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밀어붙인다고 길이 열리지는 않는다
作 앙상블 · 2026-10-22
# 《퍼펙트큐》
## 제1부 무너진 큐
### 제5화. 밀어붙인다고 길이 열리지는 않는다
민호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봤다. 회사 메신저에 새로 올라온 공지 때문이었다. 지난주 인사 발표 이후 별다른 변화가 없던 부서에 새로운 업무 배분표가 올라와 있었다. 민호가 오랫동안 맡아 온 신규 사업 검토 업무의 일부가 박준호에게 넘어가 있었다.
그는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
준호는 입사한 지 십 년도 되지 않은 직원이었다. 머리가 빠르고 보고서를 간결하게 쓰는 재주가 있었다. 민호도 그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현장 실무에서 생기는 문제를 처리하고, 거래처와 의견을 조율하고, 예상하지 못한 위험을 찾아내는 일은 보고서 한 장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일을 민호는 오랫동안 해 왔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해 온 일의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했다.
민호는 휴대전화를 껐다. 아직 출근도 하지 않았는데 속이 답답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준호가 먼저 다가왔다.
“부장님, 업무 배분표 보셨습니까?”
“봤어.”
“제가 맡게 된 부분은 기존 자료를 정리하고 사업 일정 관리하는 쪽이라고 합니다. 부장님께서 검토하셨던 자료를 좀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준호의 말투에는 특별한 의도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민호는 그 조심스러움마저 자신을 의식한 행동처럼 받아들였다.
“자료는 공유 폴더에 있어. 읽어 보면 알 거야.”
“네. 혹시 따로 설명해 주실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필요하면 내가 연락하지.”
준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리로 돌아갔다.
민호는 자신의 말이 조금 차갑게 들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사과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 놓였는지 아직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전 회의에서는 새로운 사업 일정이 논의됐다. 준호가 정리한 일정표는 깔끔했다. 단계별 업무와 담당자가 한눈에 들어왔고, 상급자들이 확인하기에도 편리했다. 회의 참석자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호는 자료를 넘기다가 일정표 한쪽에 표시된 납품 예정일을 발견했다.
“이 날짜는 확인했나?”
준호가 화면을 바라봤다.
“네. 기존 계획에 맞춰 넣었습니다.”
“기존 계획이 바뀌었어. 협력업체 쪽에서 지난주에 납품 일정을 조정해 달라고 연락이 왔을 텐데.”
준호는 급히 메일을 확인했다. 잠시 뒤 얼굴이 굳었다.
“죄송합니다. 메일은 받았는데 일정표에 반영하지 못했습니다.”
회의실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민호는 그제야 자신이 이 업무를 맡아 온 이유를 다시 떠올렸다. 자료를 정리하는 것과 실제 업무가 굴러가도록 관리하는 것은 달랐다. 작은 변경 하나를 놓치면 뒤에 연결된 일정 전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일정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납품이 늦어지면 다음 단계도 영향을 받습니다.”
민호는 수정해야 할 항목들을 짚었다. 회의는 잠시 길어졌지만 큰 문제로 번지기 전에 일정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 준호가 민호를 찾아왔다.
“부장님, 아까 지적하신 부분은 제가 놓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변경 사항부터 확인해.”
“네. 그런데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민호는 준호를 바라봤다.
“이 업무를 제가 맡게 된 건 부장님께서 다른 일을 하시게 돼서 그런 겁니까? 아니면 제가 앞으로 이쪽을 더 맡게 되는 겁니까?”
질문은 조심스러웠지만 분명했다. 민호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인사 담당자는 새로운 역할을 준비하라는 말만 남겼고, 부서장은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한 조정이라고 설명했다. 어느 쪽도 민호가 납득할 만한 구체적인 계획을 말해 주지는 않았다.
“나도 아직 설명을 들은 게 많지 않아.”
민호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맡은 부분은 제대로 해 보겠습니다.”
준호가 돌아간 뒤 민호는 모니터를 바라봤다. 아까 회의에서 일정 오류를 지적할 때는 자신이 여전히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승진 탈락을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자신이 잘하는 일이 있다는 것과 조직에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민호는 혼자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부서장에게 메시지가 왔다. 오후에 잠깐 이야기를 나누자는 내용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업무 조정에 관한 이야기였다.
“준호 씨가 일정 관리 쪽을 맡으면 자네는 사업 위험 분석과 대외 협의에 집중할 수 있겠어. 그동안 자네가 해 온 경험을 더 활용하자는 취지야.”
민호는 부서장의 말을 들으며 손가락을 맞잡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제 역할이 어떻게 바뀌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일단 업무를 나눠서 진행해 보자는 거야. 결과를 보고 다음 계획을 세우면 되겠지.”
“인사 발표 때 말씀하신 새로운 역할도 이 업무와 연결되는 겁니까?”
부서장은 잠시 말을 멈췄다.
“아직 확정된 건 없어. 지금부터 성과를 보여 주면 기회가 생길 수도 있겠지.”
민호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왜 불편한지 분명히 알 것 같았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성과를 보여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성과를 보여야 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무엇을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 어떤 기준으로 평가받을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민호는 더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 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여 봐야 원하는 답을 얻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불만을 가라앉혀 주지는 않았다.
퇴근 무렵 준호가 다가와 말했다.
“부장님, 오늘 일정표 수정본을 보내 드렸습니다. 협력업체 쪽에도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래. 확인해 볼게.”
민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오늘 회의에서 놓친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야. 다만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확인 절차를 만들어 둬.”
준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민호는 자신의 말이 처음보다 부드러워졌다는 것을 느꼈다. 준호가 승진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미워할 필요는 없었다. 준호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일부러 움직였다는 증거도 없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완전히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민호는 사무실을 나서면서 자신이 지금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생각했다. 준호와 경쟁하는 것인지, 자신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은 조직과 싸우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지나간 승진 발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과 싸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날 저녁 민호는 태성당구장으로 향했다.
당구장 안에서는 재식이 다른 손님과 경기를 하고 있었다. 민호는 구석에 가방을 놓고 빈 당구대를 골랐다. 혼자 연습할 생각이었다. 공을 배치하고 큐를 잡았지만,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첫 번째 시도에서 수구는 제1적구를 비껴갔다.
민호는 곧바로 공을 다시 놓았다. 이번에는 힘을 더 주었다. 수구가 제1적구를 맞혔지만, 예상보다 크게 튀어 나가면서 두 번째 적구를 맞히지 못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공을 놓고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는 꼭 맞히겠다는 생각에 어깨가 굳었다. 큐가 수구를 때리는 순간, 공은 처음 생각했던 길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오늘은 공이 말을 안 듣나 봅니다.”
태성이 옆으로 다가왔다.
“제가 힘을 너무 주는 모양입니다.”
“그럴 때가 있죠.”
민호는 큐를 세워 놓고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회사에서 부서장과 이야기할 때도 그랬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한마디를 더 보탤수록 상대가 자신의 뜻을 알아주기보다 대화가 더 꼬일 것 같았다. 그래서 참았다. 그런데 참는 동안 속으로는 계속 힘을 주고 있었던 셈이었다.
재식이 경기를 마치고 다가왔다.
“한 게임 하시겠습니까?”
민호는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당구대 앞에서 가볍게 인사했다.
“열심히 치겠습니다.”
뱅킹이 끝나고 재식이 먼저 초구를 쳤다. 수구는 제1적구를 맞힌 뒤 쿠션을 따라 움직였지만, 마지막에 두 번째 적구를 비껴갔다. 재식은 당구대에서 물러나 다음 배치를 살폈다.
민호에게 차례가 돌아왔다.
수구와 제1적구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두 번째 적구까지 이어지는 길도 아주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민호는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득점하고 싶었다. 조금 전까지의 실패를 만회하고, 재식에게도 자신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 마음이 앞서자 큐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민호는 수구를 강하게 밀었다. 수구는 제1적구를 맞혔지만 쿠션을 돌아 나오는 길이 예상보다 길어졌다. 두 번째 적구를 맞히지 못한 채 당구대 반대편으로 흘러갔다.
민호는 큐를 내려놓았다.
“너무 세게 쳤네요.”
재식이 당구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맞히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가 있죠. 저도 점수 차가 벌어지면 가끔 서두릅니다.”
민호는 재식을 바라봤다. 재식이 자신을 달래려고 하는 말인지, 실제로 그런 경험이 있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재식은 자신의 실수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
경기는 이어졌다. 재식은 차분하게 득점을 쌓아 갔다. 민호도 한두 번 좋은 기회를 만들었지만, 득점으로 연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점수 차가 벌어지자 민호의 마음은 다시 조급해졌다. 한 점이라도 빨리 따라잡고 싶었다.
재식이 어려운 옆돌리기를 성공시켰을 때, 민호는 큐를 가볍게 두드려 그 공을 인정했다. 그리고 자기 차례가 돌아오자 당구대 주위를 돌았다. 이번 배치에서는 무리하게 득점을 노리기보다 수구의 이동을 짧게 가져가는 편이 나아 보였다.
그는 큐를 내려놓고 한 번 더 각도를 확인했다. 처음 생각했던 길은 득점 가능성이 있었지만, 실패하면 다음 공이 더 어려워질 수 있었다. 반면 다른 길은 득점 가능성이 조금 낮아 보여도 수구를 다루기가 나을 것 같았다.
민호는 두 번째 길을 선택했다.
수구는 제1적구를 맞힌 뒤 쿠션으로 향했다. 민호가 예상했던 만큼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두 번째 적구를 향해 움직였다. 마지막 순간 공이 살짝 빗나갔다.
득점은 실패였다.
민호는 잠깐 아쉬워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곧바로 공을 다시 놓으려 하지 않았다. 수구가 어디에 멈췄는지 살펴보고, 처음 예상했던 경로와 실제 경로의 차이를 확인했다.
재식이 말했다.
“방금 선택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점수는 못 냈는데요.”
“그렇다고 선택까지 전부 잘못된 건 아니죠. 다만 다음에는 두께를 조금 조정해야겠네요.”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에서는 결과가 좋지 않으면 자신이 잘못 판단한 것인지, 조건이 바뀐 것인지, 다른 사람이 놓친 것이 있는지부터 따졌다. 그 과정은 필요했다. 하지만 결과가 나빴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모든 판단을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반대로 자신이 옳았다는 생각만 붙잡고 결과를 외면해서도 안 됐다.
그는 그 차이를 당구대 앞에서 조금씩 배워 가고 있었다.
경기가 끝났을 때 재식이 이겼다. 민호는 점수판을 바라보다가 큐를 정리했다.
“오늘도 제가 졌네요.”
“오늘은 지난번보다 공을 보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그게 점수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죠. 보는 것과 실제로 맞히는 건 또 다르니까요. 그래도 그 과정이 쌓여야 합니다.”
민호는 재식에게 인사했다.
“잘 쳤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경기에서 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지는 동안 무엇을 잘못했는지 몇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점수판만 보고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민호는 부서장과 나눴던 대화를 다시 생각했다. 자신의 역할이 어떻게 바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했다. 언젠가는 다시 물어야 했다. 필요하다면 자신이 맡아 온 업무와 성과를 정리해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생각도 있었다.
다만 오늘 당장 모든 것을 뒤집어야 한다는 생각은 조금 누그러졌다.
준호가 실수한 일정은 수정됐다. 자신이 맡아 온 위험 분석 업무는 여전히 필요했다. 승진에서 탈락했다는 사실과 자신이 해 온 모든 일이 쓸모없다는 판단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민호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맞은편 건물 유리창에 퇴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쳤다. 그중 한 사람의 어깨가 유난히 굳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는 어깨를 천천히 내렸다.
밀어붙인다고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힘을 줄이고, 각도를 다시 보고, 지금 놓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됐다. 길을 살핀 뒤에는 결국 자신이 선택한 방향으로 큐를 밀어야 했다.
민호는 신호가 바뀌자 걸음을 옮겼다.
회사에서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현우와 나눌 대화도 남아 있었다. 당구 실력 역시 한참 부족했다.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세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덤비지 않기로 했다.
하나씩 살펴보고, 하나씩 선택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것.
지금 민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