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엄마가 숨긴 이름
作 루시엘 · 2026-10-26
7화. 엄마가 숨긴 이름
“윤하니 씨의 어머니 성함이…… 윤서정입니다.”
비서의 목소리가 대표실 안에 울렸다.
서도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윤서정.
그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몇 년 전, 서은재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겼던 편지. 그 편지의 마지막 장에는 분명히 그 이름이 적혀 있었다.
도혁아. 혹시 나를 찾게 되더라도 윤서정 씨를 원망하지 마.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은재가 왜 갑자기 한 여자의 이름을 남겼는지.
왜 자신에게 그 여자를 원망하지 말라고 했는지.
그리고 왜 마지막까지 무언가를 숨기려 했는지.
도혁은 그 편지를 수없이 읽었지만,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마음을 주기 시작한 여자의 어머니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대표님?”
비서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도혁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윤하니 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네. 인사 기록상으로도 사망 사실이 확인됩니다.”
“언제입니까?”
“정확한 날짜는 본인에게 확인하지 않는 이상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현재 확보된 자료에는 사망 연도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도혁은 눈을 감았다.
하니가 강릉 바다 앞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바다에 온 적이 없었다고.
힘들 때면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크림치즈 허니 토스트를 먹는다고.
그 음식은 자신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서은재 역시 같은 토스트를 만들곤 했다.
그녀는 크림치즈를 빵 가장자리까지 얇게 펴 바르고, 꿀을 조금만 뿌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늘 같은 말을 했다.
도혁아, 오늘도 고생했어.
그런데 하니도 같은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연일까.
아니면 자신이 애써 외면했던 무언가가 두 사람을 연결하고 있는 걸까.
도혁은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바라봤다.
서은재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낮게 물었다.
“윤서정 씨와 서은재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확인해 주세요. 다만 윤하니 씨에게 불필요한 접근은 하지 마세요.”
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도혁은 잠시 망설였다.
“이 일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마세요.”
“네, 대표님.”
비서가 나간 뒤에도 도혁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진실을 알고 싶었다.
은재가 왜 사라졌는지.
윤서정이라는 여자는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하니는 그 모든 일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진실을 알게 되면 하니를 지금처럼 바라볼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그녀 역시 자신을 지금처럼 바라보지 못할지도 몰랐다.
도혁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니야…….”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졌다.
1.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같은 시각.
하니는 회사 탕비실에서 종이컵에 물을 따르고 있었다.
밤새 뒤척인 탓인지 머리가 무거웠다.
서은재의 사진을 본 뒤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사진 속 도혁은 자신이 알던 사람과 달랐다.
지금처럼 차갑지도 않았고, 무슨 말을 하든 한 번 더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옆의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하니는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을 정말 많이 사랑했나 봐.’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팠다.
자신은 계약이 끝났는데도 그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혁에게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기다리고 있는 사람.
그렇다면 자신이 그에게 다가가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니 씨?”
동료의 목소리에 하니가 고개를 들었다.
“네?”
“괜찮아요? 물만 계속 마시고 있길래.”
하니는 컵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아, 네. 잠을 조금 못 자서요.”
“요즘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별일 없어요.”
그 말이 입에 너무 익숙하게 붙어 있었다.
별일 없다고.
괜찮다고.
힘들지 않다고.
하니는 자신이 언제부터 이런 말을 쉽게 하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였을까.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 뒤였을까.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였을지도 몰랐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최민석이었다.
점심 먹었어?
하니는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아직!
또 빵으로 때우려고 하지?
아닌데?
거짓말하지 마. 오늘 점심 내가 살게. 회사 앞으로 갈까?
하니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응. 고마워 오빠.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민석은 언제나 그랬다.
하니가 괜찮다고 말해도 한 번 더 물어봐 주는 사람.
억지로 웃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사람.
하니는 컵을 비우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아직 몰랐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온 과거가, 누군가에게는 오랫동안 감춰 온 비밀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비밀을 가장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을 잊지 못하고 있는 남자라는 사실을.
2. 네가 웃으면 신경이 쓰여
점심시간이 되자 민석이 회사 앞에 도착했다.
하니는 서둘러 로비로 내려갔다.
“오빠!”
“밥 먹으러 가자.”
“오늘은 뭐 사 줄 건데?”
“네가 먹고 싶은 거.”
“진짜?”
“대신 비싼 거 고르면 다음 달까지 굶는다.”
“치사해!”
하니가 웃으며 민석의 팔을 잡았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
서도혁이었다.
그는 외부 미팅을 위해 로비로 내려오던 중 두 사람을 발견했다.
하니는 민석과 함께 있을 때면 편안해 보였다.
말을 할 때마다 웃었고, 민석이 장난을 치면 자연스럽게 받아쳤다.
도혁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멈췄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의 하니는 늘 조금 조심스러웠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살폈고, 자신이 불편해할까 봐 말을 삼키기도 했다.
그런데 민석 앞에서는 달랐다.
자신의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좋으면 좋다고 말했고, 싫으면 싫다고 했다.
도혁은 그 차이가 마음에 걸렸다.
‘저 사람 앞에서는 편한가 보군.’
당연한 일이었다.
오래된 친구라고 했다.
거의 십 년을 알고 지냈다고 했다.
자신은 하니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계약 연애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삶에 들어왔다가, 그녀가 원하자마자 물러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민석이 하니의 팔을 잡고 있는 모습이 불편했다.
하니가 그를 보며 웃는 모습이 신경 쓰였다.
도혁은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차량 준비됐습니다.”
비서의 말에 그는 걸음을 옮겼다.
“출발하죠.”
“네.”
차에 오르기 직전, 도혁은 한 번 더 로비를 돌아봤다.
하니는 이미 민석과 함께 밖으로 나간 뒤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낮게 중얼거렸다.
“……잘 지내는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음 한쪽이 무거웠다.
그녀가 잘 지내기를 바랐다.
자신이 없어도 웃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막상 그녀가 다른 사람과 웃는 모습을 보니, 자신이 그 웃음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혁은 눈을 감았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계약이 끝났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까지 끝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3. 엄마의 오래된 상자
그날 저녁.
하니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민석과 점심을 먹고 나니 한결 나아졌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서은재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하니는 결국 서랍에서 사진을 꺼냈다.
사진 뒷면에 적힌 자신의 이름.
윤하니에게.
누가, 왜 이런 글씨를 남겼을까.
그녀는 휴대전화를 들어 정세린의 명함을 확인했다.
연락할까.
하지만 아직은 무서웠다.
자신이 모르는 과거를 하나씩 알게 될수록, 지금까지 믿어 온 것들이 무너질 것 같았다.
하니는 사진을 내려놓고 방을 둘러봤다.
어머니가 쓰던 물건들은 대부분 정리했지만, 아직 버리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작은 나무 상자.
어머니가 생전에 침대 아래에 보관해 두었던 상자였다.
하니는 그 상자를 열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안에는 오래된 편지와 사진, 작은 액세서리들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할 때 발견했지만, 당시에는 슬픔이 너무 커서 제대로 살펴볼 수 없었다.
하니는 천천히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어머니의 글씨가 적힌 편지 몇 장.
어린 시절 자신이 그린 그림.
그리고 낡은 사진 한 장.
하니는 사진을 집어 들었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가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젊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그런데 사진 속 어머니 옆에는 낯익은 여자가 서 있었다.
하니의 손끝이 떨렸다.
서은재였다.
분명히 서은재였다.
사진 속 은재는 도혁과 함께 찍힌 사진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웃고 있었다.
하니는 사진을 가까이 가져갔다.
뒷면을 뒤집자 작은 글씨가 보였다.
서정 언니와 함께. 2008년 여름.
하니의 숨이 멎었다.
서정 언니.
어머니의 이름은 윤서정이었다.
그렇다면 서은재는 어머니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아는 사이가 아니라, 함께 사진을 찍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는 뜻이었다.
하니는 사진을 내려놓고 편지들을 뒤적였다.
그러다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봉투에는 받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앞면 한가운데, 어머니의 글씨로 짧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
은재에게.
하니는 손을 멈췄다.
은재에게.
어머니가 서은재에게 쓴 편지였다.
그녀는 한참 동안 봉투를 바라봤다.
열어 봐도 되는 걸까.
어머니가 숨기고 싶어 했던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진 속 자신의 이름을 생각하자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하니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오래된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종이는 누렇게 변해 있었고, 글씨는 군데군데 번져 있었다.
하니는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은재야.
네가 부탁한 일은 내가 끝까지 지킬게.
하지만 하니에게까지 이 일이 이어지는 건 원하지 않아.
하니는 숨을 삼켰다.
자신의 이름이었다.
편지에는 분명히 하니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몰라야 해.
네가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하니만큼은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줘.
하니의 눈앞이 흐려졌다.
무슨 뜻일까.
서은재가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는 것.
어머니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니는 편지를 더 읽었다.
하지만 그 아래쪽은 물에 젖은 듯 번져 있었다.
몇 글자는 알아볼 수 있었지만, 문장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나마 마지막에 적힌 문장만은 선명했다.
도혁 씨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마.
하니는 편지를 놓칠 뻔했다.
서도혁.
어머니는 서도혁을 알고 있었다.
서은재뿐만 아니라, 서도혁까지.
하니는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동안 자신은 도혁과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했다.
비 오는 날 길에서 부딪쳤고, 며칠 뒤 면접장에서 다시 만났다.
그것이 전부라고 믿었다.
하지만 정말 우연이었을까.
어머니와 서은재가 알고 지냈고, 서은재가 서도혁을 사랑했으며, 어머니가 도혁에게 무언가를 숨겼다면.
자신과 도혁의 만남은 정말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니는 편지를 가슴에 안았다.
“엄마…….”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는 대체 뭘 알고 있었던 거야?”
대답은 없었다.
오래된 방 안에는 시계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하니는 처음으로 어머니가 남긴 과거가 두려워졌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모습.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던 비밀.
그리고 그 비밀의 한가운데에 서도혁이 있다는 사실.
하니는 한참 동안 울었다.
어머니가 그리워서였을까.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이 서러워서였을까.
아니면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게 된 도혁의 슬픔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4. 말하지 못한 사람
다음 날 아침.
도혁은 평소보다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윤서정과 서은재의 관계를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하니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눈빛이 달라졌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은 아직도 그녀 안에 남아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어머니가 숨긴 과거를 캐묻는 건 잔인한 일이었다.
도혁은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서정 씨와 관련된 자료는 더 확인됐습니까?”
“현재 확인 중입니다. 다만 과거 서은재 씨와 함께 일했던 기록이 일부 발견됐습니다.”
“함께 일했다고요?”
“네. 두 분이 같은 기관에서 근무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도혁은 미간을 좁혔다.
“어떤 기관입니까?”
“당시 아동 지원 사업과 관련된 단체로 확인됩니다. 다만 세부 기록은 아직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아동 지원 사업.
도혁은 그 말을 되뇌었다.
은재가 한때 봉사 활동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좋아했고, 언젠가 작은 공간을 만들어 어려운 아이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윤서정과 함께 일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추가 자료가 나오면 바로 알려 주세요.”
“네, 대표님.”
도혁은 전화를 끊었다.
그는 하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보이던 표정.
크림치즈 허니 토스트를 먹으며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말하던 목소리.
도혁은 눈을 감았다.
자신이 알고 싶은 진실이 하니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면, 어디까지 알아내야 하는 걸까.
진실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그녀에게 더 나은 일일까.
그는 한참 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하니가 원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캐묻지 않기로.
적어도 그녀가 먼저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하지만 그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전 열한 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대표실 문이 열리고 비서가 들어왔다.
“대표님, 윤하니 씨가 찾아왔습니다.”
도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니 씨가요?”
“네. 잠시 이야기하고 싶다고 합니다.”
도혁은 잠깐 말을 잃었다.
계약이 끝난 뒤 하니가 먼저 자신을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비서가 나가자 도혁은 책상 위 서류를 정리했다.
괜히 손이 바빴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계약을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려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자신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겠다고 말하려는 걸까.
잠시 후 문이 열렸다.
하니가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봉투가 들려 있었다.
도혁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눈가가 조금 붉었다.
“무슨 일입니까?”
하니는 대답 대신 봉투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도혁의 시선이 사진으로 향했다.
서은재.
그리고 윤서정.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도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이 사진을…… 어디서 났습니까?”
하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마 유품에서요.”
도혁은 사진을 집어 들었다.
사진 뒷면에는 오래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서정 언니와 함께. 2008년 여름.
그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조금씩 맞춰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중요한 조각이 남아 있었다.
하니가 왜 이 사진을 자신에게 가져왔는지.
그녀는 무엇을 알고 있는지.
도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니 씨는……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하니는 그를 바라봤다.
“저도 알고 싶어요.”
“…….”
“우리 엄마가 왜 서은재 씨를 알고 있었는지. 왜 엄마가 은재 씨에게 편지를 썼는지. 그리고 왜…….”
하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엄마가 대표님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했는지요.”
도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니는 눈물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엄마가 저한테 숨기는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저한테는 솔직한 사람이라고 믿었어요.”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런데 제가 모르는 엄마의 과거가 있었어요. 대표님과도 관계가 있었고요.”
“하니 씨.”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하니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대표님은 뭘 알고 계세요?”
도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은재가 어디에 있는지.
왜 사라졌는지.
윤서정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하니가 이 모든 일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저도 아직은 모릅니다.”
하니의 표정이 굳었다.
“……정말요?”
“네. 다만 서은재 씨가 사라지기 전, 당신의 어머니와 관련된 무언가를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엄마가…….”
하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가 서은재 씨가 사라지는 데 관여했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편지에 적혀 있었어요.”
도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슨 편지요?”
하니는 가방에서 어머니가 남긴 편지를 꺼냈다.
“엄마가 은재 씨에게 쓴 편지예요.”
도혁은 편지를 받아 들었다.
첫 줄을 읽는 순간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네가 부탁한 일은 내가 끝까지 지킬게.
그 아래 문장.
도혁 씨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마.
도혁은 편지를 움켜쥐었다.
“이걸…… 언제 발견했습니까?”
“어제요.”
“하니 씨.”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혹시 이 편지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했습니까?”
하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직 아무에게도요.”
도혁은 한동안 편지를 바라봤다.
은재가 사라진 뒤, 자신은 수없이 그녀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가장 신뢰했던 사람의 흔적은 한 번도 찾지 못했다.
윤서정.
그녀는 은재와 함께 있었고, 무언가를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에는 자신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도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니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도혁은 깨달았다.
이제는 하니를 진실에서 완전히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그녀의 어머니가 남긴 편지에는 분명히 하니의 이름이 있었고, 자신과 은재의 이야기가 있었다.
무엇보다 하니는 더 이상 모른 채 살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도혁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니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알고 싶어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요?”
“과거를 알아가는 과정이요. 당신이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니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