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부운(浮雲)
作 ジウンイネ
내반원 내시가 그려준 판내시부사의 집은 굳이 찾지 않으려 해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크고 화려했다. 마치 창덕궁을 그대로 옮겨왔다고 해도 무리가 없었다. 거대한 솟을 대문 밖에서 지웅이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대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사내가 지웅의 위아래를 훑었다. 아마도 판내시부사를 호위하는 사내인 듯 했다. 눈가에 칼자국이 있고 체격이 다부진 게 한눈에 봐도 무인(武人)이었다. 굳이 누구라고 신원을 밝히지 않아도 지웅의 옷차림을 보고 바로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아본 듯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사랑채로 달려갔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설마 이 시간에 판내시부사가 자는 건 아닐 테고 평소 위에 고하고 답을 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좀처럼 사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자는 시간이면 굳이 깨울 필요가 없음을 말하고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나타난 사람은 칼자국의 사내가 아니라 판내시부사의 아들 이공신(李公信)이었다. 그는 아버지 김처선의 양자로 역시 같은 내시였으나, 내시들의 법적 한계인 종2품의 직급을 넘어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였다. 이는 연산군의 각별한 신임으로 대신들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김처선의 위상이나 다름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내금위장 대감께서 오실 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지웅은 자신보다 품계가 높은 이공신이 깍듯하게 대우하자 손사래를 쳤다.
“대감께서 나오시니 소장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대감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지웅은 종2품으로 영감이라 불러야 맞았다. 이공신이 대감으로 불러주자 부담이 되었다.
“주상의 그림자가 아니오이까. 그리 불러주는 건 오랜 관행입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이공신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자 그곳엔 김처선 말고 두 사람 더 있었다. 비단 저고리에 머리카락보다 얇은 죽사(竹絲)를 촘촘하게 엮어 만든 세립(細苙)을 쓴 김계창과 고급 진사립(眞絲笠)을 머리에 얹은 박원종이었다. 김계창은 내시부의 고위급으로 김처선 다음으로 궁에 오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 역시 이공신처럼 주상의 신임으로 정2품 자헌대부에 제수되었고, 연산군 특유의 변덕과 고집으로 종친이나 공신이 아닌데도 연산군(延山君)에 봉해져 내시에게 ‘군(君)’을 봉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간관들의 상소가 빗발쳤던 사내였다. 지웅과 눈이 마주치자 주로 얼굴을 보았던 사이인 만큼 가벼운 목례를 주고받았다. 박원종과 눈이 마주치자 낮에 그런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말을 걸어왔다.
“어서 오시오 내금위장 대감, 반갑소이다. 박원종이오.”
“내금위장,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소.”
어색한 공기를 느낀 김처선이 지웅을 향해 친근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김처선의 뒤에 봉황이 그려진 팔 폭 병풍이 김처선의 위세만큼 위풍당당했다.
“저를 보자고 하셨기에 찾아 뵌 걸음이나 아무래도 제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가보겠습니다. 판내시부사 대감.”
“허허, 무엇이 그리 급하시오. 내금위장. 어려운 걸음일 테니 가벼운 약주나 한 잔 하십시다. 우리 사이에 못할 것도 없지 않겠소.”
“대감, 앉으시지요. 주안상을 들이라 일렀으니 곧 들어 올겁니다. 작년에 담은 동치미가 아주 풍미가 기가 막힙니다. 한 사발 드시기 전엔 못 보냅니다.”
김처선의 말을 거들어 아들 이공신이 지웅의 소매를 잡았다. 지웅은 이대로 야멸차게 나가는 것 또한 어색할 것이기에 마지못해 앉았다. 동치미라는 소리에 입맛이 다셔진 이유도 있었다. 제법 큰 방이었지만 남자 다섯이 앉으니 비좁은 느낌이었다. 방 안에선 사내들의 퀘퀘한 냄새가 아니라 은은한 화초향이 퍼졌다. 방 안쪽의 벽면에는 검은 광택이 흐르는 오목(烏木)으로 짠 사방탁자(四方卓子)에 난(蘭) 화분이 여러 개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아래쪽에는 임금에게 하사받았음직한 서역의 유리잔과 진귀한 옥기(玉器)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문 옆에는 벽을 따라 길게 늘어선 문갑(文匣)이 있고 그 위에 서첩과 붓걸이, 몇 개의 수석(水石)이 기이한 모양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일곱 임금을 거쳤다더니 이 정도 사치는 애교인 모양이었다. 잠시 후 커다란 주안상이 들어왔다. 지웅은 갑자기 허기가 졌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끼니를 찾은 적이 없었다. 지웅은 판내시부사 대감을 만나고 해란을 찾아갈 예정이었다. 어쩌면 오늘 아니면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허기를 채우고 술 몇 잔 마신 후 판내시부사 대감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고 결정하기로 생각하니 마음에 한결 여유가 생겼다.
이공신이 김처선을 비롯하여 모두에게 술을 따랐다. 술 향이 알싸하게 퍼져나갔다. 처음 맡아보는 향이었다.
“박원종 대감이 평안도에서 가져온 호골주(虎骨酒)라오. 범의 뼈를 넣고 담근 술로 용맹을 상징하는 술이지. 한 잔만 마셔도 뱃속에 불덩이가 들어앉은 듯할 것이오. 요즘 같은 추위에 이만한 술이 어디 있겠소.”
김처선이 말하자 김계창이 말을 받았다.
“우리 조선에도 불로 태운 술이라는 소주(燒酒)가 있지만 이 정도는 아니지요. 오늘 이 술을 마시고 제대로 걸어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습니다. 하하하.”
“북방엔 이 술 말고도 유로주(乳露酒)라 하여 말과 양의 젖을 발효시킨 뒤 다시 증류하여 만든 술이 있지요. 우리의 거사가 끝나면 제가 이 술을 대접하겠습니다.”
평안도에 오래 있었던 만큼 북방의 술 문화에 해박한 박원종이 말하자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박원종이 입을 손으로 가렸다. 말끝에 거사라고 말한 부분을 지웅도 들었기에 박원종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박원종이 좌중의 눈치를 살피다가 술을 입에 털어 넣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내금위장을 만났소이다. 내 목숨을 살려 주었지요. 허나, 이렇게 된 이상 숨길 게 없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어차피 목숨을 던졌으니 언젠가는 부딪칠 일 아니오이까? 내금위장 대감 없이는 성공하지 못할 거사라고 생각합니다. 저잣거리 아녀자들처럼 간 보지 말고 바로 의중을 물어봅시다. 난 내금위장께서 우리의 손을 잡을 거라고 봅니다.”
박원종이 알 듯 말 듯 이상한 말을 했다. 바로 이공신이 말을 받았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아버님, 신 대감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세작(細作)이나 할 위인이 아니잖습니까?”
이공신의 말에 김처선이 잠시 술잔을 바라보더니 작정한 듯 입을 열었다.
“이보시게 내금위장. 나는 세종대왕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곱 분의 선대왕을 모셔왔네. 우리같이 양물(陽物)을 제거한 내시들이 무슨 욕망이 있겠나. 조정의 안위와 이 나라 만백성을 위해 일할 뿐이라네. 하지만 작금의 주상은 망나니 같은 칼춤을 멈추지 않고 있네. 내금위장도 잘 알 테니 말해보시게. 자네가 지키고 싶은 것은 이 나라의 종묘사직인가 아니면 무도함인가.?”
지웅이 답을 못하고 술잔만 만지작거리자 김처선은 목소리를 높였다.
“어미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 아래 이 나라를 도살장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네. 여기서 멈추어야 하네. 호랑이도 우리에 갇혀 있을 때가 아니라, 먹이를 물어뜯을 때 비로소 그 위엄이 서는 게 아니겠나. 내금위장의 칼은 임금 한 명 지키기 위한 게 아니라 이 나라 만백성을 지키기 위함인 걸 알아주시게.”
“오늘만 해도 어떻습니까? 주상의 이복동생인 엄숙의의 아들 안양군 이항(李㤚)과 정숙용의 아들 봉안군 이봉(李㦀)을 불렀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선대왕 시절에 주상의 생모인 윤씨를 투기하고 괴롭혔던 마마들의 대군들 아닙니까? 주상의 눈에는 이 두 마마께서 폐비에 이어 사약까지 받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콕 집어서 이 두 사람만 부른 이유가 뭐겠습니까? 무오년에 이어 피바람이 불고 있어요. 빨리 막아야 합니다.”
상선 김계창이 말했다. 이공신이 지웅의 손을 잡더니 간곡하게 말했다.
“내금위장 대감, 소신은 이씨(李 氏)가 아닙니다. 예종대왕 때 돌아가신 오차권(吳借權)이 제 아버님입니다. 역모로 몰려 죽기 전에 저의 양물을 제거하고 내시로 만들었습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말입니다. 여기 계신 판내시부사께서 저를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정2품이 무슨 소용입니까? 내시 권력을 잡은들 무슨 소용입니까? 한 집안의 씨가 말랐고 아직도 그 원혼은 구천에 떠돌고 있습니다. 저는 내시가 되었고 하나뿐인 제 누이는 평생을 관기로 살았습니다. 개인의 복수가 아닙니다. 제2의 이공신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의 주상이 만백성을 위한 선정(善政)을 베풀어도 모자랄 판에 피에 굶주린 늑대처럼 사람을 죽이고 있어요.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공신의 눈빛에서 진심을 보았다. 지웅은 무어라 말할 수 없어 난감했다. 임금을 호위하는 내금위장이 반정에 가담하기도 그렇고 인륜을 저버리는 짓을 하는 주상을 지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웅의 본분은 역시 주상을 지키는 것이었다. 지웅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소장, 알아들을 귀가 있으나 쉬이 열 수 없는 입이 있음을 헤아려 주시지요. 소장은 오늘 판내시부사의 술을 얻어먹었을 뿐, 어떠한 이야기도 나눈 바 없습니다. 허나 소장의 복심(腹心)에도 문경지치(文景之治)가 있음을 알아주십시오.”
지웅은 술 한 잔 입에 털어 넣었다. 뱃속에 불덩어리가 들어가는 것 같았다.
문경지치(文景之治)란 중국 한나라 고조 유방이 죽은 뒤, 그의 아내인 여태후와 그 친척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유씨 종친들을 핍박했다. 여태후가 죽자 대신들이 힘을 합쳐 여씨 일족을 몰아내고 유방(劉邦)의 아들인 유항(劉恒)을 옹립하여 문경지치라 불리는 한나라 최고의 태평성대가 열렸다는 고사였다. 거사는 모르지만 태평성대가 찾아 왔으면 좋겠다는 다소 두루뭉술한 대답이었다. 박원종이 자작하여 한 잔 비우더니 말했다.
“유배 가던 이세좌 대감과 홍귀달 대감을 다시 불러 곤장을 때리고 보낸다 하지요. 조선이 개국한 이래 이런 적은 없었습니다. 주상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니에요.”
지웅도 주상이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특히 생명에 대한 경시(輕視)는 대단했다. 사냥을 가서 잡은 동물들을 굶게 하여 고기를 던져준 뒤 서로 싸우는 모습을 즐겨 보는 건 예사였고, 나중엔 다시 활을 들어 쏘아 죽이기를 즐겼다. 한번은 주상이 아끼던 고양이를 내관이 쥐를 잡으라고 풀어 주었다가 잃어버리자 크게 분노하여 그 내관을 의금부에 가두고 엄벌에 처했는가 하면, 아끼던 사냥개를 조회가 열리는 어전에 끌고 나타나 대신들이 경악한 적도 있었다. 어느 날 황새 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도성 안의 황새란 황새는 모두 잡아 죽여 씨를 말리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고, 지웅이 제일 충격을 받았던 건 선왕이 죽고 왕위에 오른 주상이 평소 선왕이 매우 아끼어 후원에 기르던 사슴을 직접 활로 쏘아 죽인 뒤 그 고기를 술안주로 삼았던 일이었다. 선왕이 살아계시던 시절 사슴이 주상의 옷을 핥고 손을 물었다 하여 사슴을 발로 찼고, 이를 본 선왕이 크게 꾸지람을 냈던 적이 있었다. 그에 대한 복수를 잊지 않고 했던 것이었다. 자신이 당한 건 반드시 배로 갚아주는 성정이었다. 지웅은 그게 제일 걱정되었다.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지웅은 조절하려 했지만 북방의 독한 술을 당해낼 수 없었다. 누군가 두 발로 서서 나가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웬만한 술은 끄덕도 없던 지웅이 정신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였다. 비몽사몽간에 누군가의 안내로 방에 기어들어갔다. 그래도 무관인지라 손에서 칼은 절대 놓지 않았다. 아침 점심도 거른 상태에서 며칠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잠도 푹 자지 못한 상태에서 마신 술은 지웅을 뻗게 했다. 순식간에 달이 서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얼마나 잤을까. 목이 말라 평소처럼 손을 머리위로 뻗었지만 자리끼가 잡히지 않았다. 낯설었다. 눈을 떠보니 누운 왼쪽으로 문창이 밝았다. 달빛이 들어왔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 지웅의 집이 아니었다. 마침 어디선가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총 다섯 번이었다. 그 뒤로 징소리가 네 번 울렸다.
‘오경(五更) 사점(四點)이라.’ - (현재의 새벽 4시 반)
이제 이각(二刻) 후면 파루(罷漏)가 울릴 것이었다. 지웅은 독한 술의 기운이 아직 몸에 퍼져있음을 느꼈다. 잠시 일어나 앉아 운기(運氣)를 하면 딱 나갈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바보처럼 술을 마시고 취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지웅은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제꼈다. 그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실오라기 하나 없는 하얀 여인의 나신(裸身)이 옆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웅 자신도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당혹감에 숨을 죽이고 빠르게 기억을 더듬어 냈다. 하지만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칼을 손에 들고 방까지 누군가의 안내로 들어온 건 기억이 났지만 거기까지였다. 지웅이 머리를 두 손으로 쥐어짜면서 자책하고 있을 때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군요.”
여인이 몸을 돌려 이불로 가슴을 가린 채 살포시 일어나 앉았다. 긴 머리가 얼굴을 가려 보이지 않았다. 지웅은 판내시부사 아니면 이공신 대감이 아랫것 한 명 시침(侍寢)하라 보냈으려니 생각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니,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하얀 여인의 옆모습이 자꾸 지웅의 눈을 잡아 당겼다. 손으로 가린 가슴과 옆구리의 고운 선이 둥그스런 둔부(臀部)에 이르러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지웅은 애써 무시하며 머리맡에 곱게 개어져 있는 자신의 옷을 발견하고 입으면서 말했다.
“얼굴도 모르는 낭자와 동침한 무례를 용서하시오. 내가 술이 과하여 혹여 무슨 실수를 했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하시오. 이제 나는 나가봐야 하니 혹 결례가 안 된다면 시원한 동치미 한 그릇 부탁해도 되겠소.?”
“그럼 소녀를 이대로 책임지지 않고 버리고 가신다는 건가요?”
지웅은 옷을 입다말고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어지러웠다. 책임이라니 어불성설이었다. 술에 취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동침한 이유로 책임을 져야 한다면 조선 땅 총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터였다.
“낭,,낭자. 혹시 이 집안과는 어떤,,”
“호호호호. 보기보다 순진한 사내군요. 칼을 휘두를 땐 관운장(關雲長)도 벨 기세더니 전립을 벗고 칼을 놓으니 여인의 세 치 혀도 감당하기 어려운가요?”
여인이 얼굴을 돌려 지웅을 쳐다보며 말했다. 여인의 머리칼이 출렁이면서 지웅의 얼굴을 스쳤다. 알 수 없는 좋은 향이 났다. 지웅은 여인의 얼굴을 보고 또 다시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당신은 아란카?”
어제 낮에 보았던 푸른 눈의 북방 여인이었다. 너울을 벗고 머리를 풀었다 해도 누군지 몰랐을 테지만 푸른 눈은 감출 수 없는 것이었다. 지웅은 당황하여 어떠한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당,,당신이 여길 어떻게,,왜 나와 같이 잠을 자는 것이오?”
아란카는 어제 낮에 던져 주었던 패도를 지웅의 눈앞에 흔들면서 말했다.
“이걸 버리지 않고 품에 간직한 걸 보면 날 기억하고 싶었던 거에요. 아니에요?”
아란카는 말을 마치더니 패도에서 칼을 빼내 들었다. 그리곤 재빨리 지웅을 밀쳐 넘어뜨리고 가슴위에 올라타더니 패도의 칼날을 지웅의 목에 대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지웅이 미쳐 반응하지 못했다. 이대로 죽이려는 것인지 지웅이 긴장했다. 손을 제압하려 생각했지만, 아란카가 한 손으론 지웅의 목을 잡고 칼을 든 손으로 너무 단단하게 지웅의 목을 찌르기 일보직전이라 무방비로 목숨을 내어 놓아야 했다. 지웅은 방심했던 자신이 어처구니없어 화가 났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죽일 거면 잠을 자고 있던 사이에 죽이면 더 편할 것을, 도대체 왜 번거롭게,,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란카, 이것 놓으시오. 죽일 거라면 애초에 죽였겠지. 이게 뭐하는 짓이오?”
지웅은 아란카의 눈을 쳐다보았다. 아란카의 커다란 두 젖가슴이 지웅의 가슴을 눌렀다. 달빛으로 인해 아란칸의 어깨와 등 허리가 밝게 빛이났다. 아란카의 알몸이 지웅의 몸 위에 있다고 생각하니 지웅의 호흡이 가빠졌다. 아란카의 두 눈을 직시할 수 없어 눈을 감았다.
“우리 구왈기야 사람은 갖고 싶은 건 뭐든지 가져야 해요. 우린 남편감을 스스로 골라야 하죠. 나 구왈기야 아란카는 당신을 내 ‘베이러(남편)’로 삼기로 했어요. 지금 당신을 살려두는 건 어제 나를 죽이지 않은 거에 대한 보답이에요. 우린 이제 빛이 없는 거에요.”
아란카는 말을 마치자 패도를 던져버리더니 지웅의 입에 입술을 포갰다. 지웅이 놀라 눈을 떴다. 아란카의 긴 머리가 지웅의 볼을 간지럽혔다. 아란카의 혀가 들어왔다. 지웅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누운 채로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만 들어야 했다. 밖에서 파루가 울렸다.
‘덩,,덩,,,덩,,“
서른 세 번이 끝날 때까지 아란카는 지웅의 입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지 않았다. 지웅의 목을 너무 세게 끌어안고 있어서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지웅은 하체가 힘차게 반응하고 있음을 느껴 심히 당혹스러웠다. 해란을 생각하니 한편으론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겨우 아란카가 입술을 떼었다.
“이건 당신이 나의 남편이라는 걸 선언한 거에요. 앞으로 나를 배신하면 죽여버리겠어요.”
북방의 여인들은 거칠기만 한 게 아니라 무섭기까지 했다. 지웅의 의중은 중요하지 않고 아란카는 자신의 주장만 되풀이했다. 급기야 지웅이 입었던 저고리를 벗기려 옷고름을 풀었다. 지웅이 아란카의 두 손을 잡았다. 아란카가 푸른 눈으로 지웅을 노려보았다. 지웅이 입을 열었다.
“아,,아란카 낭자. 제발 이러지 마시오. 인연이 있다면 어련히 알아서 맺어질 게 아니겠소. 조선은 예(禮)를 중시하는 나라이니 부모의 허락 없이 이러는 건 도리에 맞지 않소.”
지웅이 아무렇게나 돌려대자 아란카가 상체를 세우더니 피식 웃었다.
“좋아요. 당신 부모님을 먼저 만나고 그 다음에 같이 국경을 넘기로 해요. 하지만 우리 부모님 앞에서도 이렇게 술이 약하면 다음 날 까마귀밥이 되어 있을 거에요. 호호호호.”
아란카가 웃으면서 지웅의 몸에서 내려왔다. 북방의 여인이라 그런지 벗은 몸을 외간 남자에게 보여도 부끄러움을 타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웅이 간신히 일어나 마저 옷을 입었다. 아란카는 어제 저녁 술에 취한 지웅을 박원종 대감이 아란카의 방에 데리고 왔었다는 말을 했다. 김처선 대감과는 오래전부터 친분이 있었고 조선에 내려올 때마다 이곳에서 묵는다는 말도 했다. 어제는 사내들끼리 국정을 논하고 술을 마시는 자리라 본인이 참석하지 않았지만, 지웅이 찾아 온 걸 보고 운명이라 생각했다며 일부러 센 독주를 가져다 준 게 아란카 본인이라는 말도 했다. 내가 취할 걸 알고 있었단 말이었다. 지웅은 아란카의 언제 다시 만나 부모님을 뵈러 갈 거냐는 독촉을 박원종 대감편에 언질을 주겠노라 겨우 달래고 풀려 나올 수 있었다.
지웅은 시원한 동치미 한 그릇을 얻어먹고 김처선 대감의 집을 나왔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지웅이 창덕궁에 들어서니 희정당을 향해 달려가던 상선 내시 김자원이 보였다. 무언가 다급한 표정이었다. 평소 달리지 않는 그의 성정으로 볼 때 무언가 일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었다. 뒤이어 하급 내시 두 명이 뒤따라 달려갔다. 반대편에서 무수리 두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지웅은 그녀들을 불러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저희도 잘은 모르오나, 전하께서 수강궁(壽康宮)에 있는 왕대비마마의 처소에 가셨다 하옵니다. 전하께서 술을 드시고 칼을 들고서,,,”
옆에 있던 무수리가 팔꿈치로 툭 하고 치자 말을 하던 무수리가 입을 닫았다. 수강궁이라면 창덕궁과 담장 하나 사이를 둔 궁궐로 이전에 수강궁이라 했으나, 선왕 때에 이르러 대비들을 위해 확장한 궁으로 창경궁(昌慶宮)이라 이름하고 이 두 궁궐을 통칭하여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수강궁이라면 주상의 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가 계신 곳이 아닌가.’
지웅은 무언가 큰 일이 벌어질 것을 우려하였다. 어의御醫)를 통해 잠을 자게 하는 처방을 상선에게 부탁했건만, 결국 주상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밤새 술을 마시도록 방치한 게 틀림없었다. 지웅이 수강궁을 향해 달려 나갔다. 주상이 침전에서 나와 옆으로 난 함양문(涵陽門)을 통해 수강궁 왕대비의 침전으로 걸어가는 게 보였다. 뒤따라 김자원과 하급 내관, 제조상궁, 지밀상궁, 여러 명의 궁녀들이 빠르게 걸으며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런 날은 목숨이 열 개라도 불안했다. 주상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라 늘 긴장해야 했다. 침전에 이르자 연산군이 소리를 질렀다. 오른손에는 벽사검(辟邪劍)이 들려 있었다.
“모후(母后)! 아들이 왔소. 나와 보시오. 내 궁금한 게 있으니 나와 보시오.!”
연산군이 밖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정현왕후를 모시는 상궁과 나인들이 허리를 숙이고 벌벌 떨고 있었다. 더구나 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며 중심을 잡지 못해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 같이 술에 취한 임금의 모습에 누구 하나 감히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연산군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눈동자가 평소와 달랐다.
“내 친모(親母)가 죽어갈 때 나의 양모(養母)로서 무얼 했소. 내 어미가 당신을 독살하려 했다가 폐비 되어 사사를 당했는데 가증스럽게 나를 안고 키우다니. 정녕 하늘이 무섭지 않은 게요? 여봐라. 무얼 하느냐. 당장 저 문을 열고 안에 있는 여인을 끌어내라.”
연산군의 패륜이 도를 넘고 있었다. 지웅은 이 모습을 보고 어찌해야 할지 분간이 서지 않았다. 저쪽에서 마침 중전 신씨(愼氏)가 걸어오고 있었다. 연산군은 칼을 마구 휘둘렀다.
“빨리 뜰 아래로 나오라.”
연산군이 소리치면서 칼을 휘두르자 서 있던 상궁과 나인들이 허둥대고 놀라 비명과 함께 넘어지면서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졌다. 중전 신씨가 다급히 달려와 연산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멈추시옵소서. 이 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물러서라. 중전! 내 오늘 저 가식적인 얼굴 뒤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을 봐야겠느니라. 내 어미의 피눈물로 이 자리를 차지한 이가 아니더냐.?”
중전 신씨가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바닥에 짓찧었다.
“전하, 모후께서는 전하를 친자식처럼 품어 기르신 분이옵니다. 지난 세월 전하를 향한 그분의 정성이 어찌 거짓이겠나이까. 오늘 이 칼로 천륜을 끊으신다면, 훗날 역사가 전하를 어찌 기록할 것이며, 전하의 가슴에 남을 상처는 어찌 감당하려 하시나이까!”
연산군이 당장이라도 내려 칠 것처럼 칼을 든 손이 부르르 떨렸다.
“역사? 그딴 것이 내 어미의 목숨보다 귀하단 말이냐. 저 여인은 내 어미가 사약을 받을 때 침묵했느니라. 내 그날 침묵한 이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다.”
중전 신씨가 주상이 든 칼끝을 잡아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녀린 중전의 손에 피가 흘렀다.
“전하, 정녕 피를 보시겠다면 차라리 소첩을 먼저 베어 주시옵소서. 패륜의 왕으로 만고에 이름을 남기시는 걸 보느니 차라리 소첩 먼저 이 자리에서 전하의 칼에 죽겠나이다. 제발 성총(聖聰)을 흐리지 마시옵소서.”
연산군은 눈물로 호소하는 아내를 차마 칼로 내려치지 못했다. 연산군이 태어나 지금까지 유일하게 마음을 허락한 동갑내기 정실이었다. 연산군은 한참을 노려보다 칼을 바닥에 내동댕이 치고 몸을 돌렸다.
“정녕, 내 편은 하나도 없으렷다. 에잇, 이항과 이봉은 언제 오느냐? 빨리 두 사람을 끌고 오거라.”
연산군이 몸을 돌려 수강궁을 나서면서 김자원에게 소리쳤다. 연산군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걸 확인한 정현왕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틈으로 밖의 상황을 주시하던 지밀상궁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왕대비를 안심시켰다.
“왕대비마마. 주상께서 환궁(還宮)하신 것 같사옵니다. 도대체 점점 왜 저러시는지 앞으로 더 걱정이옵니다. 마마”
“세자빈 시절에도 따뜻한 성품으로 칭송이 자자했었지. 내 며느리 덕을 다 보는구나.”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낙담한 표정의 정현왕후는 연산군을 욕하지 않고 오히려 중전 신씨에 고마워했다.
“엄 숙의(嚴淑儀) 마마와 정 숙용(鄭淑容) 마마님의 대군들에 소집령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이 일을 대체 어찌 해야 할는지요.”
지밀상궁이 마치 자신이 소집된 것 마냥 겁을 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정현왕후는 눈을 감았다. 주상과는 열네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주상의 생모 윤씨가 폐비되었을 때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다. 그래도 주상을 친 자식처럼 애써 정성을 다해 키웠다. 키우면서도 내내 불안하고 근심이 많아 소화도 되지 않고 더부룩하기만 했던 지난날이 이제야 그 원인을 알 것 같았다. 정현왕후의 나이 이제 마흔 셋이었다. 이렇게 살 바에 차라리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는 게 나았을 거였다. 갑자기 손발이 차가워졌다. 정현왕후는 가슴 저 밑에서 둥둥거리는 불안함을 참기 위해 내의원을 불렀다.
다음 날 새벽, 지웅은 금군 일장 권열이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형님, 궐이 발칵 뒤집어 졌습니다.”
“또 무슨 일이냐?”
어제 수강궁 사단이 있고 나서 지웅은 집무실에 들어와 그동안 밀린 업무를 했다. 겨우 잠이 들어 새벽 단잠을 자는 지웅을 권열은 깨우지 않았을 터였다. 그만큼 중차대한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자 권열이 말했다.
“정업원(淨業院)의 비구니들이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우림위를 불렀다는 겁니다. 방금 홍승찬 형님이 금군 열 명을 차출하여 출발했습니다.”
지웅은 난데없이 정업원 이야기가 나오자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일인지 의아했다. 정업원(淨業院)이라면 고려 때부터 왕실 또는 권문세가 여인이 출가해 살던 개경에 있던 절이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창덕궁 후원 뒤편에 존재하고 있었는데, 숭유억불 정책이 강화되는 태종대왕 때부터 궁궐 내에 여성 불교신자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을 극혐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정업원을 폐지시키자는 논의가 계속 제기되다가 세종대왕대에 이르러 내불당(內佛堂) 건립을 앞두고 정업원이 혁파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다 1,457년 병자년(丙子年)에 당시 불교를 중시하는 왕이었던 세조대왕의 명에 따라 원래 있던 자리에 정업원이 다시 부활했다. 당시 정업원의 부활은 불교의 흥성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궁에 살다가 혼자가 된 여성들과 자식이 없는 후궁들, 장애인들의 궁핍한 삶을 구제하고자 시행했다는 점이었다.
-과부(寡婦)와 외로운 여자들이 대개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는데, 여승이란 실로 궁박(窮迫)한 무리들이다. 그래서 내가 다시 정업원(淨業院)을 세우고 이곳에 모여 살게 하여 이들을 구제하려고 한다. 또 다리를 절어서 보행할 수 없는 자도 지극히 궁하고 불쌍한 자이다. 삼각산(三角山)의 들에서 살며 걸식(乞食)하는 의뢰(依賴)할 곳 없는 기민(飢民)들은 어찌 그 생명을 이어 가겠는가? 내 뜻을 몸받아 포치(布置)하도록 하라.-
세조대왕이 했던 말이었다.
“비구니들이 자결했다면 내수사(內需司)를 거쳐 형조의 검시관들 아니면 의금부에서 조사를 해야 마땅하지 않느냐?”
“제 말이 그겁니다 형님, 의금부를 부르지 않고 왜 우림위를 불렀냐구요. 시신 검시를 위해서도 오작인들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지웅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왜 우림위인가. 주상의 의중에 아무도 몰래 숨기고 싶은 일이 있어서 은밀히 처리하려 했다면 내금위를 불렀어야 했다. 아니 이런저런 생각하기에 앞서 지웅을 먼저 불렀어야 했다. 늘 무슨 일이 있으면 지웅을 찾던 주상이 오늘은 뜬금없이 우림위를 찾았다. 지웅은 갑자기 가슴 속에 뜨거운 불똥 하나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함정이다. 막아야 해’
지웅은 일어서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권열이 쳐다보고 무슨 영문인지 몰라 지웅이 말을 타고 사라진 곳만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지웅은 창덕궁 후원으로 달렸다. 아직 파루가 울리기 전이었다. 사위는 여전히 어두워 배부른 달이 창덕궁 처마 위에서 쉬고 있었다. 모두들 자는 시각이었다. 이 시간만큼은 별과 달의 시간이었다. 바람과 구름의 시간이었고 물과 산새들의 시간이었다. 언젠가부터 궁궐은 이 자연의 시간마저 뺏고 있었다. 그 중심에 주상이 있었다. 지웅은 어쩌면 조정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말발굽 소리가 정적을 깨며 선평문(宣平門)을 지났다. 이 문은 단순하지만 단단한 기둥이 받치고 있어, 궁궐 내부의 질서를 상징하는 듯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희정당을 벗어나 창경궁과 경계가 맞닿은 북쪽 길로 접어들자, 공기는 더욱 서늘해지고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길가에는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측백나무와 느티나무들이 호위무사처럼 서 있었다. 잎을 다 떨군 나뭇가지들은 마치 지웅을 향해 뻗은 검은 손가락 같았다. 저 나무들은 이 궁궐을 오래도록 호위했을 것이었다.
북쪽으로 고개를 들면 백악산의 가파른 능선이 보였다. 달빛은 차가운 은가루처럼 쏟아져 내려, 기와지붕의 곡선을 따라 흐르고, 적막함 속에 부엉이 울음소리만이 궁궐의 밤이 아직 새지 않았음을 알리는 것 같았다. 궁의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의미의 숙장문(肅章門)을 지나면 차가운 물소리가 들리는 개천이 나오고, 그 옆 담장은 높고 견고하며, 그 너머로 보이는 창경궁의 숲은 달빛에 젖어 신비로운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마침내 말의 걸음이 멈춘 곳은 궁궐의 가장 깊숙하고 외진 곳, 낙선재 북쪽 언덕 너머에 위치한 정업원(淨業院)이었다. 정업원은 화려한 단청 대신 소박한 백토벽과 검은 기와로 이루어져 있었고, ㄱ'자 혹은 'ㄷ'자 모양의 아담한 전각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위엄보다는 정갈하고 차분한 느낌을 주었다. 마당 한가운데 놓인 작은 석탑과 그 옆을 지키는 늙은 향나무 한 그루가 정업원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듯 했다.
이곳은 궁궐 안의 또 다른 세상이었다. 권력의 암투도, 병장기의 날카로움도 느껴지지 않는, 오직 염불 소리와 향 내음만이 밴 고요한 안식처였다. 지웅은 말에서 내려 잠시 멈춰 섰다. 달빛 아래 정업원의 지붕은 마치 고난을 견뎌낸 여인의 등처럼 처연하고도 아름답게 굽어 있었다.
정업원 입구에 여러 마리의 군마(軍馬)들이 서 있었다. 붉은빛의 적토마와 검은빛의 가라마가 섞여 있었다. 조선의 군마는 제주에서 올라온 제주마와 명(明)나라나 북방 지역에서 공수되어 온 호마(胡馬)가 주력이었다. 제주마는 체격은 작지만 성질이 온순하고 발굽이 단단해 전투용으로 제격이었고, 호마는 체격이 크고 속도가 빨라 장수들이 선호하는 군마였다. 지웅은 체격이 큰 검은 빛의 호마를 애용했다. 지웅이 말에서 내리자 때마침 우림위 홍승찬이 입구에서 나오고 있었다. 금군들이 창을 들고 지웅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옆에는 내수사 별좌가 붙어 있었다. 지웅이 다가가자 홍승찬이 군례를 표했다.
“오셨습니까? 영감? 마침 조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입니다.”
지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수사 별좌에게 그만 들어가도 좋다는 말을 했다. 별좌가 인사를 하고 들어가자 지웅이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비구니들이 목을 매다니? 뭐가 나왔는가?”
홍승찬은 지웅의 팔을 잡고 석탑 쪽으로 걸어 나와 조용히 속삭였다. 그의 표정이 사뭇 긴장되어 있었다.
“형님, 목을 맨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자그마치 일곱이에요. 모두 선대왕의 후궁들입니다. 그 중엔 나이 육십이 넘은 비구니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왜 목을 맸냐고 묻지 않느냐? 설마 주상께서 오셨었단 말이냐?”
홍승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좌가 말하길, 어젯밤 늦게 인정이 울리고 주상이 찾아왔답니다. 술에 잔뜩 취해 어가를 타고 와서는 비구니들 보고 모두 떠나라고 외치면서 늙은 비구니들의 가슴을 만지고 희롱을 하다가 젊은 비구니 두 명을 그 자리에서 겁탈했다고 합니다. 주상이 칼을 들고 설치면서 위협을 가해 별좌들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밤새 통곡소리가 나고 새벽 염불로 달랠까 하여 나와 보니 모두 목을 맨 채 죽어 있더랍니다.”
지웅은 주상이 사고를 쳐도 크게 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실이 조정 대신들과 대왕대비마마의 귀에 들어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를 감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웅은 홍승찬의 머리를 맞대고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승찬아, 잘못하면 우리들 목도 날아가기 십상이다. 의금부가 아니라 너를 부른 이유를 알겠느냐? 주상은 사건이 커지길 바라지 않는다. 본인도 일을 저질러 놓고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알고 있는 거다. 사실대로 고하지 말거라. 죽은 인원도 축소하거라. 그냥 삶을 비관하고 정신이 불쾌(不快)하여 화증(火症)에 의한 울병(鬱病)으로 자결한 것이다. 알았느냐?”
“허나 형님, 궁인(宮人)의 말(言)은 네 마리가 끄는 마차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비천리(言飛千里)라고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곳이 아니오이까? 결국 모두 알게 될 것입니다.”
“알고 있다. 그건 그때 문제다. 일단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내 말대로 하거라.”
홍승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웅은 알 수 있었다. 우림위(羽林衛)는 조선의 금군(禁軍) 삼청(三廳) 중 하나로, 서얼(庶孼)들의 진출로를 열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주상은 우림위를 이용하여 왕을 능멸한 죄이거나 기만한 죄로 처벌할 게 뻔했다. 서얼들의 집합소인 우림위 하나쯤 없앤다고 불만 가질 대신들은 없을 것이었다. 지웅과 홍승찬이 고삐를 잡고 말안장에 오를 때쯤 이미 대왕대비인 인수대비(仁粹大妃)의 귀에 이 소식이 날아든 뒤였다.
연산군이 즉위 후 추존하여 소혜왕후가 된 한씨(昭惠王后 韓氏)는 서원부원군(西城府院君) 한확(韓確)의 3남 6녀중 막내로 태어나 세조대왕의 큰아들인 도원군(의경세자, 덕종)과 혼인하여 군부인에 봉작되었으며,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왕위로 즉위하여 자신은 맏며느리로서 세자빈이 되어 궁궐에 들어갔으나, 남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어 사가로 물러났었다. 그러나 자신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성종)이 왕위에 등극하고, 자신도 궁궐에 다시 들어가 곧 왕비로 진봉되었다가 성종 6년에 왕대비에 올라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되었다. 인수대비의 큰고모 한씨는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고, 막내고모는 명나라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다. 따라서 영락제와 선덕제는 인수대비의 고모부가 된다. 한편, 둘째 언니 한씨는 세종대왕의 서차남 계양군과 혼인하였고, 남동생 한치례(韓致禮)는 정의공주의 차녀와 혼인하였다. 또 인수대비 본인은 세조대왕의 장남 의경세자(추존왕 덕종)와 혼인하였으니, 인수대비의 집안은 조선 왕실과 명나라 황실 양쪽과 사돈 관계를 맺은 명문가 중 명문가(名門家)였다.
또한 인수대비는 불교를 신봉하면서 유학자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유교에 전부 통달하여 여인의 행동 규범을 담은 ‘내훈(內訓)’을 썼는데 내훈에 '며느리가 잘못하면 이를 가르칠 것이고 가르쳐도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릴 것이고 때려도 고치지 않으면 쫓아내야 한다.'라고 쓸 정도로 예(禮)에 엄격한 성격이었다. 그런 그녀가 정업원의 사건을 들은 것이었다. 천륜을 저버린 손자의 패륜에 인수대비는 정신이 나갈 정도로 충격을 받아 쓰러졌다.
조회를 위해 어전회의에 참석한 문무대신들은 주상의 낯빛을 보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의를 풀어 헤친 채 한 손엔 칼을 들고 용상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워낙 그동안 보여준 기행(奇行)들이 많았기에 별의 별 일들이 있었지만, 용상에 칼을 들고 온 건 처음이었다. 전날의 소식을 들은 임사홍과 유자광도 고개를 숙이고 주상의 말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편전에 술냄새가 진동했다. 연산군이 바닥에 피묻은 적삼(赤衫)을 던지더니 입을 열었다.
“경들은 짐이 과연 폐비 되어 사사(賜死) 된 어미에 대해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소? 뭐라? 백년을 묻어라? 선왕의 교지는 중요하고 내 어미의 억울한 죽음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요?”
“전하, 폐비 되신 전하의 모후를 폐비에서 복권(賜死)하고 이제라도 추승(追贈)하여 억울함을 푸시옵소서.”
눈치빠른 임사홍이 외치자 유자광과 대소 신료들이 억울함을 푸시옵소서 하며 복창했다. 연산군이 말했다.
“짐이 즉위하고 선왕의 묘지문을 검토할 때 보았소. 짐은 왕대비가 나의 친모인 줄 알았었기에 최를 지어 쫒겨나 사사되었다는 내용이 누구인지 깨닫는데 한참 걸렸소. 자그마치 십 년이오. 십 년 동안 아무도 나에게 진실을 들려준 이가 없소. 저 피묻은 적삼 하나 때문에 짐이 이러는 줄 아시오? 내 이제부터 하나하나 정상으로 돌려 놓아야겠소. 도승지는 들어라. 죽은 내 어미 폐비 윤씨를 복권하여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하고, 묘소는 회릉(懷陵)으로 옮길 것이다. 당장 시행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대소 신료들이 하나같이 외쳤다. 이 상황에서 주상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것과 진배없었다. 우의정 허침(許琛)은 과거 선대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살아 있을 때에야 어찌 변을 만들겠는가마는,
내가 죽으면 반드시 난을 만들어낼 것이니,
경 등은 반드시 오래 살아서 목격할 자가 있을 것이다.-
선왕 자신의 성품을 잘 알아서였을까. 아들 연산군의 폭정을 이보다 더 정확히 예언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허침은 눈을 감았다. 10척(尺)이 넘었던 죽은 형인 허종(許琮)이 생각났다. 커다란 키 때문에 말을 타고 가도 말 위에 타고 가는 것인지 서서 가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된다는 농(弄)을 받던 형님이었다. 주상의 어미를 폐출할지 논하는 자리에 가서는 안 된다는 누이의 충고에 형님은 북교를 건너오다가 다시 돌아가자는 얘기를 했었다. 할머니의 장례를 핑계 삼아 가지 말자던 형님은 내가 끌어서 오게 되었지만, 결국 말에서 떨어지는 시늉을 하여 다리가 부러졌다는 이유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었다. 그것 때문에 우리 형제는 지금까지 폐비 윤씨 사사 사건에서 주상의 관심을 받지 않는 것이었다. 주상은 이미 모든 전말을 알고 있었다. 허종과 허침 형제가 말에서 떨어진 곳이라 하여 둘의 이름을 따 그 다리를 종침교(琮沈橋)라고 불리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허침의 상념을 깨는 주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앞으로는 경연(經筵)을 중단하고 정책 토론은 아예 금하노라. 성균관(成均館)을 폐쇄하겠다. 또한 원각사(圓覺寺)와 정업원(淨業院)의 모든 중들과 비구니들은 쫒아내고 그곳을 새로 개조할 테니 우상은 그대로 시행하라.”
대소 신료들은 감히 옳은 말을 간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미 사간원과 사헌부의 기능이 정지되었기에 아무도 조언하는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서로 눈치만 살피면서 성은이 망극하다는 소리만 지껄일 뿐이었다. 교육기관을 없애고 선왕들의 후궁을 쫒아낸다는 데 아무도 거역하는 이가 없었다.
“어제 정업원의 비구니가 자결했다는 소릴 들었다. 우림위장은 나와서 결과를 보고하라.”
우림위장 홍승찬은 처음으로 대전에 올라 임금 앞에 나아갔다. 용안을 바로 보지 못하고 엎드려 아뢰었다.
“신, 우림위장 홍승찬 주상전하께 삼가 아뢰옵니다. 정업원(淨業院)의 비구니 한 명이 간밤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숨지는 변고가 발생하였나이다. 신이 즉시 달려가 살피건대, 시신에는 타살의 흔적이 없고 오직 스스로 삶을 마감한 자취만이 뚜렷하였나이다.
주변을 문초하고 평소의 행색을 살피니, 고인은 생전에 가슴 속에 쌓인 억울함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심화(心火)가 성(盛)하고 기(氣)가 뭉치는 화증(火症)을 깊이 앓아왔다 하옵니다. 이러한 울병(鬱病)이 날로 깊어져 끝내 제 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울결(鬱結)된 마음을 풀 길 없어 홀로 자진(自盡)에 이른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사무치게 안타까운 일이나, 이는 병증이 골수에 사무쳐 일어난 변고이오니 전하께서는 부디 심려를 거두시옵소서. 추후 검시(檢屍)의 절차를 법도에 따라 엄격히 마친 뒤 다시 상세히 보고하겠나이다."
연산군이 우림위장의 얘기를 듣고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
“정녕, 한 명이었단 말이냐?”
홍승찬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지웅은 그 모습을 보고 답답하여 자칫하면 자신이 대신하여 답을 할 뻔 했다. 홍승찬이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한 명이었사옵니다.”
“어허, 저런 발칙한 놈을 봤나. 내 분명 세 명이라 들었거늘, 감히 짐을 우롱하는 것이냐?”
홍승찬은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의 전개에 당황했다. 이렇게 대답하면 무사히 넘어갈 줄 알았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이 조사를 미진하게 하여 성총을 흐렸으니 백번 죽어 마땅하옵니다. 하오나 다시 기회를 주신다면,,”
“시끄럽다. 여봐라. 저놈을 당장 의금부에 가두고 내 허락 없이 물 한 모금 주지마라.”
홍승찬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금군들에게 끌려 나갔다. 지웅은 눈을 감았다.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다. 차라리 그날 궁을 떠나게 했어야 했다. 지웅은 괴로운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답답하여 미칠 것 같았다. 연산군이 다시 소리쳤다.
“이항과 이봉을 들라 하라.”
연산군이 소리치자 금군 두 명이 이항과 이봉을 각각 끌고 대전으로 들어섰다. 오라줄로 포박을 당한 상태였다. 주상의 이복동생들이었다. 신료들은 모두 저 두 대군이 왜 끌려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저 대군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저 시대를 잘못 태어났고 어미를 잘못 만난 죄였다. 불어 올 피바람에 신료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산군이 꿇어앉은 이항과 이봉을 보고 싸늘하게 물었다.
“네놈들이 여기에 왜 끌려 왔는지 아느냐?”
이항과 이봉이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면서 눈알만 좌우로 굴릴 뿐이었다. 누군가 도와줄 대신들이 없는지 살펴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눈을 마주치는 이가 없었다.
“네놈들은 나의 배 다른 동생들이니 그게 죽을 이유다. 네놈들이 사랑을 듬뿍 받아 지금까지 호의호식 했으니 그것 또한 죽을 이유다. 네 어미들이 내 어미의 자리에 앉아 내 어미가 죽기를 바라고 결국 죽게 했으니 그 모든 게 다 죽을 이유다.
여봐라. 안양군(安陽君) 이항(李㤚)과 봉안군(鳳安君) 이봉(李㦀)을 목에 칼을 씌워 옥에 가두고, 숙직 승지 두 사람이 당직청에 가서 항과 봉을 장 80대씩 때려 외방에 부처(付處)하라. 또 의금부 낭청(郞廳) 1명은 옥졸 10인을 거느리고 금호문(金虎門) 밖에 대령하라.”
“신, 주상전하의 명을 받아 일벌백계로 다스리겠나이다.”
임사홍이 대답하며 조회는 끝이 났다. 일방적인 임금의 독무대였다. 어전을 떠나는 대신들이 모두 한숨을 짓고 있었다. 칭병(稱病)으로 사직(辭職)도 할 수 없었다. 잘못했다간 그날로 목이 달아날 수 있었다. 지웅은 가만히 서 있다가 맞은 편 판내시부사 김처선 대감과 눈이 마주쳤다. 김처선은 지그시 지웅을 쳐다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 결정을 강요하는 눈빛이었다. 지웅은 고민이 되었다. 지금 주상은 정상이 아니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말도 안 되는 회의와 결정들이 이어졌다. 동생인 홍승찬도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지웅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려 대전을 빠져나왔다.
지웅은 옷이 벗기고 오라에 묶여 끌려가는 홍승찬을 바라보았다. 서얼 출신이었지만 지웅과 막역한 벗이자 한 살 동생이었다. 총명하고 용감하여 부하들이 모두 잘 따랐다. 지웅은 아까운 인재 한 명 사라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구원할 길이 없을까 고민하였지만, 지금의 주상이라면 방법이 아예 없었다. 죽어서 나올 것 같아 심히 괴로웠다. 임사홍이 유자광과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지웅의 옆을 스쳐갔다. 지웅은 그들과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판의금부사 대감,”
유자광이 가다가 걸음을 멈추더니 지웅을 바라보았다. 얼굴엔 왜 부르는지 알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아이구, 이게 누구신가. 주상전하의 호위대장 아니신가? 그래 나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시오?”
“대감, 소신 자주 인사드리지 못하여 송구하나이다. 주상전하의 심기가 예전 같지 않아 조석으로 불려 가는지라 사람 구실도 못하고 삽니다.”
“허허, 그거야 주상전하를 위해서는 좋은 거 아니겠소. 내금위장을 보니 내 든든합니다. 그래 왜 나를 부르셨소?”
“대감, 방금 끌려간 우림위장은 저와 친한 벗입니다. 구명(救命)에 힘을 써 주십시오. 주상전하를 위해 축소 보고한 것이었는데 전하께서 저러시는 이유를 알기 어렵나이다.”
“허허, 말조심 하시게. 우리도 다 듣는 귀가 있지만 입은 하나일세. 요즘은 입을 닫고 살아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네. 내 힘은 써 볼 테네만 장담할 수는 없으이.”
지웅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임사홍과 유자광은 발길을 돌렸다. 유자광이 지웅을 보고는 알 듯 모를 듯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둘 다 생긴 것도 비슷했고 수염의 모양과 크기도 비슷했다. 둘 다 수염에서 윤기가 흘렀다. 권력을 잡으면 다 저렇게 비슷해지는 건지 궁금했다. 몸을 돌려 유자광과 함께 걸음을 옮기던 임사홍이 멈칫하더니 다시 발길을 돌려 지웅 앞으로 걸어왔다.
“자넨 내삼청(內三廳)의 관할이 병판인 나에게 있다는 걸 모르는가? 어찌 우림위장의 일을 판의금부사에게 부탁하는가?”
“대감, 의금부로 끌려갔으니 당연히,,그럼 대감께서 구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임사홍이 고개를 삐딱하게 젖히면서 혀를 끌끌 차더니 안타까운 듯 말했다.
“쯧쯧, 자넨 주상전하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사람이 어찌 그리 둔한가? 주상이 한 번 처결해서 번복한 적이 있던가? 힘 빼지 말고 포기하게.”
임사홍의 말을 들은 지웅은 그의 말이 옳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단 한 번도 주상은 자신이 뱉은 말을 주워 담은 적이 없었다. 지웅이 낙담하고 있을 때 임사홍의 아들 임숭재가 다가왔다. 정3품 장악원 제조였다. 당하관으로 어전회의에는 참석할 수 없었지만, 주상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에 각종 회의나 연회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받은 인물이었다. 남들이 볼 때, 지웅과는 임금의 총애를 받기로 서로 경쟁하는 관계로 보일 수 있었다. 내금위장은 임금 옆에서 유일하게 칼을 차고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고 그만큼 권세가 있었다. 하지만 임숭재는 여동생과 자신의 아내까지도 주상에게 헌납할 만큼 충성을 과시했고 대신들의 부인과 후궁, 기생 가리지 않고 미모가 빼어난 여인들을 찾아다가 주상에게 바치면서 주상의 실질적인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나이도 지웅보다 한 살이 많았다. 그러나 직급은 정3품으로 종2품인 지웅보다 확실히 낮았지만, 임금의 총애를 믿고 지웅에게 존대하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밥맛이 떨어지는 위인이었다.
“아버님, 예서 뭐 하십니까? 날이 아직 찹니다.”
임숭재는 임사홍에게 말하면서 시선은 지웅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웅에게 예를 갖추어야 했지만,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걸 본 임사홍도 아무런 충고가 없었다. 지웅이 벌 쏘듯 한마디 쏘아붙였다.
“임 제조는 목에 이상이라도 있는가 보오.?”
“말 안해도 보이는가 봅니다. 주상 전하와 밤새 술을 마시고 잠을 잘못 잤더니 풍(風) 맞은 닭처럼 목이 뻣뻣해졌지 뭡니까? 내금위장께서 이해하시지요.”
주상을 밤새 취하도록 만든 원흉이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지웅은 대번에 임숭재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 말할 때 입에서 썩은 달걀 냄새가 났다. 눈의 흰자위가 귤껍질처럼 노란 목황(目黃) 증세에 피부가 마치 장작불에 오리를 구운 것처럼 어둡고 검푸른 음황(陰黃) 빛이었다. 배를 보니 불룩하게 솟아 있어 굳이 의원이 진맥하지 않더라도 간적(肝積-간경화)이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황달(黃疸)에 복부가 부푼 고창(鼓脹)이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군.’
지웅은 아버님의 의술(醫術)이 웬만한 의원 못지않았고 어려서부터 용한 의원들의 진맥과 온갖 약재(藥材)들을 보고 자라왔던 터라 얼굴색만 보고도 알아내는 망진(望診)이 내의원 뺨칠 정도였다.
“임 제조께서는 술을 줄이셔야 할 것 같소이다.”
지웅은 임사홍에게 예를 갖추고 돌아섰다. 뒤에서 임숭재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버려두었다. 저 작자는 저승사자가 문 앞에 와 있다는 걸 모를 것이었다.
지웅은 우림위 이장(二將) 윤혜명(尹惠溟)과 삼장(三將) 서만복(徐萬福)에게 명하여 번갈아 번(番)을 서고 추후 명을 기다리라 했지만 반 시진만에 돌아왔다. 주상이 우림위의 호위를 받지 않겠다고 하더니 오후에는 우림위를 철폐한다는 교지가 내려왔다. 이해할 수 없었던 지웅은 주상을 뵙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홍승찬의 구명은 임금의 재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침전 앞에 서자 제조상궁이 내금위장 입시를 알렸다. 안에서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상궁이 재차 고 하자 그제야 주상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라 하라.”
문이 열리고 지웅이 들어가자 낯부끄러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종3품 숙용 장씨(淑容 張氏) 장녹수(張綠水)와 함께였다. 장녹수는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 상태에 연산군은 장녹수의 붉은 치마를 입고 상의는 여인의 하얀 다리속곳으로 목을 두른 상태였다. 연산군의 눈은 여전히 벌겋게 충혈된 채 술에 취해 있었고 장녹수도 술을 마셨는지 지웅을 보고도 내놓은 젖가슴을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잘 보이도록 두 손을 번쩍 올리고 보란 듯이 누웠다. 얼굴은 예쁜 구석이라곤 없었고 음흉한 미소가 달려있었다. 다만 언뜻 보면 이제 겨우 달거리를 시작한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오, 나의 친구 무극, 어서 오시게. 같이 한 잔 할텐가?”
주상은 왜 왔는지 물어보는 게 아닌 술부터 찾았다. 방 한구석에 커다란 주안상이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마시고 얼마나 잠을 안 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장녹수의 상태를 보아하니 며칠 여기에 머무른 것 같았다. 평소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 머물던 장녹수가 요즘 주상과 멀어졌다는 풍문을 비웃기라도 하듯 주상을 다시 손바닥 안에 놓고 주무르고 있었다. 장녹수가 발가락으로 주상의 엉덩이를 쑤시면서 말했다.
“어디 계집이 장군님 앞에서 술타령이야? 똑바로 하지 못해?”
연산군의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바뀌더니 그대로 일어나 부복하면서 고개를 땅에 박았다.
“장군, 죽여 주시옵소서.”
붉은 치마와 여인의 속곳이 벌거벗은 연산군의 처량한 몸을 애처롭게 가리고 있었다. 지웅의 반응이 없자 연산군이 고개를 들더니 웃어가며 다시 말했다.
“장군, 기분이 풀리셨나이까?”
지웅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땅에 박으며 소리쳤다.
“전하.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부디 섭생(攝生)에 마음을 쓰시고 옥체(玉體)를 보존하셔야 하옵니다. 종묘사직을 위해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마음으로 정사(正事)에 임하시옵소서.”
연산군은 지웅의 고함을 듣고 재미가 없는지 일어나 앉아 휭하니 몸을 돌렸다. 장녹수가 술을 한 잔 따라 주상에게 주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술잔을 비웠다. 연산군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가워진 북풍한설이었다.
“여기는 뭐 하러 왔는가? 재미없으니 돌아가라.”
“전하, 우림위장에 대해 드릴 말씀이,,”
“시끄럽다. 돌아가라지 않느냐? 돌아가서 추후 인정이 울리면 창경궁으로 오거라. 내 재미있는 걸 보여주마.”
연산군은 생각만 해도 재미있다는 듯 또다시 어린아이처럼 표정이 환해졌다. 장녹수가 두발로 연산군의 귀를 문지르자 연산군이 개처럼 네 발로 서서 개 짖는 시늉을 했다. 장녹수가 까르르 웃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지웅은 일어나서 절을 한 후 뒷걸음을 쳐 물러났다. 만백성의 어버이라는 임금의 행태가 저러하다면 황후장상의 씨가 과연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밖에는 묘한 웃음을 띠고 있는 승전내시 김자원이 지웅을 보자 굽혔던 허리를 폈다. 김자원은 단순히 왕의 수발을 드는 내시를 넘어, 연산군의 광기를 증폭시키고 그 권력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운 간신의 전형이었다. 그에 대한 말들이 많았지만, 지웅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는 사람 좋게 생긴 인상을 가졌으나, 그 웃음 뒤에는 잔인하고 이기적인 성격으로 연산군의 총애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권력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았다. 그는 때때로 아랫것들에게 "왕의 명령은 내 입에서 나간다" 며 맘에 들지 않는 대신들이 오면 무시하기 일쑤였고, 연산군의 기분을 사전에 파악하여 왕과 신하 사이의 소통을 완전히 차단했다.
“내금위장도 이제 서서히 약발이 떨어지나 보오. 목숨이 흔들리는 저 촛불보다도 못하니 앞으로 줄을 잘 잡아야 할 것 같소이다. 허허.”
지방 유생들이나 강직한 신하들이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면, 김자원은 이를 왕에게 전달하지 않고 태워버리거나, 반대로 왕에게 유리하게 왜곡해서 읽어주기도 했다. 또한 왕을 보좌하는 승정원의 승지들이 왕을 만나려 하면 "전하께서 피곤하시니 물러가라"며 문전박대하기 일쑤였다. 사실상 연산군의 귀와 입을 독점한 셈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잣거리에는 김자원을 ‘동네 정승‘이라고 놀리면서도 그가 탄 가마가 행차하면 고관대작들이 말에서 내려 허리를 숙일 정도로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자 정승부터 말단 관리까지 그에게 줄을 섰다. 그의 집 대문 앞은 뇌물을 싸 들고 온 관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김자원에게 돈을 바치면 하루아침에 판서가 되고, 눈 밖에 나면 귀양을 간다는 말도 들렸다. 고위 관료들이 그를 찾아와 뜰 아래에서 엎드려 절을 해도, 김자원은 방 안에서 비스듬히 누워 거드름을 피웠다는 소문도 들렸다. 그러니 내금위장도 그가 보기엔 한낱 칼 든 무관으로 보일 뿐 어려워하지 않았다. 지웅이 김자원의 눈을 쳐다보며 비웃듯 말했다.
“주상 전하의 혀끝에 있다 하여 뭘 착각하시는 것 같소이다. 내 앞길은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영감의 가르마나 잘 타시오.”
연산군이 전국의 미녀들을 강제로 징집하기 시작하자 김자원은 그 실무를 가장 악독하게 수행했으며 연산군이 마음에 드는 여인을 발견하면, 김자원은 군사를 동원해 그 집을 부수고 여인을 끌어갔다. 남편이 있는 부녀자라도 예외는 없었다. 왕이 정사는 돌보지 않고 잔치에만 몰두하도록 끊임없이 새로운 유희를 제안했고, 연산군의 분노를 자극해 피바람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으니 임사홍, 장녹수와 더불어 천하의 둘도 없는 간신이었다 신하들이 사석에서 한 불평불만을 몰래 수집해 연산군에게 일러바치니 수많은 선비가 죽어나가는 작금의 사태에서 자유롭지 않은 영혼이었다. 저 자의 세 치 혀가 또 누구를 죽일지 이번엔 지웅의 차례가 될지 걱정이었다. 지웅은 김자원의 어깨를 밀치고 대전을 빠져나왔다.
지웅은 말을 달려 궁을 빠져나왔다. 오늘마저 해란을 보지 못하면 영영 못 볼 것 같았다. 말의 고삐를 바짝 쥐고 속도를 냈다. 홍승찬의 구명을 하지 못하면 미련 없이 궁을 떠날 생각이었다. 해란을 면천(免賤) 시키지 못한다 해도 데리고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요즘은 아비가 양반이고 어미가 천인일 때 자식을 양인으로 만드는 경우도 종종 보아왔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차선일 뿐 최선이 되지 못했다.
관기(官妓)를 면천시키는 방법은 임금의 재가없이 두 가지 정도 있었다. 이른바 속량(贖良)이라고 해서 몸값을 지불하고 사는 방법이었다. 관기는 국가 재산이므로 그에 상응하는 포백(布帛)을 내야 했다. 다른 하나는 군공(軍功)을 이루거나 납속(納粟)을 통해 국가에 기근이 들거나 위급시에 곡식을 대량으로 기부하여 면천첩(免賤帖)을 받는 방식이었다. 다행히 아버님이 많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재산이 있기에 부탁하면 길이 트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장악원 제조가 임숭재라는 점이었다. 간신 중의 간신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부탁하는 건 죽어도 못할 짓이었다. 임숭재의 약점을 찾아야 했다. 저들이 좋아하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상대방의 약점을 잡아 그걸로 협박해서 이득을 취하는 방법, 이제 지웅도 그들이 하는 방식에 익숙해져야 함을 느꼈다.
해란의 집에 도착했다. 지웅은 말에서 내려 헛기침을 한 번 하고 호문(呼門)하자 전에 보았던 늙은 여종이 고개를 내밀었다.
“또 오셨네. 잠시 기다리슈.”
여종은 지웅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 번 보고 기억하다니 눈썰미 하나만큼은 지웅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음이었다. 이제 봄바람이 살랑 불어 저 멀리 눈을 돌리니 백악산이 어느새 푸릇푸릇해져 있었다.
‘자연의 이치만큼 사람도 정직할 수 있다면,,,’
봄바람과 봄볕을 느끼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해란이 나타났다. 급히 머리를 빗었는지 무척 단정했고 옷도 새하얗게 주름 하나 없이 펴져 있었다. 딱 봐도 급하게 단장을 한 모습이었다. 고개를 숙인 해란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가슴이 뛰고 설레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지웅은 이 여인을 많이 사모하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또 오시다니 내금위장은 한가한 자리인가 봅니다.”
“해란 낭자, 요 며칠이 몇 년 같았소. 낭자가 보고 싶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니 혼을 내려거든 내시오. 기꺼이 채찍을 맞을 것이오.”
“노(魯)나라에 살던 오기(吳起)라는 사람이 장군이 되기 위해 아내를 죽였다는 살처구장(殺妻求將)의 고사가 있습니다. 대장부가 큰 일을 도모하려면 사사로운 정에 연연하여서는 아니 될 줄로 아옵니다.”
“그런 말 마시오. 낭자. 어찌 장군의 자리에 연연하여 아내를 죽이겠소. 다 부질없는 말장난이오. 낭자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았소?”
“花未開而非無花(화미개이비무화 - 꽃이 아직 피지 않았다 하여 꽃이 없는 것은 아니요,)
星不見而守長空(성불견이수장공 - 별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 해서 없는 것은 아니옵니다.“
말도 예쁘게 하는 해란이었다. 지웅은 오면서 내내 결심했던 말을 꺼내었다.
“낭자. 사월 초 하루요. 낭자를 데릴러 오겠소. 그 안에 사직할 까 하오. 이유는 묻지 마시오. 낭자를 아내로 맞을 것이오. 세상의 시선 따위는 두렵지 않소. 이 말 하러 왔소.”
“소녀. 기다리겠나이다.”
해란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을 하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지웅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였다. 지웅은 참지 못하고 해란을 와락 안아 버렸다. 해란이 벗어나려 했지만, 지웅의 완력에 꼼짝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가만히 서서 지웅의 체온을 느꼈다. 한참을 그렇게 껴안은 후 지웅은 해란을 떼어 내고 말에 올라탔다. 비로소 해란이 지웅을 쳐다보았다. 한동안 서로를 응시하다가 지웅은 고삐를 틀어 자리를 떠났다. 해란은 사라지는 지웅을 보다가 시야에서 완전히 없어진 후에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이구. 남사스러라. 벌건 대낮에 다 큰 남녀가 뭐하는 짓이래요. 남녀가 유별하다는 디 다 옛 말인가보네.”
해란은 유모를 쳐다보고는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험악한 눈으로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모가 눈치를 채고는 혀를 끌끌거리며 마루로 올라섰다.
“에구 숭악혀라.”
해란은 기분이 좋아져서 배고픈 것도 잊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당에 실례를 한 고양이를 타박하면서 모래를 뿌리고 있었다. 해란은 눈을 감고 졸고 있는 고양이를 힘껏 안아서 마루 위를 뒹굴었다. 골골거리던 고양이가 깜짝 놀라 발버둥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