의약품을 관리하고 조제하던 관직이었다. 둘 다 주요 요직이었다. 안 그래도 권도평 자신의 대(代)에서 벼슬이 끊겨 죽어 조상 뵐 낯이 없음을 통탄하며 살던 중이었다. 양주목사의 말대로 두 아들에게 벼슬이 주어진다면 가문의 영광이자 평생 양주목사의 가신(家臣)이라도 될 수 있었다. 때를 맞추어 혜명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권도평은 두 팔을 벌려 오체투지(五體投地) 하듯 몸을 엎드려 큰 소리로 외쳤다.

“사또, 그리만 해주신다면야 평생 사또를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것을 천지신명께 약속하겠습니다.”

이 정도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지웅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최만호에게 시선을 옮겼다. 지웅이 권도평에게 말하는 게 무얼 의미하는 지 잘 알고 있는 최만호가 자신에겐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는 표정이 역력했다. 지웅이 최만호를 부르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호장, 최 호장에겐 아들이 없지만 과년한 딸이 있다고 들었소. 혼기를 놓친 딸이 있다 들었는데, 내가 중매(仲媒)를 서면 어떻겠소?”

최만호는 이 무슨 소린가 싶어 귀를 씻는 시늉을 했다.

“나와 의형제를 맺은 동생이 올해 스물 여섯으로 기해생(己亥生) 돼지띠요. 현재 궁궐 내금위 부장으로 있소이다. 종6품의 무관으로 권세가 하늘을 찌르지요. 어떻소?”

최만호는 이게 정녕 사또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최만호 옆에 앉은 권도평도 깜짝 놀랐다. 최만호가 고개를 살짝 들고 공손히 물었다.

“사또, 중인 신분은 반중불혼(班中不婚)이라 하여 양반과 결혼할 수 없사옵니다. 설마 모르시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시지요?”

지웅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그걸 왜 모르겠소? 하지만 공명첩(空名帖)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소. 최 호장이 그간 쌓아 놓은 곡식을 조정을 위해 바친다면, 내 관찰사에게 부탁해 그깟 공명첩 한 장 못 구하리까?”

공명첩이라는 소리에 최 호장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재산이 아무리 있다하나 쉬이 구할 수 없는 게 공명첩이었다. 공명첩은 조정의 호조(戶曺)에서 도장만 찍히고 이름 칸이 비어있는 공명첩을 각 도의 관찰사에게 보내고 관찰사는 이를 다시 각 고을의 수령에게 할당하는 식이었다. 비어있는 이름 칸에 최만호의 이름 석 자가 들어가면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나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같은 고위 명예직의 벼슬을 얻게 되어 외견상 양반 가문의 격을 갖출 수 있는 것이었다. 지웅은 최만호에게 이 방법을 알려준 것이었다.

최만호는 양반이 아닌 중인(中人)이었다. 중인은 양반(兩班)과 양인(良人)의 중간인 신분이었지만, 좁게는 역관(譯官), 의관(醫官), 율관(律官), 산관(算官), 화원(畵員) 등 잡과 출신 기술 관리를 가리켰다. 고려 기득권층 중 사대부가 아닌 이들의 후손으로, 일반 상민과 달리 양반처럼 한문으로 이름을 짓고 성씨와 관향이 있으며 족보도 가지고 있지만 대과 응시를 할 수 없었다. 이는 정도전이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면서 고려 말의 폐단을 야기했던 부원세력, 향리세력, 상인세력을 한꺼번에 박살내기 위해 취한 극단적인 조치의 영향이었다.

중인은 잡과에 급제해도 벼슬을 받지만, 문, 무과에 비해 낮은 접을 받았으며, 한품서용(限品敍用)이라 해서 신분과 직종에 따라 품계(品階)를 제한하여 관리를 서용하는 제도로 승진 품계에 한계가 명확했기에 문과 급제 가문에서는 잡과를 천시했고, 사대부로 대접 받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양천제(良賤制)가 사실상 반상제(班常制)로 바뀌면서 양반과 상민의 구분이 짙어지던 때에도 양반들은 법적으로는 대과 응시가 가능한 상민보다 그나마 족보도 있고 돈도 많은 중인들을 더 경계하고 멸시하였다. 중인이 멸시받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왕실 직속 호위대인 별감이 되는 것이었다. 별감은 국왕과 왕비와 왕세자의 수족이었으므로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최만호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벌서부터 양반이 된 것 같아 심장이 요동쳤다. 종2품 가선대부가 되어 자신의 딸을 내금위 부장과 혼인 시킨다면 전 재산을 바친다 해도 아깝지 않을 터였다. 이것이야말로 돌아가신 아버님께 효도를 하는 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최만호는 일어나 지웅에게 큰 절을 했다.

“아이구 사또, 제가 비록 미천한 신분으로 온갖 나쁜 짓을 해 왔으나 사또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제가 가진 전 재산을 조정과 주상 전하께 바치고 사또의 선정을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 하겠나이다.”

지웅은 생각한 대로 잘 풀렸다고 생각했다. 최만호와 권도평을 내보내려면 이유와 방법은 많았지만 그럴 경우 이들의 결속을 부추기는 꼴이 될 게 뻔했다. 한 무리로 일어나 지웅에게 반기를 든다면 언젠가는 진압을 할 수 있다 해도 지웅 또한 많은 기운을 소모해야 했다. 결국 이들을 안고 가야 했고 최선의 방법은 누가 목숨 줄을 쥐었는지 알게 한 후 동행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호랑이가 누군지를 알려주고 최상의 곶감을 던져주었으니 지웅은 원하는 바를 충분히 얻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유월(六月) 초하루 술시(戌時)에 유향소 어른들을 모시고 연회를 베풀 테니, 최 호장은 그리 준비해 주시고 권 좌수는 내 뜻을 전달해 주시오.”

지웅의 다정한 목소리에 옥(獄)에서 불려나올 때만 해도 타협이냐 강수(强手)냐를 두고 고민하던 두 사람은 생각지 못한 큰 소득을 가지고 부뚜막의 고양이처럼 날아가듯 달려 나갔다. 밖에서 대기하던 윤혜명과 서만복이 들어왔다.

“역시 형님의 계책(計策)은 제갈량의 칠종칠금(七縱七擒)을 보는 것 같습니다. 다루기 까다롭고 평생 부정(不正)에 치우친 자들을 저렇게 순한 새색시로 만들어 버리다니요.”

“그러게 말입니다. 남중(南中)의 맹획(孟獲)도 저자들에 비하면 세 살 바기 어린아이 수준 아닙니까? 하하하”

촉(蜀)나라 제갈량이 촉나라 남쪽의 남만왕이라 불리던 맹획을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준 고사를 들어 혜명이 감탄하자 만복이 그보다 더 하다며 웃었다. 칠종칠금이란 제갈량이 전쟁 중에 맹획을 일곱 번이나 사로잡았으나, 그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승복하지 않자 번번이 풀어주며 얼마든지 덤벼보라고 했고 결국 일곱 번이나 잡힌 뒤에야 다시는 남쪽을 배반하지 않겠다며 진심으로 항복한 고사였다.

“어허, 소란 떨 것 없다. 책임이란 상시 우리 머리 위에 있으니 한시라도 말과 행동에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예 형님,,아, 아니 사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