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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함으로 정렬된 목록

作 장지호 · 2026-10-26

D+8 · 10:30

삭제 필지 목록이 처음으로 화면에 떴다.

4,012건. 주소가 시도별로 정렬되어 스크롤이 한참 내려갔다. 다인은 그 목록을 보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데, 처음에는 그게 뭔지 몰랐다.

최민기가 브리핑을 했다. 삭제는 02:40:12에 시작해 09분 41초 동안 이어졌다. 접속 계정은 정상 발급된 관리 계정. 침입 경로는 조사 중. 백업은 주 단위 테이프가 존재하나 시점별 정합성 검증이 필요하다.

"목록 첫 줄은 배정에서 빼겠습니다. 조회가 안 되는 지번입니다."

"없는 주소가 왜 목록에 있습니까."

"모르죠. 그래서 빼는 겁니다."

아무도 더 묻지 않았다. 사천열한 건이 남아 있었다.

"질문 있습니까."

다인이 손을 들었다.

"목록 정렬을 주소 말고 등기 원인별로 볼 수 있을까요."

"원인별이요?"

"필지마다 마지막 등기의 원인이 있잖아요. 매매, 상속, 경매 낙찰, 신탁, 진정명의회복. 그걸로 묶어보면 좋겠어서요."

최민기가 잠깐 자판을 두드렸다. 화면이 바뀌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4,012건 중에 매매로 끝나는 평범한 필지는 사백 건이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전부 어딘가 긁혀 있었다. 가처분, 가등기, 신탁, 채권최고액까지 꽉 찬 근저당, 진정명의회복. 지분권자가 삼백 명을 넘는 임야도 몇 건 있었다.

"무작위가 아니네."

누군가 낮게 말했다.

본부장은 놀라지 않았다. 회의실에서 그 목록이 무작위가 아니라는 데 놀라지 않은 얼굴은 황인선 하나였다. 다인은 그 얼굴을 그날은 그냥 지나쳤다.

황인선이 화면을 보며 물었다.

"서 주무관. 창구에서 이런 등기부 자주 봅니까."

"자주는 아니고요. 한 달에 몇 번은 봐요. 그리고 이런 등기부를 들고 오는 분들은," 다인은 잠깐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대개 뭔가 억울한 게 있어서 와요."

회의실 누구도 받아 적지 않았다. 홍보 담당 하나만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D+8 · 15:00

오후에는 목록을 쪼개서 분담했다. 황인선은 과거에 민원이나 진정이 접수된 이력이 있는 필지를 다인에게 몰아줬다. 창구에서 그런 사람들을 상대해본 사람이 봐야 뭐가 보인다는 이유였다. 다인 몫은 사백스무 건이었다.

한 건씩 백업 사본과 대조하면서, 다인은 오전의 이상한 기분이 뭐였는지 알았다.

낯이 익었다.

창구에서 한 달에 몇 번씩 보던 종류의 등기부가 화면을 스크롤하는 동안 계속 지나갔다.

백열일곱 번째 줄. 오 년 전 상속으로 소유권이 넘어간 아파트. 상속인 이름 옆에 배우자라고 적혀 있고, 혼인신고 날짜가 사망 두 달 전이었다. 비고란에 한 줄이 있었다. 혼인신고서 필적 감정 진행 중. 그 사람은 상속받은 두 달 뒤에 집을 팔았고, 산 사람은 지금 거기 살고 있었다.

이백사 번째 줄. 을구에 근저당이 있었다가 삼 년 전에 지워진 집. 말소 서류가 위조로 판정됐는데 그 사이에 집이 두 번 팔렸다. 지금 주인은 빚 없는 집을 산 줄 알고 있었다.

다인은 그 두 줄을 나란히 놓고 봤다. 하나는 위조로 이름이 생겼고 하나는 위조로 빚이 사라졌다. 창구에서 만난 사람은 그 반대였다. 위조로 빚이 생긴 사람.

목록 삼백열두 번째 줄. 다인은 스크롤을 멈췄다. 그 주소를 알고 있었다. 지방 저축은행이 근저당권자인, 채권최고액 이억 사천의, 을구에 노란 형광펜이 그어져 있던.

권상호의 집이었다.

다인은 한참 그 줄을 봤다. 사 년 동안 아무도 지워주지 않던 근저당이, 아무도 모르는 새벽에, 소유권과 함께 통째로 지워져 있었다.

최 계장이 다인의 화면을 흘긋 보고 물었다.

"아는 집이에요?"

"아는 분 집이요."

"어떤 분인데요?"

다인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랐다. 투명 파일과, 형광펜과, 반듯한 필체와, 여기가 마지막인 줄 알았다던 뒷모습을 요약하는 법을 몰랐다. 그래서 제일 짧은 사실만 말했다.

"창구에 사 년을 다니신 분이요. 이 근저당 지워달라고."

"사 년요?" 최 계장은 잠깐 화면을 봤다. "와. 그럼 이 사람한테는 이번 사건이."

말을 끝맺지 못했다. 다인도 끝맺어주지 않았다.

"저희 어머니도 그런 거 하나 있어요." 최 계장이 자기 화면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십 년 됐나. 결국 포기하셨는데."

"어떻게요?"

"안 하는 게 포기예요, 그런 건.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그만두는 게 아니고."

D+8 · 23:40

숙소는 구청 근처 비즈니스호텔이었다. 행정처가 잡아줬다.

방은 깨끗했고 창밖으로 남의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다인은 씻고 나와 침대에 앉아 그 불빛들을 셌다. 서울의 집들. 저 한 칸 한 칸이 등기부 한 장씩을 갖고 있고, 그중 얼마가 오늘 낮의 목록 같은 사연을 품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었다. 서울 갔다며, 밥은, 숙소는. 다인은 괜찮다는 말을 세 번 하고 끊었다. 끊고 나니 방이 조용했다. 혼자 사는 집의 조용함과는 다른 조용함이었다. 집의 조용함에는 자기 물건들의 기척이 있는데, 이 방의 조용함은 아무의 것도 아닌 조용함이었다.

자기 전에 다인은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목록 첫 화면으로 돌아가 세 번째 줄의 주소를 복사했다. 지도에 붙여넣고 로드뷰를 켰다.

집이 나왔다.

이층 빨간 벽돌 다가구였다. 계단 난간에 화분이 다섯 개 있고, 이층 창문 밖으로 건조대가 나와 있었다. 수건 두 장과 아이 옷 한 벌. 촬영 날짜는 재작년 봄이었다.

다인은 다음 줄의 주소를 복사했다.

여섯 층 오피스텔. 일층에 부동산과 편의점. 그다음 줄은 논 가운데 슬레이트 집이었고 마당에 트럭이 있었다. 그다음은 신축 아파트, 그다음은 상가주택, 그다음은 문 앞에 택배 상자가 세 개 쌓인 빌라.

열몇 개를 열고 나서 다인은 손을 멈췄다.

낮에 그것들은 시도별로 정렬된 문자열이었다. 옆 칸에 등기 원인이 적혀 있었고, 다인이 하는 일은 백업 사본과 한 줄씩 대조하는 것이었다. 등기부는 집을 세 가지로 나눠 적는다.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큰지, 누구 것인지. 사람들은 그 셋을 합쳐서 집이라고 부르는데 장부에서는 칸이 세 개다.

로드뷰에서는 합쳐져 있었다. 빨래가 걸려 있고 화분이 있고 택배가 와 있었다.

사천십이 개였다.

다인은 노트북을 덮었다. 덮고 나서도 한참 앉아 있었다. 그러고 나서 노트를 폈다. 적던 대로 적어. 오늘 자 첫 줄을 적었다.

목록은 무작위가 아니다. 억울함으로 정렬되어 있다.

D+9 · 09:30

사백스무 건 중에 이상한 필지가 하나 있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한 집만 지워져 있었다. 105동 802호. 백업에서 이력을 열어보니 팔 년 전 이전등기 때 주소가 1005동으로 잘못 적혔다가 두 달 뒤 경정된 기록이 있었다. 1005동은 그 단지에 없는 동이었다.

오타 하나. 두 달간 이 집은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 동에 있었다.

피해 확인 통화가 오후에 잡혔다.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오십 대쯤의 목소리였고, 다인이 소속을 밝히자 대뜸 웃었다.

"우리 집이 또요?"

"또, 라니요?"

"팔 년 전에도 등기소 때문에 두 달 고생했어요. 집이 없는 동에 있다고 나와서. 그때 은행에서 나를 어떻게 봤는 줄 알아요? 서류 위조범 보듯이 봤어요. 내 집인데 내가 증명을 못 해서." 남자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물었다. "이번엔 뭐예요. 우리 집이 어느 동으로 갔대요?"

"이번에는 그, 기록이 삭제된 목록에 포함되셔서요."

"삭제." 남자는 그 단어를 한 번 굴려보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뭐. 없는 동에 있어봤는데 아예 없는 것도 있어봐야지."

다인은 통화를 마치고 그 집 이력에 메모를 달았다. 팔 년 전 경정 이력 있음. 두 번째 피해.

목록에는 그런 필지가 자꾸 나왔다. 큰 사기와 큰 분쟁 사이사이에, 그냥 실수로 한 번 긁혔던 집들이 끼어 있었다. 한 번 긁힌 집이 목록에 올라 다시 긁혔다.

D+9 · 11:20

신탁 필지 담당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다인의 옆자리였다.

"이거 보세요. 등기부에는 신탁, 두 글자예요. 끝."

"나머지는요?"

"딴 문서에 있어요. 누가 돈을 받는지, 세입자를 들여도 되는지, 빚이 얼마인지 전부요. 그게," 그는 화면을 가리켰다. "같이 지워졌어요."

"종이는요?"

"전국 등기소 서고에 흩어져 있죠. 다 꺼내서 대조하는 데만 몇 달이에요."

다인은 그 화면을 보다가 낮게 말했다.

"등기부는 아무것도 삭제하지 않는다고 배웠는데요."

"그렇죠."

"다 적지도 않네요."

담당이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닌데 웃음이 나는 종류의 말이었다. 다인은 웃지 않았다.

D+9 · 21:40

사무실에 불이 하나 남아 있었다. 다인이 지나치자 황인선이 불렀다.

"서 주무관. 오늘 원인별 정렬, 그거 위에 보고했습니까."

"아니요. 본부 안에서만 봤는데요."

"그렇게 유지하세요."

"왜요?"

황인선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무작위 삭제면 재난이에요. 골라서 지웠으면 사건이고. 재난은 복구하면 끝나는데 사건은 범인이 나와야 끝나요. 지금 위에서 원하는 건 끝나는 쪽이에요."

"사실은 사건이잖아요."

"그러니까 유지하라는 겁니다. 사실이 준비 안 된 채로 나가면 사실이 아니라 소문이 돼요."

다인은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그 말을 뒤집어봤다. 맞는 말 같기도 했고, 맞는 말이라는 게 문제 같기도 했다. 창구에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말을 듣는 쪽은 언제나 유리 바깥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 숙소에서 다인은 노트를 폈다. 오늘 자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원인별 정렬, 본부 밖으로 내보내지 말 것. 지시 황인선. 사유는 준비되지 않은 사실이 소문이 된다는 것.

적어놓고 한참 봤다. 창구에서 조회 소요 시각을 적던 것과 같은 손이었다. 그때는 경위서 때문이었고 지금은 무엇 때문인지 다인도 몰랐다.

그 아래 한 줄을 더 쓰려다 말았다. 권상호의 주소가 목록 어디쯤에 있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적으면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정해야 했다. 다인은 노트를 덮었다.

[익명 커뮤니티 · 직장인 게시판]

등기 사태 2주째인데 은근 통쾌한 사람 나만 아님?

└ 무주택자는 잃을 게 없다 ㅋㅋㅋ

└ 이런 글 쓰지 마라. 전세 보증금 날아가게 생긴 사람도 있다

└ 솔직히 갭투자로 스무 채씩 굴리던 인간들 등기 날아간 건 고소하다

└ ㄴ 그 스무 채에 세 들어 사는 스무 가구는 무슨 죄냐

└ 어차피 우리는 평생 못 사는 집이었어. 판이 엎어져야 기회라도 생기지

└ ㄴ 좋아요 800

D+11 · 16:30

회의실 화면에 로그가 초 단위로 떠 있었다. 삭제를 처음부터 다시 세는 자리였고, 다인은 말석에서 들었다.

"시작이 02:40:12입니다. 왜 그 시각이냐. 온라인 백업이 매일 02:30에 돕니다. 02:39에 완료 로그가 찍혀요. 그러니까 그날치 백업이 끝나는 걸 확인하고 일 분 뒤에 지우기 시작한 겁니다."

"백업을 남겨두고 지웠다고요?"

"네."

"왜요."

"모르죠. 지울 거면 백업부터 지우는 게 상식인데."

"상식대로 하는 사람이었으면 여기까지 안 왔겠죠."

웃는 사람은 없었다. 최민기가 볼펜 뒤꽁무니로 책상을 두 번 쳤다.

"기다린 게 더 이상해요. 일 분을요. 저 같으면 완료 뜨는 거 안 보고 그냥 지웁니다. 그 일 분에 관제가 들어오면 끝나는 건데."

"관제는 한 명이었어요."

"그건 우리가 지금 아는 거고요."

최민기가 다음 장을 띄웠다.

"그리고 속도가 안 맞습니다."

"속도요?"

"구 분 사십일 초 동안 사천십이 건이요. 초당 일곱 건입니다."

"사람 손은 아니네요."

"사람 손이 아니면 훨씬 빨라야 합니다." 최민기는 화면을 짚었다. "이 정도 작업은 스크립트로 돌리면 일 분이면 끝나요. 십 초로도 만들 수 있고요. 그런데 십 분을 썼습니다."

"느렸다는 겁니까?"

"느렸어요. 일부러 느렸는지, 뭔가 하면서 지웠는지."

"뭔가 하면서라니요."

"한 건씩 뭘 보면서 했다면 그 속도가 나와요." 최민기는 어깨를 조금 올렸다. "확인할 게 있었던 것처럼요."

회의는 다음 쟁점으로 넘어갔다. 다인은 노트에 두 줄을 적었다. 구 분 사십일 초. 초당 일곱 건.

다인이 손을 들었다. 스무 명 중에 창구 출신은 하나뿐이라 손 드는 게 아직 어색했다.

"지우려는 사람이 왜 되돌릴 방법을 남겨뒀을까요."

아무도 받지 않았다.

"되돌릴 방법이라뇨."

"백업이요. 저건 저희가 복구할 수 있게 남겨둔 거잖아요."

"남겨둔 게 아니라 안 지운 거겠죠." 전산 담당이 말했다. "그것도 실수일 수 있고요."

"실수한 사람이 완료 로그를 확인하고 일 분을 기다리나요."

전산 담당은 대답 대신 화면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황인선이 회의록을 적던 손을 멈추고 다인을 한 번 봤다.

회의가 다른 쟁점으로 넘어간 뒤에도 다인은 그 일 분을 생각했다. 지우는 자가 백업이 완료되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