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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취하지 않은 고백

by 루시엘 · 2026-10-26

# 《두부참이슬》

루시엘 지음

## 25화. 취하지 않은 고백

“윤서하 씨.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을 거죠?”

강태준의 목소리가 조용한 거실에 울렸다.

서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늦은 밤이었다. 라면 그릇은 이미 치워졌고, 주방에는 물 끓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넓은 거실에는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을 치며 웃었는데, 태준은 어느 순간부터 진지해져 있었다.

서하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손을 잡은 태준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태준 씨.”

“네.”

“나도 노력할게요.”

“…….”

“그런데 무조건 도망가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어요.”

태준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서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태준 씨가 싫어서가 아니에요. 내가 너무 무섭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는 나도 모르게 피하고 싶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럴 때마다 바로 괜찮아질 수 있다고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태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해요.”

“어떻게요?”

“도망가고 싶어지면, 도망가기 전에 저한테 한 번만 말해 줘요.”

서하는 눈을 깜빡였다.

“……한 번만요?”

“네. 지금 무섭다고, 혼자 있고 싶다고, 아니면 제가 너무 부담스럽다고요.”

태준은 희미하게 웃었다.

“제가 그 말을 듣고도 서하 씨를 이해하려고 노력할게요. 서하 씨가 저한테 솔직하게 말해 주기만 하면 돼요.”

서하는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무조건 자신을 믿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대신 두려워하는 순간에도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했다.

서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약속?”

태준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서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우리 몇 살이에요?”

“서른둘이요.”

“저는 서른이에요.”

“그럼 서른 살 윤서하 씨, 약속하시겠습니까?”

서하는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네. 약속할게요.”

태준은 그 손가락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저도 약속할게요.”

“뭘요?”

“서하 씨가 무서워하는 걸 제가 마음대로 판단하지 않을게요. 그리고 중요한 일은 혼자 결정하지 않을게요.”

서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좋아요.”

태준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서하 씨.”

“네?”

“오늘 저한테 해 주고 싶은 말 없어요?”

서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요?”

“아까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뭘요?”

“오늘 서하 씨가 우리 집에 와 줬잖아요. 아버지 앞에서도 도망가지 않았고, 저녁도 같이 먹었고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런데 아직 제가 듣고 싶은 말은 못 들었어요.”

서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뭔데요?”

태준이 웃었다.

“좋아한다고 해 줘요.”

서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아니, 지금 그걸 꼭 말해야 해요?”

“네.”

“왜요?”

“제가 듣고 싶으니까요.”

“맨날 듣잖아요.”

“맨날 듣고 싶어요.”

서하는 입술을 삐죽였다.

“진짜 못 말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뻔뻔한 대답에 서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해요.”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하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왜요?”

“한 번 더 듣고 싶어서요.”

“강태준!”

“네, 윤서하 씨.”

“진짜!”

태준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서하는 그의 팔을 가볍게 때렸다.

그런데 태준은 그 손마저 잡아 버렸다.

“저도 좋아해요.”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니,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좋아해요.”

서하의 웃음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태준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진지하게 말했다.

“서하 씨를 만나기 전에는 제 하루가 늘 비슷했어요. 회사에 가고, 회의하고, 일하고, 집에 돌아오고. 다음 날도 똑같았죠.”

“…….”

“그런데 어느 날부터 하루가 달라졌어요. 오늘은 서하 씨 가게에 갈 수 있을까, 오늘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제가 가면 웃어 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태준은 작게 웃었다.

“처음에는 그냥 재미있는 사람이 생겼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서하 씨가 없는 하루가 싫어지더라고요.”

서하는 숨을 죽인 채 그의 말을 들었다.

“서하 씨가 저를 좋아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저를 남자로 봐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결국에는 제 여자친구가 되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태준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앞으로의 제 인생에 서하 씨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서하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태준 씨…….”

“그렇다고 서하 씨한테 제 인생을 책임져 달라는 건 아니에요. 제 문제는 제가 해결할 거예요. 다만 제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서하 씨였으면 좋겠어요.”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윤서하 씨.”

“……네.”

“사랑해요.”

서하는 눈을 크게 떴다.

태준이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여러 번 들었다.

그런데 오늘의 고백은 달랐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장난을 치지도 않았다.

그는 맑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어떤 대답을 바라는지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건네고 있었다.

태준은 조용히 덧붙였다.

“오늘은 술 한 방울도 안 마셨어요.”

서하는 눈물을 참으며 웃었다.

“알아요.”

“그러니까 이 말은 취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그는 그녀의 손을 조금 더 꼭 잡았다.

“내일 아침에도, 일주일 뒤에도, 일 년 뒤에도 같은 마음일 거예요. 제가 그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 줄게요.”

서하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태준은 놀라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서하 씨, 왜 울어요? 제가 무슨 잘못했어요?”

“아니요.”

“그럼 왜…….”

서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좋아서요.”

그 말에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하는 눈물을 닦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사랑해요.”

태준의 눈이 커졌다.

“……네?”

“사랑한다고요.”

“한 번만 더…….”

“싫어요!”

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이걸로 만족할게요.”

서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태준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서하는 그의 품 안에서 생각했다.

자신은 여전히 두려웠다.

태준의 아버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서로 다른 환경이 두 사람을 얼마나 힘들게 할지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남자는 자신의 두려움을 없애 주겠다고 약속하는 대신, 두려움이 남아 있어도 함께 걸어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서하는 그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태준 씨.”

“네.”

“우리…… 잘할 수 있을까요?”

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잘하는 게 뭔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

“싸울 수도 있고, 서로 서운하게 할 수도 있고, 생각이 달라서 힘들 때도 있겠죠.”

서하는 고개를 들었다.

태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그럴 때마다 다시 이야기해 봐요. 잘못했으면 사과하고, 서운하면 말하고, 무서우면 같이 고민하고요.”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저는 서하 씨랑 오래오래 연애하고 싶거든요.”

서하는 작게 웃었다.

“오래오래요?”

“네.”

“얼마나 오래요?”

태준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가능하면 평생이요.”

서하는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너무 빨라요.”

“뭐가요?”

“평생이라는 말이요.”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천천히 갈게요.”

그는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대신 오래 가요.”

서하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날 밤, 태준은 서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까지도 두 사람은 손을 놓지 못했다.

“들어가요.”

태준이 말했다.

“네.”

“집에 도착하면 연락하고요.”

“알았어요.”

“그리고 내일 밥 꼭 먹어요.”

서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태준 씨는 맨날 밥 먹으라는 말만 해요?”

“밥은 중요하니까요.”

“알았어요. 잘 먹을게요.”

서하는 문을 열고 내리려다가 멈췄다.

“태준 씨.”

“네?”

“오늘 고백…… 좋았어요.”

태준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요?”

“네.”

“그럼 다음에도 해 줄게요.”

“매일은 안 돼요.”

“왜요?”

“익숙해지면 감동이 덜하잖아요.”

태준은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매일 다른 방식으로 해 볼게요.”

“아이고, 됐어요!”

서하는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태준은 그녀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차를 출발시켰다.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서하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집에 들어왔어요.

그리고 잠시 뒤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사랑해요, 강태준 씨.

태준은 도로 옆에 차를 잠깐 세우고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진짜 사람 미치게 하네.”

그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저도 사랑해요, 윤서하 씨.

그날 밤, 태준은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두부참이슬에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불이 켜졌다.

서하는 앞치마를 두르고 두부를 썰고 있었다.

어젯밤 태준의 고백이 자꾸 떠올랐다.

가능하면 평생이요.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 진짜.”

서하는 괜히 도마를 정리했다.

“내가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그때 가게 문이 열렸다.

딸랑.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서하는 고개를 들었다.

태준이었다.

“……벌써 왔어요?”

“네.”

“출근 안 해요?”

“조금 늦게 가도 됩니다.”

“회사 대표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대표도 사랑하는 여자 보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서하는 얼굴이 붉어졌다.

“아침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태준은 웃으며 구석 자리에 앉았다.

“두부김치 하나, 참이슬 하나요.”

서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침부터 술이요?”

“농담이에요. 오늘은 커피 한 잔이면 됩니다.”

“커피는 팔지 않거든요.”

“그럼 물 한 잔 주세요.”

서하는 웃으며 물을 가져다주었다.

태준은 물을 받아 마시고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서하 씨.”

“네?”

“오늘도 사랑해요.”

서하는 들고 있던 물병을 떨어뜨릴 뻔했다.

“강태준!”

태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매일 다른 방식으로 해 보겠다고 했잖아요.”

“그건 오늘부터가 아니거든요!”

“그럼 내일부터 할까요?”

“아니요!”

서하는 결국 웃고 말았다.

태준도 따라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해외 법인도, 회장과의 갈등도, 서로 다른 세상도 멀리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알아 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아침이 끝나기도 전에, 태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최도윤이었다.

태준은 전화를 받았다.

“왜?”

“대표님, 급하게 확인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도윤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무슨 일인데?”

“싱가포르 법인 관련 인사안이 방금 공유됐습니다.”

태준의 표정이 굳었다.

“인사안?”

“네. 회장님께서 이사회에 검토를 요청하신 모양입니다.”

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어제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서에는 대표님이 부임 예정자로 기재돼 있습니다.”

태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뭐라고?”

“아직 최종 발령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사회 논의가 진행되면 결정이 빨라질 수도 있습니다.”

태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는 서하를 바라보았다.

서하는 주방에서 주문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젯밤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웃었던 얼굴.

자신과 함께 고민하겠다고 약속했던 얼굴.

태준은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

이번에는 숨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니 지금 말해야 했다.

그는 서하에게 다가갔다.

“서하 씨.”

“네?”

“저…… 이야기할 게 있어요.”

서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무슨 일이에요?”

태준은 잠시 숨을 골랐다.

“싱가포르 법인 문제가 생각보다 빨리 진행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서하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앞치마에 손을 닦고 태준 앞에 섰다.

“그럼 같이 생각해 봐요.”

태준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서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어제 약속했잖아요. 혼자 결정하지 않기로.”

태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니까 오늘 저녁에 다시 이야기해요. 제가 가게 끝나고 태준 씨 회사 근처로 갈게요.”

“서하 씨가요?”

“네. 이번에는 제가 갈게요.”

태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 작은 희망이 피어났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 25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