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다시, 두부김치 하나
作 루시엘 · 2026-10-26
# 《두부참이슬》
루시엘 지음
## 26화. 다시, 두부김치 하나
오전 열한 시.
태성그룹 대표이사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강태준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싱가포르 법인장 파견 검토안.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와의 대화로 끝날 줄 알았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사회에 검토안이 올라갔고, 자신이 부임 예정자로 기재되어 있었다.
아직 최종 결정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똑똑.
“들어와.”
문이 열리고 최도윤이 들어왔다.
“대표님, 오후 두 시에 전략기획실 회의가 잡혔습니다. 싱가포르 법인 관련 안건도 논의될 예정입니다.”
“참석자 명단은?”
“회장님과 주요 임원들이 참석합니다. 대표님께서 직접 의견을 말씀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태준은 서류를 덮었다.
“알겠어. 자료 준비해 줘.”
“네.”
도윤은 돌아서려다가 잠시 멈췄다.
“대표님.”
“왜?”
“서하 씨께는 말씀드리셨습니까?”
태준은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아침에 서하에게 이야기하기는 했다. 다만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회사에서 어떤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지는 아직 자세히 말하지 못했다.
“오늘 저녁에 이야기하기로 했어.”
“잘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해?”
도윤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대표님은 늘 혼자 해결하는 데 익숙하시잖습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혼자 해결한다고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태준은 피식 웃었다.
“너 요즘 윤서하 씨랑 똑같은 말만 한다?”
“서하 씨가 맞는 말씀을 하시는 거겠죠.”
“……너도 나한테 잔소리가 늘었네.”
“대표님이 제 말을 들으시면 잔소리할 일도 줄어들 겁니다.”
태준은 고개를 저었다.
“나가 봐.”
“네. 회의 자료 준비하겠습니다.”
도윤이 나간 뒤, 태준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지금까지 늘 정답을 찾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회사의 이익을 따져야 했고, 직원들의 미래를 고려해야 했고,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다.
감정 때문에 판단을 흐려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기준만으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겼으니까.
그렇다고 서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서하 역시 그런 선택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태준은 휴대전화를 들어 메시지를 보냈다.
서하 씨, 오늘 오후에 회사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어요.
답장은 몇 분 뒤 도착했다.
많이 중요한 회의예요?
네. 싱가포르 법인 관련 문제예요.
잠시 후 서하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태준 씨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오늘 저녁에 다 이야기해 줘요. 제가 들을게요.
태준은 그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그리고 답장을 보냈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이번에는 서하의 답장도 빨랐다.
저도 사랑해요. 그러니까 밥부터 먹어요.
태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못 당하겠네.”
그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서류를 다시 펼쳤다.
오늘은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지킬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지.
모두 직접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오후 두 시.
태성그룹 전략회의실.
긴 테이블을 따라 임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태준이 들어서자 대화가 멈췄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네. 시작하시죠.”
회의가 시작되고 십여 분이 지났을 때였다.
전략기획실장이 자료를 넘기며 말했다.
“싱가포르 법인 운영과 관련해 현지 조직 개편이 필요합니다. 본사와의 협업을 강화하고, 신규 사업을 안정적으로 추진하려면 책임자를 파견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판단입니다.”
화면에 사업 계획이 나타났다.
“현재 후보자로 강태준 대표님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파견 기간은 최소 12개월이며, 현지 사업 성과에 따라 연장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태준은 자료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직접 검토했던 사업이었다.
현지 법인의 실적을 개선하고, 아시아 시장에서 회사의 입지를 확대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었다.
한 임원이 입을 열었다.
“대표님께서 직접 가신다면 의사결정 속도가 빨라질 겁니다. 현지 임직원들의 신뢰도 얻기 쉬울 것이고요.”
다른 임원도 동의했다.
“장기적으로도 도움이 될 겁니다. 대표님께서 해외 사업을 직접 경험하시면 향후 경영 전략을 세우는 데도 큰 자산이 될 테니까요.”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의견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럼 파견을 전제로 일정을 조율해도 되겠습니까?”
회의실의 시선이 태준에게 모였다.
태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결정된 사안이 아닙니다.”
전략기획실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 최종 결정은 이사회와 회장님께서 하시겠지만, 대표님께서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계신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것과 수락하는 것은 다릅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태준은 준비해 온 자료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현지 사업의 중요성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제가 직접 파견되지 않더라도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이 있는지 먼저 검토해야 합니다.”
그는 화면을 넘겼다.
현지 경영진에게 권한을 확대하는 방안, 본사에서 프로젝트 책임자를 파견하는 방안, 일정 기간 집중 지원한 뒤 현지 체제로 전환하는 방안 등이 정리되어 있었다.
“이 세 가지 방안을 비교한 뒤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제가 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면 그 이유와 기대 성과를 명확하게 확인하고 싶습니다.”
임원 한 명이 물었다.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결정을 미루시는 겁니까?”
태준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질문 자체를 불쾌하게 여겼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숨기지 않기로 했다.
“개인적인 사정도 제 삶의 일부입니다. 다만 오늘 이 자리에서 검토해야 할 것은 회사의 사업 목표와 가장 효과적인 실행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그 책임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검토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파견을 기정사실로 만들지는 말아 주십시오.”
회의실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회의실 문 쪽에 앉아 있던 강현석 회장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대표가 제시한 대안을 검토하도록 하죠.”
태준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회장의 표정은 여전히 무거웠다.
“다만 결과가 나오면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회의는 다른 안건으로 넘어갔다.
태준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자신의 의견을 말했지만, 아직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회의실을 나서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서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회의 끝났어요. 오늘 저녁에 이야기해요.
잠시 뒤 답장이 왔다.
고생했어요. 저녁은 제가 살게요.
태준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제가 살게요.
안 돼요. 오늘은 제가 살 거예요.
그럼 반씩 내요.
……그건 괜찮네요.
태준은 작게 웃었다.
회의실에서 느꼈던 무거운 기분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오후 여섯 시.
두부참이슬.
서하는 주방에서 김치를 볶고 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을 썼다.
두부는 먹기 좋게 썰어 따뜻하게 데웠고, 김치는 태준이 좋아하는 정도로 볶았다. 너무 맵지도, 너무 짜지도 않게.
태준이 오늘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알고 싶었다.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중간에 끊지 않고 들어 주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시간이 가까워지자 긴장이 됐다.
‘내가 정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서하는 프라이팬을 내려놓았다.
자신은 경영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회사가 어떤 기준으로 결정을 내리는지, 해외 법인을 운영하려면 어떤 책임이 따르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태준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대신 정해 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혼자 고민하게 두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앞치마에 손을 닦고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아직 연락은 없었다.
“바쁘겠지.”
그녀는 혼잣말을 하며 테이블을 정리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딸랑.
“어서 오세…….”
서하가 고개를 들었다.
태준이었다.
그는 평소보다 조금 지쳐 보였지만, 서하를 보자마자 미소를 지었다.
“사장님.”
“왔어요?”
“네.”
“밥은 먹었어요?”
태준은 잠시 멈췄다.
서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안 먹었죠?”
“네.”
“아이고, 정말.”
서하는 한숨을 쉬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일단 앉아요. 음식부터 줄게요.”
태준은 구석의 자리에 앉았다.
그가 늘 앉던 자리였다.
서하는 두부김치를 접시에 담아 가져왔다.
“자, 오늘의 특별 메뉴입니다.”
태준이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두부김치네요.”
“네. 태준 씨가 좋아하는 거잖아요.”
“맞아요.”
태준은 젓가락을 들었다가 잠시 멈췄다.
“그런데 오늘은…….”
“네?”
“두부김치 하나만 주세요.”
서하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게 두부김치 하나인데요?”
태준은 쑥스럽게 웃었다.
“아, 그러네요.”
서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회의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요.”
“그런가 봐요.”
“얼른 먹어요. 식어요.”
태준은 두부김치를 한 입 먹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요.”
“다행이다.”
서하는 맞은편에 앉았다.
“자, 이제 이야기해 봐요.”
태준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늘 회의에서 싱가포르 법인 문제를 논의했어요.”
“어떻게 됐어요?”
“아직 결정되지는 않았어요. 제가 직접 가지 않고도 사업을 운영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 보기로 했어요.”
서하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럼 안 갈 수도 있는 거예요?”
“네. 다만 그게 최선의 방법인지 아직은 모르겠어요.”
태준은 솔직하게 말했다.
“회사를 생각하면 제가 가는 편이 효율적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는지도 확인해 보고 싶어요.”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준 씨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태준은 잠시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당장은 한국에 있고 싶어요.”
서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요?”
태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여기 있고 싶으니까요.”
“…….”
“회사 일도 중요하고, 제가 맡은 책임도 중요해요. 그건 변하지 않아요. 그런데 제 삶이 회사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잖아요.”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저한테는 서하 씨가 있고, 제가 좋아하는 일상도 생겼어요. 퇴근하고 서하 씨 가게에 오는 것, 같이 밥 먹는 것, 별것도 아닌 일로 장난치는 것들요.”
태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런 것들이 이제는 제 삶에서 굉장히 중요해졌어요.”
서하는 손끝으로 컵을 만지작거렸다.
태준은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서하 씨 때문에 무조건 안 가겠다고 하고 싶지는 않아요. 서하 씨도 그런 선택을 원하지 않을 것 같고요.”
“네. 저는 태준 씨가 저 때문에 중요한 기회를 포기했다고 생각하며 살고 싶지는 않아요.”
서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그렇지만 태준 씨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꼭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회사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요.”
태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원하는 것…….”
“네. 태준 씨도 사람인데,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니에요.”
서하는 작게 웃었다.
“저한테는 늘 뭘 먹고 싶은지, 어디 가고 싶은지 물어보잖아요. 그런데 정작 태준 씨가 뭘 원하는지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아요.”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는 서하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조절하려고 했다.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면 서하가 걱정할까 봐 숨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 보니 정작 자신의 마음은 뒤로 미뤄 두고 있었다.
“……맞아요.”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제가 원하는 게 뭔지 제대로 생각해 봐야겠네요.”
서하는 웃으며 두부김치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일단 먹어요. 생각은 밥 먹고 해도 되니까.”
태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네, 사장님.”
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가게 문을 잠시 닫고 골목을 걸었다.
밤공기는 제법 차가웠다.
태준은 서하가 춥지 않도록 걸음을 조금 늦췄다.
서하는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준 씨.”
“네.”
“혹시 해외로 가게 되면…… 저랑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태준이 걸음을 멈췄다.
“아니요.”
대답은 즉시 나왔다.
서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요?”
“네. 왜 그런 생각을 해요?”
“일 년이면 짧은 시간은 아니잖아요. 지금처럼 자주 만날 수도 없을 거고요.”
태준은 잠시 생각했다.
“힘들겠죠.”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고 싶을 거고, 같이 밥 먹고 싶을 거고, 서하 씨가 힘들 때 바로 옆에 있어 주지 못할 수도 있겠죠.”
그는 서하의 손을 잡았다.
“그렇지만 힘들 거라는 이유만으로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서하의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태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물론 무조건 괜찮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요. 장거리 연애가 쉽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래도 정말 그런 상황이 오면 우리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보고 싶어요.”
“…….”
“만날 수 있는 날짜를 정하고, 서로 바쁜 날에는 미리 이야기하고, 힘든 일이 생기면 숨기지 않고 말하고요. 무엇보다 서로가 어떤 마음인지 계속 확인했으면 좋겠어요.”
서하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렇게 해도 힘들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때도 우리가 어떻게 할지 같이 이야기하면 좋겠어요. 서하 씨 혼자 견디게 하거나, 저 혼자 참고 버티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서하는 그의 손을 더 꼭 잡았다.
“태준 씨.”
“네.”
“나도 해 보고 싶어요.”
태준의 눈이 커졌다.
“……뭘요?”
“태준 씨랑 계속 만나는 거요. 설령 멀리 떨어져 있게 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싶어요.”
서하는 작게 웃었다.
“아직 겁은 나요. 그래도 이제는 무섭다는 이유만으로 먼저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태준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또 고맙대.”
“그럼 사랑한다고 할까요?”
“……그건 괜찮아요.”
태준이 웃었다.
“사랑해요, 서하 씨.”
서하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저도 사랑해요.”
태준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다시 걸었다.
그날 두 사람은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태준이 한국에 남을지, 싱가포르로 갈지 아직 알 수 없었다.
회사의 검토도 끝나지 않았고, 아버지와의 대화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적어도 한 가지를 분명히 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서로를 빼놓고 결정하지 않겠다는 것.
그 약속은 아직 미래를 바꾸지는 못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마음이 향하는 방향은 조금씩 같아지고 있었다.
며칠 뒤.
두부참이슬의 평범한 저녁이었다.
손님들이 하나둘 들어왔고, 서하는 주방과 홀을 오가며 바쁘게 움직였다.
그때 가게 문이 열렸다.
딸랑.
“어서 오세요!”
서하가 고개를 들었다.
태준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구석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사장님.”
“네?”
“두부김치 하나, 참이슬 하나요.”
서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금방 드릴게요.”
태준은 자리에 앉아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낡은 테이블, 오래된 메뉴판,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리고 자신을 향해 웃어 주는 서하.
그 모든 것이 좋았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되든, 이곳은 오래도록 돌아오고 싶은 장소일 것 같았다.
서하가 두부김치를 가져왔다.
“자, 나왔습니다.”
태준은 접시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오늘도 맛있겠네요.”
“당연하죠. 제가 만들었는데.”
서하는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은 회사 어땠어요?”
“회의가 하나 더 잡혔어요.”
“또요?”
“네. 싱가포르 법인 운영 방안을 다시 검토한대요.”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요. 여러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으니까요.”
태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하 씨.”
“네?”
“만약 제가 가게 된다면…….”
서하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태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때도 제가 여기 와도 될까요?”
서하는 눈을 깜빡였다.
“……여기요?”
“네. 두부김치 먹으러요.”
서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싱가포르에서 어떻게 와요!”
태준도 웃었다.
“아, 그러네요.”
“진짜 바보야.”
“네. 서하 씨 앞에서는 바보가 되나 봐요.”
서하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못 오면 제가 갈게요.”
태준의 웃음이 멈췄다.
서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태준 씨가 늘 여기로 왔잖아요. 그러니까 정말 멀리 가게 되면…… 이번에는 제가 갈게요.”
태준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약속이에요?”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신 저 길 잃으면 안 돼요.”
태준은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꼭 데리러 갈게요.”
그는 두부김치를 한 입 먹었다.
따뜻하고 익숙한 맛이었다.
그날도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많았다.
하지만 이제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사랑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세상에 무조건 맞춰 들어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의 세상을 조금씩 열어 주고, 그 안에서 함께할 방법을 찾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태준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며 결심했다.
자신이 어디에 있든, 어떤 일을 맡게 되든, 서하를 자신의 삶에서 빼놓지 않겠다고.
서하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태준의 세상이 무섭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세상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가게도, 자신의 삶도, 자신이 살아온 시간도 모두 소중했다.
태준이 그 모든 것을 존중해 주듯, 자신도 태준의 삶을 존중하고 싶었다.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갈 길은 아직 멀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길을 혼자 걸을 필요가 없었다.
### 26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