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부운(浮雲)
by Jiungine
다음 날, 연산군의 친모였던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한다는 교지가 내려졌다. 선대왕의 “폐비의 추숭을 허하지 말라.”는 유교(遺敎)가 무시되면서 제헌왕후(齊獻王后)에 추숭되고 묘도 경기도 장단에 매장되었다가, 후에 양주군 망우리로 이장되었고 묘소의 이름도 회묘(懷墓)에서 회릉(懷陵)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효사의 묘호도 혜안전(惠安殿)으로 개칭하면서 완전히 신원되었다. 임사홍과 임숭재는 임금이 가는 길이면 어김없이 동행했고 술을 마시면 격의 없이 마셨다.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갔던 이세좌나 홍귀달, 폐비를 투기하고 미워했던 엄 숙의와 정 소용 등 연산군의 마음속에 있던 제일 큰 원한의 응어리를 해소했다고 생각했는지 주상은 본격적으로 방탕한 일상으로 빠져 들어갔다. 대신들도 오히려 내버려 두었다. 충언을 직언해 봐야 잘하면 태형(笞刑)이었다.. 장녹수와 임사홍, 임숭재, 그리고 김자원은 연산군 옆에서 연산군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상처난 고름을 빨아주었다. 제 어미를 몽둥이로 패 죽인 이항은 다음 날 연산군에게 말 한 마리 하사 받았다. 그리곤 가산을 몰수하고 충북 제천으로 유배 보냈다. 비정상이 상식이 되고 비상식이 정상이 되는 조정이었다. 여기저기 홍승찬의 구명을 위해 알아보던 중 군기시 앞에서 참형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웅은 분노로 밤을 지샜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더 가볍게 생각하는 주상의 행태에 살기마저 생겨났다.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떠넘기고 죽여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주상을 향한 분노가 통한이 뒤섞인 울음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비록 서얼이었지만 심성이 강직하고 능력이 있던 동생이었다. 잘못이 없어도 희생을 당하는 정치 논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나마 있던 연민마저 사라졌다. 동생들과 승찬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지웅은 확실히 이곳을 떠나 반정의 주축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며칠 후, 지웅은 동생 권열을 임숭재에게 보내 술자리를 마련했으니 참석해 달라는 서찰을 보냈다. 권열이 돌아와서는 경계하는 표정을 짓더니 흔쾌히 수락하더라는 대답을 주었다. 그만두기 전에 해란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지웅은 난생 처음으로 도성 밖 이름 난 기생집인 청화정(淸華停)에 자리를 잡았다. 값비싼 고급 비단 저고리에 명주실로 덧댄 말총갓을 쓰고 일부러 환도는 가져오지 않았다. 옆에는 보약(補藥) 꾸러미도 자리를 차지했다. 기다린 지 반 시진이 지나자 임숭재가 나타났다. 지웅은 일부러 상석을 비워놓고 임숭재가 들어오자 일어나 목례를 하고는 상석을 권유했다. 임숭재가 경계하는 표정으로 잠시 쳐다보다가 당연하다는 듯 상석에 앉았다. 품계가 높은 지웅이 상석에 앉는 게 당연했지만, 임숭재는 임금 아래 무서울 게 없다는 듯 사석에서는 권세의 도를 더 중요시 여긴다는 풍문을 들은 터였다. 임숭재는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물었다.
“내금위장이 어인 일로 저를 다 보자고 하셨소. 본래 술은 잘 안한다고 들었소만,”
“대감, 이리 와 주시니 참으로 고맙소이다. 조정을 위해 일하는 데 누군들 어떻습니까? 백지장도 맛 들면 낫다는 데 이렇게 술 한 잔 하다보면 대감과 장차 사돈이 될지 누가 압니까?”
평소와는 다른 지웅의 모습에 임숭재는 살짝 경계가 풀리는 듯 했다. 품계를 떠나 상석을 양보한 것도 그렇고 칼을 찬 장수의 모습을 떠나 비단 저고리를 입고 나오니 곱상한 게 그런대로 이 바닥과 제법 잘 어울려 보였다. 급기야 표정을 풀고 활짝 웃더니 머리를 지웅에게 가까이 하면서 입을 열었다.
“내금위장께서도 이런 자리를 좋아하는 줄 몰랐소이다. 진즉에 이런 자리 마련했으면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없었을 것을,,흐흐흐”
“그러게나 말입니다. 대감이나 저나 주상 전하의 지근거리에서 주상의 은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아니오이까. 일전에 대감을 보니 주상 전하를 모시느라 주야(晝夜)로 피로하고 분초(分秒)가 고민인지라 건강이 말이 아니더이다. 해서 제가 보약을 좀 준비해 보았습니다. 요즘 온몸이 간지럽고 낮엔 잠이 오나 밤엔 잠이 안 오고 입맛도 없고 배만 나오며 극도로 피로하지 않으십니까?”
임숭재의 눈이 커졌다. 어찌 그리 잘 아느냐는 표정이었다.
“내금위장은 무사가 아니고 의원이시오? 어찌 그리 내 몸의 증상을 보지 않고도 아시는 거요?”
“대감, 제 아버님께서 큰 약방과 의원을 운영하시면서 동네에서 방귀 좀 뀌는 편입니다. 약방(藥房) 개 삼 년이면 탕약(湯藥)을 달인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하. 그것 참 명언이오이다. 나는 그럼 기방(妓房) 개 삼 년이면 거문고를 탈 줄 알겠구려. 하하하하.”
“옳거니, 그것 참 재미지십니다. 하하하.”
임숭재는 기분이 좋은 듯 저고리를 풀고 갓을 벗어 던졌다. 지웅은 보약을 건넸다.
“대감, 적취(積聚)에 좋은 택사(澤瀉) 복령(茯苓) 견우자(牽牛子) 대황(大黃) 그리고 인삼(人蔘)과 감초(甘草)를 넣은 값비싼 약재입니다. 원기를 회복시키고 비장을 튼튼하게 하는 약재이오니 하루 세 번 푹 끓여 드시면 수일 내로 효험을 보실 것입니다.”
지웅은 이 약으로 조금이라도 좋아지길 진심으로 빌었다. 당분간 효과가 나타나 몸이 좋아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술을 마시면 오히려 더 나빠질 것이었다. 어쨌거나 아무리 좋은 약도 임숭재의 생명을 아주 잠깐 늘이기는 할 지언정 저승사자의 앞길을 막을 정도는 아닐 것이었다. 잠시 후 기생이 들어오고 지웅과 임숭재는 거듭 술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했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떨던 손도 사라지고 혈색도 풀리면서 임숭재는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기생의 젖가슴을 만지면서 술잔을 받은 임숭재에게 지웅은 가슴에 품었던 말을 꺼냈다.
“대감, 사실 청이 하나 있사온대, 이런 말을 해도 될는지,,,,”
“무얼 말씀이시오?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무에 있습니까? 말씀 하시지요. 하하하”
취기가 한껏 오른 임숭재가 기분이 좋은 지 호탕하게 말했다.
“사실, 아랫것들이 알아서 해도 될 것을 괜히 대감을 번거롭게 하는 건 아닌지 해서,,”
“허허, 무슨 말씀이시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내 대감을 위해서라면 직접 나서야지요. 시원하게 말씀하시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당연히 해 드리지요.”
“관기(官妓) 한 명, 기적(妓籍)에서 뺄 수 있겠습니까?”
지웅의 말을 들은 임숭재는 잠시 동안 눈을 껌벅껌벅하더니 고개를 젖히면서 웃어 제꼈다.
“하하하하. 난 또 뭐라고, 그깟 기생 한 명 때문에 그리 뜸을 들이셨소이까? 장악원 제조가 기생 한 명 빼내는 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난 호랑이 코털이라도 뽑아 오라는 줄 알았습니다. 하하하. 그래 누굽니까? 빼내고 싶은 기생이,,”
“오(吳)가 해란이라는 기생입니다.”
“가만, 오 해란이라면,,,일전에 주상 전하와 내금위장이 사냥을 나갔을 때 차출해서 보냈던 기생 중 한 명이오만,,,오호라, 그게 그렇게 되는 거였구만, 으하하하.”
임숭재는 손으로 무릎을 탁 치며 무언가를 알았다는 듯 또다시 웃어 제꼈다. 술을 마시면 웃음이 많은 위인이었다. 제법 머리도 총명했다. 오래 전 일을 세세히 기억하는 걸 보면 그 능력을 좋은 일에 쓰지 않고 허튼 일에 쓰는 게 안타까웠다. 시대와 건강을 다시 만나면 인재가 될 상이었다. 지웅이 멋쩍어 하자 임숭재가 나지막히 소근거렸다.
“사내대장부가 배꼽 아래는 인격이 없는 법 아니오이까. 걱정 붙들어 매시오. 내일 바로 빼내어 드리리다.”
“아니, 속량(贖良) 값을 치루기도 전에 말입니까?”
임숭재는 웃음을 멈추더니 보약꾸러미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면 속량 값으로 충분합니다.”
지웅은 기뻤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리 간신인 임숭재도 부처님으로 보였다. 지웅은 술을 계속 시키면서 주거니 받거니 술병을 비워나갔다. 기생의 몸을 주무르는 임숭재의 기분에 맞추기 위해 지웅도 어색하게 옆에 앉은 기생을 만졌지만 몸을 과도하게 흔들면서 어깨나 만지는 정도였다. 기생이 눈을 흘기며 지웅의 허벅지를 자꾸 꼬집었다.
“그나저나 대감, 내 진정 궁금한 것이 있어 그렇습니다만, 주상 전하의 능력이 도대체 어디까집니까? 아니 우리 같은 사내들이야 하루에 기껏 한두 번이면 나가 떨어지는 판에 주상 전하께서는 일각이 멀다하고 여인을 찾으시니 진정 임금의 피는 다른 것입니까?”
술에 취해 코가 벌개진 임숭재는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지웅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몸이 앞뒤로 흔들리는 걸로 보아 나갈 때가 된 것 같았다.
“궁금하시오? 내가 비밀 하나 알려드리리다. 북방 야인들에게서 들어오는 물개의 생식기인데, 차가운 바다에서도 양기를 유지하는 힘이 있다고 알려진 해구신(海狗腎)이 있지요. 또 하나, 사막의 인삼이라 불리며 명(明)에서 들어오는 육종용(肉蓯蓉)이 있습니다. 말이 교미하여 흘린 정액이 땅에 떨어져 피어난 풀로 매우 희귀한 약초입니다. 그뿐입니까. 삼지구엽초(三枝九葉草)라고 불리는 음양곽(淫羊藿)이 있어 이 풀을 뜯어먹은 숫염소가 하루에 백 번을 교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건 정말 구하기 어려운건데, 바다 위를 떠다니는 고래의 배설물이 굳은 것으로 용연향(龍涎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최음 효과와 기력을 살리는 데 탁월한 효능이 있어요. 이 네가지를 빻아서 가루로 만들고 그걸 하루에 세 번씩 먹으니 양기가 성 할 수 밖에요. 아니 그렇습니까? 으하하하.”
“확실히 약방 개보다 기방 개가 한 수 위로군요. 하하하하.”
“그렇습니까? 그것 참 말이 됩니다. 으하하하.”
밤이 깊어갔다. 인정이 울렸어도 이곳 청화정의 홍등은 꺼지지 않았다. 술을 먹다가 여인과 잠자리를 하고 파루가 울리면 집으로 기어 들어가는 양반과 사대부들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 조선의 제도는 처음부터 잘못 된 것이었다. 지웅은 언제 반상의 구별 없이 평등한 세상이 올 까 생각했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만큼 어려울 것이었다. 지웅은 파루가 울리고 소매를 끄는 기생의 유혹을 뿌리치고 집으로 향했다. 배 꺼진 초승달이 목멱산 자락에 걸려있었다. 완연한 봄이었다.
인수대비가 엄 숙의와 정 소용이 죽던 날 연산군의 패륜으로 인해 쓰러진 뒤에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상황의 엄중함을 이해했는지 오늘따라 연산군은 술에 취해 있지 않은 맨 정신이었다. 옆에는 장녹수도 없었다. 지웅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김계창 상선이 입시해 있었다. 지웅은 눈인사를 했다. 입시 전 눈치껏 주상의 상태를 귓속말로 알려주었기에 지웅은 심호흡을 하고 들어갔다.
“주상 전하, 신 내금위장 문안드리옵니다.”
연산군이 고개를 돌려 지웅을 쳐다보았다. 술은 깨어 있었지만 눈은 퀭하니 들어가 그새 비쩍 마른 모습이었다.
“무극 왔는가.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밤사이 궁궐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지웅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이란 일은 본인이 다 저질러 놓고 이제 와서 딴 소린가 싶었다. 평소 궁궐 안팎으로 거동 및 침범이나 금군 교대와 궁문 파수 상태, 변고 및 긴급 상황이라든가 예정된 사냥 준비에 관해 보고 하던 시간도 보통 사시(巳時)쯤 이었기에 주상이 의아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 내금위장 외직(外職)을 청할까 하옵니다.”
“뭐라? 외직(外職)? 이런 엄중한 시기에 임금을 호위하는 내금위장이 외직이라니,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인가? 윤허할 수 없네.”
“전하, 신 내금위장, 전하의 은덕으로 중책을 맡아 오늘에 이르렀으나 전하를 모시기에 아직 부족함이 많사옵니다. 또한 신(臣)의 아비가 병중(病中)에 있사와 조모님의 묘소가 있는 양주(楊州)에 일견 다녀오고자 하시니 자식 된 도리로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나이까.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얘기를 꺼내니 연산군이 말을 잇지 못하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병중에 있다는 건 미리 묻힐 묘 자리를 보려 한다는 뜻으로 들릴 터였다. 아버지에겐 막심한 불효였다.
“그렇다면 양주 목사를 달라는 건가? 거긴 종3품으로 품계가 한 단계 낮질 않느냐?”
“전하의 은덕이 만백성 사는 곳이면 어디에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데, 품계의 높고 낮음이 무슨 상관이겠나이까. 황폐한 양주 땅에 전하의 뜻을 세우고 선정을 베풀겠나이다.”
연산군은 그래도 무언가 불안한지 섣불리 대답을 못했다. 차기 내금위장에 대한 확신이 없던 탓이었다. 지웅이 선수를 쳤다.
“전하, 차기 내금위장으로는 박원종 대감을 추천하나이다. 박원종 대감은 무예가 뛰어나고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 있으면서 북방의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현재 동지중추부사로서 국가 중대사에 중한 역할을 하였으니 적절하다 사료되옵니다. 더구나 박원종 대감은 주상 전하의 종형제(從兄弟)가 아니옵니까?”
지웅의 추천에 연산군의 표정이 밝아졌다. 몸을 돌려 고쳐 앉더니 연산군은 지웅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 박원종이 있었지. 박원종이라면 믿을만하다. 그러고 보니 큰 어머님께 가본 지 꽤 오래되었구나. 채비하라 일러야겠다. 그리고 우림위장 일은 짐이 취중에 벌인 일이라 안타깝다만, 이미 지난 일이니 마음에 두지 말거라. 내 그 일로 서운하여 외직을 청하나 했더니 짐을 위하는 충정이 이와 같구나. 내 그대를 외직으로 보내지만 품계는 유지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지웅은 억울하고 분하여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연산군에겐 맘에 안 들면 죽여도 되는 그런 존재였다. 취중의 일이니 당연히 실수로 인정하라는 말이 가증스러웠다.
양주(楊州)는 의정부, 구리, 중랑, 광진, 성동 일대를 모두 포함하는 거대한 행정구역이었지만, 관리가 안 되고 현재 양주 목사의 부정과 수탈로 백성들이 힘겨워 떠나가는 곳이었다. 북쪽엔 태조 대왕 이성계가 쏜 화살이 꽂힌 평평한 들판이라는 뜻을 가진 전관평(箭串坪)이라는 살곶이벌이 있었다. 이곳과 구리의 아차산(峨嵯山) 뒤편 들판은 군사들을 훈련 시킬 수 있는 절호의 공간이었다. 또한 중랑천(中浪川)을 끼고 있어 물자 보급이 용이하고 도성 바로 턱밑이라 도성 동쪽 홍인지문까지 한 시간이면 당도할 수 있는 거리였다. 더구나 살곶이벌엔 조선 임금의 전용 목장인 마장(馬場)이 있었다. 마장 관리인 감목관(監牧官)을 구워 삶으면 수백마리의 말을 확보할 수 있어 최고의 요충지였다.
삼 일 후, 지웅은 연산군이 하사한 흑마 한 마리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 소식에 어머니께서는 잔치를 여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별로 탐탁치 않은 표정이셨다.
“그래, 이 아비를 칭병(稱病)하여 외직을 청했다고? 이놈, 사실대로 고하렸다. 무슨 일을 꾸미는 게냐?”
“아버님, 소자 뜻이 있어 하는 일이오니 믿어 주십시오. 가문에 누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아이였다. 어미를 닮아 성품도 바르고 하는 일마다 옳은 방향으로 스스로 찾아오던 아이였다. 아버지 광현(光賢)은 지난밤 붉은 혜성 하나가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불길한 징조였지만 한양 도성에 있는 궁궐만 불타고 푸른 서광이 비추는 그런 꿈이었다. 광현은 오랜만에 아들 지웅의 관상을 보았다.
눈은 가늘고 길게 뻗어 봉황의 눈을 닮아 지혜가 깊고, 이마의 형광(螢光)이 번뜩이는 게 호랑이가 숲을 살피는 기상이 있었다. 눈 밑의 와잠이 두툼하니 아랫것들의 신임이 있겠고 코는 콧방울이 단단하고 콧대가 이마까지 곧게 뻗은 게 현담비라 하여 재물이 들어오는 상에, 권골(拳骨)이 적당히 솟아 윤기가 흐르니 높은 권좌에 앉을 상이었다. 하관(下棺)이 모나지 않고 두툼하게 턱을 감싸고 있어 말년 운이 좋았다. 크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이 정도면 호상(好像)이었다.
“어명(御命)이오! 내금위장 신지웅은 교지(敎旨)를 받드시오!”
갑작스런 고함에 광현과 지웅은 동시에 방문을 열었다. 선전관(宣傳官)을 필두로 함을 든 하례들과 이들을 호위하는 금군들이 집 마당에 들어섰다. 마당에 멍석이 깔리고 지웅은 관복을 입고 대궐쪽을 향해 사배(四拜)를 올렸다. 무릎을 꿇고 앉자 선전관이 함에서 교지를 꺼내 큰 소리로 읽었다.
“교지(敎旨), 내금위장은 과인의 목숨을 지킨 자다. 양주가 비록 3품의 고을이나, 그대의 품계는 종2품 가선대부를 유지하며, 행(行) ‘양주목사楊州牧使)’로 임명하노라. 또한, 양주에 머물며 경기 북방의 군사 훈련을 감독하는 ‘경기 북도 병마절도사 겸 차사원(差使員)’의 권한을 추가로 부여하노라.”
선전관은 교지를 다 읽고 따로 말했다.
“전하께오서 이르시길, ‘가서 몸을 추스르되 북방의 호랑이들을 잘 길들여 과인의 방패가 되라!’ 하셨나이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어머니는 선전관과 일행들을 사랑채에 모시고 음식을 대접했다. 아버지는 내심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권력의 허상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가 궁의 소식을 못 들을리 만무했다. 코 뚫은 망아지 같은 임금 곁에 있는 것보다는, 골이 난 염소처럼 아들이 들판을 뛰어노는 게 더 이상적일 터였다. 지웅 또한 기대하지 않았던 북방의 병권까지 얻었으니 대만족이었다.
모두가 잠든 밤 지웅은 오랜만에 후원에 나와 검법을 연습했다. 달도 없는 어두운 밤에 관솔불이 유일한 친구였다. 한참을 정신없이 검술에 매진하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버지였다. 묵중한 태산(太山)의 기운이 다가왔다.
“타핫!”
지웅은 아버지의 칼을 받았다. 적막한 후원에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장닭의 새벽잠을 깨우고 부엉이의 눈을 뜨게 했다. 한참을 겨루었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물론 지웅도 숨이 거칠어지지 않았다. 호흡을 망치면 아버지의 호된 질책이 있었기에 어릴 적부터 수련을 해온 덕분이었다. 아버지가 칼을 내려놓았다.
“그만하면 되었다.”
지웅은 칼을 거두고 아버지를 따라 돌계단 위에 앉았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양주까지 왜 가는지는 묻지 않겠다. 다만 몸조심하거라.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을 가지만 정승이 죽으면 문상을 안 가는 법이다. 권력도 살아 있을 때라야 권력이니 매사 위를 경계하고 아래를 살피거라.”
“소자, 명심하겠사옵니다. 저,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소자 혼인을 생각해 둔 처자가 있사옵니다. 아버님께서 한 번 만나주셨으면 합니다.”
광현은 깜짝 놀랐다. 평소 혼인 얘기를 꺼내면 볼이 발개지며 도망가기 바쁜 녀석이 혼인할 처자가 있다니 이거야말로 임금의 교지보다 더 중한 경사였다.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처자는 어디에 사는 사람이더냐? 부친은 뭐 하시는 분인고?”
지웅은 사실대로 말하기가 어려웠다. 관기였다는 사실을 알면 허락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인륜지 대사를 거짓으로 시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웅은 어렵게 입을 떼었다.
“저, 사실 아버님, 그 처자는 관기(官妓)였습니다.”
“뭐라? 관기였다고 했느냐? 그럼 기생을 정실로 들이겠다는 말이더냐?”
“아닙니다. 지금은 제가 면천첩(免賤帖)을 받아 양인이 되었습니다.”
“흠, 그렇다면 무슨 문제겠느냐. 면천이 안 된 노비라 해도 아비는 반대할 생각 없느니라. 다만, 평생을 함께 할 배필이라면 조금 더 신중해야 하지 않겠느냐? 심사숙고(深思熟考)한 것이렸다?”
“예 아버님, 소자와 운명을 함께해도 후회하지 않을 여인이옵니다.”
아버지는 의외로 기뻐하셨다. 어머니도 걱정이 되었지만, 아버지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는 당부도 하셨다. 지웅은 큰 시름을 던 거 같아 마음이 가벼웠다. 해란을 보면 분명 아버지도 흡족해 할 것이라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