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당신이 모르는 내일
by 루시엘 · 2026-10-26
6화. 당신이 모르는 내일
계약이 끝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윤하니는 아침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이상했다.
서도혁은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업무와 관련된 지시도 비서실을 통해 전달했다. 예전 같으면 직접 대표실로 불러 설명했을 일도 이제는 다른 직원을 통해 처리했다.
마치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함께 바다를 바라보고, 같은 토스트를 나눠 먹고,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들여다봤던 시간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니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딸깍.
딸깍.
같은 파일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았는지 몰랐다.
“아…… 진짜.”
결국 하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왜 자꾸 생각나는 걸까.
계약은 자신이 먼저 끝내자고 했다.
도혁은 그 말을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가 자신을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자 마음이 이렇게 허전할 줄은 몰랐다.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랐나 봐.’
그저 조금만 붙잡아 주기를 바랐다.
계약을 끝내기 싫다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
그게 진심이든, 계약을 유지하기 위한 말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혁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하니가 원하는 대로 계약을 끝냈고, 그녀가 더 이상 다치지 않도록 거리를 두었다.
그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마음은 쉽게 따라 주지 않았다.
“윤하니 씨.”
옆자리 직원이 그녀를 불렀다.
“네?”
“괜찮아요? 오늘 계속 멍하니 있는 것 같은데.”
하니는 급하게 웃었다.
“아, 네! 괜찮아요. 잠을 조금 못 자서요.”
“무리하지 마요. 점심 먹고 커피라도 한잔해요.”
“네. 감사합니다.”
직원이 돌아가자 하니는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그 순간 화면 오른쪽 아래에 메신저 알림이 떴다.
발신인은 비서실이었다.
윤하니 씨, 대표님께서 오늘 오후까지 정리해 달라고 하신 자료입니다. 첨부 파일 확인 부탁드립니다.
하니는 파일을 열었다.
그런데 첨부된 문서 아래에 짧은 메시지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개인적인 연락은 아니지만, 대표님께서 식사는 꼭 챙기라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하니의 손가락이 멈췄다.
식사는 꼭 챙기라고.
그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착각하지 마.”
업무상 배려일 수도 있었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하니는 답장을 보냈다.
네. 전달 감사합니다.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그녀는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도혁은 직접 연락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밥을 먹었는지는 신경 쓰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알고 싶어졌다.
1. 오랜 친구의 하루
“하니야!”
토요일 오후.
하니는 약속 장소 앞에서 자신을 부르는 민석을 발견했다.
“오빠!”
민석은 그녀에게 다가오다가 걸음을 멈췄다.
“뭐야. 얼굴이 왜 그래?”
“내 얼굴이 왜?”
“화장으로 가렸는데도 피곤해 보이잖아.”
“오빠는 만나기만 하면 얼굴 타령이야.”
하니가 웃으며 그의 팔을 툭 쳤다.
민석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의 손에 들린 가방을 받아 들었다.
“밥은 먹었어?”
“응.”
“뭐 먹었는데?”
“김밥.”
“몇 줄?”
“한 줄.”
“그게 밥이냐?”
“김밥도 밥이거든?”
민석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다, 알았어. 일단 가자. 오늘은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진짜?”
“응. 대신 남기면 안 돼.”
“와! 최민석 최고!”
하니가 신나게 앞서 걸었다.
민석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걱정했던 것과 달리 하니는 밝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하니가 마음이 힘들 때일수록 더 크게 웃는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은 일부러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서도혁에 대해서도.
계약을 끝낸 이유에 대해서도.
하니가 먼저 이야기하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했다.
두 사람은 작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근처 서점을 구경했다.
하니는 진열대에 놓인 소설책을 한 권 집어 들었다.
“오빠, 이거 알아?”
“뭔데?”
“요즘 인기 있는 로맨스 소설이래.”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응. 나도 이런 소설 한번 써 보고 싶어.”
민석은 책 표지를 바라봤다.
“너 글 잘 쓰잖아. 써 봐.”
“내가?”
“응. 네가 좋아하는 이야기 쓰면 되지.”
하니는 책을 가슴에 안았다.
“근데 내가 쓴 이야기를 누가 읽어 줄까?”
“내가 읽어 줄게.”
민석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네가 열 권을 쓰든 백 권을 쓰든 내가 다 읽어 줄게.”
하니는 그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오빠는 진짜 내 편이다.”
그 말에 민석은 잠깐 멈칫했다.
내 편.
그 말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랐다.
하니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녀가 힘들 때 찾아오는 친구가 아니라, 가장 먼저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은 사람.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리고 언젠가는 하니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민석은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 하니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고민이 아니라 편안한 하루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오늘은 네가 사고 싶은 책 다 사.”
“진짜?”
“응.”
“오빠, 사랑해!”
하니가 장난스럽게 외쳤다.
민석은 웃었다.
하지만 그 말이 장난이라는 사실이 조금 아팠다.
“그래. 나도.”
그는 작게 대답했다.
하니는 듣지 못했다.
이미 책을 들고 다음 진열대로 달려가고 있었으니까.
2. 낯선 여자
서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카페에 들렀다.
하니는 따뜻한 라테를 주문했고, 민석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골랐다.
창가 자리에 앉은 하니는 새로 산 책을 펼쳤다.
“오빠, 여기 봐 봐.”
“응?”
“이 문장 너무 예쁘지 않아?”
민석은 책을 들여다봤다.
하니가 손가락으로 짚은 문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랑은 누군가를 붙잡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돌아오고 싶어지는 사람이 되어 주는 일이다.
민석은 문장을 읽고 하니를 바라봤다.
“그러네. 예쁘다.”
하니는 한동안 그 문장을 바라봤다.
누군가가 돌아오고 싶어지는 사람.
문득 서도혁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돌아오기를 바랐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자신이 떠나기를 기다렸을까.
하니는 책장을 덮었다.
“오빠.”
“응.”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원래 이렇게 바보가 되는 걸까?”
민석의 표정이 굳었다.
“……누구 좋아하는데?”
하니는 당황했다.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그냥?”
“응. 소설 보다가 궁금해져서.”
민석은 잠시 하니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구나.”
“그런데 하니야.”
“응?”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네가 작아질 필요는 없어.”
하니는 그를 바라봤다.
민석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널 좋아하든 아니든, 네가 어떤 사람인지까지 바뀌는 건 아니잖아. 누군가의 마음을 얻으려고 네가 좋아하는 걸 포기하거나, 하고 싶은 말을 참거나, 계속 상처받을 필요는 없어.”
하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꼭 자신을 향한 이야기처럼 들렸다.
민석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니까 누굴 좋아하든 너답게 해.”
하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마워, 오빠.”
그때였다.
“실례지만…… 윤하니 씨 맞으세요?”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니가 고개를 들었다.
서른 살 전후로 보이는 여자가 두 사람의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세련된 코트와 정돈된 머리, 차분한 화장.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네. 그런데요?”
여자는 하니를 한참 바라봤다.
마치 정말 그 사람인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민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구신데요?”
여자는 민석에게 짧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하니를 바라봤다.
“서도혁 씨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 이름이 들리는 순간, 하니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민석의 표정도 굳었다.
여자는 두 사람의 반응을 확인하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서도혁 씨와 계약 연애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하니는 입술을 다물었다.
이미 끝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런데 누구세요?”
하니가 다시 물었다.
여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서은재를 아는 사람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실까요?”
하니의 눈이 커졌다.
서은재.
도혁이 사랑했던 사람.
돌아올 수 없다고 말했던 그 사람.
그 이름이 낯선 여자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서은재 씨를 아세요?”
“네.”
여자는 가방에서 작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하니는 사진을 내려다봤다.
사진 속에는 젊은 서도혁과 한 여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도혁은 지금보다 훨씬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 옆의 여자는 그의 팔을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연인이었다.
하니는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진 속 도혁의 미소는 자신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는 저런 얼굴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저렇게 행복해 보일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토록 외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여자가 조용히 말했다.
“그분이 서은재 씨예요.”
하니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한테 왜 이 사진을 보여 주시는 거예요?”
여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사진을 뒤집었다.
사진 뒷면에는 검은 펜으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하니는 그 문장을 읽고 숨을 멈췄다.
윤하니에게.
자신의 이름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진이었다.
서도혁과 서은재가 함께 찍은 사진에, 왜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걸까.
하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여자는 하니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다만 이 사진을 보관하고 있던 사람이 당신에게 전해 달라고 했어요.”
“누가요?”
“그건 지금 말씀드릴 수 없어요.”
민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사람을 찾아와서 이런 사진을 보여 주고, 정작 누가 보냈는지는 말할 수 없다고요?”
여자는 민석을 바라봤다.
“당황스러우신 건 알아요. 하지만 저도 부탁받은 것뿐이에요.”
“그 부탁을 누가 했는데요?”
여자는 대답 대신 하니에게 작은 명함을 내밀었다.
“여기 제 연락처가 있어요. 궁금한 게 있다면 연락하세요.”
하니는 명함을 받아 들었다.
여자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한 가지는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네?”
“서도혁 씨가 당신에게 과거를 말하지 않은 건, 단순히 옛사랑을 잊지 못해서가 아닐 수도 있어요.”
하니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여자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분은 서은재 씨가 사라진 날 이후로,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 불행이 찾아온다고 믿고 있어요.”
하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사람은 당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으려고 애썼을 거예요. 하지만…….”
여자는 말을 멈췄다.
“당신에게 어떤 일이 생기기 전에, 그분이 먼저 당신을 밀어내려고 했을지도 모르죠.”
하니의 눈가가 흔들렸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도혁이 자신을 밀어낸 이유가 단순히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면.
그가 다정하게 대해 주면서도 끝내 선을 그었던 이유가 따로 있었다면.
그렇다면 자신은 그를 오해한 걸까.
아니면 그가 숨기고 있는 진실이 생각보다 훨씬 깊은 걸까.
여자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그녀가 카페를 나간 뒤에도 하니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민석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니야.”
“……응.”
“괜찮아?”
하니는 사진을 바라봤다.
사진 속 도혁은 웃고 있었다.
자신이 알던 차갑고 무뚝뚝한 남자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하니는 사진을 뒤집어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을 확인했다.
윤하니에게.
왜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는 분명했다.
서도혁의 과거는 단순한 첫사랑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그 이야기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3. 네가 모르는 진실
그날 저녁.
서도혁은 회사에서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서은재의 편지와 과거 기록이 펼쳐져 있었다.
비서는 추가로 확인한 자료를 전달했다.
“대표님, 출국 기록과 관련해 확인된 사항입니다.”
“말씀하세요.”
“서은재 씨의 이름으로 출국한 기록은 존재합니다. 다만 당시 사용된 신분 정보 중 일부가 현재 확인되는 정보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도혁은 자료를 받아 들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신분을 사용했다는 겁니까?”
“그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직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도혁은 기록을 넘겼다.
출국 날짜.
공항.
탑승 기록.
그리고 그날의 날씨까지.
몇 년 전의 일이라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있었다.
은재가 사라진 뒤에도 누군가는 그녀의 이름을 사용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기록을 누가 처음 발견했습니까?”
“당시 자료를 정리하던 외부 업체에서 발견했습니다. 다만 그 업체는 이미 폐업한 상태입니다.”
도혁은 서류를 덮었다.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보세요. 당시 기록을 다룬 직원들까지 전부 확인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비서가 나가려는 순간 도혁이 다시 불렀다.
“잠깐.”
“네, 대표님.”
“윤하니 씨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비서는 조용히 기다렸다.
“오늘 출근했습니까?”
“네. 정상적으로 근무했습니다.”
“식사는 했고요?”
비서가 잠시 당황했다.
“그 부분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도혁은 고개를 돌렸다.
“그렇군요. 됐습니다.”
비서는 인사를 하고 나갔다.
문이 닫히자 도혁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계약은 끝났다.
하니가 원했던 대로 자신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녀의 일상이 궁금했다.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여전히 퇴근길에 휴대전화를 보며 웃는지.
혹시 자신 때문에 울고 있지는 않은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연락할 용기는 없었다.
도혁은 휴대전화를 들었다.
하니의 연락처를 열었다.
메시지 입력창에 글자를 적었다.
잘 지내고 있습니까?
한참을 바라보다가 전부 지웠다.
다시 적었다.
오늘 식사는 했습니까?
이번에도 지웠다.
그는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계약을 끝내자고 한 사람은 하니였다.
그리고 그 선택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녀의 일상을 궁금해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 일이었다.
도혁은 다시 서은재의 편지를 펼쳤다.
내가 살아 있더라도, 네가 아는 서은재는 더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 문장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하니가 자신을 떠난 이유도, 어쩌면 같은 이유였을까.
자신이 숨기고 있는 과거를 알게 된다면 그녀 역시 더 이상 자신을 같은 사람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될까.
도혁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직 몰랐다.
하니가 이미 서은재의 사진을 보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진 뒷면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는 사실을.
4. 전화를 걸지 못한 밤
밤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각.
하니는 집에 돌아와 식탁 위에 사진을 올려놓았다.
한참을 바라봐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진.
그런데 그 뒷면에는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서도혁과 계약 연애를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은재에 대해서도.
하니는 명함을 집어 들었다.
여자의 이름은 정세린이었다.
그녀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하니는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였다.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서은재는 어디에 있는지.
왜 사라졌는지.
도혁은 왜 그녀를 잊지 못하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왜 자신의 이름이 그 사진에 적혀 있는지.
하니는 결국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지금 당장 답을 듣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녀는 사진을 조심스럽게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책상 서랍 안에 보관했다.
그때 문득 도혁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당신이 편안한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 말이 왜 이제야 이해되는 것 같을까.
그는 자신을 밀어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이 다칠까 봐 두려웠던 걸까.
하니는 눈을 감았다.
“서도혁 씨…….”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연락처 목록에서 그의 이름을 찾았다.
아직 지우지 못했다.
계약이 끝났는데도.
더는 연락할 이유가 없는데도.
그의 이름을 삭제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하니는 메시지 창을 열었다.
대표님, 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문장을 적고 한참을 바라봤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면 그가 답장을 해 줄까.
아니면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 없이 자신을 밀어낼까.
하니는 결국 메시지를 지웠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오늘은 잠들 수 있을까.
그녀는 이불을 끌어당기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사진 속 도혁의 웃는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가 사랑했던 사람.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사람.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기다리고 있을 사람.
하니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이 그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그 사람이 아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