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는 숲》 제1부 — 죽은 친구의 남자 제8화. 남겨진 온기
by SEINE · 2026-10-20
새벽 다섯 시 십칠 분.
김준은 잠에서 깨어났다.
꿈을 꾼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꿈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고, 돌아보려는 순간 눈을 떴다는 것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준은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커튼 사이로 푸른 새벽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베개 옆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새로운 메시지는 없었다.
준은 자신이 왜 메시지부터 확인했는지 깨닫고 잠시 멈췄다.
유진이 살아 있을 때는 아침마다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밤사이 유진이 무슨 사진을 보냈을지, 또 어떤 이야기를 늘어놓았을지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조금 달랐다.
준은 메시지 목록을 내려다보았다.
강태신.
어젯밤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사람.
그 이름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차 안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좁은 좌석 사이로 몸을 숙이던 남자.
휴대전화를 건네던 길고 따뜻한 손가락.
그리고 아주 잠깐, 서로의 손끝이 맞닿았던 순간.
준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스친 것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기억은 이렇게 선명할까.
준은 손가락을 천천히 오므렸다.
그 순간 자신이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놀람.
경계.
낯선 사람과의 신체적 접촉에서 오는 긴장.
그렇게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준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거울 속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창백한 피부.
짧은 검은 머리.
조금 피곤해 보이는 눈.
준은 거울을 바라보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녀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강태신은 이유진의 남자친구였다.
아니, 정확히는 남자친구였던 사람이다.
유진이 사랑했던 남자.
유진이 마지막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남자.
그리고 자신이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
준은 거울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를 향해 어떤 감정을 느끼든,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유진의 죽음은 아직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오전 아홉 시.
준은 연구실에 앉아 논문을 읽고 있었다.
화면에는 대인관계에서의 신뢰 형성과 정서적 반응에 관한 연구가 떠 있었다.
하지만 같은 문장을 세 번이나 읽고서야 내용을 이해했다.
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노트북을 잠시 덮었다.
그리고 서랍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유진의 죽음과 관련해 정리해 둔 기록이었다.
첫 장에는 확인된 사실들이 적혀 있었다.
이유진 사망.
현재까지 알려진 사망 경위: 자살 추정.
사망 전 김준에게 연락.
사망 후 유진의 번호로 전화 및 문자 수신.
숲속 저택 방문.
방문 이후 장소에 대한 불편감 표현.
준은 펜을 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했다.
숲속 저택 음악회 참석.
강태신과 현장에서 재회.
저택 내부 일부 공간에 출입 통제 인원 확인.
그녀는 마지막 문장을 읽다가 잠시 멈췄다.
검은 정장을 입고 복도 끝의 문 앞에 서 있던 남자.
그는 단순한 행사 직원이었을 수도 있었다.
개인 저택에서 열린 음악회라면 손님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일부 공간을 관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준은 옆에 작은 표시를 남겼다.
특이사항으로 단정하지 말 것.
그녀는 다음 줄에 강태신의 이름을 적으려다가 펜을 멈췄다.
어젯밤 차 안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해야 할까.
숲에서 그가 했던 말은 분명 기록할 만했다.
여기서 사람이 죽어도 아무도 모를 겁니다.
준은 그 문장을 적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덧붙였다.
본인은 농담이라고 설명함.
잠시 생각한 뒤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불쾌감을 느꼈으나 실제 위협 의도는 확인되지 않음.
준은 펜을 내려놓았다.
그때 문득 어젯밤 그의 손끝이 떠올랐다.
그 기억은 수첩에 적지 않았다.
그것은 유진의 죽음과 관련된 사실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준아.”
연구실 문이 열렸다.
한서윤 교수였다.
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님.”
“어제 잘 들어갔어?”
“네.”
“연락은 받았는데, 그래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서윤은 안심한 듯 웃었다.
“혼자 돌아오느라 고생했겠다.”
“아닙니다.”
“택시는 잘 잡혔어?”
준은 잠시 망설였다.
“저택에서 큰길까지는 다른 분 차를 탔습니다.”
“누구?”
“강태신 검사님이요.”
서윤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강 검사님?”
“네.”
“그분이 데려다주셨어?”
“큰길까지만요.”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다행이네. 거기서 혼자 걸어 나오기에는 길이 너무 어둡더라.”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었니?”
“아니요.”
“표정이 좀 피곤해 보여서.”
“잠을 잘 못 잤습니다.”
“유진 씨 생각 때문에?”
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서윤은 그녀의 침묵을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 논문은 하루 늦는다고 큰일 안 나.”
준은 희미하게 웃었다.
“네.”
서윤은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네?”
“어제 그 음악회 주최 측에서 사진을 보내 줬어.”
준의 시선이 움직였다.
“사진이요?”
“응. 행사 사진 몇 장.”
서윤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너도 찍혔을지 모르겠네.”
준은 교수 옆으로 다가갔다.
화면에는 전날 음악회 사진들이 있었다.
연주하는 현악 사중주단.
와인잔을 들고 웃는 사람들.
저택의 정원.
그리고 단체 사진.
준은 화면을 천천히 살폈다.
그때 사진 한쪽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강태신이었다.
그는 중년 남녀와 함께 서 있었다.
준은 그 옆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짙은 남색 드레스를 입은 중년 여성이었다.
얼굴은 단정했고,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교수님.”
“응?”
“이분은 누구세요?”
준이 여성을 가리켰다.
서윤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아, 윤혜경 교수님.”
“의사이신가요?”
“응. 의과대학 교수로 오래 계셨지.”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서윤은 덧붙였다.
“강 검사님 어머니야.”
준의 손이 멈췄다.
“어머니요?”
“응. 몰랐어?”
“네.”
서윤은 화면 속 남자를 가리켰다.
“옆에 계신 분이 아버지 강도현 교수님이고.”
준은 사진을 다시 바라보았다.
강도현.
윤혜경.
며칠 전 문화재단 홈페이지에서 보았던 이름들이었다.
그들은 강태신의 부모였다.
준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두 분 다 의사이신가요?”
“응. 의료계에서는 꽤 유명하신 분들이야.”
“어느 병원에 계셨나요?”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예전에는 세명대학교병원에 계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준의 얼굴이 굳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서윤은 알아차렸다.
“왜?”
준은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무슨 일 있어?”
준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저희 부모님이 수술받으셨던 병원이라서요.”
서윤의 표정이 달라졌다.
“아…….”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준이 어린 시절 부모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구나.”
서윤은 조심스럽게 휴대전화를 내렸다.
“우연히 이름을 들으니까 놀랐겠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오래전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흰색 복도.
차가운 의자.
수술실 앞에 걸린 빨간 불빛.
그리고 누군가 건네주었던 작은 종이컵.
그날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의사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병원 이름만큼은 잊은 적이 없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뒤.
준은 학교 도서관의 자료 열람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노트북으로 세명대학교병원의 오래된 자료를 검색하고 있었다.
강도현.
윤혜경.
두 사람의 이름은 쉽게 검색되었다.
학술논문.
학회 발표.
의료봉사 활동.
병원 경영 관련 기사.
사회공헌 행사.
화려한 경력들이 화면에 나타났다.
준은 천천히 읽었다.
강도현은 외과 분야에서 오랫동안 활동했고, 윤혜경 역시 의학계에서 여러 연구를 진행한 인물이었다.
두 사람 모두 여러 상을 받았다.
준은 오래된 기사 하나를 열었다.
십수 년 전의 병원 행사 사진이었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가운데 강도현이 있었다.
준은 사진을 확대했다.
낯선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이 조금 답답해졌다.
그녀는 화면을 닫았다.
아직 아무것도 확인된 것은 없었다.
같은 병원에서 근무했다는 사실만으로 부모의 수술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준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도 그 이름들이 마음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수첩을 꺼냈다.
강도현·윤혜경 — 세명대학교병원 근무 이력.
그 아래에는 짧게 적었다.
부모 사망 사건과의 관련성 확인되지 않음.
준은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때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강태신이었다.
김준 씨.
준은 메시지를 읽었다.
잠시 후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어제는 잘 들어가셨죠?
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답장을 보냈다.
네. 감사합니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다행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
혹시 오늘 시간 있으세요?
준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만남을 제안하는 메시지였다.
그녀는 답장을 입력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태신의 답장은 짧았다.
커피 한 잔 사드리고 싶어서요.
준은 잠시 침묵했다.
경찰서 앞에서도 같은 제안을 받았다.
그때는 곧바로 거절했다.
지금도 거절하면 됐다.
그런데 손가락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준은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차 안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던 눈.
손끝에 닿았던 온기.
그리고 유진의 이야기를 듣던 조용한 얼굴.
준은 천천히 답장을 입력했다.
오늘은 어렵습니다.
전송.
잠시 후 답장이 왔다.
그럼 다음에요.
준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서운하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다음을 이야기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강태신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검찰청 사무실에는 늦은 오후의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김준은 오늘도 자신을 거절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처음에는 단호하게 만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지금은 오늘은 어렵다고 했다.
태신은 그 차이를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의도한 차이인지, 단순한 표현의 차이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에서 가능성을 읽고 싶었다.
그때 박현우가 문을 두드렸다.
“강 검사님.”
“네.”
“잠깐 시간 되십니까?”
“들어오세요.”
현우는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이번 주 회의 자료입니다.”
태신은 서류를 받았다.
현우는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데 검사님.”
“네.”
“요즘 누구 만나세요?”
태신은 고개를 들었다.
“왜요?”
“아니, 그냥. 분위기가 달라지신 것 같아서요.”
태신은 웃었다.
“제가요?”
“네. 전보다 휴대전화를 자주 보시는 것 같기도 하고.”
태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그런가요.”
현우가 웃었다.
“좋은 분 있으시면 소개도 좀 해 주세요.”
태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김준.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논문을 읽고 있을까.
유진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다시 보고 있을까.
태신은 그 마지막 가능성을 떠올리며 웃었다.
현우가 물었다.
“왜 웃으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태신은 서류를 펼쳤다.
하지만 눈은 한동안 글자 위에 머물지 못했다.
저녁 여섯 시.
준은 유진의 작업실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유진의 어머니에게 미리 연락해 그림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작업실에 남은 자료를 정리해도 되는지 허락받았다.
준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물감 냄새가 났다.
그녀는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
유진이 없는 공간은 여전히 낯설었다.
준은 불을 켰다.
작업대 위에는 붓과 물감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창가에는 마르다 만 꽃이 꽂혀 있었다.
준은 그 꽃을 바라보았다.
유진은 꽃을 좋아했다.
특히 흰색 꽃을 좋아했다.
“준아, 흰 꽃은 이상하게 예쁘지 않아?”
“그냥 꽃이지.”
“넌 진짜 감성이 없다.”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준은 그때의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작업실 안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캔버스 앞에 섰다.
『아무도 모르는 숲.』
그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검은 나무.
회색 하늘.
붉은 원피스.
그리고 얼굴 없는 남자.
준은 그림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러다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붉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손.
지난번에는 무엇을 쥐고 있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
준은 작업실에 놓인 작은 스탠드를 가져왔다.
빛을 비스듬히 비추었다.
그러자 물감의 두께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
하얀 물체는 종이처럼 보였다.
준은 고개를 기울였다.
종이의 한쪽에 아주 작은 검은 선이 그려져 있었다.
마치 글씨 같았다.
하지만 너무 작아 알아볼 수 없었다.
준은 휴대전화로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스케치북을 펼쳤다.
지난번 보았던 남자의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웃는 얼굴.
다음 장.
웃지 않는 눈.
준은 그 아래를 천천히 살폈다.
종이 끝부분에 연필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스케치북을 창가로 가져갔다.
빛이 비스듬히 닿자 희미한 글씨가 드러났다.
유진이 지웠던 문장이었다.
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완전히 읽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몇 글자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준의 손이 멈췄다.
그 아래에는 다른 문장이 있었다.
나를…….
그 뒤는 지워져 있었다.
준은 스케치북을 내려놓았다.
가슴이 조금 답답해졌다.
유진은 무엇을 쓰려 했을까.
왜 지웠을까.
준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책상 아래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무언가 떨어진 듯한 소리였다.
준은 고개를 돌렸다.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바람이 들어와 종이 몇 장을 흔들고 있었다.
준은 창문을 닫으려다가 책상 아래에 떨어진 작은 봉투를 발견했다.
흰색 봉투였다.
겉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준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안에는 접힌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펼쳤다.
종이는 유진이 작업할 때 쓰던 메모지였다.
짧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금요일. 밤 11시 40분.’
그 아래에는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