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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가짜 남자친구 작전

作 루시엘 · 2026-10-26

# 《두부참이슬》

## 13화. 가짜 남자친구 작전

### 1.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두부참이슬의 오후는 평화로웠다.

점심 장사가 끝난 뒤라 가게 안에는 손님이 없었다. 서하는 카운터에 앉아 지난달 매출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고, 옆 가게 미자는 반찬통을 들고 들어와 냉장고 앞에 놓았다.

“서하야, 이거 먹어 봐.”

“뭔데요?”

“내가 새로 만든 장조림. 간이 괜찮은지 봐 줘.”

서하는 젓가락으로 장조림 하나를 집어 먹었다.

“음, 맛있는데요?”

“그치? 역시 내가 음식 하나는 잘해.”

미자가 어깨를 으쓱하자 서하가 웃었다.

“이모, 그러다 진짜 반찬가게 말고 식당 차리겠어요.”

“아이고, 내가 너처럼 고생을 사서 하겠니? 식당은 무슨. 지금도 허리가 아파 죽겠는데.”

두 사람은 한참을 웃었다.

그때였다.

딸랑.

가게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어서 오세요!”

서하는 습관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웃음이 사라졌다.

문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깔끔하게 다려진 셔츠에 검은색 코트. 손에는 명품 브랜드의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예전보다 조금 마른 듯했지만, 서하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때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남자.

그리고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남자.

이민혁.

서하의 전 남자친구였다.

“……윤서하?”

민혁이 놀란 듯 웃었다.

“와. 진짜 오랜만이다.”

서하는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머릿속에서는 오래전 기억들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비 오는 날 혼자 기다렸던 밤.

끝내 오지 않았던 약속.

자신이 모르는 여자와 다정하게 웃던 그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었던 차가운 말.

너는 좋은 사람이야. 그런데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남자가 아니야.

그 말 한마디로 끝났던 관계였다.

서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무슨 일이야?”

민혁은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서 장사하는 줄 몰랐네. 네가 이런 가게를 하고 있을 줄은.”

그 말투가 마음에 걸렸다.

마치 서하가 예상보다 초라하게 살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미자가 옆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세요?”

민혁은 미자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서하 전 남자친구입니다.”

서하는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

전 남자친구.

그 말을 왜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까.

미자는 서하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 같으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서하가 지금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서 있었다.

“아, 그러세요?”

미자의 목소리가 한층 차가워졌다.

“그런데 전 남자친구가 여기까지 무슨 일로 찾아왔을까요?”

민혁은 웃으며 쇼핑백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그냥 서하가 보고 싶어서요.”

서하의 눈썹이 꿈틀했다.

“할 말 없으면 나가.”

“서하야.”

“내 이름 부르지 마.”

민혁의 표정에서 웃음이 조금씩 사라졌다.

“너 아직도 나한테 화났어?”

서하는 헛웃음을 흘렸다.

“화났냐고?”

“…….”

“민혁아. 우리가 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

“그래도 한때는 좋아했던 사이잖아.”

“한때는 그랬지.”

서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잠깐의 침묵.

민혁은 한숨을 쉬더니 카운터에 놓인 쇼핑백을 밀었다.

“이거 받아.”

“뭔데?”

“선물.”

“필요 없어.”

“네가 좋아하던 브랜드야.”

서하는 쇼핑백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때도 네가 좋아하는 건 잘 기억했지. 내가 싫어하는 건 하나도 기억 못 하면서.”

민혁의 표정이 굳었다.

미자는 입을 다물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서하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장사해야 하니까 나가 줘.”

민혁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서하야,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싫어.”

“5분만.”

“싫다고 했어.”

민혁은 한동안 서하를 바라보다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나 결혼해.”

서하의 손이 멈췄다.

미자도 눈을 크게 떴다.

“뭐?”

“다음 달에 약혼식 해. 그래서 그전에 너한테 사과하고 싶었어.”

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과?

이제 와서?

자신은 그를 잊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울었는지 모른다. 그가 떠난 뒤 한동안 누군가를 믿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런데 민혁은 이제 와서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하며 사과하고 싶다고 했다.

마치 자신이 모든 걸 정리한 뒤, 남은 양심을 조금 덜어 내러 온 사람처럼.

서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축하해.”

민혁이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뭐?”

“결혼한다며. 축하한다고.”

서하는 억지로 웃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이었다.

그가 누구와 결혼하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제 서로 갈 길 가자. 나도 내 생활이 있고, 너도 네 생활이 있잖아.”

민혁은 서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너는?”

“뭐가?”

“남자친구 없어?”

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혁은 그 침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아직 혼자구나.”

그 말에 미자가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이 양반이!”

서하가 재빨리 미자의 팔을 잡았다.

“이모, 괜찮아요.”

하지만 민혁은 멈추지 않았다.

“서하야. 너 좋은 사람이야. 그런데 네가 아직도 이런 식으로 살고 있을 줄은 몰랐어.”

그 순간 서하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졌다.

“……뭐?”

“아니, 내 말은.”

“네가 뭔데 내 생활을 평가해?”

민혁은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

서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여기서 장사를 하든, 혼자 살든, 누구를 만나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서하야, 난 그냥…….”

“사과하러 왔다며. 그럼 사과만 하고 가.”

서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가 나한테 상처 준 거, 나도 이제 다 잊었어. 그러니까 제발 네가 잘났다는 듯이 굴지 마.”

민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후 그가 조용히 물었다.

“정말 다 잊었어?”

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가게 문이 다시 열렸다.

딸랑.

“사장님, 저 왔습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강태준이었다.

그는 문을 닫다가 가게 안의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서하는 굳은 얼굴로 서 있었고, 미자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다. 그리고 카운터 앞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태준은 서하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민혁이 태준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누구세요?”

태준은 천천히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서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하 씨?”

그 다정한 목소리에 서하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혼자이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의 편이 되어 줬으면 했다.

민혁에게 더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더 이상 예전의 윤서하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다.

서하는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그리고 태준에게 다가갔다.

“태준 씨.”

“네.”

서하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태준의 눈이 커졌다.

“……저 사람.”

서하는 민혁을 바라봤다.

“내 전 남자친구예요.”

태준의 표정이 조용히 굳었다.

서하는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태준 씨는…….”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기다려 주겠다는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서하는 그의 팔을 조금 더 꼭 붙잡았다.

“제 남자친구예요.”

순간 가게 안이 조용해졌다.

미자의 입이 벌어졌다.

민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태준을 바라봤다.

그리고 태준은…….

서하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손이 자신의 팔에 닿아 있었다.

작은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태준은 그 떨림을 느꼈다.

그녀가 지금 얼마나 용기를 내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자연스럽게 서하의 옆에 섰다.

그리고 민혁을 향해 차분히 웃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태준은 서하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가 잠시 멈췄다.

서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태준은 눈빛으로 물었다.

괜찮습니까?

서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태준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강태준입니다. 서하 씨 남자친구예요.”

그 한마디에 서하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자신이 먼저 부탁한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의 입에서 남자친구라는 말이 나오자, 이상하게 얼굴이 뜨거워졌다.

민혁은 태준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남자친구라고요?”

“네.”

“언제부터 만났는데요?”

태준은 서하를 바라봤다.

서하가 작게 눈을 깜빡였다.

둘은 아직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민혁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태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직업은요?”

태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회사 다닙니다.”

“어떤 회사요?”

“그냥 평범한 회사입니다.”

서하는 순간 고개를 숙였다.

‘평범한 회사는 무슨…….’

태성그룹 대표가 평범한 회사에 다닌다고 하면 대한민국에 평범하지 않은 회사가 몇 개나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웃을 수 없었다.

민혁은 태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서하가 원래 남자 보는 눈이 까다로워서.”

그는 서하를 향해 웃었다.

“너무 급하게 만나지는 마. 너 예전에도 사람 잘못 만나서 고생했잖아.”

서하의 얼굴이 굳었다.

그때 태준이 입을 열었다.

“걱정해 주시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서하 씨가 어떤 사람을 만날지는 서하 씨가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민혁의 시선이 태준에게 향했다.

“……네?”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일 때문에 서하 씨가 앞으로 만날 사람까지 의심받아야 할 이유는 없겠죠.”

태준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단단한 힘이 실려 있었다.

“저는 서하 씨를 잘 알아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 서하 씨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제가 직접 판단하겠습니다.”

서하는 태준을 올려다봤다.

가슴 한쪽이 따뜻해졌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

왜 헤어졌는지, 누가 잘못했는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따지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자신을 봐 주고 있었다.

민혁은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다.

“뭐, 두 분이 잘 만나신다면 제가 더 할 말은 없죠.”

그는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서하야. 나중에라도 이야기하고 싶으면 연락해.”

서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럴 일 없을 거야.”

민혁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게를 나갔다.

딸랑.

문이 닫혔다.

그제야 서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 2. 남자친구라는 말

민혁이 나간 뒤에도 서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태준은 그녀의 어깨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내렸다.

“……괜찮으세요?”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정말요?”

“네.”

태준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잡고 있던 자신의 팔을 살짝 내려다봤다.

서하는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그의 팔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그녀는 황급히 손을 놓았다.

“미안해요!”

태준이 웃었다.

“괜찮습니다.”

“아니, 그게…….”

서하는 얼굴이 빨개졌다.

“아까는 정말 미안해요. 갑자기 그런 말 해서.”

“어떤 말이요?”

“남자친구라고 한 거요.”

태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물었다.

“그 말이 후회되십니까?”

서하는 입을 다물었다.

후회하느냐고?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민혁 앞에서 남자친구라고 말한 건 분명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태준에게 미리 설명하지도 않았고, 허락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가 기분 나빴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후회하지는 않아요.”

태준의 눈빛이 달라졌다.

서하는 급히 덧붙였다.

“그냥 상황이 그랬잖아요. 전 남자친구가 자꾸 이상한 말을 하니까…….”

“네.”

“제가 순간적으로 그랬던 거예요.”

“알겠습니다.”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웃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아쉬워 보였다.

서하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기분 나빴어요?”

태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데 왜 그래요?”

“그냥 조금 놀랐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조금…… 기뻤습니다.”

서하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왜요?”

태준은 그녀를 바라봤다.

“서하 씨가 제 팔을 잡아 주셨으니까요.”

“그건 상황이…….”

“네. 알고 있습니다.”

태준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도 저는 좋았습니다.”

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준은 그녀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더는 말을 이어 가지 않았다.

그저 앞치마를 벗어 정리하며 물었다.

“오늘은 제가 두부김치라도 볶아 드릴까요?”

서하는 그를 바라봤다.

“태준 씨가요?”

“네.”

“그럼 손님이 먹는 거예요?”

“물론입니다.”

“맛없으면요?”

태준은 잠시 생각했다.

“……사장님이 책임져 주시면 안 됩니까?”

서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진짜!”

그 웃음소리에 태준도 따라 웃었다.

조금 전까지 무거웠던 가게 안에 다시 따뜻한 공기가 흘렀다.

### 3. 사장님, 질투하세요?

저녁 장사가 시작되기 전.

서하는 주방에서 재료를 손질하고 있었다.

태준은 카운터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 민혁이 했던 말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 남자가 서하에게 어떤 상처를 줬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서하의 표정만 봐도 그 시간이 쉽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태준은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얼마나 아팠는지.

어떤 말을 들었는지.

왜 그 남자가 나타났을 때 그렇게 떨었는지.

하지만 묻지 않았다.

서하가 말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 서하가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태준 씨.”

“네?”

“왜 그렇게 쳐다봐요?”

태준은 당황했다.

“제가요?”

“네.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잖아요.”

“그냥…….”

태준은 솔직하게 말했다.

“예뻐서요.”

서하는 칼을 들고 있던 손을 멈췄다.

“……뭐라고요?”

“예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니, 지금 주방에서 재료 손질하고 있는데요?”

“그래도 예쁩니다.”

서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태준 씨는 진짜 이상해요.”

“네. 서하 씨 때문에 조금 이상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 말 좀 그만해요!”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태준은 웃음을 참았다.

서하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고개만 내밀었다.

“그런데요.”

“네.”

“아까 그 사람…….”

태준의 표정이 조용해졌다.

“네.”

서하는 잠시 망설였다.

“그 사람은 제가 예전에는 정말 좋아했던 사람이에요.”

태준은 아무 말 없이 들었다.

“그때는 그 사람이랑 결혼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헤어지고 나서도 한동안 힘들었고요.”

서하는 앞치마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다시 만나도 괜찮을 줄 알았어요.”

“…….”

“막상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그때 생각이 나서 기분이 나빴어요. 제가 아직도 그 사람 때문에 흔들리는 것 같아서 싫었어요.”

태준은 조용히 물었다.

“그 사람을 아직 좋아하시는 겁니까?”

서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대답은 빨랐다.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때의 제가 싫은 것 같아요. 그 사람한테 그렇게까지 매달렸던 제가요.”

태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때의 서하 씨도 지금의 서하 씨도 잘못한 건 없습니다.”

서하의 눈이 흔들렸다.

“…….”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했다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 마음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때의 서하 씨가 바보였던 것도 아니고요.”

서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태준은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요.”

그는 작게 웃었다.

“저도 지금 용기를 내고 있는 중입니다.”

서하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용기요?”

태준은 그녀를 바라봤다.

“서하 씨를 좋아한다고 계속 말하는 용기요.”

서하는 숨을 멈췄다.

태준은 더 다가오지 않았다.

“제가 서하 씨를 좋아한다고 해서, 서하 씨도 저를 좋아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저는 그저 제 마음을 솔직하게 전하고 싶습니다.”

서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마음속 깊이 들어왔다.

예전의 사랑은 늘 불안했다.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확인하고 싶었고, 조금이라도 연락이 늦으면 불안했다. 자신이 더 많이 좋아하는 것 같으면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태준은 달랐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리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