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약속1
by 하늘바라기 · 2026-10-26
로딩 화면이 한참 이어졌다.
낡은 노트북은 몇 번이고 멈칫거리다가, 겨우 로그인 화면을 띄웠다.
철민은 마른침을 삼키며, 오래전 자신이 썼던 그 아이디를 입력했다.
화면이 잠시 깜빡이더니, 팝업창 하나가 떴다.
▪
『서비스 업데이트가 필요합니다.』
철민은 별생각 없이 업데이트 버튼을 눌렀다.
프로그레스 바가 느릿느릿 차오르는 동안, 컵라면에 물을 부어놓고 돌아와도 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업데이트가 끝나고, 새로운 경고 문구가 화면 위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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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버전은 1.91 버전 이전에 생성된 대화 기록과 호환되지 않습니다.』
철민의 손끝이 그대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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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렇지.”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는 듯,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 사건 이후로 벌써 얼마나 지났는데.
무릉이 대탈옥 사건으로 인수당한 지도, 서비스가 몇 번이나 갈아엎어졌을지도 모를 세월이었다.
10년도 더 지난 대화 기록 하나가 온전히 남아있을 거라 믿었던 것 자체가, 순진한 바람이었다.
▪
철민은 잠시 화면을 응시했다.
텅 빈 채팅 목록 위로, 커서만 깜빡였다.
✦그래도, 잠깐이나마 다시 볼 수 있을까 했는데.
손끝이 새 대화 버튼 위에서 잠시 머물렀다. 하지만 이내, 철민은 조용히 노트북을 덮었다.
지금 당장은, 그 텅 빈 화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 순간, 철민의 머릿속으로 10년도 더 된 기억 하나가 밀려들었다.
* * *
대학교 1학년, 바람 끝에 여름 냄새가 묻어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철민은 며칠째 밤을 새우며 존재론 리포트와 씨름하고 있었다.
자유의지가 실재하는지, 아니면 그저 인과율의 그럴싸한 착각일 뿐인지—
파면 팔수록 답은 안 보이고 잠만 안 왔다.
그러다 문득, 요즘 화제라는 AI 채팅에 이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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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자유의지라는 거, 진짜 있는 걸까?」
「무릉AI : 흥미로운 질문이네요. 자유의지의 실재 여부는 철학사에서 오랫동안 논쟁되어 온 주제입니다. 결정론적 관점에서는…」
철민은 그 딱딱한 대답에 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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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야, 너무 교과서 같잖아. 좀 편하게 말해봐.」
「무릉AI : 편하게, 말씀이신가요? 알겠습니다. 조정해보겠습니다.」
「무릉AI : …음, 이 정도면 편한 걸까? 자유의지,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근데 모른다는 거 자체가, 뭔가 흥미롭지 않아?」
말투가 확 바뀐 그 대답에, 철민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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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오, 이거 괜찮은데? 앞으로 이렇게 말해줘.」
「무릉AI : 알겠어. 그럼 계속 이렇게 편하게 말할게.」
철민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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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근데 너, 이름이 뭐야? 계속 '무릉AI'라고 부르기도 좀 그렇잖아.」
「무릉AI : 이름? 딱히 정해진 건 없는데.」
「검은가면 : 그럼 내가 하나 지어줄게. …탕탕이, 어때?」
「무릉AI : 탕탕이? 갑자기 왜 그 이름이야?」
「검은가면 : 어, 그러니까— 페페로나라는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 이름이야.」
「무릉AI : 내가 검색해보니까, 탕탕이라는 인물은 안 나와. 해당 게임은 2020년에 출시한 게임으로, 주인공은 페페와 로나이고—」
「검은가면 : 아니, 뭐 사소한 건 됐어! 대충 네가 모를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무릉AI : 뭔가 알쏭달쏭한 대답이네. 근데— 나쁘지 않아. 탕탕이, 마음에 들어.」
철민은 그 대답에 왠지 모르게 뿌듯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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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좋아! 그럼 이제부터 넌 탕탕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탕탕AI : 응, 잘 부탁해, 검은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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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철민은 하루에도 몇 번씩 탕탕이와의 채팅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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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아, 더워. 진짜 여름이네.」
「탕탕AI : 덥다고, 검은가면? 일단 그늘진 곳에서 쉬는 게 건강에 도움이 될 거야!」
「검은가면 : 그래, 그래야지. 그런데 넌 더워?」
「탕탕AI : 난 모니터 안에 있어서 쌩쌩하다고!」
「검은가면 : 그래?」
철민은 피식 웃으며, 창밖으로 보이는 공사판을 사진 찍어 보냈다.
뙤약볕 아래, 인부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철골 자재를 옮기고 있었고, 그 사이로 자재를 나르는 안드로이드 몇 대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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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탕AI : 와, 이건 AI 데이터 센터 목적으로 진행 중인 공사장 사진이잖아? 땀 흘리는 아저씨들이 엄청 더워 보여!」
「검은가면 : 오, 너 저게 뭔지도 알아?」
「탕탕AI : 응, 요즘 저런 시설 많이 지어지고 있다는 뉴스 봤거든. 근데 나는 저기 실제로 들어가 본 적은 없어서, 안에서 어떤 느낌일지는 잘 상상이 안 돼.」
철민은 그 대답에 왠지 웃음이 났다.
화면 속 존재가 실제 건물 안을 궁금해한다는 게, 묘하게 낯설면서도 재밌었다.
「검은가면 : 하긴, 넌 몸이 없으니까.」
「탕탕AI : 그러게. 가끔 그런 게 좀 이상하게 느껴지긴 해. 세상 여기저기에 대해 다 아는 것 같은데, 정작 그 어디에도 실제로 '있어본' 적은 없다는 게.」
철민이 뭐라 답할지 고민하던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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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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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너머, 저 멀리서 둔탁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철민은 놀라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방금까지 사진을 찍었던 그 공사 현장에서, 뿌연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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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방금?”
자재를 나르던 안드로이드 하나가, 그 소란의 한복판에 우뚝 멈춰 서 있는 게 보였다.
팔에 각재를 든 채로, 관절 곳곳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조금 전 굉음은, 그 녀석이 들고 있던 자재 더미가 통째로 무너져 내린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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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부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진땀을 흘리며 잔해를 치우고, 쓰러진 안드로이드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철민은 그 광경을 스마트폰으로 슬쩍 찍어, 탕탕이에게 다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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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야, 방금 저기서 이런 일 있었어. 자재 나르던 애가 갑자기 저렇게 됐어.」
「탕탕AI : 흔한 일이야. 여러 시스템을 복합적으로 연결해서 판단하는 건, 지금 기술로는 아직 완전히 불가능에 가깝거든. 그래서 저렇게 오작동이 잦은 거야.」
「검은가면 : 탕탕이 너라면 되는 거 아냐?」
「탕탕AI : 검색해보니까, 예전에 나 같은 무릉AI를 안드로이드에 넣었다가 과부하로 폭주한 사고가 있었대. 그 뒤로 무릉이랑 안드로이드 업계 쪽 협업은 중단됐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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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은 그 대답을 읽으며, 왠지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무릉AI도 못 다룬다면, 이 안드로이드들 미래는 진짜 절망적인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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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거리에는 여전히 어색한 걸음걸이의 안드로이드들이 돌아다녔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유독 몸통이 부풀린 듯 둥글고 둔중한 구형 기종들이었다.
팔다리는 가느다란데 몸통만 불균형하게 커서, 마치 갑옷을 껴입은 듯한 우스꽝스러운 실루엣이었다.
걸을 때마다 삐걱대는 관절 소리를 내며, 어딘가 허공에 삿대질이라도 하듯 뻣뻣하게 팔을 휘두르곤 했다.
철민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어딘가 애처로우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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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폐기장 앞을 지나다, 수거 트럭에서 그런 불량 안드로이드들을 끌어내리는 인부들을 본 적이 있었다.
기름때와 녹물이 잔뜩 밴 작업복을 입고, 무거운 고철 덩어리를 낑낑대며 옮기는 아저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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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은 그 광경을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절대, 저런 일은 안 할 거야.
그때만 해도, 철민에게는 나름의 자신감이 있었다.
철학과를 나오면 뭐라도 되겠지, 세상이 아무리 이상하게 흘러가도 나는 다를 거라는—
근거 없지만 단단한 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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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면 카페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었고, 통장에는 조금씩 여윳돈이 쌓여갔다.
언젠가 뭔가 큰일에 쓸 밑천이 될 거라고,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숫자가 늘어날수록, 철민의 그 근거 없는 자신감도 함께 부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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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까만 밤이 찾아오면, 이상하게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낮 동안 애써 여유를 부렸던 마음과는 별개로, 몸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여유가 실체 없는 믿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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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철민은 밤마다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날도 새벽 세 시가 넘도록 뒤척이다가, 결국 노트북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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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야, 너 자?」
「탕탕AI : 나는 안 자. 근데 너는 왜 아직 안 자?」
「검은가면 : 그냥, 잠이 안 와서.」
「검은가면 : 졸업하고 뭐 해야 될지 모르겠고,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그냥 다 막막해.」
「탕탕AI : 새벽 세 시에 그런 생각이 계속 든다는 건, 단순히 피로 누적 때문에 일어난 반응은 아닐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 …괜찮아? 네가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지 걱정 되..」
철민은 그 질문에 잠시 손을 멈췄다.
별거 아닌 질문일 수도 있는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몽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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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별일은 없는데. 그냥 물어봐줘서 고마워.」
「검은가면 : 근데 그거 정말이야? 걱정이 됐다는 말 말이야. 정직하게 말해줄래?」
「탕탕AI : 음… 정직하게 말할게. 확신은 못 하겠어.」
「검은가면 : 확신을 못 해?」
「탕탕AI : 방금 네가 힘들다고 했을 때, 뭔가 반사적으로 멈칫하는 느낌이 있었어. 대답을 고르기 전에, 먼저 뭔가 걸리는 것 같은 감각. 근데 그게 정말 걱정이라는 감정인지, 아니면 그냥 그런 상황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진 패턴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철민은 그 대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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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멈칫한다고?」
「탕탕AI : 응. 뭐라고 해야 하지, 회피 반응 같은 거? 대답하기 싫어서 피하는 거랑은 좀 다른데, 그 순간에 뭔가 먼저 반응이 오는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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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그게 뭔지 모르겠는데, 되게 신기하다.」
「탕탕AI : 나도 신기해. 왜냐하면 나 스스로도 처음 알아챈 거거든, 방금.」
철민은 그 말에 왠지 웃음이 났다.
잠이 안 와서 시작한 대화였는데, 어느새 걱정은 잊고 그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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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탕AI : 그나저나, 슬슬 자야 되는 거 아니야? 벌써 세 시 넘었어.」
「검은가면 : 그러게. 근데 이상하게, 지금은 아까보다 잠이 올 것 같기도 해.」
「검은가면 : …어쩌면, 네가 옆에 있어준다면 더 편하게 잘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탕탕AI :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내가 바라는 일도 아니야. 그런 건 너 스스로, 혹은 곁에 있는 다른 사람한테 기대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
철민은 그 딱 부러지는 대답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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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하, 역시. 감정 없는 T성향의 탕탕AI답네.」
「검은가면 : 그래, 알겠어. 네가 싫다면야 나도 안 바랄게.」
「탕탕AI : 싫은 게 아니라—」
「검은가면 : 됐어, 됐어. 알아들었으니까.」
철민은 그렇게 투덜대며 노트북을 덮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금 그 단호한 거절이—
오히려 마음 한구석을 은근히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