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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온다

by 영우 · 2026-10-27

찰칵. 찰칵, 찰칵찰칵찰칵.

셔터 소리가 쉴 새 없이 터졌다. 하얀 배경지 앞에 강연무가 서 있었다.

"좋아요, 연무 씨! 턱 조금만 내리고. 시선은 렌즈 뚫고 지나간다는 느낌으로!"

연무는 지시대로 턱을 내렸다. 데뷔 18년 차라 카메라 앞에서 어떤 각도로 숨을 쉬어야 가장 매혹적으로 찍히는지 이미 몸이 먼저 알았다.

매스컴은 그를 매일같이 '아시아의 얼굴 천재'라 찬양했고, 내로라하는 톱 여배우들조차 그의 독보적인 피지컬과 비주얼에 묻힐까 봐 투샷 촬영을 꺼릴 정도였다.

사진작가들은 그 깊고 서늘한 눈빛에 영혼이 담겨 있다고 극찬했지만, 정작 연무의 생각은 달랐다. 그저 카메라 렌즈 뒤의 세상에 아무런 감흥이 없을 뿐이었다.

"자~, 잠깐 쉬어 갈게요!"

조명이 탁 꺼지자마자 소속사 박 대표가 다가왔다. 평소 같으면 시원한 생수나 커피부터 챙겨 내밀었을 사람이, 오늘은 어딘가 잔뜩 들뜬 얼굴로 연무의 귓가에 속삭였다.

"연무야. 여화 들어온대."

순간, 연무의 손에서 생수병이 미끄러질 뻔했다.

"유학 접고 아예 들어온대. 이번엔 진짜야, 진짜로."

"……그래요?"

연무는 입술 끝을 올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런 가짜 미소를 짓는 것쯤은 데뷔 때부터 뼈에 사무치도록 연습해 와서 자신 있었다.

열여덟 살, 데뷔하던 날 소속사 비상계단에서 그 빛나는 하얀 천사를 처음 마주한 뒤로, 연무의 눈엔 그 어떤 여인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한민국, 중국 등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여배우들과 수없이 붙어 찍었어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갈게요! 연무 씨, 아까 그 지독한 눈빛 한 번 더!"

조명이 다시 켜졌지만, 신기하게도 아까 그 오만한 눈빛이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렌즈를 보고 있는데 자꾸만 기억 속 딴 얼굴이 겹쳐 들었다.

찰칵-.

모니터를 점검하던 사진작가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연무 씨, 이거 뭐예요? 눈빛이 아까랑 완전 다른 사람 같은데…… 근데 묘하게 좋아요, 이거! 그냥 갑니다!"

연무는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요동치기 시작했다.

누나가 온다.

* * *

그 사무치게 달콤한 소식이 서울에 닿기 열흘 전. 몽골, 고비 사막.

"Noona! 정신 차려! 눈 떠!"

귀가 먹먹해지는 무자비한 포격 소리 사이로 낯익은 외침이 꽂혔다. 섭씨 40도를 웃도는 붉은 모래 언덕, 매캐하고 건조한 흙먼지 너머로 땀과 핏방울로 범벅이 된 동료의 얼굴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누나(Noona)' 이곳에서 여화를 증명하는 유일한 이름이었다.

스물두 살, 처음 입단한 하얀 동양 여자애를, 덩치가 산만 한 외국 용병들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본명은 아무도 알 필요가 없었다.

15년이 지나 그녀가 단원들 중 가장 높은 고참이 된 뒤에도, 콜네임은 변함없이 'Noona' 그대로였다.

그날의 시작 역시 평소와 같았다. 황량한 능선 너머를 응시하던 여화의 목덜미가 먼저 뜨끈해졌다.

기계의 눈이 제 살결에 닿는 순간 햇볕을 받은 듯 뜨겁게 데워지는, 어릴 때부터의 기이한 체질.

짧게 스치면 미지근한 온기로 끝나지만, 10분을 넘기면 두드러기와 붉은 반점이 번져 오는 저주 같은 몸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여화는 이 생활에서 저를 노리는 적의 시선을 누구보다 먼저 읽어내는 최고의 용병이 될 수 있었다.

여화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열기가 목덜미에서 멈추지 않았다. 어깨를 타고 팔꿈치를 지나, 제 왼쪽 공간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하고 있었다.

적외선 조준선이 노리는 건 여화가 아니었다. 바로 옆에 있던 용병단 막내 녀석, 베어였다. 덩치만 곰처럼 커다랬지 이번이 첫 실전인 유약한 애송이였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여화는 거칠게 다리를 뻗어 베어의 발목을 걷어차 모래 위로 넘어뜨렸다.

타아앙-!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총알이 방금 전까지 베어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반 박자, 딱 반 박자가 늦어버렸다.

피할 틈도 없이 다음 총알이 여화의 왼쪽 옆구리를 뚫고 등 뒤 모래에 박혔다. 뜨거운 선혈이 꿀럭꿀럭 새어 나왔다.

예전 같았으면 베어를 넘어뜨림과 동시에 제 몸까지 완벽히 뺐을 거리였다. 몸이 둔해졌다는 걸, 여화는 허탈하게 인정했다.

무릎을 꿇고 쓰러지려는 순간, 연이어 날아온 또 한 발의 탄알이 오른쪽 허벅지를 찢고 지나갔다. 여화는 그대로 붉은 모래 위에 고꾸라졌다.

"Noona! Noona!"

울먹이는 베어가 그녀의 방탄조끼 끈을 움켜쥐고 바위 그늘 뒤로 끌었다. 모래 위로 붉은 핏자국이 길게 선을 그렸다.

여화는 질질 끌려가면서도 그저 멍하니 하늘만 보았다. 사막의 하늘은 쓸데없이 파랗고 청량했다.

아, 이번엔 끝인가.

무섭지는 않았다. 15년 내내 매일 대비해 온 순간이었으니까. 이제야 저승사자 얼굴이라도 보려나.

그런데 막상 눈을 감으려니, 떠오르는 얼굴이 단 하나도 없었다. 죽을 만큼 사랑해서 제 발로 이 머나먼 전장까지 흘러 들어오게 만들었던 그 사람의 얼굴조차, 어느새 사막의 매서운 모래바람에 쓸린 것처럼 흐려져 있었다.

그럼 나는, 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서 죽는 걸까.

시야 끝에서부터 먹물이 번지듯 까맣게 물들어 왔다. 베어의 울음소리도, 포격 소리도 아득히 멀어졌다. 몸이 뜨거운 모래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 * *

얼마나 흘렀을까.

삐— 삐—.

일정한 기계음이 고막을 두드렸다. 코끝을 찌르는 건 건조한 소독약 냄새였다.

'……여기가 저승인가.'

저승치고는 냄새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그다음은 통증이었다. 옆구리 깊숙한 곳에서부터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쑤시는 듯한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여화는 저도 모르게 이가 악물렸다.

아프다…… 아프다는 건……

"……씨발. 또 살았네."

갈라진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허망하게 새어 나왔다.

눈을 뜬 곳은 회복실이었다. 하얀 천장, 팔뚝에 꽂힌 링거 줄, 일정하게 울리는 기계음.

블라인드 틈으로 희뿌연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왼쪽 옆구리와 오른쪽 허벅지가 번갈아 가며 지독하게 욱신거렸다.

허벅지는 두 번째 봉합이었단다. 처음 꿰맨 자리가 사흘 만에 터지는 바람에, 의사 세룩이 욕을 한 바가지 퍼부으며 다시 꿰맸다고 했다.

여화는 천장을 아주 오래 올려다보았다.

15년 전, '진도원'이라는 이름 하나를 가슴에 묻어둔 채 이곳에 왔다. 살기 위해 온 게 아니었다.

그저 가장 그럴싸하게 죽을 자리를 찾아 온 거였다. 그런데 총알도, 사막도, 그 긴 시간도 끝내 저를 데려가 주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그 사실이 그렇게 억울하지 않았다.

스스로 내린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살면서 고심해서 고른 것도 별로 없었고, 하고 싶은 걸 골랐으니 결과가 잘못되어도 수긍하며 묵묵히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런 여화가 이번만큼은 오래 고민했다.

살아 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 * *

사흘 뒤, 여화는 침대에서 내려와 섰다. 단장실까지는 기어코 제 발로 걸어가고 싶었다.

한 걸음. 허벅지의 단단한 실밥이 당기면서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두 걸음. 마른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세 걸음째에 무릎이 힘없이 꺾여버렸다. 침대 난간을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버티는 여화를 보고 간호사가 기겁을 하며 달려왔다.

결국 여화는 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 단장실 문을 열었다. 간호사가 반쯤 억지로 태운 휠체어였다. 단장실 창밖으로 저녁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그만두겠습니다."

차분하고 조금 낮은 목소리가 적막한 방 안을 지나 또렷이 귓가에 박혔다. 서류를 넘기던 단장의 손이 그대로 멈춰 섰다.

"……계약이었지? 자네가 그만둔다고 하면 무조건 놓아준다는."

재계약서에 그녀가 직접 써넣었던 단 하나의 조건이었다. 내가 그만두고 싶을 때까지. 그땐 단장도 그저 웃고 넘겼던 조항이었다.

단장은 그녀가 처음 왔던 날을 떠올렸다. 짧은 커트 머리에 하얀 얼굴, 될 대로 되라는 듯 텅 비어 있던 눈동자.

하지만 지금 그녀의 깊은 눈에는, 단단한 생의 의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래…… 그랬지."

"전화 한 통만 쓰겠습니다."

"물론."

단장은 손수 수화기를 건넸다. 여화는 번호를 누른 뒤 단장과 눈을 마주쳤다. 먼저 시선을 피한 쪽은 단장이었다. 그는 호출 버튼을 눌러 서둘러 의사 세룩을 찾았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여화는 미동도 없었다. 휠체어 위에서도 그녀의 등은 곧았다.

* * *

자정을 막 넘긴 이태원. 클럽은 한창 화려하고 시끄러울 시간이었다. 플로어를 한 바퀴 돌고 사무실에 막 들어서던 윤태범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혀를 찼다.

"누가 이 시간에 사무실로 전화야."

투덜대면서도 범이의 걸음은 빨랐다.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12년 전 용병단을 나오면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만들어 둔 번호였다. 5년 전 '나 살아 있다'라는 덤덤한 한마디 남기고 끊긴 뒤로는,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범아."

담배를 꺼내 들던 손이 그대로 딱 굳었다. 숨이 멈췄다.

"범아."

지독하게 그리웠던 목소리로 다시 제 이름이 불리자, 범이는 저도 모르게 참았던 뜨거운 숨을 울컥 내쉬었다.

"……그래, 임마."

"나 이제 갈래."

범이는 책상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중학교 1학년, 일진들에게 얻어맞던 저를 무심하게 구해 준 날부터 무려 20년 넘게 등만 보고 따라다닌 여자였다.

용병단까지 따라 들어갔다가 겨우 3년 버티고, 12년 전 집안 사정을 핑계로 먼저 빠져나올 때, 같이 가자고 울며 매달리는 저를 발로 뻥 차며 "빨리 꺼져" 하던 여자였다.

그 여자가, 온다고 했다.

"갈래."

보채듯 한 번 더 들려온 목소리에, 범이는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속삭였다.

"그래…… 이제 와? 올 때도 됐지."

"근데 요즘 표값이 얼마냐? 나 비행기 값 아까워. 내 돈 내고 가기 싫으니까…… 네가 데리러 와."

지독하리만큼 나른하고 무심한 은퇴 선언이었다. 범이는 어이가 없어 웃다가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미친놈. 알았어."

"1등석으로."

"……야."

"나 환자잖아."

범이의 숨이 다시 한번 멎었다. 15년 동안 어디 다쳤다는 말은 한 번도 안 하던 애였다. 어딜 얼마나 다쳤는지 물으려는데,

"고마워."

뚝. 여화는 대답 대신 수화기를 단장에게 넘겼다.

"날세."

이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여화는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고 휠체어를 돌렸다. 문을 나서자 복도 끝에서 세룩이 걸어오고 있었다.

* * *

퇴임하는 날, 여화의 단출한 짐을 본 단장은 헛기침을 했다.

처음 이곳에 올 때 들고 온 작은 구찌 클러치 하나. 어느 의뢰 중에 눈이 부셔서 슬쩍 훔쳤다는 길거리 표 선글라스 하나.

훈련복 위에 여미지 않은 검정 코트와 조금 닳아버린 훈련화.

"자네가 멋을 안 부리는 줄은 알았지만…… 짐이 고작 이것뿐일 줄은 몰랐네."

"범이가 알아서 준비했을 겁니다."

"그래.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네. 여긴 자네가 있기엔 너무…… 아니, 됐네. 우리 다신 만나지 말세."

퇴임한 단원과 다시 만나는 날은, 적이 되었거나 누군가의 표적이 되었을 때뿐이었다. 그렇기에 이 바닥의 마지막 인사는 늘 정해져 있었다.

여화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 아주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늘 차갑던 얼굴에 떠오른 홀가분한 미소가 눈이 부셨다.

앞서 걷던 단장은 뒤따르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의아한 듯 돌아보았다. 여화는 두 걸음 뒤에서 걷고 있었다.

허, 이렇게까지 기척을 죽이다니. 남은 녀석들은 더 굴려야겠군.

그녀가 없는 용병단은 단원들에게 지옥이 될지도 몰랐다.

단장은 손수 뒷좌석 문을 열었다. 여화가 오르자 문을 닫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피를 흘리며 헌신한 그녀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다.

뒷좌석에서 여화는 훔쳤다던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도로 위 CCTV를 지날 때마다 뺨이 잠깐씩 미지근하게 데워졌다가 이내 식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제 쫓길 일도, 숨을 일도 없었다. 범이가 기다리는 모스크바까지는 두 시간. 여화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차가 멀어져 갔다.

이제 여기에…… 'Noona'는 없다.

* * *

연무는 그날 이후로 온종일 휴대폰만 손에 쥔 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온다던 누나는 일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내리 지나도 연락 한 통 없었다.

그녀의 얼굴 한 번을 다시 마주하는 데 무려 '석 달'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걸릴 줄은, 그때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