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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만능은 공짜가 아니다

by Jayu · 2026-10-27

1화 만능은 공짜가 아니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트럭의 전조등이 눈앞을 새하얗게 태우던 순간까지는 기억난다.

헬멧 안쪽으로 숨이 막혔다. 브레이크를 잡은 손가락이 굳었다. 신호는 분명 초록불이었다. 나는 속도를 줄이고 있었고, 차선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트럭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에 서 있었다.

바닥도, 천장도, 벽도 보이지 않았다. 발밑에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공기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숨은 쉬어졌다.

“문자유 씨.”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앞을 보자, 흰 로브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아무도 없었는데.

그의 얼굴은 이상할 정도로 평범했다. 잘생긴 것도, 못생긴 것도 아니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도 없었다. 기억에 남을 만한 특징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눈만은 달랐다.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지켜봐 온 사람이라는 듯,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눈이었다.

“여기가 어디죠?”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차분해서 내가 놀랐다. 죽었다고 생각하면 보통 비명을 지르거나, 엄마부터 떠올릴 줄 알았다.

그런데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맴돌았다.

오토바이는 어떻게 됐지?

그리고.

엄마는 내가 사고 난 걸 알면 얼마나 놀랄까.

“경계입니다.”

남자가 대답했다.

“당신의 세계와, 다른 세계 사이의 경계.”

“죽은 겁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그 말에 눈썹이 움직였다.

“아직은?”

“당신은 본래 죽을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신호를 지켰고, 속도도 줄였으며, 당신의 운전 실력에도 문제가 없었죠.”

그는 마치 사고 영상을 되감아 본 사람처럼 말했다.

“하지만 다른 세계의 소환식이 당신의 세계에 작은 틈을 만들었습니다. 그 틈이 사고와 겹쳤고, 당신은 죽음이 아니라 전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전이요?”

“쉽게 말하면.”

남자는 잠시 말을 골랐다.

“이세계 소환입니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세계 소환.

웹소설이나 게임에서 수도 없이 봤던 단어였다. 죽을 뻔한 사람이 다른 세계로 가고, 신에게 능력을 받고, 마왕을 잡거나 왕국을 구하는 이야기.

하지만 직접 당하니 낭만은 없었다.

그저 어이가 없었다.

“그럼 다시 돌려보내 주세요.”

내가 말했다.

“원래 있던 곳으로요.”

“바로는 어렵습니다.”

“왜요?”

“당신을 데려간 힘은 이쪽 세계의 힘입니다. 저는 그것을 되돌릴 권한이 없습니다.”

“그럼 당신은 누구인데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었다.

그 순간 내 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이름: 문자유]

[종족: 인간]

[상태: 이계 전이자]

[고유 특성: 만능]

[설명: 모든 일반 직업 및 상위 직업의 기술과 숙련도를 A급 수준까지 다룰 수 있다.]

[제한 1: S급 이상의 경지와 고유 권능은 사용할 수 없다.]

[제한 2: 육체, 마력, 장비, 재료가 부족할 경우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다.]

[제한 3: 만능은 당신을 죽지 않게 만들지 않는다.]

나는 창을 읽고 다시 남자를 봤다.

“이게 뭡니까?”

“보상입니다.”

“보상?”

“당신은 원래 세계에서 아주 위대한 영웅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남을 돕는 일을 몇 번 했고, 가족을 버리지 않았고, 힘든 상황에서도 누군가에게 악의를 품고 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계는 그저 선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조차 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희귀하게 진심으로 순수하고 선한 자군요.”

“그걸로 이세계에 떨어뜨린 보상이 능력 하나라고요?”

“원래대로라면 아무 보상도 없거나 당신이 얻은 능력보다 초라했을 겁니다.”

남자의 말은 지나치게 담담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나빴다.

“그러니까 운이 없어서 다른 세계로 떨어졌고, 운이 좋으니까 능력 하나는 받는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받아들여도 틀리진 않습니다.”

순간 화가 났다.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그에게 화를 낸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지금 필요한 건 감정이 아니라 정보였다.

“돌아갈 방법은 있습니까?”

“있습니다.”

남자가 처음으로 즉답했다.

“정말요?”

“당신이 간 세계에는 ‘귀환의 문’을 열 수 있는 유물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에 가까운 약도 존재합니다.”

나는 숨을 멈췄다.

“약?”

“기억을 잃어 가는 병. 당신의 세계에서는 치매라고 부르는 병에 효과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 약입니다.”

그 말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며칠 전, 냉장고 앞에서 한참을 서 있던 엄마.

내 이름을 부르다가도 잠시 멈추던 엄마.

“유근아.”

그러다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부르던 엄마.

그때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다고.

기억이 조금 헷갈릴 수도 있다고.

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가서는 한참 동안 울었다.

“그 약이 있습니까?”

내 목소리가 낮아졌다.

“확실히.”

“있습니다. 다만 아무나 얻을 수 있는 약은 아닙니다.”

“어디에 있죠?”

“성국의 기록에는 ‘기억의 영약’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왕족과 성국, 그리고 아주 오래된 마도 귀족들만 존재를 아는 약입니다.”

“그걸 구하면 돌아갈 수도 있고, 엄마 치료도 할 수 있다.”

“가능성은 있습니다.”

가능성.

확실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원래 세계에서는 가능성조차 없었다.

나는 치료법이 있다는 말만 들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배달을 하다가 죽을 뻔한 것도, 돈을 벌려고 위험한 길을 달린 것도 결국은 엄마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가겠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는 기억하십시오.”

“뭡니까?”

“당신은 모든 직업을 A급까지 다룰 수 있습니다. 검술도, 마법도, 신성력도, 연금술도 가능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조금 낮아졌다.

“하지만 모든 분야의 정점에는 S급이 존재합니다.”

“그럼 피하면 되죠.”

“피할 수 없는 적도 있습니다.”

“그때는 다른 방법을 찾겠습니다.”

남자가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좋은 대답입니다.”

그 순간, 발밑이 무너졌다.

하얀 공간이 갈라졌다.

내 몸이 끝없는 어둠 아래로 떨어졌다.

“잠깐!”

나는 팔을 휘저었다.

“여기서 뭘 해야 하는지는 알려줘야 할 거 아닙니까!”

멀어지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아남으십시오.”

그게 마지막이었다.

*

“눈 뜨지 마.”

누군가의 속삭임에 정신이 들었다.

처음 느껴진 것은 냄새였다.

썩은 짚 냄새, 땀 냄새, 오래된 피 냄새.

그다음에는 흔들림.

몸이 좌우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뜨지 않은 채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손목이 묶여 있었다. 차가운 쇠사슬이 피부를 짓눌렀다. 발목에도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바퀴 소리가 들렸다.

마차였다.

“눈 뜨면 맞아요.”

작고 떨리는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조용히 있어요.”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철창.

사방이 철창으로 막힌 나무 수레 안이었다.

수레 안에는 나를 포함해 일곱 명이 있었다. 모두 손발이 묶여 있었다. 늙은 남자, 얼굴이 피투성이인 여자, 겁에 질린 소년 둘, 눈을 감은 채 벽에 기대앉은 중년 남자.

그리고 내 옆에는 아주 작은 체구의 소녀가 웅크리고 있었다.

열다섯 살쯤 되어 보였다.

헝클어진 은빛 머리카락. 낡은 천 조각 같은 옷. 그리고 손목과 발목에 있는 쇠사슬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목에 채워진 검은 금속 목걸이.

표면에는 붉은 문양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소녀는 나를 보지 못한 척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작게 묻자, 소녀의 몸이 움찔했다.

“말하지 마요.”

“여기가 어디냐고.”

“노예 수레예요.”

대답은 너무 간단했다.

그래서 더 무거웠다.

“뭐?”

“노예 상단. 아마 더르크 변경 쪽으로 가는 중일 거예요.”

“내가 왜 여기에 있어?”

“숲길에서 쓰러져 있었다고 했어요.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어서 그냥 태웠대요.”

“그냥 태웠다고?”

“팔 수 있으니까요.”

소녀는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그 말이 더 끔찍했다.

나는 철창 너머를 봤다.

수레 앞뒤로 말을 탄 남자들이 있었다. 가죽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검과 도끼를 찼다. 적어도 열 명은 넘어 보였다.

지금 당장 도망치는 건 무리였다.

쇠사슬도 문제였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갈비뼈 쪽이 쑤셨다.

그때였다.

[고유 특성 “만능”이 활성화됩니다.]

[현재 상황에 적합한 직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내 시야 한쪽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선택 가능 직업 예시]

[도적 A]

[사냥꾼 A]

[해체공 A]

[검투사 A]

[연금술사 A]

[신관 A]

[마도공학자 A]

나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세계 소환.

능력.

노예 수레.

전부 현실이었다.

“이름이 뭐야?”

내가 물었다.

소녀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요.”

“아이?”

“네.”

“그건 이름이 아니잖아.”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맑은 푸른 눈이었다.

그런데 너무 지쳐 있었다. 누군가에게 기대하는 법을 잊은 사람의 눈이었다.

“다들 저를 그렇게 불렀어요.”

“부모님이 지어 준 이름은?”

소녀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기억 안 나요.”

그 짧은 말에 더 묻지 못했다.

내가 이세계에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 막 정신을 차렸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저 아이에게서 엄마가 떠올랐다.

누군가가 이름을 잊어 가는 모습.

기억을 잃고, 자기 자신이었던 부분을 하나씩 빼앗기는 모습.

“좋아.”

나는 손목을 움직였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소녀의 눈이 커졌다.

“안 돼요.”

“왜?”

“목걸이가 있어요.”

그녀가 검은 목걸이를 가리켰다.

“도망치면 죽어요.”

“폭발하는 거야?”

“그것보다 더 나빠요.”

소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걸이와 이어진 주인장치에서 마력 공급이 끊기면, 제 심장이 멈춰요.”

나는 다시 목걸이를 살폈다.

붉은 문양.

마력 회로.

정교하게 얽힌 금속 구조.

내가 의식적으로 생각하자, 시야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직업 선택: 마도공학자 A]

[해당 분야의 구조와 원리를 이해합니다.]

순간.

목걸이의 구조가 보였다.

단순한 폭발 장치가 아니었다. 소녀의 심장 박동과 연결된 저주식 구속구였다. 억지로 부수면 심장이 멈춘다. 해체하기 위해 마력을 흘려 넣어도 역류한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문양의 가장자리, 아주 미세하게 갈라진 부분.

마력을 순환시키는 회로 하나가 다른 회로보다 얇았다.

“풀 수 있어요?”

소녀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은 확신이 없었다.

A급 마도공학자의 지식은 생겼다.

하지만 도구가 없었다.

내 몸 안의 마력을 느껴 본 적도, 실제로 다뤄 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수레 밖에는 무장한 남자들이 열 명 넘게 있었다.

그때 수레가 갑자기 멈췄다.

“도착했다!”

밖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운이 좋군. 치유 재능을 가진 계집애까지 있으니.”

수레 문이 열렸다.

햇빛이 쏟아졌다.

눈을 찡그리자,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남자가 철창 앞에 섰다. 그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일어나, 아이.”

소녀가 비명을 삼켰다.

“오늘부로 넌 좋은 주인을 만나게 될 거다. 성국 쪽에서 재능 있는 애를 찾고 있거든.”

성국.

신이 말했던 이름이었다.

기억의 영약.

왕족과 성국만이 알고 있다는 약.

나는 남자의 손을 봤다.

아이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

목에 걸린 가죽 주머니.

허리에 찬 열쇠 꾸러미.

그리고 그의 상태.

[직업: 검객 C]

[위험도: 낮음]

[특이사항: 오른쪽 무릎의 오래된 부상. 좌측 방어에 익숙함.]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도적.

해체공.

검투사.

연금술사.

필요한 직업은 많았다.

그런데 한 번에 다 할 수 있을까?

[고유 특성 “만능”은 직업 전환에 제한이 없습니다.]

[단, 사용자의 육체적 피로와 마력 소모는 누적됩니다.]

좋다.

완벽한 치트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충분했다.

나는 손목을 비틀었다.

[직업 선택: 도적 A]

철사 하나가 필요했다.

수레 바닥에는 녹슨 못이 박혀 있었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못을 잡아당겼다. 손톱이 찢어지고 피가 났다. 하지만 못은 빠졌다.

곧바로 손을 움직였다.

쇠사슬 자물쇠의 구조가 손끝에 느껴졌다.

딸깍.

너무 쉽게 풀렸다.

아이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조용히.”

나는 다른 사람들의 족쇄도 풀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

그러나 모두를 풀기 전에 남자가 눈치챘다.

“뭐 하는 거냐?”

그가 검을 뽑았다.

철창 안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수레 문을 발로 걷어찼다.

쾅!

문이 열리며 남자의 얼굴을 강하게 때렸다.

그가 비틀거렸다.

나는 그의 허리에서 열쇠 꾸러미를 뽑아 족쇄가 풀린 늙은 남자에게 던졌다.

“남은 사람들을 풀고 반대쪽으로 도망가요.”

[직업 선택: 검투사 A]

몸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근육이 갑자기 커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는 알았다.

상대의 발끝.

무게 중심.

검을 뽑는 손의 각도.

무릎이 약한 사람은 어디를 노려야 하는지.

남자가 검을 휘둘렀다.

나는 반 걸음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 무릎을 걷어찼다.

우득.

짧고 둔한 소리.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의 검을 빼앗아 목에 겨눴다.

주변의 노예상들이 술렁였다.

“저 자식 뭐야?”

“방금 쇠사슬을 풀었어!”

“마법사냐?”

“아니, 검을 쥔 자세를 봐. 검사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검을 쥔 손이 떨렸다.

사람을 죽여 본 적은 없었다.

배달을 하면서 욕을 먹고, 위험한 운전을 피하고, 새벽에 비를 맞으며 돈을 번 적은 있어도.

누군가의 목에 칼을 겨눈 적은 없었다.

그런데 아이의 목걸이가 보였다.

검은 금속.

붉은 문양.

물건처럼 팔려 가는 아이.

그 순간, 망설임이 조금 사라졌다.

“목걸이 해제 방법을 알아.”

내가 말했다.

“누가 그 목걸이를 만들었지?”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미친놈아. 그건 성국 소유물이야.”

“누가 만들었냐고.”

“네가 건드릴 물건이 아니야. 그 계집은 성국에 넘겨야 해. 치유 재능을 가진 천민은 국가 자산이라고.”

국가 자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천천히 검을 더 밀어 넣었다.

“한 번만 더 자산이라고 부르면.”

내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 목부터 베겠다.”

그때였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노예상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먼지 너머로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보였다.

검은 태양 문양이 새겨진 깃발.

성국의 문장이었다.

기사들 사이로, 검은 망토를 쓴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수정구가 들려 있었다.

수정구 안에는 붉은 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아이의 목걸이와 같은 색이었다.

“찾았다.”

검은 망토의 남자가 말했다.

그의 시선이 아이에게 향했다.

“도주한 성녀 후보 개체. 열여덟 번째.”

아이의 몸이 얼어붙었다.

그리고 내 시야에 경고창이 떠올랐다.

[경고.]

[대상 “성국 처분집행관”의 위험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습니다.]

[추정 직업: 성기사 S]

[권장 행동: 즉시 도주.]

나는 눈앞의 창을 바라봤다.

S급.

신이 말했던, 정면으로는 이길 수 없는 존재.

그런데 성기사는 천천히 검을 뽑으며 웃었다.

“노예상 주제에 성국의 자산을 빼돌리다니.”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걸 막으려는 이방인까지.”

아이의 손이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도망쳐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때문에 죽지 마요.”

나는 아이의 목걸이를 한 번 더 봤다.

그리고 멀리 있는 성기사를 봤다.

엄마에게 돌아가려면 살아야 한다.

치료약을 구하려면 성국의 비밀을 파헤쳐야 한다.

무엇보다.

내 앞에서 누군가의 삶을 물건처럼 빼앗으려 한다면.

“싫은데.”

나는 검을 쥐었다.

“나는 아직 엄마한테 돌아가야 하거든.”

성기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아이의 손목에 남은 쇠사슬을 끊었다.

“그러니까 네 목에 줄 채우는 놈부터 치운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세계에서 싸울 준비를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