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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스타가 이렇게 한가해도 돼?

by 영우 · 2026-10-27

연무가 돌아간 뒤에도, 여화는 한참을 대표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목덜미가 뜨끈했다.

여화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시스템 에어컨 구멍, 아직 전선만 늘어진 조명 자리, 시멘트 기둥. 한 바퀴를 다 훑어도 렌즈는 없었다. 범이가 쌓아 둔 자재 더미 덕에 골목의 블랙박스도 여기까진 닿지 않았다.

이 방엔 카메라가 없는데, 대체 왜 이럴까.

여화는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지그시 눌렀다. 15년 동안 전장을 구르며 이 몸이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언가 저를 음흉하게 노리면 본능적으로 살결이 먼저 달아올랐으니까.

그럼 방금 가슴 깊은 곳까지 훅 끼쳐 왔던 그 맹렬한 열감은 뭐였을까.

카메라의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강연무 그 꼬맹이의 지독한 시선 때문이었다는 걸 여화는 애써 부정했다.

"……피곤해서 그래."

여화는 그렇게 결론 내리고 일어섰다. 그날 밤, 여화는 집에 오자마자 쓰러지듯 잠들었다.

* * *

"여화야아아아!"

아, 시끄러.

여화는 속으로 욕을 한 번 하고 무시했다.

"아니, 무슨 잠을 서른 시간을 자!"

"……너 어떻게 들어왔어. 누가."

테이프가 늘어지는 것 같은 나른한 목소리였다.

"응? 엄마가."

천진난만한 대답에 여화는 그저 어이가 없었다. 엄마. 그래, 엄마였겠지. 여화는 오히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범이가 그 이불을 홱 걷어 내고 여화를 흔들었다.

"빨리 좀 일어나 봐. 허리도 안 아프냐? 맨날 움직이던 애가 이러면 몸 굳는다니까?"

"허."

헛웃음 한 번. 여화의 다리가 범이의 목을 감았다.

유연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체술이었다. 여화가 침대를 짚고 가볍게 몸을 비틀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범이의 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여화는 새하얀 맨발 하나를 범이의 뒤통수 위에 얌전히 얹은 채, 고개만 까딱였다.

"뭐라고 했니?"

"읍, 으으……."

범이가 바닥을 탁탁 치며 항복하자 그제야 발이 치워졌다.

"와, 중력이 바뀐 줄 알았네. 무슨 힘이 더 세졌어? 나이를 거꾸로 먹냐?"

석 달을 쉬었는데 이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놈은 어쩜 이렇게 종이 인형처럼 넘어가는지. 범이는 목을 주무르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됐고. 씻어. 나가게."

"……어딜."

"넌 친구가 여태 뭐 하고 살았는지 안 궁금하냐? 내 직장 구경 가자고."

"너무 이른데."

"해가 기울고 있거든요?"

여화의 발이 다시 쭉 뻗어지는 순간, 범이는 한 발짝 더 물러섰다.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집에 돌아온 뒤 엄마가 여화 방에 따로 달아 준 것이었다. 전화보다 버튼 하나 누르는 게 편하다면서.

[우리 딸, 밥 먹어야지. 범이 데리고 넘어와.]

"응. 씻고 갈게."

석 달 전 집에 온 첫날 먹었던 엄마 밥이 떠오르자, 갑자기 배가 고팠다. 여화는 양치와 세수만 하고, 롱 니트 티 하나를 걸친 채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어 내렸다.

"가자."

바닥에 앉아 있던 범이가 냉큼 일어나 졸래졸래 따라왔다.

* * *

"엄마!"

부엌으로 들어선 여화는 걸음을 멈췄다. 식탁에 남자 셋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중 지극히 한국 남자 평균 덩치를 한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어, 오빠!"

여화는 쪼르르 달려가 박 대표에게 안겼다.

"와, 요 기집애 좀 봐라? 이제는 기집애라고 부르지도 못하겠네. 왜 이렇게 예뻐졌어? 아주 귀티가 흐른다, 흘러."

"당연하지, 누구 동생인데. 보고 싶었어, 오빠."

평소의 나른한 여화라면 절대 하지 않을 애교 섞인 어리광이었다. 옆에 서 있던 범이는 그걸 보며 여화가 오늘 기분이 최고조라는 걸 눈치챘다.

여화는 가운데 앉은 남자와도 눈을 맞췄다.

"안녕, 연무야."

"……어."

그저께 공사장에서 피자 열 판을 들고 뻔뻔하게 들이대던 톱스타는 어디 가고, 오늘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박 대표는 그 모습을 보며 킥킥댔고, 연무의 매니저인 김군은 신기하다는 듯 여화를 바라보았다.

"연무랑은 그저께 봤다며?"

"응. 피자 사 왔더라."

박 대표가 또 킥킥거렸다. 필승 전략을 문자로 보내 준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이 친구는 연무 매니저. 처음 보지?"

"와, 말로만 듣던 대표님 사촌 동생분이시죠? 이모님 따님……."

"그래 김군아. 예쁘다고 반하는 건 좋은데, 들이대지는 마라. 저래 봬도 성격이 아주 지랄맞……."

"에헴."

박 대표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식탁 밑에서 정강이를 정확히 걷어차인 얼굴이었다.

"……뭐, 내 성격은 각자 알아서 파악하라는, 뭐 그런 뜻이지."

여화는 범이의 밥그릇을 먼저 챙겨 주고는 자연스럽게 연무의 맞은편에 앉았다.

마주 앉으니, 연무는 괜히 입맛이 돌았다. 누나가 내 앞에서 밥을 먹는다. 그냥 그것만으로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많이 먹어, 연무야. 너 보니까 너무 말랐다. 오빠가 애를 얼마나 굴리는 거야?"

"야, 최여화! 내가 굴리긴 뭘 굴려? 지가 밤마다 대본 보느라 안 잔 거지!"

"오빠는 좀만 먹어. 배가 무지 나왔던데."

"와, 이모랑 똑같이 말하네."

"그 피가 어디 가겠어."

마침 엄마가 옥상 텃밭에서 갓 뜯은 상추를 한 바구니 가득 들고 들어오자, 식탁 위에 생기가 확 돌았다.

말투는 여전히 차분하고 무심했지만, 여화의 목소리 톤은 평소보다 살짝 올라가 있었다. 제집 식탁이라 완전히 무장 해제된 모습이었다. 연무는 그런 여화의 낯선 얼굴을 멍하니 훔쳐보았고, 엄마와 범이는 그런 연무의 지독한 시선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밥그릇이 거의 비어 갈 즈음, 여화가 불쑥 수저를 내려놓으며 연무를 빤히 바라보았다.

"연무야. 다음엔 저 인간들 빼고 혼자 와서 밥 먹어. 그리고 이 누나만 따로 불러."

"……어? 왜?"

연무의 눈동자가 갈팡질팡 흔들렸다. 여화가 입꼬리를 슥 올리며 나른하게 대꾸했다.

"너처럼 잘생긴 애를 마주 보고 먹어야 소화가 잘될 것 같아서. 너 이렇게 잘생긴 거, 오늘 처음 알았네. 옆에 계신 분들이 너무 칙칙하셔서 그런가?"

"야, 최여화!"

"아, 누님! 저희도 나름 관리하는 남자들입니다!"

박 대표와 김군의 억울한 항의는 엄마와 여화의 시원한 웃음소리에 묻혀 버렸다. 오직 한 사람, 연무만 웃지 못했다.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숨기려 빈 밥그릇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여화에겐 장난이었지만 연무에게는 달콤했던 그 한마디를, 연무는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수백 번은 더 곱씹었다.

* * *

해가 지고 나서야, 여화 귀국 기념이라며 새로 뽑아 보란 듯이 광을 낸 범이의 새빨간 페라리가 요란한 배기음을 뿜으며 이태원 클럽 정문 앞에 멈춰 섰다. 금요일 밤이었다. 음악 하나 새어 나오지 않는 건물 앞에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건물을 두 바퀴나 감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다 너네 손님?"

"당연하지. 내가 좀 한다고."

자부심 가득한 얼굴이 재수 없긴 했지만, 여화는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차가 서자마자 어디선가 홍매가 나타나 여화 쪽 문을 열었고, 발레 직원이 범이에게서 키를 받아 갔다.

줄 선 사람들이 페라리를 향해 하나둘 휴대폰을 들었다. 여화의 목덜미가 따끔해지는 순간, 범이가 자연스럽게 여화 앞을 막아섰다. 반대편은 홍매가 막았다. 여화는 두 남자 사이에 끼어, 렌즈 하나 닿지 않고 입구를 지나갔다.

"어서 와. 와, 오늘도 역시 윤태범이군."

"내 걸작. 예술이지?"

범이가 으스댔다.

홍매는 두 사람을 위아래로 훑었다. 여화는 어깨가 살짝 드러나는 검은 실크 블라우스에 통 넓은 슬랙스, 범이는 같은 결의 검은 셔츠에 슬랙스. 손목시계 줄 색까지 똑같았다. 대놓고 커플룩은 아닌데, 나란히 서 있으면 누가 봐도 드레스 코드를 맞춘 한 쌍이었다.

이 녀석, 또 저 혼자 신나서 맞춰 입혔구먼.

홍매가 범이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야, 늦었잖아. 애들 오픈도 못 하고 두 시간째 대기야."

"괜찮아. 오늘은 여화 인사가 먼저야."

여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한테 나를 인사시키는데?"

"우리 직원들. 여기 오면 너한테 실수하면 절대 안 되니까."

"흐음. 네 직원들 실려 갈까 봐 걱정돼서가 아니고?"

홍매가 저도 모르게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범이의 매서운 눈총에 입을 꾹 다물었다.

계단을 내려가기 전, 범이가 홍매의 어깨를 툭 치며 짧게 물었다.

"홀 카메라는?"

"다 꺼 놨지. 네가 몇 번을 말했는데."

여화는 못 들은 척했다. 목덜미는 조용했다.

스테이지와 바, 테이블에 흩어져 있던 직원들이 범이가 들어서자 일제히 몸을 바로 했다. 또각, 또각. 굽 소리에도 다들 부동자세였다. 그런데 그 정적을 깬 건 여자의 밝은 목소리였다.

"어머, 이모!"

"에구, 에구. 우리 아가씨!"

주방 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화의 얼굴에 아이 같은 미소가 번졌다. 덩치 좋은 주방 실장 이모가 달려와 여화를 품에 와락 안았고, 여화는 이모의 어깨에 얼굴을 부비며 좋아했다. 직원들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주방 이모는 여화와 범이가 함께 수련하던 중고등학교 시절, 범이네 집 주방을 맡던 사람이었다. 몸을 굴리느라 늘 배고팠던 두 아이를 먹여 키운 손이었다. 범이가 크고 집이 텅 비자 아예 클럽 주방으로 따라온, 범이가 가장 아끼는 식구였다.

"아이고, 아가씨 왜 이렇게 말랐어요. 음식이 안 맞았어요? 뭐 좀 먹었어요? 뭐 해 줄까요?"

"이모, 나…… 비빔국수."

"알았어요, 쪼끔만 기다려요. 금방 맛있게 비벼 올게요."

여화는 잡은 손을 한참 놓지 못하다가, 이모가 어여 놓으라며 웃는 바람에 겨우 놓아주었다. 범이는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다 직원들 앞으로 나섰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 여기 최여화. 앞으로 종종 올 테니까 얼굴 기억해. 이 친구 오면 무조건 나나 홍매한테 바로 넘겨. 그리고 거기, 바 팀장!"

"네, 사장님!"

"여화한테 맥주 주지 마. 칵테일 안 되고. 술 섞어 주지 마. 이 세 개 꼭 기억해라. 큰일 난다."

직원 하나가 손을 들었다.

"사장님,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혹시 애인이십니까?"

"쓸데없이 많이 알려고 하지 말고. 우리 형님들처럼 대접해. 오래 살고 싶으면."

여화가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뭘 이렇게 불편하게 해. 저 봐도 신경 쓰지 말고 일들 해요. 귀찮게 안 할게요."

그때 클러치 안에서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첫 클라이언트'였다. 그저께 여화가 직접 바꿔 저장해 둔 이름이었다.

[누나…… 혼자 와서 밥 먹으라고 한 거, 그거 진짜지?]

[내일 저녁 스케줄 다 뺐어.]

[나 혼자 간다.]

여화는 어이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탑스타가 이렇게 한가해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