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부운(浮雲)
by Jiungine
누원(樓院) 주막거리에 들어간 지웅과 돌석은 제법 큰 주막에 들어가 방 하나를 차지한 채 술상을 받아 놓고 있었다. 양반과 상놈이 함께 앉아 술을 마시는 걸 누가 보면 강상죄를 물어 경을 칠 일이었지만, 지웅은 남들이 아랫것들이라고 부르는 노비들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허물없이 지냈다. 그렇다고 지웅을 함부로 대하는 이 또한 없었다. 얼굴까지 발개져 술이 오른 돌석은 연신 자식 자랑을 해댔다. 네 살 된 아들이 있어 늦은 나이에 본 자식 사랑에 아들 이야기만 나오면 침을 튀겼다.
“대감마님, 아 이놈이 벌써 천자문을 읽습니다요. 저를 닮아서 머리가 비상합니다요. 제 처는 학문을 익혀서 무슨 소용이냐며 타박하지만 전 생각이 다릅지요. 아무리 천것이라도 제 이름 석자는 쓸 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요?”
“그래 맞는 말이다. 허나 굳이 한문을 배울 필요가 있느냐? 이제 우리 한글을 배워도 충분히 사람 구실 할 수 있느니라. 한글은 돌석이 너도 할 수 있지 않느냐?”
돌석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
“근데 고것이 그,,한문이 좀 더 있어 보이는 게,,아 왜 사대부들도 한글을 언문이라 하여 무시하고 한문을 고집하지 않습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여전히 명나라를 사대하는 훈구 대신들의 세력들과 젊은 사림의 잔존 세력들마저 한글을 싫어했다. 훈구파는 배우기 쉬운 한글이 퍼지면 백성들이 똑똑해져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위협이 될까 하여 싫어했고, 사림파마저 한글은 오랑캐의 글자와 다름없는 근본 없는 글자라며 철저히 무시했다. 씁쓸한 표정으로 탁주 한 잔 마신 지웅에게 돌석이 누가 들을 까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나지막히 물었다.
“근데 대감마님, 운종가의 종루 기둥에 벽서(壁書, 괘서)가 붙은 건 아십니까요? 한글로 써진 벽서에 장안이 온통 뒤집어 졌습니다요”
지웅은 금시초문이었다. 말을 타고 다니는 내내 그런 벽서를 보지 못했기에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벽서라니, 그런 게 있었단 말이냐?”
“어허, 우리 대감마님, 연정(戀情)에 빠져 정신이 다른 데 계시는구만요. 이것 보십시오. 제가 한 장 뜯어왔습니다요. 이제 운종가 말고도 도성 안 곳곳에 이런 벽서가 붙어 있습니다요. 여기 들어오기 전에 대감마님께서 누원(樓院)엔 채홍사들이 들러 말을 갈아타는 곳이니 이곳으로 오자며 들어온 거 아닙니까요? 그 누원 담벼락에도 괘서가 있었습니다요.”
지웅은 심각한 표정으로 돌석이 내민 벽서를 펼쳤다. 거기엔 한글로 쓰여진 마치 화가 난 듯 거친 필체가 있었다.
-만 백성에 고함. 하늘이 듣고 땅이 굽어보신다! 백주 대낮에 꽃 같은 처녀들을 짐승처럼 끌고 가니, 부모는 통곡하고 강물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백성의 피로 이룩한 땅에 술판을 벌이고 기생의 치맛자락을 흔드니, 이 나라의 명운이 다하였구나. 백성의 입을 막는다고 그 원통함이 사라질쏘냐? 폭군 연산은 들어라. 민심은 물과 같아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광풍이 불면 그 배를 뒤엎는 법이다! 머지않아 일장산의 호랑이가 내려와 너의 목을 물 것이니, 만백성은 깨어나 새로운 새벽을 맞이하자!-
지웅은 걱정이 되었다. 이런 벽서가 장안에 나돈다면 분명 궁에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천하의 간신 임사홍이 가만 놔뒀을 리 만무했다. 도성 밖 30리를 헐어서 백성들을 내쫓고 금표를 세우더니 지금은 채홍사를 통해 처녀건 유부녀건 닥치는 대로 잡아가 백성들의 원성을 듣고 있었다. 이러한 임금을 비방하는 벽서가 붙은 걸 주상이 알게 되면 또 얼마나 많은 백성이 피를 흘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누원이면 요 맞은편에 있는 게 아니냐? 가서 벽서가 붙어 있다면 한 장 떼오거라.”
돌석은 지웅의 표정이 심각해진 걸 느끼고는 바로 달려나갔다. 누원(樓院)은 출장 중인 관리들이 숙식을 해결하고 관리들의 말을 갈아주고 공문서를 전달하는 역참(驛站)기능을 겸하고 있었다. 종6품 외관직인 찰방(察訪)들이 상주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하고 통행을 통제하였으나 최근엔 채홍사들이 전국에서 끌고 온 여인들을 잠시 수용하느라 복잡하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일각(一刻)이 채 지나지 않아 나갔던 돌석이 돌아왔다. 손에는 찢어진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돌석이 종이를 건네주고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한달음에 다녀왔습니다요.”
지웅은 벽서를 펼쳐 보았다.
-告八道萬民書(고팔도만민서) - 팔도 만민에게 고함
昏君無道 綱紀崩壞(혼군무도 강기붕괴) - 혼미한 임금이 도를 잃으니 나라의 기틀이 무너졌도다.
奪人妻女 汚穢聖地(탈인처녀 오예성지) - 남의 아내와 딸을 빼앗고 성스러운 배움터를 더럽혔으니,
天怒人怨 必有災殃(천노인원 필유재앙) - 하늘이 노하고 백성이 원망하니 반드시 재앙이 닥칠 것이다.
伐暴救民 就在今日(벌폭구민 취재금일) - 폭정을 벌하고 백성을 구하는 일은 바로 오늘에 달려 있다! -
지웅은 벽서를 다 읽고 나니 백성과 임금 사이에 생긴 간극(間隙)을 더 이상 좁힐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이제 피바람이 불어 백성들이 다 죽어 나가든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조정을 뒤엎든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지웅은 이제 때가 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돌석이 목이 마른지 탁주 한 잔 마실 때 밖에서 누군가 소리치는 게 들렸다.
“양주목사님 찾습니다요. 양주목사님 계십니까요?”
지웅은 돌석을 바라보며 귀를 집중했다. 분명 지웅 자신을 찾는 소리였다. 돌석이 문을 열었다. 밖에서 마당에 멍석을 깔고 탁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전부 돌석을 쳐다 보았다. 대문 앞에는 이마에 커다란 점이 있는 아이가 서 있었다.
“양주목사를 찾은 게 바로 너냐?”
“맞습니다요.”
돌석의 질문에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양주목사님 계십니까요?”
아이가 재차 물었다. 이번엔 지웅이 문밖으로 나와 섰다. 고관대작들이나 입는 옷차림에 탁주를 마시던 사람들이 죄다 지웅을 쳐다 보았다.
“내가 바로 양주목사니라. 어인 연유로 나를 찾느냐?”
지웅을 쳐다보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목사나 되는 고위직이 바로 앞에 있는 누원(樓院)을 놔두고 이런 허름한 주막에 들어 온 게 이상하다는 소리들이 들렸다. 아이는 지웅의 말에 앞으로 달려오더니 안도하는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더니 입을 열었다.
“기별을 넣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요, 저 누군지는 모르겠고 양주목사님 찾아서 이말을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요. 정혼자가 성균관에 끌려갔다고 빨리 오시라구요.”
지웅은 놀라 아이를 닦달했으나 그 이상 아는 바가 없다며 지금 자신과 대화하는 양주목사의 이름이나 알려달라더니 지웅의 이름을 듣고는 발길을 돌렸다. 지웅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분명 해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였다. 하지만 누가 이 소식을 전했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나와 해란의 관계를 아는 이는 조선 땅에 아버지와 어머니 말고는 없었다. 장악원 제조 임숭재는 내가 기적(妓籍)에서 빼내 달라는 부탁만 받았을 뿐 해란과 나의 사이를 알 도리가 없었다. 일각도 지체할 수 없었다. 지웅은 돌석에게 먼저 양주로 내려가라고 이른 뒤 그 즉시 말을 타고 도성 방향으로 달렸다. 이미 어둑해진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는지 달이 보이지 않았다. 왠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웅은 잠시 쉬었던 말이 힘차게 달리도록 고삐를 죄며 상체를 숙였다. 말은 지나온 길을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창경궁(昌慶宮)은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대왕이 세조대왕의 왕비이자 할머니인 자성왕대비, 생모이자 대비인 인수대비, 예종대왕의 계비인 숙모 인혜대비를 모시기 위해 20년 전에 대대적으로 궁역을 확장해, 창성하고 경사스럽다는 뜻의 '창경(昌慶)'으로 이름을 고친 궁이었다. 연산군이 편전(便殿)으로 사용하여 평소 업무를 보던 문정전(文政殿)이지만 오늘은 대소 신료들을 위해 연회를 베푸는 곳으로 전락해 술시(戌時)부터 풍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자성왕대비(慈聖王大妃)가 살던 통명전(通明殿)도 비어있고, 인혜대비(仁惠大妃)도 이미 6년 전에 돌아가셨기에 양화당(養和堂))도 비었고, 경춘전(景春殿)에 살던 할머니 인수대비(仁粹大妃)도 불과 몇 개월 전에 돌아가신 터라 연산군은 눈치 볼 것도 거리낄 것도 없었다. 연회엔 김처선을 비롯하여 삼정승과 판서들, 종친들도 나와 자리를 차지했다. 당상관은 모조리 불러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부인을 대동하라는 어명을 받은 터였다. 영의정으로 갓 제수된 유자광(柳子光)과 좌의정 허침(許琛), 우의정 박숭질(朴崇質), 병판 임사홍, 연산군의 장인이자 거창부원군인 신승선(愼承善),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愼守勤), 박원종과 이조판서 강귀손 등 표정은 어두운 채 연산군이 차려 준 술상을 앞에 두고 마지못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연산군의 장인인 신승선은 고령을 이유로 중간에 궁을 나갔다. 박원종은 내금위장이었지만 종친이라는 이유로 칼을 거두고 연회에 참석하게 했다. 연산군이 벌써부터 몸을 가누지 못하며 취한 목소리로 고함쳤다.
“그만!”
연산군이 큰 소리로 그만하라고 하자 악공들이 모두 멈추었고 춤을 추던 흥청(興淸)들이 가무를 멈추고는 뒷걸음질로 한쪽에 모였다. 연산군이 대신들을 바라보며 역시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오늘 기분이 좋아 연회를 베풀었거늘, 어찌하여 단 한 놈도 고맙다는 말이 없는 것이냐?”
연산군의 노기 섞인 한 마디에 좌중은 침묵한 채 긴장했다. 유자광이 간들거리며 달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 망극하옵니다. 사람마다 희노애락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나, 군자는 표현을 경계하라 했으니 어찌 마음속에 성은(聖恩)의 망극을 모르겠나이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그래도 연산군은 노기를 띤 채 자리로 돌아가 종이 한 장을 들고 오더니 다시 고함쳤다. 표정엔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표현을 경계하라? 이것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시오? 영상은 이걸 큰 소리로 읽어보시오.”
연산군은 종이를 유자광에게 던졌다. 유자광이 그 종이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연산군의 눈치를 살핀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종이의 글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만 백성에 고함, 하늘이 듣고 땅이 굽어보신다! ,,,백, 백주대낮에 꽃 같은 처녀들을 짐승처럼 끌고 가니, 부, 부모는 통곡하고 강물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배, 백성의 피로 이룩한 땅에 술판을 벌,,,이고 기생의 치맛자락을 흔드니, 이 나라의 명운이 다하였구나. 전하 죽여주시옵소서.”
유자광이 바닥에 넙죽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고 미처 끝까지 읽지 못하자 연산군은 화를 내며 마저 읽으라 강요했다. 유자광은 우는 목소리로 남은 글을 마저 읽었다.
“백성의 입을 막는다고 그 원통함이 사라질쏘냐. 폭군 연, 연, 연산은 들어라. 민심은 물과 같아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광풍이 불면 그 배를 뒤엎는 법이다! 머지않아 일장산의 호랑이가 내려와 너의 목을 물,,, 것이니, 만백성은 깨어나 새로운 새벽을 맞이하자!”
유자광은 글을 다 읽고 나서 자신이 죽을죄를 지은 죄인인 양 울음을 터뜨렸다. 역시 천하의 간신다웠다.
“망극하옵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전하. 흐흐흑”
연산군은 마시던 술잔을 바닥에 내 던졌다. 대신들이 숨죽였다. 벽서의 내용은 끔찍했다. 연산군이 대신들의 면면을 살펴보며 손가락질을 하였다.
“내 네놈들의 면상을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이런 괘서(掛書)가 팔도에 나 붙은 지 오래되었거늘 오늘에야 내가 알게 되었다. 병판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나에게 이 사실을 알렸을꼬. 괘씸하다. 모조리 태형으로 다스려야 정신들을 차리겠느냐?”
역시 임사홍이었다. 천하의 간신 임사홍이 아니면 누가 연산군에게 이런 벽서를 일러 바쳤을까. 대신들은 오늘도 순탄치 않을 것을 예감하였다. 연산군은 판내시부사 김처선에게 걸어갔다. 연산군은 김처선의 머리 위로 들고 있던 술병의 술을 모두 부었다. 술이 뚝뚝 떨어지며 김처선의 머리칼과 얼굴, 내시복을 적셨다.
“판내시부사. 그대는 말끝마다 여섯 임금을 모셨다느니 일곱 임금을 함께 하였다느니 거드름을 피웠소만, 정작 임금을 비방하는 이런 글은 안중에도 없나 보오?”
김처선은 고개를 숙였다. 연산군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익숙치 않은 얼굴이 보였다. 연초에 손녀를 궁중에 들이지 않아 교살된 홍귀달(洪貴達) 다음으로 제수된 호조판서 이기동(李基仝)이었다. 한동안 공석이었던 호판 자리를 전혀 연관이 없는 뛰어난 무술 실력을 핑계로 호판에 제수한 기억이 났다. 하지만 이기동의 처(妻)가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제수한 거였다. 가만히 보니 좋은 핑계거리가 생겨 연산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연산군이 소름 돋는 시선으로 이기동을 쳐다보며 앞에 섰다.
“네 이놈, 내가 네놈을 가상히 여겨 호판에 제수하였거늘, 감히 어명을 어기고 신언패를 차지 않았으렷다. 여봐라. 이놈을 당장 끌고 나가 장 100대에 처하고 가산을 몰수하라.”
그러자 이기동이 바짝 엎드려 살려달라며 읍소(泣訴)를 했다. 하지만 금군들이 들어와 가차 없이 끌고 나가버렸다. 누구 하나 나서서 처결이 과함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술상 앞에 앉아 조용히 시간이 지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제수된 지 얼마 안 된 이기동은 어전회의에서든 연회에서든 신언패를 차야함을 몰랐던 것이었다. 연산군은 이기동이 있던 자리에 홀로 남은 이기동의 처(妻)를 바라보았다. 연산군의 눈빛이 달라졌다. 좀 전의 노기(怒氣)는 간데없고 광기(狂氣)만 남은 눈빛이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손,,손 하영이라 하나이다. 전, 전하.”
이기동의 처는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었다. 연산군이 손을 뻗자 여인은 흠칫 몸을 떨었다. 연산군은 손으로 여인의 얼굴을 어루만지더니 손가락 두 개를 여인의 입에 넣었다.
“손 하영이라. 이름만큼 고운 얼굴을 가졌구나. 너의 속살도 이리 고울 것이 아니더냐?”
이기공의 처(妻)는 고개가 들려져 연산군을 바라본 채 아무말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촛불이 일렁이며 한바탕 작은 바람이 불었다. 어딘가 문이 열린 모양이었다. 연산군은 자리로 돌아가 용포(龍袍)를 맵시 있게 뒤로 털며 앉더니 술을 따랐다. 그리고 명을 내렸다.
“감히 어느 놈이 이따위 오랑캐 글자로 나를 비방한단 말이냐? 백성들이 제 생각을 적어 올리고, 아녀자들이 쑥덕거리는 이 천한 글자가 화근이다. 이 글자가 살아 있는 한 짐의 권위는 땅바닥에 굴러 다닐 것이야. 오늘 이후로 이 나라에서 언문(諺文)은 죽었다. 누구도 이 글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자, 사용하는 자는 모조리 효수(梟首)할 것이다. 만약 집안에 이 글자로 된 책이 한 장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집안의 씨를 말려 버리겠다. 알겠느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연산군은 마지못해 분을 감추면서 말했다.
“이기동의 처 손하영은 이리로 오라.”
대신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박원종도 분을 삭이며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강귀손도 착찹한 심정을 숨기지 못해 조용히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유자광은 그저 묵묵히 고개만 숙인 채 억지웃음을 짓고만 있었고 김처선은 아직도 술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분위기였지만 이 상황을 제어할 역량이 누구에게도 없었다. 잘못하면 목이 달아나거나 운이 좋아야 장 100대였다. 이기동의 처 손하영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주섬주섬 옷깃을 여미고 일어났다. 저 여인은 오늘이 지나면 가문의 수치가 되어 목을 매달아야 할 것이었다. 손하영이 연산군의 보챔으로 천천히 자리로 걸어가자 다른 대소신료 부인들이 망측하다며 고개를 돌렸다. 김처선이 술을 따라서 연거푸 몇 잔 마셨다. 저 멀리 문 앞에 서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김처선의 양자 이공신은 불안함에 속이 타들어 갔다. 아무래도 오늘은 아버님이 일을 낼 것 같았다. 평소에 술을 즐겨 드시지만 저렇게 급하게 마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더구나 요즘은 집을 나설 때마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 매 순간 앞뒤를 깨끗이 하라며 꾸짖던 아버님이었다.
연산군이 손하영을 자신의 다리에 앉히더니 한 손으로 가슴을 주무르며 아기처럼 좋아하였다. 얼굴에 화색이 돌아 침을 흘리는 발정난 개처럼 손하영의 몸을 여기저기 냄새 맡으며 킁킁 거렸다. 종내는 손하영의 아래 깊은 곳에까지 손이 들어가 주무르고는 냄새를 맡았다. 손하영이 수치심에 고개를 돌려 눈을 꽉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네년도 여기 오기 전 알고 있었던 것이야. 내가 너를 선택할 것을,,그렇지 않느냐?”
그 순간, 결국 걱정하던 일이 일어났다. 김처선이 마지막 술 한 잔을 비우더니 술상을 밀치며 그대로 벌떡 일어나 연산군에게 큰 소리로 소리쳤다.
“늙고 못난 놈이,,,”
순간, 깔깔대며 손하영을 괴롭히던 연산군의 웃음이 멎었다. 놀리던 손가락도 멈추었다. 술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던 대소신료들이 모두 깜짝 놀라 김처선을 바라보았다. 박원종도 유자광도 강귀손도 예상 못한 사태에 긴장이 되었다. 멀리서 바라보던 이공신은 발을 동동 굴렀다. 순간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연산군이 김처선을 바라보자 김처선이 마저 말을 이었다.
“늙고 못난 놈이 여섯 임금을 섬겼고, 사서(四書)와 경서(經書)를 대강 통하지만, 고금에 전하와 같은 임금은 없었습니다.”
김처선은 평소처럼 허리를 굽히지도 않았고 목소리를 약하고 가늘게 내지도 않았다. 마치 딴사람인 것처럼 눈빛에는 기개가 있고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연산군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손하영을 밀치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여인이 술상 앞으로 고꾸라졌다. 연산군이 김처선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꼿꼿하게 선 김처선의 눈을 쏘아보자 김처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예로부터 혼군(昏君)과 폭군(暴君)이 없지 않았으나, 전하처럼 행동하는 임금은 전무후무하옵니다. 어찌 하늘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계속 해 보아라.”
연산군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김처선을 노려보더니 뒷짐을 진 채 김처선의 주위를 빙 돌았다. 김처선이 다시 말을 이었다.
“백성의 눈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전하께서는 지금 임금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야차(夜叉)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음란함을 당연시 여기고 조상의 업적을 더럽히고 학문을 천시하는 임금은 지금껏 단 한 분도 없었나이다.”
연산군이 활을 가져오라고 소리치자 금군 한 명이 각궁과 화살을 가져왔다. 연산군이 화살을 매겨 김처선을 향해 시위를 잡아 당겼다. 김처선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연산군을 더 미치게 했다.
“야아아아!”
연산군이 소리를 지르며 화살을 놓았다. 화살이 날아가 김처선의 가슴에 꽂혔다. 김처선이 ‘으윽’하는 비명을 지르며 한쪽 발이 무너졌다. 그러나 완전히 넘어지지 않고 버티었다. 김처선이 고통을 참고 계속 말을 이었다.
“저를 죽여 이 미친 연회를 멈출 수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죽겠나이다. 허나, 전하의 그 악명은 만대에 기록될 것입니다.”
연산군은 내금위장이 벗어 놓은 환도를 가져와 칼을 빼들었다.
“어디 그 주둥아리를 계속 놀려보아라.”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나라를 망친 상(商)나라 주왕(紂王)이 생각나는구려. 충신인 비간(比干)의 심장을 꺼내 구경하더니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쳐들어오자 온갖 보석을 달고 불속에 들어가 자결한 비운의 왕 이었소. 주상이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 없소이다.”
연산군의 얼굴은 분노와 광기로 번뜩였다. 김처선이 이제는 왕에 대한 예(禮)도 갖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눈에서는 핏물이 흐르는 듯 했고, 온몸에서는 연기가 나는 듯 했다. 급기야 들고 있던 칼을 내리쳤다. 그나마 지탱하고 서 있던 김처선의 다리가 무너졌다. 그러나 여전히 넘어지지 않고 김처선은 두 무릎을 꿇은 채 꼿꼿이 허리를 펴 연산군을 가련하게 쳐다보았다. 입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연산군이 비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디 그래도 여전히 서 있을지 보자꾸나. 내 그동안 귀가 거슬려도 속으로 참고 참았거늘, 네놈의 목숨이 열 개는 된다더냐?”
“하하하, 가련한 왕이여. 포육(抱育)의 온기가 없다 하여 지엄한 궁궐의 법도만 탓하더니 이젠 폐비(廢妃)를 핑계로 실비(失庇-어미를 잃음)와 무포(無抱-안겨본 적 없음)를 말하며 어린아이처럼 울기만 하는구나.”
연산군은 눈을 부라리며 분노에 쌓인 채 연산군의 멱살을 잡고 칼을 목에 대었다.
“그래, 그동안 옆에서 나를 얼마나 가증스럽게 쳐다보았겠느냐. 한마디만 더 지껄여 보아라. 내 네놈의 혓바닥을 잘라주마.”
그래도 김처선은 기가 죽지 않았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임을 각오한 것처럼 측은한 아이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눈빛에 경멸과 조롱이 들어 있었다.
“이보시오. 연산군, 상나라 주왕의 죽음을 두고 맹자(孟子)께서 뭐라고 하셨는 줄 아시오? 임금을 죽인 게 아니다. 의리를 저버린 일개 장부(丈夫)를 죽인 것이다. 연산군 그대 또한 이리 될 것이오. 허나 그대는 장부도 아닌 폐비를 핑계로 녹수에게 젖이나 달라며 울부짖는 어린아이가 아니오?”
결국 참았던 연산군은 칼로 김처선의 혀를 뽑아 잘라버렸다. 바닥에 선혈이 낭자했다. 그제야 김처선은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쓰러져 입에서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뭐라고 말하듯 연산군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우우 거렸다. 연산군은 이제 눈에서 초점이 사라져 광기만 남았다. 칼을 미친 듯이 휘둘러 김처선의 온몸을 난도질했다. 김처선의 움직임이 멈췄다. 연산군은 김처선의 목숨이 완전히 끊긴 후에도 계속 칼을 휘둘러 김처선의 피와 살이 튀었다. 옆에 앉아 있던 박원종과 유자광의 얼굴에도 피가 튀었다. 대소신료 부인들은 그 광경을 보고 토악질을 하거나 눈을 뒤집고 까무러친 이도 있었다. 연산군이 칼을 내동댕이 쳤다.
“연회는 끝났다. 이놈의 시신은 열흘 동안 저잣거리에 효수(梟首)하고 그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린 뒤 놈의 가산을 몰수하고 7촌까지 역적의 죄를 물어 죽일 것이다. 놈의 집은 파가저택(破家瀦澤) 하고 앞으로 처(處) 자를 사용하는 자도 똑같이 역적의 죄를 물으리라.”
연산군은 씩씩거리며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칼로 김처선의 몸을 몇 번 더 내리쳤다. 그리고는 김처선의 술상에 있는 술을 병째로 마신 뒤 남은 술을 김처선의 몸 위에 부었다. 피로 얼룩진 김처선의 시체와 술이 사방으로 튀어 난장판이었다. 이 장면을 눈 뜨고 보고 있는 대신들은 한 명도 없었다. 좌중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칼을 집어 던진 연산군은 이기동의 처 손하영의 머리를 움켜쥐고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손하영이 저항했지만 광기로 얼룩진 연산군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손하영의 뽀얀 젖무덤이 드러났다. 손하영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이제 연산군은 손하영을 눕혀 가슴을 핥기 시작했다. 대소신료들이 일어나 빠르게 문정전을 나섰다. 대소신료의 부인들도 앞다투어 몰려 나갔다. 이공신은 임금의 지근거리를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김처선의 시신을 끌고가는 금군들을 따라 울부짖으며 쫒아갔다. 법도는 사라졌고 삼사(三詞)의 기능은 죽었으며 역사는 멈추었다. 전당합각(殿堂閤閣) 위에 쌓인 깊은 세월의 무게마저 무너진 날이었다. 문정전엔 연산군의 색에 빠진 음탕한 웃음소리와 손하영의 비명소리만 난무했다. 김처선의 피가 아직도 식지 않고 나무로 된 우물마루에 고여있었다.
피맛골 할매집에 막 당도한 구왈기야 이룸은 남장을 한 동생 아란카를 보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뼛속 깊이 여진의 피가 흘러 자아(自我)를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며 조선인의 상투를 우습게 알던 애가 가짜 상투까지 만들어 패랭이를 쓴 모습에 이룸은 헛웃음을 지었다. 더구나 칼을 목숨처럼 지니고 다니던 아이가 칼도 지니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칼도 없이 옷차림은 또 뭐란 말이냐?”
놀라 묻는 이룸에게 아란카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듣고 난 이룸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의 왕이 젊고 예쁜 여인들을 보면 떨어진 가래(호두) 줍듯 한다더니,,정혼한 여인까지 데려가는 이 나라는 망국으로 접어들었구나. 사사야. 굳이 이 나라에 있어야겠느냐? 지금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자꾸나. 아버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박원종 대감을 따라 나섰다만, 솔직히 이들이 성공할 수 있을지도 확신이 없구나.”
“오라버니, 조선보다 명나라가 먼저 망할거에요. 우린 조선 조정의 내부 기밀을 알아내고 우리의 막강한 군사력을 조선 조정에 알려줄 필요가 있어요. 특히 조선의 쌀과 면포는 우리에게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자산이에요. 그리고 처음엔 전략적으로 접근했지만 지금은 내 마음이 정말 원하고 있어요. 성균관에 끌려간 여인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지웅은 많이 슬퍼할거에요. 난 내 남자가 슬퍼하는 걸 볼 수 없어요. 오라버니가 안 간다면 나 혼자서라도 가겠어요. 가서 그 여인을 구해 지웅에게 보내 주겠어요.”
이룸은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었다. 마침 그때, 지웅을 찾아 떠났던 아이가 돌아왔다. 아이에게 육포를 주며 양주목사를 만났느냐고 묻자, 누원 앞 주막집에서 만났으며 함자가 신지웅(申知雄)이라는 대답을 들었노라고 했다. 전달은 잘 된 것이었다. 아란카는 흡족해하며 아이를 칭찬했다. 결국 둘은 성균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란카가 칼이 없어 근처 다른 주막에 앉아 있던 한 사내와 시비를 트고 때려눕힌 뒤에 그의 칼을 빼앗았다. 어제와는 달리 하늘에 달이 없어 움직이기가 수월했다. 아란카는 성균관을 향해 가면서도 내내 지웅을 생각했다. 연모하는 사내의 정혼자가 위기에 빠졌을 때, 모른 체 하지 않고 나서는 자신이 옹졸하지 않다는 것에 스스로 위안이 되었다. 성균관에 당도하니 주변에 큰 담장이 넓게 둘러쳐져 있었다. 성균관 주변 10리 안에 있는 민가를 다 헐고 담장을 세웠다더니 이미 완성한 모양이었다. 이룸과 아란카는 근처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 주변 순찰을 도는 순라군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다섯 명이 한 조로 동문에서 서문으로 움직이고 다른 조는 서문에서 동문으로 움직이는 데 약 이각(二刻) 정도의 시간이 지날 때 서로 만나면서 암호와 신패를 확인했다. 방금 두 조의 순라군이 서로를 확인하고 사라지고 있었다. 담장은 비교적 높았지만 이룸과 아란카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둘은 재빨리 움직여 순식간에 담장을 넘었다. 하지만 넘자마자 누군가 둘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웬놈이냐?”
담장 주변을 순찰하는 순라군만 있는 줄 알았던 게 실수였다. 담장 안에는 반수(泮水)라는 물길이 성균관 주변을 직각으로 돌고 있었고 이 물길을 따라 순찰하는 호위군이 또 있던 것이었다. 외부인의 침입에 호위군들은 호각 소리를 울리며 쫒아왔고 둘은 어두운 곳으로 급하게 뛰었다. 명륜당(明倫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일단 둘은 몸을 숨길 곳이 없어 명륜당 건물 지붕 위로 올라갔다. 몸을 낮추어 거의 눕다시피 하니 뒤쫒아온 호위군들이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가 두 편으로 나뉘어 사라져갔다. 이룸과 아란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룸이 조용히 말했다.
“에페를 불렀다면 같이 왔어야 했다. 우린 이곳 지리에 익숙하지 않다.”
“오라버니, 저 멀리 불이 환하게 켜진 곳이 여인들을 데려간 곳인 거 같아요. 다른 곳은 모두 컴컴한데 저곳만 불이 환해요. 저곳에 그 여인이 있을 거에요.”
“사사. 잘 생각해 보거라. 우린 너무 무모하다. 막상 여인을 찾아 구한다고 치자. 여기 군사들을 따돌리고 어떻게 담장을 넘을 수 있단 말이냐? 우리만 간다면 모를까 그 여인과 함께라면 분명 우리까지 잡힐 것이다. 조선은 대명률에 속지주의(屬地主義)를 내세우는 나라가 아니냐? 우린 정식 외교 사절단이 아니니 저들의 법에 따라 목이 잘릴 것이다.”
아란카는 곰곰이 생각하다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일단 여인을 구하고 방법을 찾아요. 주변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말을 훔쳐 달아날 수 있을 거에요. 오라버니가 군사들을 따돌리면 제가 여인을 말에 태워 정문으로 탈출할게요.”
이룸은 아란카의 성급한 작전에 걱정이 앞섰다. 군사들이 열 명이 아니라 백 명이 와도 싸우는 건 자신있었다. 하지만 동생이 위험에 빠지면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까 두려웠다. 그러나 동생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최대한 동생을 살려서 이곳을 무사히 빠져 나가는 데 집중해야 했다.
“알았다. 둘이 움직이면 발각되기 수월하니 내가 먼저 움직이마. 너는 이십 보(步) 뒤에서 따라오거라.”
아란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룸은 어둠속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말이 숨차도록 쉼 없이 달려온 지웅은 성균관 앞에 당도하여 서쪽으로 살짝 돌았다. 이곳 성균관은 내금위장 시절에 밥 먹듯 왔던 곳이기에 위치는 눈 감고도 훤했다. 성균관은 대성전(大成殿)이라 하여 공자(孔子)의 위패를 모신 문묘(文廟)가 있고 중앙의 위패에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 공자를 지칭했다. 앞쪽 동서엔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4성(四聖)의 위패를 모셨고, 양옆 동무와 서무엔 10철(十哲)과 72현(七十二賢) 등 유교의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배향하고 있었다. 이곳이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라면 대성전 앞쪽엔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있었다. 이곳은 유생들이 강의를 듣고 공부하던 대강당으로 성균관의 상징과도 같았다. 동쪽과 서쪽에서 길게 마주 보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어 유생들이 기거하던 기숙사 역할을 했었다. 그 외 수많은 유교 경전과 책 등을 보관한 존경각(尊經閣)과 무예도구를 보관한 육일각(六一閣), 과거 시험을 치르거나 별도의 행사가 열리던 비천당(丕闡堂)이 있었다. 여기 명륜당의 서재 쪽과 가까운 담장은 커다란 나무들이 밀집해 있어 몸을 숨기고 담장을 넘기에도 수월할 터였다.
지웅은 서쪽에 있는 느티나무 가지에 말의 고삐를 돌려 묶고 손쉽게 담장을 넘었다. 많은 여인들을 가두고 통제하기엔 대성전과 명륜당밖에 없었다. 역시나 안에 불이 환하게 켜진 걸로 보아 이곳 명륜당 먼저 확인해 보면 될 것이었다. 담장에 올라 불빛이 새어나오는 틈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너무 여인들이 많아 이렇게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평소처럼 철릭(裰翼)에 행전(行纏) 차림이었다면 운신이 더 쉬웠을 것이었다. 기다란 도포자락이 무척이나 거추장스러웠다. 다행히 환도는 가져왔기에 목숨을 담보할 필요는 없었다. 호위군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웅은 피해야 했다. 만일 해란을 구했다면 지금 다가오는 호위군들을 제압해도 충분히 시간이 있었겠지만 언제 해란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 되었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내금위 1장인 권열을 통해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전에는 순라군들이 외부를 순찰하고 성균관 안에는 반인(泮人)이라는 노비들이 감시업무를 하고 있었지만, 연산군이 성균관을 흥청들을 위한 가무소로 바꾸면서부터는 내금위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저 호위군들이 내금위장이었던 지웅의 얼굴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했다. 성균관은 신삼문(神三門)이라 부르는 세 개의 정문이 있었다. 가운데 문은 신(神)이 다니는 문이라 하여 출입을 통제했고 유생들은 동문으로 들어가 서문으로 나오는 식이었다. 지웅은 일단 담장을 넘어 반수(泮水)를 건너 작은 담장마저 넘어 명륜당 서쪽 협실문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들이 많이 있었지만 특별히 지웅을 신경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들 강제로 끌려왔기에 흐느껴 우는 여인, 앉아서 무릎에 고개를 숙이고 침울한 여인, 양반가 규수인지 도도하게 앉아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여인, 이제 갓 열 살이나 되었을까 보기에도 너무 어린 여자아이도 있었다. 누군가 지웅을 보고 흠칫 놀랐다. 지웅은 그 여인을 보고 손가락 하나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조용히 해달라는 신호였다. 여인은 다시 한 번 놀라는 듯 보였지만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 순간 오늘 낮에 보았던 그 옷차림 그대로 눈에 익은 한 여인이 보였다. 분홍빛 치마에 구름색 저고리, 해란이었다. 저 구석에 앉아서 무릎을 안은 채 고개를 무릎에 파묻은 상태였다. 하마터면 반가워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지웅은 생각했다. 방금 호위군이 서문 쪽을 지나갔으니 앞으로 일각이면 다시 올 것이었다. 지웅은 이내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여인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호위군들의 신경이 그쪽으로 몰리면 그 틈을 타 해란을 데리고 나가면 될 것이었다. 여인들이 알아서 나가게 하려면 제일 좋은 방법이 방화(放火)였다. 지웅은 도포자락을 칼로 찢어 얼굴을 가리는 복면을 만들어 쓰고 주위를 돌아 보았다. 바닥에 버려진 서책 몇 권이 보였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장구와 북, 꽹과리 등 여러 가지 악기들이 보였다. 지웅은 품에서 부싯돌을 꺼내 서책에 불을 붙였다. 이내 불이 붙어 불길이 커졌다. 장구 하나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이니 금새 활활 타들어갔다. 지웅은 그 장구를 명륜당 한가운데 던지자 여인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금새 아수라장이 되었다.
“불이다!”
누군가 불이 났다며 소리치자 여인들이 허둥대며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지웅은 해란의 얼굴을 보았다. 역시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지웅은 어수선한 틈을 타 해란에게 달려가 팔을 부축했다. 시끄럽고 혼돈의 와중에 해란은 복면을 한 지웅을 알아보았다. 놀란 눈이 밖으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지웅이 말했다.
“나갑시다. 낭자.”
저 멀리서 호각소리와 함께 군졸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웅은 자신이 훈련시켰던 금군들이기에 외부 침입이나 궐내 화재가 발생했을 시에 어떻게 대처할지 잘 알았다. 이내 동쪽과 서쪽, 외부에서 순찰하는 순라군들 또한 몰려올 게 자명했다. 지웅은 해란의 손을 잡고 서문 쪽으로 향했다. 지웅 먼저 담장에 올라 말 타는 자세로 앉고는 해란의 손을 잡았다. 힘겹게 해란이 올라와 담장을 넘었다. 앞에 반수가 흐르고 있었다. 반수(泮水)를 건너려던 그때, 맞은편에서 두 사람이 뛰어오고 있는 걸 발견했다. 지웅은 해란을 감싸 담장 그림자 사이로 숨었다. 어딘가 낯이 익었다. 구왈기야 이룸과 아란카였다. 확실했다. 패랭이를 쓴 남장을 했지만, 아란카의 움직임은 익히 알고 있었고 이룸은 바로 어제 몇 초식 나누었기에 덩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굳이 덩치가 아니더라도 얼굴은 숨길 수 없었다. 조선 복장을 입었으면서 복면을 하지 않는 무모함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지웅은 고개를 저었다. 이쪽이 어두워서 그랬는지 그들은 지웅과 해란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금군들이 그들을 쫒으며 달려갔다. 시큼한 땀냄새가 확 몰려왔다. 지웅은 별 걱정하지 않았다. 저 둘의 실력이면 금군들 몇 명쯤이야 쉽게 대적할 것이었다. 지웅은 자신이 키운 부하들이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은 해란의 구출이 더 시급했다. 그때 ‘쒸이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두운 하늘에 불화살이 날아가는 게 보였다. 창공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신호였다. 지원군을 요청하는 내금위의 신호였다. 이제 겸사복 금군들까지 몰려 올 차례였다. 아마 명륜당에 일어난 화재 때문이리라. 지웅은 일단 해란을 무사히 탈출시키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낮고 수월하게 넘을 수 있는 외부 담장을 쳐다보았다. 한군데 눈에 보였지만 입구 근처여서 관솔이 두 개나 피워져 있는 데다 너무 환해서 금방 들통날 게 뻔해 보였다. 해란이 지웅의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손에는 땀이 차서 축축했다. 해란이 무서워하며 긴장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요란한 호각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몰려 든 금군들 사이에 이룸과 아란카가 포위되는 게 보였다.
“게 섰거라. 왠 놈이냐? 무기를 놓아라.”
호각소리는 점점 커지고 많아졌다. 말발굽 소리도 들렸다. 겸사복 금군들도 담장 밖에 당도한 거였다. 이제 곧 오십 여명이 넘는 금군들이 몰려 올 것이었다. 그 중 대장이 이십 여명을 담장에 올려 궁수(弓手)를 배치할 것이었다. 이제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한 두 개의 화살은 쳐 낼 수 있지만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은 당해낼 수 없었다. 낭패였다. 횃불을 든 금군들이 모여들어 대낮처럼 환했다. 어둠속에서 한 사내가 붉은 철릭을 입고 나왔다.
“병기(兵器)를 내려놓고 순순히 오라를 받으라!”
말하는 이는 신위대(申威大)였다. 두 살 동생 위대가 겸사복 1군 대장으로 있었는데, 아직도 그 직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보기에 늠름했다. 지웅은 한 편으로 기특하면서도 한 편으론 살짝 안도감이 들었다. 지웅은 일단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대처하리라 마음먹었다.
아란카와 이룸은 사방에서 몰려 든 금군들에 포위되어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담장 위에 배치된 궁수들이 화살을 쏘면 십중팔구 죽은 목숨이었다. 칼과 창을 든 군졸들이야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지만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천하의 관운장이 와도 피할 수 없었다. 앞에 서서 칼을 들고 호통하는 사람이 대장으로 보였다. 저놈만 제압하여 인질로 삼고 달아날까 잠시 생각하였지만, 그런것도 염두에 있었는지 네 명의 군졸로 경호를 받고 있었다. 아란카는 낭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끌려가면 지웅이 알지 못하는 이상 자력으로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을 터였다. 그순간 아란카는 낮에 만났던 학조대사의 말이 떠올랐다.
’성균관 대성전 뒷담장 아래 반수 물길에 던져라.‘
아란카는 순간 어찌 이런 상황을 예측하였는지 학조대사의 법술에 감탄했다. 아란카는 칼을 내려놓는 척 하며 금군 대장에게 말하였다.
“알았소. 칼을 내려 놓겠소.”
그리고는 재빨리 품에서 염주 알을 꺼내 옆 반수 물길에 던졌다. 금군들은 덩치가 작은 아란카보다 변발을 하고 덩치가 큰 이룸에게 더 집중하느라 아란카의 행동을 유심히 보지 못하고 있었다.
지웅도 상황을 지켜보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좋은 방법을 짜내느라 모든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때 아란카가 무엇인가를 품에서 꺼내더니 슬그머니 반수(泮水) 속에 던지는 게 보였다. 횃불을 든 금군 덕분에 아란카의 행동이 자세하게 보여 천만다행이었다. 그 물건은 물길 따라 흘러서 지웅이 있는 쪽으로 떠내려 오고 있었다. 지웅은 떠 있는 물건을 손으로 집어 올렸다. 큰 느티나무의 그림자에 가려 다행히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염주 알이었다. 위대가 어서 빨리 무릎을 꿇고 오라를 받으라며 최종 경고를 하고 있었다. 칼을 내려 놓지 않으면 위대의 손이 올라가는 순간 저 둘은 벌집이 될 것이었다. 지웅은 할 수 없이 칼을 빼어 싸워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때 언뜻 보이는 염주 알에 아(阿) 자가 새겨진 게 보였다. 지웅은 순간 머리에 번개 맞은 것처럼 전율이 일었다. ’이거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지웅은 해란에게 잠시 있으라고 안심을 시킨 뒤 앞으로 튀어 나갔다.
“암행(暗行)이다! 어명(御命)을 받으라!”
지웅이 품에 있는 마패를 꺼내 금군 무리들 속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자 지웅의 손에 들린 마패와 어명 소리만 듣고도 위대를 비롯한 금군들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나는 승정원 소속 채홍감찰관(採紅監察官) 이명(李明)이라 하오. 어명으로 채홍준사를 감찰하고 있소. 여기 둘은 외지인으로 가장한 나의 심복들이니 소란 떨 것 없소이다. 명륜당 쪽에 불이 난 것 같으니 겸사복장이 있다면 거기에 손을 넣는 게 좋을 것이외다.”
금군들이 고개를 숙인 채 서로 쳐다보며 두리번거렸다. 대장 신위대는 당혹스러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보였다. 어명을 확인해야 했지만 잘못하면 불경죄로 다스려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침입자로 보이는 자객들을 그냥 내보내기도 찜찜할 거였다. 이룸과 아란카가 지웅을 발견하고는 놀란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였다. 지웅은 태연하게 담담한 목소리로 이룸과 아란카를 향해 말했다.
“비장(裨將)들은 일어나 복귀하라. 내 뒤에 서리(胥吏)가 있으니 함께 복귀하도록 해라. 도중에 막는 자가 있다면 어명에 반 하는 것이니 베어도 좋다.”
목소리에 범접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지웅의 호통에 금군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지웅은 아란카와 이룸을 보고 살짝 눈짓으로 신호를 주었다. 총명한 아란카가 무슨 뜻인지 눈치 채고 이룸과 일어나 지웅의 뒤 편으로 걸어갔다. 위대가 고개를 들어 지웅을 보고 싶어하는 게 눈에 보였다. 아마도 목소리만 듣고도 대강 짐작했을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잠깐!”
누군가 돼지 멱을 딸 때 나는 불쾌한 소리로 이룸과 아란카를 불러 세웠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나타나는 존재는 임숭재와 채홍준사로 발령이 된 이계동이었다. 앞 이빨이 튀어나온 데다 누렇고 까매서 평소에도 불결하기 짝이 없는 위인이었다. 열흘은 굶은 듯 한 인상에 키까지 왜소하여 언뜻 보면 불구처럼 보였다. 하지만 고집은 쇠심줄보다 세고 처세술은 가히 달인이라 할 만 했다. 이계동이 입을 열었다.
“승정원 소속 채홍감찰관이라 했소? 마패가 쉬이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은 아니나 옷차림을 보아하니 일반 잡인은 아닌 듯 싶소만, 어찌 얼굴은 복면을 한 것이오? 그리고 조선 천지에 채홍준사보다 더 큰 어사(御史)는 없소이다. 감히 주상께서 직접 하사하신 이 채홍패보다 더 높다고 말하는 것이오?”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저놈만 없었다면 벌써 해란을 데리고 담을 넘었을 것이었다. 지웅은 초조해졌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건 지웅이었다. 하지만 내금위장의 이력이 있었다. 궁궐 안에 있는 사람과 도성 밖 사람들을 어찌 다루는 지 이골이 난 상태였다.
“그렇소이까? 그렇게 자신하는 거요? 보아하니 당신은 우찬성 이계동 대감이신 것 같소이다. 품계는 정1품이나 아직 성골(聖骨)의 반열엔 끼지 못하니 당연히 모르시겠지.”
“어허, 건방진 놈이로다. 네놈이 주둥아리로 승정원 소속이라 했으렷다. 승정원 도승지라고 해봐야 최고 품계가 정3품이거늘, 우찬성인 나를 알아보고도 그 따위 망발을 하는 것이냐? 여봐라. 저놈을 당장 포박해라.”
지웅은 일부러 크게 웃고는 손에 있던 염주 알을 이계동 앞에 던졌다. 이계동이 염주 알을 줍더니 거기에 쓰여진 글자를 읽었다. 지웅이 말했다.
“당신이 정1품이라고 허리 꽤나 펴고 다닌 것 같소만, 우찬성이나 되었으니 육자금강회(六字金剛會) 정도는 들어보았겠지. 거기 염주 알에 쓰여진 글자를 읽어 보시오.”
이계동은 염주에 쓰여진 아(阿) 자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육자금강회(六字金剛會)는 조정에 오래 몸담고 있는 대신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체를 보지 못해 그 누구도 진실인지 규명해 본 사람이 없었다. 육자금강회(六字金剛會)는 성종대왕 시절에 인수대비와 함께 유명한 고승인 학조대사를 모시고 와 불법을 들으면서 육자진언(六字眞言)을 수행하는 중에 불문곡직(不問曲直)의 면책권과 어명(御命)을 대신하는 의미와 표식으로 학조대사의 염주 알 네 개에 나무아미타불의 아미타불(阿彌陀佛) 네 글자를 하나씩 염주 알에 새겨 넣어 네 명이 나눠 가졌다는 설이 있었다. 이 염주 알이 그 네 개중에 하나라면 ‘선왕의 명에 필적하여 어명과 같다’는 무소불위의 강제력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계동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딘가 선왕의 조직이 따로 있어 현 주상의 정치를 감찰하고 있다는 건가.’
이계동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채홍사를 감찰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주상의 실정(失政)이 꽤 길었다. 그러려면 애초에 인수대비가 사망할 때부터 개입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무턱대고 무시할 수도 없음이었다.
“좋소이다. 그럼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시오. 주상께 보내서 확인한 다음 풀어줄지 말지 결정하겠소이다.”
“실수하시는 거요. 주상께서도 실체를 모르실거외다. 실체를 아는 사람이라면 판내시부사 김처선 대감정도일 것이오.”
지웅은 어쩌면 실제로 확인 작업을 할 수도 있어 시간을 벌어야 했다. 김처선 대감이면 상황에 따라 이계동의 의도와 반대로 얘기할 수도 있었다. 이계동 옆에 있던 금군 한 명이 이계동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이계동이 흠칫 놀라며 큰 소리로 반문했다.
“그게 사실이냐? 김처선 대감이 죽었다고?”
“예 대감, 불과 한 시간 전이옵니다. 주상전하께서 문정전 연회를 열면서 김처선 대감을 직접 칼과 화살로 죽이셨다고 하옵니다.”
금군 한 명이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는 걸 지웅도 들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이었다. 김처선 대감이 죽다니, 지웅은 들으면서도 믿지 못해 눈을 질끈 감았다. 이계동이 소리쳤다.
“어차피 김처선 대감이 죽었다면, 이 염주 알에 대한 진실도 찾기가 어렵겠군. 여봐라. 저놈들을 당장 포박해라.”
금군들은 칼과 창을 들고 서서히 지웅 앞으로 다가왔다. 위대 또한 칼을 빼 들더니 높이 허공으로 올렸다. 저 손이 내려지면 화살이 날아올 터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지웅은 일단 이룸과 아란카, 해란을 먼저 내 보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먼저 떠나시오!”
지웅이 크게 소리치자 이룸과 아란카, 그리고 해란이 정문을 향해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지웅은 그 틈을 타 금군들 사이로 일부러 뛰어 들어가 칼을 휘둘렀다. 아군이 있으니 쉬이 화살을 쏘지 못할 거였다. 훈련을 시킨 장본인이 그 정도를 모를까 속으로 생각하면서 금군들을 하나 둘씩 쓰러뜨렸다. 칼날은 쓰지 않고 칼 등으로만 타격을 가했다. 순식간에 이십 여명이 바닥을 기고 있었다. 나머지 금군들이 눈치를 보며 섣불리 다가오지 못했다. 칼날을 썼으면 벌써 끝났을 싸움이었다. 지웅의 칼 솜씨를 보고 위대가 눈치챈 것 같았다.
“멈추어라!”
위대가 소리치자 금군들이 공격을 멈추었다. 지웅이 서서히 뒤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이계동은 그대로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저 멀리 있는 세 놈을 공격해라. 활을 쏘란 말이다. 활을,,!”
그 소리에 담장 위 궁수 중 누군가 이룸과 아란카, 해란을 향해서 화살을 쏘았다. 지웅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무술을 익히지 못한 해란이 위험했다. 더구나 무기도 없이 무방비 상태였다. 치마 입은 몸으로 쉽게 담장을 넘지 못하는 게 보였다. 지웅은 자책했다.
‘내가 옆에 있었어야 했다.’
그 순간, 지웅의 눈에 해란이 화살을 맞고 담장 위에서 떨어지는 게 보였다. 지웅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계속 화살이 날아오자 이룸이 칼로 쳐 내는 게 보였다. 지웅은 쓰러진 덩치가 작은 금군 한 명을 들어 담장 위 궁수들을 향해 던졌다. 궁수들이 중심을 못 잡고 밑으로 떨어졌다. 기와 몇 장이 같이 떨어졌다. 그리곤 금군의 칼을 빼앗아 이계동에게 던졌다. 칼이 이계동의 가슴에 박히면서 그대로 뒤로 쿵 하고 넘어졌다. 금군들이 이계동을 호위하면서 대열이 흐트러지자 후속 공격을 못하고 있었다. 지웅은 그 틈에 해란에게로 달려갔다. 왼쪽 등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 지웅은 모든 게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다행히 숨이 붙어 있었다. 지웅은 해란을 재빨리 업었다. 아란카가 화살을 빼내려고 하자 지웅이 말렸다.
“지금 화살을 빼 내면 죽소”
날아오던 화살이 멈추자 이룸이 지웅에게 말했다.
“인왕산 치마바위에 가면 우리 산채가 있소. 일단 그곳으로 피하시오.“
지웅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해란을 업은 채 있는 힘껏 호흡을 가다듬고 담장을 뛰어 넘었다. 묶어 두었던 말에 해란을 마주 보게 태우고 지웅도 말에 올랐다. 고삐를 꽉 쥐고 발로 배를 강하게 찼다. 말이 놀라 앞으로 튀어나갔다.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해란의 얼굴이 보였다.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해란과의 지난 일들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피가 많이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충분히 살리셨을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지웅은 해란을 품에 안고 발로 박차를 계속 가했다. 말이 오르막길에 올라서자 힘겨워했다. 속도가 현저히 줄었다. 지웅은 말이 더 이상 힘을 내지 못하자 중간에 말을 세워두고 해란을 업었다.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숨이 턱 밑까지 찼다. 하지만 지웅은 젖먹던 힘까지 짜내서 치마바위까지 올라갔다. 작은 산채가 보였다. 문을 발로 찼다. 안에 들어가서 해란을 뉘였다. 맥을 짚어보니 아직 희미하지만 뛰고 있었다.
“낭자. 조금만 버티시오. 내 곧 다시 오리다.“
지웅은 해란의 옆에 나뭇가지들을 한데 모아 불을 지폈다. 피가 많이 빠져나가면 추위를 타는 법이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산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어두웠지만 소나무에 상처를 내 송진을 급하게 긁어모아 횃불을 만들었다. 산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선학초(仙鶴草), 즉 짚신나물이라 불리는 약초였다. 노란 꽃이 피어있는 짚신나물을 한웅큼 캤다. 그리고 쑥도 보이는 대로 캤다. 급하게 산채로 돌아와 짚신나물과 쑥을 입으로 씹었다. 지웅은 해란을 살짝 일으켜 저고리를 찢었다. 그리곤 등에 꽂힌 화살을 부러뜨렸다. 그대로 빼 냈다가는 화살촉의 미늘에 걸려 안에 더 큰 상처가 날 수 있었다. 화살이 꽂힌 방향으로 서서히 화살촉을 빼냈다. 해란이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이미 실신하여 정신이 없는 것이었다. 무사히 화살을 빼냈다. 해란의 저고리를 벗겼다. 불쏘시개로 상처 부위를 문지르고 약초를 가슴과 등에 발랐다. 충분히 발라주고 그 주위에 송진을 덮었다. 지웅은 도포자락을 찢어 해란의 상처 부위를 견고하게 감았다. 맥을 짚어 보았다.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잘하면, 정말 운이 좋으면 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지웅은 희망을 가졌다.
“낭자. 꼭 힘을 내시오. 내가 옆에 있으리다.”
지웅은 해란의 손을 잡고 이마와 입술에 입술을 맞췄다. 장부가 흘려서는 안 될 눈물이 지웅 자신도 모르게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지웅은 나뭇가지들을 더 모아서 해란의 주위를 따뜻하게 하고는 도포를 벗어 덮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산 속으로 향했다. 칡이라도 캐어서 즙을 먹일 생각이었다. 산토끼가 놀라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