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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부운(浮雲)

by Jiungine

태평관에 들어서자 명나라 보초를 서고 있던 천군(天軍) 한 명이 기다렸다는 듯 정사의 방으로 안내하였다. 속이 훤히 비치는 자색(紫色)의 얇은 사(紗)를 입고 관모(冠帽)는 벗었으나 머리는 풀어헤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무리 급한 만남을 요청했다고 하나 조정의 신료가 만남을 청하는 데 이리도 무례한 옷차림으로 기다리는 건 예법에 맞지 않았다. 본인이 곧 명나라 황제를 대신한다는 오만함이 깊게 깔려있었다. 그러나 지웅은 내색하지 않고 인사를 했다.

”大人, 感谢您允许我们见面。我叫申智雄,我曾是国王卫队的队, 现在是杨州市的县令。这封信是我寄出的.“

-정사 대인, 이렇게 만남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소인, 전직 내금위장이자 양주목사인 신지웅이라 합니다. 제가 서찰을 보내드렸습니다.-

정사(政使)는 비스듬히 앉은 채 가늘고 긴 일자 수염을 찡그리면서 다른 손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유순정 대감과 최팔환 접주가 목레를 건네왔다. 인사는 신경도 쓰지 않고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지웅의 유창한 명나라 말에 놀라면서도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什么事?“ -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했소?-

지웅은 만만치 않은 사내라 생각하고 미리 계획한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오른편에 앉은 최필환 접주에게 눈짓을 하자 최필환이 가져온 커다란 보자기와 붉은색이 칠해진 목궤(木櫃)를 정사 앞에 내놓았다. 정사 소함(蘇含)이 그제야 눈빛이 바뀌더니 상체를 일으켜 보자기를 풀었다. 입술은 꾹 닫은 채 의심의 눈초리로 지웅 일행을 쳐다보았다. 색채가 강렬한 비단과 육(六) 년근 인삼, 설백(雪白)의 빛깔을 낸 조선의 백자병과 강화의 섬세한 손길로 짠 화문석(花紋席), 그리고 장인의 손으로 두드려 만든 방짜유기와 수저, 호랑이 수염으로 만든 붓이 들어 있었다. 정사는 다른 것은 거들떠도 안보더니 백자(白磁)를 보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백자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자세히 들여다 보고 하더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哇,看看这些颜色和形状.“ - 오호, 이 빛깔과 자태를 보라.-

정사는 화려하기만 한 명나라 도자기와는 차원이 다른 조선의 백자에 매료된 듯 했다. 그리곤 육 년근 인삼을 바라보며 흥분된 표정을 지어보였다. 유순정 대감이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말을 건넸다.

”정사 대인, 명일 본국으로 가는 귀국 길에 이 궤짝의 열 배가 넘는 물량이 따라 붙을 것입니다.“

유대감의 말을 들은 정사는 백자를 내려놓더니 통역 해주는 지웅을 쳐다보았다.

”원접사(遠接使) 임사홍이 우리 말을 잘하는 줄 알았더니 그대가 더 정확하군. 당신들의 마음은 알겠고, 그래, 원하는 게 무엇이오?“

지웅은 명나라 정사와 대화가 통할 것을 확신했다. 지웅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정사에게는 아무런 손해가 없을 것이었다.

”대인 께서 명나라로 돌아가신 다음, 조선에서는 반정(反政)이 일어날 것입니다.“

”뭐라? 반정이라고 했소?“

정사는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세자 책봉의 칙서를 들고 온 정사에게 역모(逆謀)를 알리다니 도대체 제정신인지 궁금한 표정이었다.

”그렇습니다. 대인, 만백성이 원하고 있습니다. 이미 조정 대신들 대부분이 뜻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준비도 마쳤고 대세이경(大勢已傾)이올시다.“

유대감의 말에 정사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호랑이 수염으로 만든 붓을 만지며 물었다.

”나에게 원하는 게 뭐요? 대세가 기울었으면 그대로 하면 될 것 아니오?“

지웅이 담담한 표정으로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말했다.

”자순대비의 장남, 진성대군을 임금으로 옹립할 것입니다. 정사께서 명나라로 돌아가시면 후에 저희가 주청사(奏請使)를 보냈을 때 황제폐하께 말씀만 잘 해주시면 됩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라는 거요?“

”조선의 임금이 세자 고(𩔇)가 어린 나이로 죽은 것을 몹시 슬퍼하다가 병을 얻어 병사(病死) 했으며, 죽은 임금의 아우인 이역(李懌)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였으므로 왕으로 봉 하여 주기를 주청한다는 내용의 주청사를 보낼 것입니다. 정사께서 조선에 와 임금의 용안을 보았을 때 병색이 완연했다는 점을 황제폐하께 말씀해 주십시오.“

”흠,,그 댓가로 이것들을 주겠다?“

”그렇습니다. 대인, 다음 책봉사로 오실 때는 이보다 더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정사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지웅의 눈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소. 고려지(高麗紙)를 주시오. 그럼 뜻대로 해드리리다.“

조선의 한지는 명나라에서 독보적인 인기 품목이었다. 사실 한지는 삼국시대부터 발전해왔으며,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품질이 정점에 달해 명나라 황실과 문인들 사이에서 '천하 제일'의 종이로 대접받았다. 당시 명나라 사람들은 조선의 한지를 '계림지(鷄林紙)' 혹은 '고려지(高麗紙)'라 부르며 귀하게 여겼는데, 명나라 종이는 닥나무 외에도 대나무 등을 섞어 잘 찢어지고 습기에 약했던 반면 조선의 한지는 100% 닥나무를 사용하고 '외발뜨기'라는 독특한 기술을 써서 비단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천 년을 가는 질긴 생명력을 가진 압도적인 질감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또한 묵색(墨色)의 표현에 있어 먹물이 번지는 정도가 일정하고 깊이감이 있어, 명나라 화가들은 조선의 한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쳤다. 종이가 워낙 질기다 보니 단순히 글을 쓰는 용도 외에도, 겹겹이 붙여 지갑(紙甲)을 만들거나 창호지, 장판지로도 썼다.

문제는 연산군이 정사(政事)는 내팽개쳤지만,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 시(詩) 쓰는 것을 즐겼다는 점이었다. 연산군은 자신의 시를 적거나 그림을 그릴 때 최고급 한지를 사용하게 했으며, 궁중의 화려한 장식을 위해서도 많은 양의 한지가 소모되었기에 조지서(造紙署)에서 일하던 장인들은 연산군을 위해 바칠 막대한 양의 종이를 대느라 밤낮없이 고생한다는 풍문도 있었다. 현재 한지가 여유가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정사의 요구를 어떻게 들어줄지 고심이 되었다. 기름을 바르지 않아도 윤이 나고 화살이 뚫지 못할 만큼 질기다는 소문으로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반드시 요구하는 필수 뇌물 우선순위가 바로 인삼과 이 고정지(藁精紙, 품질 좋은 한지)였기에 정사 소함이 요구하는 것도 일견 당연했다.

정사 소함은 원탁 위에 있는 한지로 만든 서책을 들고 손으로 종이의 표면을 쓸어내렸다. 비단보다 매끄러운 촉감에 그는 탄성을 내뱉었다.

"유 대감, 이것은 강원도 깊은 산속의 닥나무를 엄선하여 차가운 계곡물에 백 번을 씻어 만든 '백지(白紙)'라 하더이다.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대국의 종이가 화려하다 하나, 황제 폐하께서도 조선의 종이만은 '옥(玉)보다 귀하다' 칭송하셨지. 어쩌시겠소?”

유순정 대감은 손으로 턱주가리를 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현재 한지 공급이 어려운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임금이 바뀌면 주청사 행차 때 한지가 대량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었다. 이참에 한지를 만드는 장인들을 더 확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사께서 원하시는 한지의 양이 얼마나 되시오?”

“대규격(大規格) 백지(白紙) 이백 속(束)이 어떨까 하오.”

유대감과 지웅, 그리고 최필환의 입이 벌어졌다. 1권(卷)이 20장이었고, 1속(束)이 10권이었다. 200속이라면 한지 4만 장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조지서 장인 백 명이 달라붙어도 석 달이 넘게 걸릴 양을 아무렇지 않게 요구하는 정사를 보며 지웅은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욕망에 가득 차 있어 악(惡)하다‘고 설파한 순자(荀子)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대감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정사 대인, 이백 속은 너무 많습니다. 지금 조정에도 그만한 양은 없소이다. 거래라는 것은 본시 서로 잇속을 챙기는 게 당연하긴 하나 그것도 이해가 맞아야 하는 법이 아니오이까?”

그때 최필환이 지웅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지웅이 말했다.

“내일 당장 귀국 행렬에 50속을 드리겠소. 주청사 편에 따로 50속을 더해 총 100속을 드리지요. 말 한마디 해주는 댓가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오만.”

정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50속만 받아도 만족할 판에 백자와 인삼까지 손에 들어올 것이니 무조건 남는 장사였다. 이제 저쪽에서 명분만 만들어 주면 마지못해 승낙하면 되는 것이었다. 눈치 빠른 젊은 목사라는 사내가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그래도 안 되겠다면 우리도 어쩔 수 없소이다. 순리대로 가는 수 밖에.”

지웅이 일어서려 하자, 정사가 손을 들어 만류했다.

“알았소이다. 그렇게 하시지요. 안 그래도 조선 임금의 폭정이 걸주(桀紂)와 다를 바 없더이다. 조선이 부강해져야 대국에도 좋은 게 아니겠소. 껄껄껄.”

걸주(桀紂)란 하나라 걸왕(桀王)이 고기를 쌓아 산을 만들고 술로 연못을 만든 육산주해(肉山酒海)의 고사와 은나라 주왕(紂王)의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빗대어 두 왕의 폭정을 표현한 것으로 북소리가 울리면 수천 명의 신하가 소처럼 엎드려 술을 마시게 하여 술 연못에 빠져 죽게 하고,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바르고 그 아래 숯불을 피워 죄인을 걷게 하는 포락지형(炮烙之刑)의 잔인한 형벌을 즐기던 두 폭군을 연산군과 비교한 것이었다.

지웅과 두 사람이 태평관을 나온 건 인정(人定)이 울리기 전이었다. 유순정 대감은 임진강 석전(石戰)을 구경 간 연산군이 오기 전에 자순대비의 신병 확보를 위해 궁으로 들어갔다. 한성 상단 최필환 접주는 상단으로 돌아갔고, 지웅은 구왈기야 이룸을 만나 몰고 온 말을 타고 훈련원(訓鍊院) 근처로 이동하였다. 흥인지문(興仁之門) 인근에 있는 훈련원은 성곽과 가까워 병력 유입이 쉬웠고, 넓은 연무장(演武場)이 있어 대규모 인원을 수용하기 최적이었다. 주변은 민가보다는 군사 시설과 넓은 들판이 많았으며, 남쪽으로는 목멱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인 청계천의 지류가 흘러 밤안개가 자주 끼는 습한 지형이었다. 지웅은 내금위장으로 있으면서 이곳 지리에 밝았다. 내일 반정군이 왔을 때를 상상하며 우려되는 요소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군사 500명을 수용하기에는 충분했다.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효경교(孝經橋)를 통과하여 양반들의 주거지와 사찰이 있는 연못골을 지나 창경궁 남쪽 입구에 다다르면 마주치는 게 궁궐 수비대일 것이었다. 홍화문(弘化門)에 최종 당도하면 대략 걸리는 시간이 반 시진 정도로 예상되었다. 오백 명의 기세에 궁궐 수비대도 도망을 가던가 반정에 합류할 것으로 예상했다. 장안에 연산군을 욕하지 않는 백성이 없었다. 반정의 성공 여부를 걱정하는 정국계의 나이 든 대감들이 지웅은 한 편 이해는 되었으나, 무조건 성공하는 반정이라고 생각했기에 오히려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희열을 즐기는 중이었다. 옆에서 나란히 말을 타고 주변을 둘러보던 이룸이 말했다.

“에페, 드디어 시간이 되었군. 가르쳐 준대로 내일 유시(酉時)에 임사홍 먼저 격살하고 다음 신수근을 치면 되겠는가?”

“그렇습니다. 주상이 임진강 변에서 술을 마시면 다음 날 새벽에 올 것이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당일 저녁에 올 것입니다. 예상 시간은 술시(戌時)에서 해시(亥時) 사이가 될 것입니다. 그 전에 간신들을 처단해야 합니다. 특히 임사홍은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신수근, 신수영, 김자원 등 모두 척살해야 할 대상입니다. 일각(一刻)의 거리마다 사람을 두어 은밀히 놈들의 동태를 살피게 하십시오. 병권(兵權)을 쥔 임사홍이 군(軍)을 움직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알았네. 에페, 걱정 마시게.”

“우선, 술시(戌時)에 훈련원 앞에서 모두 모이기로 했으니 그때 지령을 확인하고 움직이기로 하죠. 어깨에 하얀 천을 달고 오는 거 잊지 마십시오.”

이룸이 말을 재촉하여 쏜살 같이 달려 나갔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동안 지내왔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덩’ ‘덩‘ 종소리가 울렸다. 야금(夜禁)이 시작 된 인정(人定)이 울렸지만 지웅은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순라군들을 마주쳐도 지웅이 대부분 얼굴을 아는 군졸들일 것이었다. 천천히 타박타박 말을 몰아 해란의 집으로 찾아갔다. 오늘은 왠지 여기서 잠을 자야 할 것 같았다. 밤늦게 찾아갔지만 해란의 어머니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절을 하고 나오자 살아생전 해란이 묵었던 방을 내어주며 유모에게 야참을 올리라 말하고는 평소 해란이 묶던 연분홍색 댕기를 건넸다.

“큰일을 하려거든 그 댕기를 달아주시게”

무엇을 아시기라도 한 것처럼 이 한마디가 다였다. 지웅은 환도(換刀)에 묶여 있던 아버님의 붉은 댕기를 풀고 분홍색 댕기를 묶었다. 지웅의 칼에 해란의 혼(魂)이 스며든 것 같았다. 지웅은 칼을 들어 불빛에 날을 세워보고는 중얼거렸다.

“부인, 내일 끝낼 것이오. 부인을 죽게 만든 조정을 박살 낼 것이오. 억울한 부인의 넋을 위로해 주리다. 그리고 미안하오. 부인처럼 소중한 이가 생겼소. 그 사람도 잃을 순 없기에 그 사람 곁에 있기로 하였소. 하지만 늘 마음은 부인과 함께 할 것이오.”

시래기를 넣고 걸쭉하게 끓인 죽이 작은 소반에 올려졌다. 쌀은 언감생심, 보리와 조, 수수를 넣은 죽에 마늘장아찌가 전부였지만, 지웅은 어느 진수성찬보다도 더 맛있게 먹었다. 매달 지게꾼을 시켜 곡식과 면포를 전달해 주기에 먹고 사는 건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마도 해란의 어머님은 그것마저도 불우한 이웃과 나누는 듯 보였다. 병을 얻은 퇴기(退妓)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돌보고 있다는 얘기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났다. 유모 단심이 자리끼를 한 바가지 떠서 넣어주고는 문을 닫았다. 아직도 나 때문에 해란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사나운 표범처럼 눈에 살기가 번졌다. 지웅은 누워 천정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해란의 얼굴에 아란카, 아니 설영의 얼굴이 겹쳤다. 처음엔 전혀 다른 얼굴이었지만 점점 비슷하게 변해 간다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해란이 저 위에서 이렇게 만들어 주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으악새가 ‘으악’거리며 울었다. 지웅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