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부운(浮雲)
by Jiungine
농기구도 없이 이만하면 제법 실한 칡이었다. 지웅은 땀을 닦고는 산채를 향해 내려왔다. 천하제일검이라고 자신하는 전직 내금위장이 칼로 칡이나 캐고 있었다는 걸 사람들이 알면 무어라 그럴까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오다가 대나무 밭이 보여 두꺼운 대나무 한 그루 베었다. 물통처럼 사용하기 위해 석자 크기로 자르고는 나머지는 버렸다. 속이 텅 비어 있는 대나무지만 계량할 수 없는 채움을 주는 대나무였다. 비어 있지만 이미 채워져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무술이나 인생에 있어서 최종 목표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산채에 가까워 오자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지웅은 칼을 고쳐 잡았다. 슬그머니 산채 안을 들여다보자 다행히 이룸과 아란카였다. 지웅은 안도했다. 지웅이 산채 안으로 들어갔다. 이룸과 아란카가 죄를 지은 듯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지웅이 말했다.
“그럴 것 없소. 그대들은 잘못이 없소. 잘못은 오히려 나에게 있지. 자신의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하는 남자가 어찌 임금을 지키는 내금위장을 했었는지 면목이 없소이다.”
지웅은 칡을 이빨로 뜯어 잘근잘근 씹었다. 그리곤 해란의 입으로 칡에서 나오는 칡즙을 흘려 넣어 주었다. 열이 많았다. 상처가 제대로 소독이 안 되었는지 해란의 몸에선 땀이 났고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 모습을 본 아란카가 슬며시 다가와 옷고름을 찢어 땀을 닦아 주었다. 이룸은 어디론가 나가더니 한참 후에 대나무 통에 물을 받아 왔다. 근처에 약수터라도 찾은 모양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달래려는 요량인지 짐짓 큰 소리로 말했다.
“조선의 산(山)은 정말 대단한 것 같소. 우리 북방의 초원과는 확실히 다르지. 풀뿌리와 나무 열매만 먹고도 살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조선의 산이지 싶소.”
지웅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분위기는 또다시 냉랭해졌다. 지웅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말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래도 아란카가 어찌 알았는지 지웅의 정혼자를 구하려고 오라버니와 함께 움직였으니 고마운 거였다.
“맞소. 6월의 산은 약창고나 다름없지요. 두 분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잊었소이다. 경황이 없어서 무례를 범 했으니 너그러이 용서하시오.”
지웅이 돌아서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이룸과 아란카가 두 손을 내 저으며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우리가 미안하오. 도움을 주려 한 것이 그만 일을 더 커지게 만들었소. 여인의 상처가 깊은 듯 하여 걱정이오이다.”
“맞아요. 제가 기별을 넣고 기다렸다가 같이 갔으면 별 탈 없었을 거에요. 너무 쉽게 생각했어요.”
늘 당당하던 아란카의 모습이 처음으로 기 죽은 소녀처럼 보였다. 하지만 저들은 정말 죄가 없었다. 정말 죄를 지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이 시대의 왕과 그 왕을 떠받드는 간신들, 그리고 이렇게 되기까지 방치한 지웅과 같은 신하들이 모두 죄인이었다.
사흘 째 되던 날 밤,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해란이 잠시 기운을 차렸다. 지웅은 화들짝 놀라 해란의 곁으로 기어가 두 손을 잡았다. 지웅 못지않게 계속 간호를 해 주었던 아란카도 옆에 있었다. 이룸은 먹을거리를 찾아 산 아래로 내려가고 없었다.
“낭자. 정신이 드시오? 정신을 차리고 이것 좀 먹어보시오.”
지웅은 칡과 대나무 죽순을 달인 물을 조금씩 떠 먹였다. 하지만 해란은 고개를 저었다. 힘겨워 하는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서방님, 서방님과 혼인해서 서, 서방님 닮은 아이를 낳고 싶었어요. 하, 하지만 지, 지금도 행복해요. 잘 살아요, 잘,,”
해란은 또다시 정신을 놓고 있었다. 지웅이 해란을 흔들었다.
“그래, 부인, 정신 차리시오. 나또한 부인과 멀리 떠나려 했소. 조금만 버티시오. 내가 살려내겠소. 부인. 부인.”
하지만 해란은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해란의 온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지웅이 잡고 있던 해란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해란이 숨을 거둔 것이었다. 지웅은 믿을 수 없어 해란을 흔들었다.
“낭자, 해란 낭자, 부인,,,부인,,정신 차리시오. 부인!”
아무런 맥도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삭막한 어둠이었다. 지웅은 끝내 눈물을 참지 못하고 절규를 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살려내지 못하고 무력하게 보고만 있던 자신의 무력감을,,그 어리석음을 토해내는 통한의 절규였다.
지웅은 해란을 품에 안은 채 한참을 절규했다. 의원을 불렀어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해란의 어머님에게 연통이라도 넣었어야 했다. 아니, 말에 태워 바로 아버지에게 달려갔어야 했다. 거기라면 좋은 약재에 여느 명의(名義) 못지않은 아버지의 의술이 있었다. 모든 게 다 후회스러웠다. 살릴 수 있는 수많은 경우의 수 중에서 해란이 죽는 길만 고집한 것 같아 가슴이 찢어졌다. 기적(妓籍)에서 빼내 양인 신분을 되찾았을 때만 해도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었다. 모든 걸 이해하고 지원해 주시는 부모님 덕분에 벼슬도 마다하고 산 중으로 들어갈 자신도 있었다. 연산군을 폐위시킬 반정의 한가운데 있었어도 해란이 원한다면 빠지려고 했다. 모든 위험한 길을 배제하고 꽃길만 걷게 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소용이 없어졌다. 살아야 할 의미가 없어졌다.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잃었을 때 이토록 가슴이 무너지는 줄 몰랐었다. 지웅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못나고 무능력한 인물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젊은 나이에 문과와 무과에 급제하고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내금위장에 제수될 때만 해도 자신이 최고인 줄 알았었다. 한 줌 바람이었다. 굴뚝에서 나는 검은 연기였다. 지푸라기였다. 흔하디흔한 개똥보다도 더 쓸모없는 인사였다.
이룸이 돌아왔다. 상황을 인지하고 지웅의 어깨에 손을 얹어 위로했다. 이룸은 가슴팍에서 단도를 하나 꺼내 자신의 가슴을 칼로 그었다. 피가 흘러 내렸다. 형제의 가족이 죽으면 같이 고통을 느껴 위로해 주는 그들만의 풍습이었다. 상처를 보고 잊지 않겠다는 맹세의 표시이기도 했다. 이룸은 지웅을 형제로 받아들였으며 동생의 남편감으로 생각했기에 진정으로 고통을 함께했다. 아란카도 저쪽 끝에서 괴로워했다. 본인이 먼저 나대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라 생각하니 죄책감이 하늘을 찌르는 듯 했다. 어찌 보면 연적(戀賊)이 되었을 지도 모르는 여인이었지만, 지웅이 사모했던 여인이었기에 그만큼 아픔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감히 지웅의 근처에도 못가고 혼자서 끙끙 앓는 아란카였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했다. 아란카는 지웅에게 여인의 집에 가서 사실을 알리겠다고 했다. 지웅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기로 한 것이었다. 북방에서는 영혼을 하늘로 보내는 화장(火葬)을 했지만, 유교주의가 뿌리까지 박힌 조선에서는 화장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땅에 묻기 전에 부모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을 아란카도 알고 있었다. 지웅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란카는 해란의 집으로 향했다. 지웅이 타고 온 말을 이용하여 다녀오면 인정(人定)이 울리기 전에 다녀올 것이었다.
지웅은 산채 옆 양지바른 곳에 칼을 박고 땅을 파내려 가기 시작했다. 무술뿐만 아니라 문과에 급제할 만큼 총명한 지웅이었기에 풍수에도 일가견 있었다. 풍수(風水)는 잡과(雜科)라고 해서 천시하는 분위기였지만 부모를 명당에 모시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성리학자들도 풍수에 매달렸다. 이를 유가(儒家)의 풍수라 하여 유풍(儒風)이라고 불렀다. 당시 지관들에게 지침서와 같았던 금낭경(錦囊經)과 청오경(靑烏經)을 공부했고,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이산 저산을 다니면서 무술을 연마하고 풍수의 기본 원리를 배웠던 터라 웬만한 명당은 가릴 수 있었다. 지웅이 파내려가는 곳은 모란반개형(牡丹半開形)으로 산의 혈(穴)이 겹겹이 쌓인 꽃잎에 둘러싸여 모란꽃 모양을 하고 있는 명당 터였다. 반쯤 피어 있는 반개(半開)의 형태라야 명당이었고 모란은 화왕(花王)이라 불릴 만큼 꽃 중의 왕이었으며 부귀영화를 상징했다. 지웅은 땅을 넉넉하게 파고는 해란의 옆에 누웠다. 차갑게 식어버린 해란의 시신을 지웅의 도포자락이 가려주고 있었다. 밤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보였다. 이미 저 중에서 하나의 별이 되어 있을 해란을 기억하기 위해 북두성 옆 가장 밝은 별 하나를 기억했다. 이 모든 게 연산군의 횡포 때문이라는 사실 또한 가슴에 새겼다. 반정에 가담했지만 이제 더 연산군을 몰아내야 할 확실하고도 틀림없는 이유가 생겼다. 이 또한 하늘이 내려 준 소명인가 생각했다. 해란을 묻고 나면 양주로 돌아가 반정군 양성에 심혈을 기울일 것이라는 굳은 의지가 생겼다. 다시는 이 땅에 해란과 같이 억울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지웅은 반드시 연산군을 끌어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날 바보같이 임금이라는 허울에 가려 그의 위선적이고 비인간적인 행태를 묵과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연산군은 기억해야 했다. 일찍이 순자(荀子)가 말했던 군주민수(君舟民水)의 고사를,,,
君者舟也, 庶人者水也 (군자주야, 서인자수야) -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다.
水則載舟, 水則覆舟 (수즉재주, 수즉복주) -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물은 배를 뒤집기도 한다.
‘부인, 내 늘 저 별과 함께 그대를 생각하리다.’
어디선가 인정(人定)이 울렸다. 산 밑에서 작은 횃불을 들고 누군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횃불이 하나인 걸로 보아 아란카와 해란의 어머니로 보였다. 전안례(奠雁禮) 때 보아야 할 해란의 어머니를 깊은 산 속 해란의 시신 앞에서 마주하는 지웅의 심정이 타들어갔다. 감히 두 눈을 뜨지도 못했다. 아란카의 옆에 선 해란의 어머니를 보자 지웅은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대부인(大夫人) 마님, 흑흑흑, 천지분간도 못하는 어리석은 제가 따님을 얻겠다며 설치다가 해란이 변을 당했습니다. 모두 제 탓입니다. 죽여주십시오.”
해란의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다가 해란의 시신에 다가가 도포자락을 걷었다. 차갑게 식어 있는 해란의 고운 얼굴이 보였다. 왼 가슴 쪽에 핏자국이 있었다. 상처를 치료하고 옷 쪼가리로 동여 맨 흔적이 보였다. 바로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혼인할 생각에 들떠 있던 아이였다. 역모로 멸문지화를 당한 가문에서 천하게 태어나 맘껏 뜻을 펼쳐보지도 못한 아이였다. 수련 자신은 험한 세상 온갖 모욕을 받고 멸시를 받으며 살아왔지만, 딸 해란 만큼은 행복하게 살게 해주고 싶었다. 마침 좋아한다는 사내가 나타났고 천재일우로 오래전 연모했던 사람의 자식이어서 이렇게 인연이 되었구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죽었다니, 수련은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억장이 무너졌었다. 오는 내내 눈물이 흘렀지만 막상 말이 없는 딸의 모습을 보자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딸을 잘 보내고 수련 자신도 이 미련 없는 세상을 떠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슬퍼할 것도 미련 가질 것도 없었다. 해란을 위해 울어주는 이 사내도 잘못한 게 없었다. 사내가 여인을 연모하는 게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젊은 여인이면 복날 개 잡듯 잡아가는 이 미친 임금이 잘못이라면 잘못일 터였다. 수련은 도포로 해란의 얼굴을 덮었다. 그리곤 차가운 어조로 지웅에게 말했다.
“남아불경루(男兒不輕淚)라 했습니다. 충(忠)과 의(義)가 아니면 울지 않는 법인데 어찌 사사로운 정(情)에 얽매여 소매를 훔치십니까? 잠시나마 속세에 인연이 있었으니 내 딸아이를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신다면 그걸로 정리는 되었다 생각하겠습니다.”
해란의 어머니는 그 말을 끝으로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산을 내려갔다. 강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였지만 돌아서는 어머니의 두 어깨가 출렁이는 걸 보았다. 눈물이 앞을 가릴 것이었다. 위험했다. 더구나 파루(罷漏)가 울리기까지 세 시진(時辰)이나 남았다. 지웅이 아란카를 돌아보자 아란카가 눈치를 채고는 해란의 어머니를 따라 내려갔다. 초입 주막에 들러 파루가 울린 후 말에 태워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는 게 지웅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지웅은 해란을 땅에 묻었다. 다행히 명당답게 흙이 누리끼리 한 게 향그러웠다. 간단하게 제(祭)를 올린 후 무덤 앞에 작은 돌 하나를 세우고 돌 밑에는 지웅의 호패와 해란의 호패를 나란히 묻었다.
‘부인, 우리가 비록 혼례를 올리진 못하였지만, 나에게 당신은 부부의 연을 맺은 부인이오. 내가 죽으면 당신 옆으로 오리다 부인,’
다음 날 아침, 지웅은 말에 올랐다. 이룸과 아란카와 지웅을 쳐다보았다.
“두 분 모두 고맙소이다. 난 양주로 내려갈 것이오. 가서 주상을 몰아 낼 반정군 양성에 모든 힘을 기울일 겁니다. 두 분 어쩌시겠소? 나와 함께 가시겠소?”
이룸과 아란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명은 산 아래로 내려가 말을 구해 양주로 향했다.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해가 바뀌었다. 그간 채홍 된 여인들의 숫자가 일만 이천 명이었다. 운평(運平)이라 하여 전국 각지에서 뽑혀 올라온 기생이나 처녀들의 숫자가 일만 이천이었고 그 운평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나고 미색이 출중하여 궁궐 내부에 머물며 연산군을 직접 모시는 아들을 흥청(興淸)이라 하여 처음에는 100명 정도로 시작했으나 점차 늘어나 300명에서 1,000명 수준까지 확대되었다. 선비들이 공부하는 성균관을 연회장으로 바꾸고, 원각사를 기생들의 숙소로 개조하는 가 하면, 날마다 이어지는 연회로 국가 재정이 바닥났고 '흥청거리는 정사에 나라가 망한다'는 뜻의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백성들 사이에 돌고 돌았다. 노비나 기생뿐만 아니라 양반가의 부녀자와 딸들까지도 미모가 뛰어나면 강제로 잡아갔고 각 고을의 수령들은 채홍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의 구역에서 가장 예쁜 여인들을 공물 바치듯 보냈다. 이 과정에서 딸을 빼앗기지 않으려 급하게 혼인을 시키거나, 얼굴에 흉터를 내는 비극이 속출했다. ‘궁중에 가득 찬 흥청들이 만 명에 이르니, 곡소리가 도성에 진동하고 민가는 텅 비었다’는 노랫소리도 장안에 파다했다.
유자광(柳子光)과 임사홍(任士洪)이 이극균(李克均)과 사귀었으니 그 죄가 참대시(斬待時; 즉시 참형에 처하지 아니하고 추분(秋分) 이후 춘분(春分) 이전의 시기가 될 때까지 기다려서 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에 해당한다고 하였으나 연산군은 다만 3천 리 유형(流刑)을 속바치고 그대로 일은 보게 하라고 전교하여 임사홍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었다. 김처선의 죽음 이후로도 연산군은 김처선을 극도로 혐오했는지 밑도 끝도 없이 복수를 꾀하였다. 예를 들어 김처선의 아내와 이공신의 아내를 관비로 삼고 7촌 관계의 친족들까지 벌을 주는가 하면, 김처선 부모의 묘도 뭉개버리고 집은 헐어버린 후에 집터를 물웅덩이로 만드는 파가저택을 하였으며 김처선의 본관인 전의(全義)도 없애버렸다. 김처선의 이름에 들어갔던 '처(處)'자의 사용을 기피하여 24절기 중 하나인 처서(處暑)를 조서(徂暑)로 바꾸고 그토록 좋아하던 처용무(處容舞)의 이름까지 풍두무(豊頭舞)로 바꿔버릴 정도였다. 또한 관리나 군사들 중 김처선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개명을 명하는가 하면 권벌이라는 사람이 과거 시험에서 처(處)자를 썼다고 합격을 취소해 버렸다. 성몽정이 상소에 처(處)자를 써서 국문을 당하다가 천만다행히도 법 제정 이전에 썼다고 국문을 취소한 사례도 있었다. 연산군은 점점 더 괴물이 되어갔다. 연산군의 큰아버지인 월산대군의 부인이자 박원종의 누이인 박씨 부인이 연산군의 아이를 잉태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미색이 뛰어나 연산군이 처음엔 월산대군의 집에 왕래를 하다가 이제 대 놓고 궁궐에 불러들였기에 과부가 아이를 잉태했다는 추문은 박씨 부인을 수치심과 고통 속에 빠져들게 했다. 결국 박씨 부인은 목을 매 자결했다. 박원종은 큰 어머니를 범한 임금을 어찌 섬기냐며 대소 신료들을 압박해 나가기 시작했다. 박원종은 분노로 하루하루 지옥 속에서 살아갔다. 하루빨리 반정의 그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후궁을 넘어, 연산군의 모성 결핍을 채워주는 장녹수는 연산군을 잠시 풀어 주다가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는 연산군을 어린애 다루듯 쉽게 다루었고 이를 이용해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조정을 장악했다. 그 사이 박원종과 성희안은 구수영(具壽永)을 찾아가 반정에 동참할 것을 건의했다. 구수영은 본관이 능성(綾城), 정2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이자 임숭재와 나란히 장악원 제조였다. 세종(世宗)대왕의 막내 아들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의 사위이자 연산군의 여동생인 휘순공주(徽順公主)의 남편이었다. 임금의 사위인 부마(駙馬)는 원칙적으로 정사에 깊이 관여할 수 없었으나, 연산군은 자신의 심복이나 가까운 친인척에게 실무직을 맡겼기에 법과 제도는 사실상 연산군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구수영은 처음엔 반정의 거사에 부정적인 시각이었다. 1504년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죽자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로서 상례를 잘 처리한 인연으로 연산군은 구수영을 임숭재와 함께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로 제수하고, 흥청(興淸) 200인, 운평(運平) 1,000인, 광희(光熙) 1,000인을 모아 악률을 교육하면서 연산군의 유락(遊樂)을 도왔다. 하지만 박원종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반정에 동참하게 되었다. 연산군에게 한 가지 고통을 주었던 일이라면 임숭재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채홍준사의 일로 격무(激務)가 누적되어 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도중 객사(客死)한 것이었다. 지웅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간(肝)이 망가질대로 망가졌을 것이라는 추론을 했지만, 정작 죽는 순간까지도 연산군을 위해 어여쁜 미녀를 바치지 못하는 게 한(恨)이라는 유명을 남겼다는 임숭재가 실로 천하의 간신다운 간신이라는 생각을 했다.
반정의 정국계는 자순대비도 만났다. 선왕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된 자순(慈順)대비는 사실상 연산군의 계모였지만, 연산군이 정(情)으로 써 다가간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고 정국계가 거듭 달려와 부복하여 아들 진성대군을 추대한다는 진언을 하자, ‘진성대군이 아직 어려 부족한 점이 많은데 어찌 나라를 이끌 수 있겠소’ 하다가도 마지못해 수락하는 분위기였다. 반정의 기틀을 다진 정국계는 거사일만 잡으면 되는 것이었다. 김처선과 이공신이 죽고 나서 조정은 그야말로 미쳐 돌아갔다. 장녹수의 품 안에서 놀던 연산군은 흥청의 치맛자락 안에서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아들을 잃은 임사홍은 이제 권력을 놓을 만도 한데 여전히 권력 놀음에 빠져 도끼 자루 썩는 줄 몰랐다. 박원종은 내금위장 직을 그만두었다. 연산군에게 환멸을 느낀 이유도 있거니와 죽은 누이를 생각하며 더 이상 연산군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게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박원종은 같은 무관 출신이자 사돈지간인 변준(邊濬)을 추천하여 내금위장에 앉혔다. 박원종은 아들 박운(朴雲)을 변준의 딸과 혼인시켜 사돈을 맺었고, 변준은 원주 변씨(原州 邊氏) 가문으로 대대로 무예에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둘은 돈독한 우애와 신뢰를 바탕으로 사돈이자 동맹을 맺은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하였다.
구왈기야 이룸은 북방 여진의 용사 ‘바투루’ 30명을 양주로 데려와 훈련시키고 있었고, 아란카는 의외로 총명한 머리로 지웅의 보좌관을 자처하며 여러 가지 지원 역할을 했다. 호장 최만호와 권좌수는 시간이 갈수록 사또인 지웅에게 충성을 다해 관아의 모든 일을 바르고 빠르게 추진했다. 중대장 윤혜명과 기찰군관 서만복은 지웅의 지도 아래 넓은 고을을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범죄 없는 고을로 만들어 가고 있었으며, 지웅이 부임한 지 일 년 만에 농작물의 수확은 두 배가 되었다.
두 달여에 걸쳐 신중하게 장정들을 물색하고 포섭하여 반정군의 일원으로 훈련 받는 이가 500명이었다. 농토를 넓히고 개간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불러와 먹여 살리고 훈련시키면서 매달 쌀과 보리를 합쳐 한 달에 두 말을 주었으며 때에 따라서는 면포를 한 달에 여섯 필에서 여덟 필까지 지급했다. 다른 지역에서 장정이 하루 일해 받는 일당이 쌀 한 되였으니 거의 곱절은 받는 셈이었다. 당연히 장정들에게 불만이 있을 리 없었고, 개나 소나 받아들이는 게 아닌 엄격한 신분 확인과 보안 교육이 있었기에 통제가 가능했다. 기찰군관 서만복이 장군으로 치면 덕장(德將)의 기운인지라 장정들이 말을 잘 들었다. 어찌 보면 지웅의 사병(私兵)이었기에 조정에 탄로라도 나면 역모로 몰려 목이 날아갈 수 있어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다.
양주엔 지역 상단(商團)을 주름잡던 두 사람이 있었다. 양주는 한양의 북쪽 관문이자, 보루산과 불곡산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양주를 거점으로 이들은 한양의 경강상인들과 연계되어 있으며, 주로 관급 물자와 면포, 소금 등 생필품의 유통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중 제일 큰 상단은 ‘한성상단(漢城商團)’으로써 도접주는 최필환(崔必煥)이었다. 원래 몰락한 잔반 출신인데다 과거를 포기하고 장사에 뛰어들어, 특유의 명석함으로 경강상인들의 신뢰를 얻었다. 중앙 관료들과의 유착 관계가 깊어 조정의 흐름을 꿰뚫고 있어 다루기 까다롭고 겉으로는 예법을 차리며 부드럽지만, 이익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계산가였다. 양주 시전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으며, 면포 5,000필을 단 하루 만에 조달할 수 있는 자금력을 가졌고 소속된 행상(보부상)만 300명이 넘었다. 주요 사업으로 면포 유통, 관청 납품(공납), 고리대업 등을 하던 경강(京江)의 자본줄이었다.
여기에 필적하는 다른 하나는 북방의 개척자 ‘백호상단(白虎商團)’이었다. 역시 양주를 거점으로 의주와 함경도까지 오가는 원거리 무역과 약재, 가죽 등을 취급하는 거친 상단이었다. 도접주겸 대행수는 강무강(姜武强)으로 함경도 변방의 군관 출신이었다.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상급자의 모함으로 군직을 잃고 상인이 되었으며 무관 출신답게 상단원들을 군대식으로 조직하여 산적이나 도적들로부터 물자를 지키는 데 탁월했다. 성격이 호탕하고 의리를 중시하지만, 한 번 눈 밖에 나면 무력을 써서라도 응징하는 야성적인 인물이었다. 자금력은 한성상단에 밀릴지 모르나, 동원할 수 있는 '무장 호위대'의 수준이 정규군 못지않아 여진족과의 밀무역 루트를 통해 희귀한 산삼과 호랑이 가죽을 독점하던 상단이었다. 주요 사업으로 약재(산삼), 가죽, 말(馬) 거래 등 어지간한 상단이 하기 힘든 일을 독자적으로 이루어 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지웅이 다루기 가장 어려웠던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지웅이 양주목사로 부임한 지 두 달 만에 지웅의 가장 친한 벗이 되었다. 나이로 보면 두 상단의 도접주들이 지웅 보다 열 살은 위였으나 서로 만나서 인품과 기개, 도량을 대어 보니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이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하여 대부분의 고을 현감들은 장사치들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많았으나 지웅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이야말로 조선 조정의 핏줄이었다. 이들이 없으면 쌀 한 톨조차도 비싼 값에 사야 했고 그 폐단은 백성들의 몫이었다. 상단의 도접주들 또한 나이 어린 고을 현감이라고 몇 년 동안 몇 푼 쥐어주면 알아서 빗장을 풀거니 하며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그는 다른 사람과 달랐다. 눈칫밥과 험한 세월 깡다구 하나만으로 살아 온 도접주들에게 지웅의 배포는 큰 산과도 같았다. 한번은 이런 일화가 있었다. 지웅이 부임한 지 두 달째 되던 날이었다.
양주관아의 깊숙한 내실에 주안상이 마련되었다. 지웅은 두 상단의 도접주를 불러 처음으로 마주했다. 촛불 하나가 일렁이는 가운데 정적만이 감돌았다. 두 상단의 도접주는 꼿꼿이 앉아 있었으나 사또의 의중을 몰라 긴장한 채 침만 삼키고 있었다. 두 도접주는 양주의 경제를 쥐고 흔드는 거물들답게 정3품 수령 앞에서도 기세가 눌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장사치들 앞에서 거드름만 피우던 허울뿐인 양반들이 종내는 달려와 도움을 청하는 모습을 여러 번 겪었던 터라 두 사람의 관심은 과연 새로 부임한 사또가 얼마를 원하는 지에 달려 있었다. 지웅이 먼저 묵직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과연, 양주의 두 상단이 조선을 먹여 살린다고 하더니 기세가 남다르십니다. 내가 두 도접주를 모셨다고는 하나 일반 벼슬아치처럼 몇 푼 동냥하자고 부른 건 아니니 표정들을 푸시지요. 하하하.”
한성상단의 최필환이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상 위에 올려놓고 입을 열었다.
“사또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더 더욱 두렵습니다. 저희도 몇 푼 적선하자고 찾아온 건 아니니 사또께서 고을을 다스리시는데 필요한 액수를 말씀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저희도 천한 장사치이기는 하나 배포만큼은 천하지 않습니다.”
백호상단의 강무강이 말을 받았으나 두 사람 모두 말에 뼈가 있었다. 지웅은 호탕하게 웃었다. 차라리 이런 인물들이 대화가 잘 통했다.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눈알을 굴리며 앞뒤를 재는 소인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자존심이 썩 크지는 않지만 오늘 내 자존의 크기가 얼마인지 대략 알았소이다. 그렇다면 대화를 달리 해야겠군요.”
지웅은 술을 한 잔 따라 마셨다. 그리곤 다시 입을 열었다.
“한성상단은 그동안 조정에서 걷어가는 상세(商稅)와 공물(貢物)에 지쳤지요? 면포나 종이, 약재 등을 조달해야 했고 때가 되면 왕실의 잔치나 사냥을 위해 수시로 최고급 비단과 지역 특산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백호상단은 어떻습니까? 명나라와의 주된 거래 품목인 군마(軍馬)와 가죽을 뺏기는 것도 모자라 최근에는 채홍을 빙자하여 채홍에 필요한 숙식비와 뇌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더구나 금표를 세워 민가의 출입은 막고 양주를 지나던 모든 상로(商路)엔 통행세를 내야 했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두 도접주는 침을 삼켰다. 모두 맞는 말이었으나 도대체 신임 사또는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당최 예상할 수 없었다. 사또가 두 도접주를 바라보더니 형형한 눈빛으로 말했다.
“한성상단에게는 공신에 준하는 신분 보장을 해 주겠소. 시장에 허가 없이 파는 난전(亂廛)들이 있지만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 독점 상권은 주지 못하나 조정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상단을 움직일 수 있도록 변방 통행증 및 세금 감면을 해 주겠소. 물론 금표의 통행세도 없을 것이오.”
한성상단 최필환이 다시 침을 삼키더니 채워진 술잔을 집어 한 잔 마셨다. 지웅이 백호상단의 강무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백호상단에겐 역적으로 몰려 죽은 동료들의 신원(伸寃)을 약속하겠소. 또한 상단의 행수나 젊은 보부상들을 양주관아의 정규군으로 임명하겠소. 선별적 정규군의 지위를 주어 위급시엔 군사로 차출이 될 수 있으나 평시에는 상단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오. 화적떼들의 기습에 대비하여 일정 지역에서는 양주관아의 포졸들이 경호를 해 줄 것이나 자체적으로 화적떼를 제압해도 아무런 징벌이 없을 것이오. 정규군으로 달마다 녹봉 역시 지급될 것이오. 또한 두 접주께는 여진과의 거래도 터 드리지요.”
사또의 얘기에 두 도접주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아무리 관할 구역이 넓은 양주관아의 수령이라고 하나 일개 목사가 임금의 권위를 행사하겠다는 데 곧이곧대로 들을 위인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지웅은 자신이 있었다. 이미 조정은 반정(反政)의 정국계(靖國契)가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상은 연일 주색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듣기로 호조판서 이기동의 처(妻)가 연산군의 희롱에 목을 매달았기에 이기동마저 정국계에 가담했다는 소리를 들었던 터였다. 육조판서가 정국계의 손아귀에 있었다. 얘기를 듣던 백호상단 강무강이 물었다.
“사또, 사또께서 말씀하신 얘기의 진위를 떠나서 우리 상단들을 위한 충분한 고심을 함께 해주시는 것만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허나, 저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으니 이러한 제안을 해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역시 무관 출신답게 예리했다. 눈빛도 마음에 들었다. 저런 눈빛은 마음을 나누면 하나가 되는 눈빛이었다. 지웅이 술잔을 들어 건배를 청하자 이젠 두 도접주가 잔을 부딪쳤다. 지웅이 술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짜릿했다.
“두 분에게 결례가 안 된다면 하나 묻겠소이다. 오늘 양주 금표(禁標) 안팎을 오간 자가 도합 몇 명이나 된다고 보시오?”
한성상단의 최필환이 술잔을 놓으며 여유 있게 말했다.
“소인의 장부에는 오늘 하루 양주 장터를 거친 행상만 오백이요, 흘러 들어온 유민이 일천(一千)이라 기록되었습니다. 대략 삼천 명은 족히 넘을 것입니다.”
“제 부하들이 지키는 길목을 지난 말발굽 소리만 세어도 수만 번입니다. 머릿수로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강무강도 거들었다. 지웅이 대답했다.
“오늘 양주를 오간 자는 단 두 사람뿐이었소.”
그러자 견문이 넓은 강무강이 끼어들었다.
“혹 사또께서 이(利)를 쫓는 자와 해(害)를 피하는 자를 들어 이(利)씨와 해(害)씨 두 사람을 칭하는 것이오이까?”
“하하하, 강 접주께서 한비자(韓非子)의 이해(利害) 사상을 아시는군요. 허나 제 대답은 다릅니다. 바로 욕생자(欲生者)와 욕살자(欲殺者) 두사람이지요.”
가만히 듣고 있던 최필환이 말했다.
“살고자 하는 이와 죽이고자 하는 이라,,,”
한비자가 말하기를 수레를 만드는 사람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관을 만드는 사람은 사람들이 빨리 죽기를 바란다며, 이는 그들이 착하거나 악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이익을 쫓기 때문이라고 설파한 적이 있었다. 굳이 말한다면 양주를 오간 사람이 이(利)와 해(害)를 가진 자들의 이야기도 맞기는 하지만 지웅이 말하고 싶은 건 현실이었다.
“맞습니다. 지금 조선은 주상의 폭정을 피해 살고자 하는 자와 주상의 폭정을 죽이려는 자 둘뿐입니다. 두 접주께서는 현 조정을 어떻게 보십니까? 정상이라고 보십니까?”
최필환과 강무강은 주변을 돌아보며 나지막히 말했다.
“사또, 누가 들을까 염려됩니다. 역모로 몰려 죽은 이가 어디 한둘입니까? 말씀 조심하십시오.”
“맞습니다.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한 세상입니다. 우리 같은 장사치들은 입을 조심해야 하지요.”
“사실 목숨을 걸고 말씀드리지요. 한양엔 정국계가 있습니다. 반정을 도모하고 있지요. 이미 자순대비의 윤허도 있으셨습니다. 두 분이 참여하신다면 향후 내가 방금 말한 모든 게 실현이 될 겁니다.”
지웅이 태연하게 술을 마시며 말을 하자 두 접주의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누가 들으면 멸문지화를 당할 얘기를 거리낌 없이 하는 젊은 수령을 보며 두 접주는 두려움을 느꼈다. 수령의 눈빛은 추호도 농을 치거나 실없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젊었지만 눈빛만 보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상황이 이미 엎질러진 물이란 걸 인식한 최필환이 물었다.
“사또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밖에는 무장한 군관들이 있겠군요. 우리가 두려워 이대로 일어서면 군관들의 칼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요. 허나, 그게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이미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우리 같은 장사치들이 시장의 소리를 제일 빨리 듣지요. 저는 사또와 함께 하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반정이 시작되면 제가 저의 상단을 이끌고 제일 먼저 앞장 서겠습니다. 사또.”
최필환의 동의하자 강무강도 이내 함께 하겠다며 의사를 밝혔다. 의기가 투합했다. 최필환의 얘기대로 밖에 무장한 군관들이 있었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건 오로지 외부를 경계하는 차원이었다. 두 접주가 거부를 해도 죽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지웅은 두 접주가 지웅과 뜻을 같이 할 것이란 걸 믿고 있었다. 이미 한성상단과 백호상단에 지웅의 부하들이 보부상으로 위장하여 들어가 있었기에 각 상단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허술하게 계획을 짜는 지웅이 아니었다. 더욱이 작년 해란이 죽은 후로 지웅의 모사(謀事)와 계획은 한층 치밀해지고 더 한층 절절했다. 모든 말과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이런 자신감이 주변 사람들을 더욱 더 끌어들이고 있기도 했다. 그날 밤 세 사람은 허물없이 술을 마셨고 처음 보았지만 마치 십년은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해진 것이었다. 지웅은 안정적인 지지기반을 만들어 가고 있었고, 정국계의 권력을 등에 업은 지웅은 반정이라는 명분으로 하나씩 완벽한 준비를 해 나가고 있었다. 벚꽃이 바람에 날려 눈처럼 쏟아졌다.
해란이 죽고 나서 지웅은 한양 땅을 밟지 않았다. 1,506년 병인년(丙寅年) 6월, 급한 기별이 날아왔다. 박원종에게서 온 전갈이었다.
‘급소회동 문기즉참(急召會同 聞奇卽參)’ - 급히 회의를 소집하오니 보는 즉시 참석바람.
지웅은 무슨 급한 일인가 싶었지만 마침 해란의 기일이 다가오기도 하여 한양으로 갈 채비를 하였다. 아란카가 따라나섰다. 이룸은 삿갓을 쓰고 다니면서 조선 무사 행세를 했고, 조선 여인을 만나 살림을 차렸다. 아란카는 양반댁 규수처럼 연분홍 치마 저고리를 입고 자신의 존재를 숨겼다. 조선말에도 능통하여 누가 보아도 칼을 잘 쓰는 자객이 아닌 조신한 처녀로 보았다. 해란이 죽은 그날 이후 칼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지웅과의 관계를 파악하지 못해 주변에서 이런저런 구설수가 있는 걸 알았지만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일상사였다. 하지만 눈치가 제법 빠른 관원들은 아란카가 사또를 흠모하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지웅과 아란카는 말 두 마리를 골라 관아를 출발했다. 시간은 가끔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도 한다. 지웅은 일 년이라는 시간동안 하루도 해란을 잊지 않았지만 늘 곁에서 이것저것 챙겨주는 아란카의 정성에 어떤 때는 아란카가 부인이라도 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유향소(留鄕所)의 난다 긴다 하는 사족(士族)들이 젊은 현감에게 중매를 서려다가도 아란카의 존재 때문에 포기한 적이 다반사였다. 지금껏 대 여섯 명의 혼담이 오고 갔지만 얼굴도 보기 전에 아란카의 입김에 막히고 말았다. 그도 그럴것이 아란카는 양주관아의 안살림과 의식주를 책임지는 내자고(內資庫)의 마님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다모(茶母)로써 양주 시장바닥의 민심을 읽고 지웅에게 밤늦게 차도 끓여 내오는 실질적인 보좌관의 역할도 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관아에 소속된 관기(官妓)나 여종들이 하는 일이었지만 워낙 일 처리가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어서 처음부터 맡겼던 것이 지금껏 이어져 온 것이었다. 때로는 상단(商團)의 접주들이 현감인 지웅을 만나기 전에 아란카를 먼저 만난다는 소리도 있었고, 지역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나 사건이 일어나면 현감에게 보고할 것도 없이 아란카가 처리하는 적도 있었다. 분명 지웅에게 해(害)가 되는 일이었지만 양주에 사는 그 어느 누구도 문제 삼는 이가 없었다. 그만큼 양주목사인 지웅의 존재를 두려워 하기도 했거니와 존경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일 년 동안 양주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첫째, '양주 아동 포백(布帛) 하사와 청년 식곡(食穀) 지원'을 했다. 이는 양주의 모든 아동에게 철마다 옷을 짓도록 면포를 고루 나누어 주어, 가난하여 옷을 입지 못하는 아이가 없었고. 또한, 장성한 청년들에게 매 철마다 '희망곡(希望穀)'을 하사하여 그들이 타지로 떠나지 않고 양주의 땅을 일구며 미래를 꿈꾸게 하였다. 둘째로 '양주 관립 혜민원(惠民院)‘을 중건하여 돈이 없어 목숨을 포기하는 백성이 없도록, 관아의 창고를 열어 의원을 상주시키고 약재를 관비로 충당하니, 산천초목도 양주목사의 인술(仁術)에 감복하여 역병이 양주를 피해 간다는 소문도 돌았다. 뿐만 아니라 토호들이 백성들의 토지를 불법으로 빼앗아 양주 산천을 개발하며 사대부와 토호들이 제 배만 불리려 했던 일들을 찾아내 간사한 상인들과 권세가들이 가로채려던 재물을 모두 환수하여 양주 관아의 공적 금고를 가득 채워 다시 억울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셋째로 양주 내에서만 쓸 수 있는 양주 통용 표식(標式)이 찍힌 유통 증서를 만들어 장날마다 백성들이 쓰게 하니, 양주의 돈이 밖으로 새 나가지 않고 양주 장터만 북적거렸다. 이로 인해 한성상단과 백호상단도 양주 백성들의 눈치를 보며 정직하게 장사하게 되었으니, 가히 양주 시전(市廛)의 중흥이라 할 만 했다. 지웅은 특히, 관아의 서리들이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부정(不正)은 곧 백성의 피눈물'이라는 관훈(官訓)을 만들어 현판을 걸었고, 뇌물을 주고받는 자들을 엄벌에 처하니 양주 관아의 담벼락이 투명해져 백성들이 억울함 없이 신문고를 두드렸다. 이렇게 일 년이 지나니 양주 백성들이 칭송문을 만들어 지웅에게 바쳤다.
"우리 양주목사께서는 이(利)를 백성에게 돌리고, 해(害)를 토호에게 주시니, 억강부약(抑强扶弱: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의 대장부라! 양주의 붉은 흙이 목사님의 발자취를 따라 황금빛으로 변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