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원래 모든 사람에게 잘해줘?
by 루시엘 · 2026-10-19
## 5화. 원래 모든 사람에게 잘해줘?
하린은 아침부터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휴대폰을 바라보는 척하면서 누군가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젯밤 이준과 나눈 대화가 자꾸 떠올랐다.
강이준: 그럼 다음에도 데이트해요.
그 문장을 읽었을 때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혼자 침대에 누워 베개를 끌어안고 웃다가, 괜히 민망해져 이불 속으로 얼굴을 숨기기까지 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준이 생각났다는 것.
씻으면서도 생각났고, 옷을 고르면서도 생각났고, 커피를 마시면서도 생각났다.
심지어 냉장고 문을 열어 놓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자신이 무엇을 꺼내려 했는지 잊어버리기까지 했다.
"아, 진짜."
하린은 냉장고 문을 닫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원래 이렇게 되는 걸까.
아니면 강이준이라는 남자가 유독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걸까.
그때였다.
띠링!
휴대폰 화면이 밝아졌다.
하린은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강이준: 하린 씨, 좋은 아침이에요.
하린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서하린: 좋은 아침이에요ㅎㅎ
강이준: 오늘은 뭐 해요?
서하린: 특별한 건 없어요. 이준 씨는요?
강이준: 오전에 일 좀 하고 오후에는 시간이 있어요.
서하린: 아, 그러시구나!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하린은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기다렸다.
또 기다렸다.
하지만 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뭐야. 시간이 있다고 말했으면 만나자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하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자기가 먼저 만나자고 할까?
아니, 어제도 이준이 먼저 연락했고, 영화도 보자고 했고, 저녁도 먹자고 했다.
오늘은 자신이 먼저 물어봐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막상 메시지를 쓰려니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서하린: 오늘 혹시…
거기까지 입력한 하린은 황급히 문장을 지웠다.
'아니야. 너무 좋아하는 티 내면 안 돼.'
다시 입력했다.
서하린: 오늘 오후에 시간 괜찮으세요?
이번에는 보내기 버튼 위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 결국 화면을 꺼 버렸다.
"아, 진짜 서하린!"
그때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강이준: 하린 씨.
서하린: 네?
강이준: 혹시 오늘 저 보고 싶어요?
하린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대체 이 남자는 어떻게 알았을까.
자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서하린: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ㅋㅋㅋㅋ
강이준: 아니면 말고요.
서하린: 아니, 그게 아니라…
강이준: 저는 보고 싶은데.
하린은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이지 강이준은 반칙이었다.
사람을 설레게 하는 말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강이준: 오후에 시간 괜찮으면 같이 밥 먹어요. 오늘은 제가 하린 씨한테 맛있는 거 사 주고 싶어요.
하린은 몇 초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서하린: 좋아요ㅎㅎ
강이준: 그럼 세 시쯤 만날까요?
서하린: 네! 어디서 볼까요?
강이준: 지난번에 만났던 카페 앞에서요. 제가 데리러 갈게요.
서하린: 알겠어요. 이따 봬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하린은 침대 위로 쓰러졌다.
"으아아아!"
쿠션을 끌어안고 발을 동동 굴렀다.
오늘도 만난다.
그것도 이준이 먼저 보고 싶다고 했다.
하린은 천장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 웃음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하린은 몰랐다.
오늘 자신이 얼마나 사소한 일 하나에 흔들리게 될지.
그리고 그 사소한 일이 자신이 이준을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깨닫게 해 줄 줄도.
오후 세 시.
하린은 약속 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거울을 세 번이나 확인했다.
머리카락이 이상하지 않은지, 옷에 얼룩은 없는지, 립스틱이 너무 진하지는 않은지.
평소 같으면 대충 확인하고 나왔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날에는 별것 아닌 일도 신경 쓰였다.
'너무 꾸민 것 같나?'
하린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봤다.
밝은 아이보리색 니트에 청바지.
평범한 옷차림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린 씨!"
고개를 들자 이준이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색 재킷에 흰 티셔츠, 단정한 바지 차림이었다.
별다르게 꾸민 것 같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눈길이 갔다.
하린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일찍 오셨네요?"
"하린 씨도요."
이준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하린을 잠시 바라봤다.
"오늘도 예쁘네요."
"……또요?"
"네."
"이준 씨는 그런 말이 안 부끄러워요?"
"부끄러운데요."
이준이 웃었다.
"그래도 예쁜 건 예쁘다고 말해야죠."
하린은 결국 시선을 피했다.
"진짜……."
"왜요?"
"그런 말 좀 줄이세요."
"싫은데요."
"왜요!"
"하린 씨가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하린은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좋았다.
너무 좋았다.
그런데 그걸 인정하기는 조금 부끄러웠다.
이준은 그런 하린의 표정을 보며 작게 웃었다.
"가요. 오늘은 제가 맛있는 거 사 준다고 했잖아요."
"뭐 먹을 건데요?"
"하린 씨가 먹고 싶은 거요."
"그렇게 말하면 더 고민되는데."
"그럼 제가 정할까요?"
"네."
이준은 잠시 생각하는 척하더니 말했다.
"파스타 어때요? 지난번에 하린 씨가 크림 파스타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하린의 눈이 커졌다.
"그걸 기억했어요?"
"당연하죠."
"그냥 지나가면서 한 말인데."
"하린 씨가 한 말이니까요."
그 말에 하린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무심코 했던 말을 기억해 주는 사람.
별것 아닌 취향까지 기억하고, 그걸 바탕으로 오늘의 약속을 준비해 주는 사람.
어쩌면 하린이 원했던 건 이런 사람이었는지도 몰랐다.
거창한 선물이나 특별한 이벤트보다, 자신을 귀 기울여 봐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이 자신의 앞에서 웃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요?"
이준이 물었다.
"아니에요."
"뭔가 할 말 있는 표정인데."
"그냥……."
하린은 살짝 웃었다.
"고마워서요."
이준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런 건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그래도요."
"그럼 다음에는 하린 씨가 저한테 맛있는 거 사 주세요."
"좋아요."
"약속이에요."
이준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하린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예요, 애도 아니고."
"약속은 확실하게 해야죠."
하린은 결국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손가락이 맞닿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식당은 아늑하고 조용했다.
창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메뉴판을 펼쳐 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저는 크림 파스타요."
하린이 말했다.
"저는 토마토 파스타 먹을게요."
"매운 거 잘 먹어요?"
"그럭저럭요."
"그럼 제가 한 입 먹어 봐도 돼요?"
이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주문을 마친 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회사 이야기부터 주말에 하고 싶은 일, 어릴 때 좋아했던 만화까지.
이준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하린에게 끊임없이 질문했다.
"하린 씨는 어릴 때 어떤 아이였어요?"
"저요? 엄청 시끄러웠대요."
"지금도 시끄러운데요?"
"강이준 씨!"
하린이 눈을 흘기자 이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지금은 귀여운데."
"그게 더 놀리는 것 같거든요?"
"아닌데."
이준은 웃으며 물컵을 들었다.
"저는 하린 씨랑 이야기하면 시간이 빨리 가요."
하린은 그 말을 듣고 잠시 그를 바라봤다.
"저도 그래요."
이번에는 장난스럽게 넘기지 않았다.
그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준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그는 천천히 웃었다.
"그 말, 기분 좋네요."
"왜요?"
"저만 그런 줄 알았거든요."
하린은 괜히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정말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어?"
하린이 먼저 식당 입구 쪽을 바라봤다.
낯익은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준이 아니라 이준의 옆에 있는 여자 때문에 시선이 멈췄다.
긴 머리카락에 세련된 옷차림.
여자는 식당 안을 둘러보다가 이준을 발견하자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다가왔다.
"이준아!"
이준이 고개를 들었다.
"어? 수빈아."
그 순간 하린은 처음으로 이준의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을 들었다.
수빈.
여자는 두 사람의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여기서 다 만나네? 너 여기 자주 와?"
"가끔."
이준이 대답했다.
여자는 그제야 하린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하린도 얼른 인사했다.
"친구야?"
여자가 이준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 이준은 잠시 하린을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응. 요즘 알아 가는 사람."
하린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알아 가는 사람.
친구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애매하게 얼버무리지도 않았다.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소개해 준 것 같아 기뻤다.
그런데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 그렇구나!"
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나는 오수빈이에요. 이준이랑은 오래된 친구예요."
"서하린이에요."
"하린 씨구나. 반가워요."
수빈은 다시 이준을 바라봤다.
"그런데 너 요즘 연락 잘 안 되더라. 바쁜가 봐?"
"일이 좀 있었어."
"아, 그래서 그랬구나."
수빈은 익숙하다는 듯 웃었다.
"지난번에 말했던 것도 아직 못 정했지? 다음 주말에 시간 괜찮아?"
하린의 손이 포크 위에서 멈췄다.
다음 주말.
둘이 따로 약속을 잡으려는 걸까?
지난번에 말했던 것이라니.
자신이 모르는 이준의 시간이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물론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다.
이준에게는 하린을 만나기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하린이 모르는 추억도 있을 것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마음 한구석이 이렇게 불편할까.
"다음 주말?"
이준이 되물었다.
"응. 네가 같이 가 준다고 했잖아."
수빈은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아, 그리고 이거."
"뭔데?"
"전에 네가 필요하다고 했던 거. 생각나서 샀어."
수빈은 상자를 이준에게 내밀었다.
이준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걸 왜 샀어?"
"그냥. 별거 아니야."
"그래도 선물까지는……."
"부담 갖지 마. 우리 사이에 뭘."
우리 사이.
하린의 마음이 이상하게 쿵 내려앉았다.
오래된 친구.
서로 필요한 걸 기억해 주고, 선물도 주고받고, 다음 주말 약속까지 잡을 수 있는 사이.
하린은 문득 자신이 이준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떤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지.
어떤 여자들과 친한지.
자신이 없는 곳에서 어떤 표정으로 웃는지.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수빈아, 고마운데 다음부터는 이런 거 안 사도 돼."
이준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그런 뜻이 아니라……."
"알았어. 잔소리는 여기까지."
수빈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하린을 바라봤다.
"두 분 데이트 중이셨죠? 제가 방해했네."
"아니에요."
하린이 얼른 대답했다.
수빈은 다시 이준을 향해 웃었다.
"그럼 다음 주말에 연락할게. 시간 비워 둬!"
그 말을 남기고 수빈은 다른 자리로 향했다.
하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준은 상자를 테이블 한쪽에 내려놓고 하린을 바라봤다.
"하린 씨."
"네?"
"괜찮아요?"
"네. 왜요?"
"표정이 조금 굳은 것 같아서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린은 억지로 웃었다.
정말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수빈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다음 주말에 시간 괜찮아?
네가 같이 가 준다고 했잖아.
우리 사이에 뭘.
하린은 고개를 숙이고 포크로 파스타를 작게 잘랐다.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온 뒤에도 하린은 평소보다 말수가 적었다.
이준은 그런 하린을 몇 번이나 바라봤지만, 그녀는 그때마다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결국 이준이 먼저 걸음을 멈췄다.
"하린 씨."
"네?"
"저한테 궁금한 거 있어요?"
하린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요?"
"아까부터 계속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요."
"아니에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
"정말요?"
이준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장난스럽지는 않았다.
"하린 씨가 괜찮다고 해도 제가 보기에는 아닌 것 같거든요."
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말할까.
그냥 솔직하게 물어볼까.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물어본단 말인가.
우리는 아직 연인도 아닌데.
그저 몇 번 만나고, 연락하고, 서로에게 조금씩 호감을 느끼는 사이일 뿐인데.
그런데도 마음은 자꾸만 욕심을 부렸다.
이준이 자신에게만 다정했으면 좋겠다고.
자신을 볼 때만 그런 눈으로 웃어 줬으면 좋겠다고.
다른 여자와 약속을 잡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런 마음을 들키는 게 두려웠다.
"하린 씨."
이준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제가 불편하게 한 게 있으면 말해 줘요."
그 말에 하린은 고개를 들었다.
이준의 눈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정말로 자신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의 눈이었다.
하린은 결국 입을 열었다.
"아까 그분……."
"수빈이요?"
"네."
하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오래된 친구라고 하셨잖아요."
"맞아요."
"원래 여자 친구들이랑도 그렇게 친해요?"
질문을 하고 나서 하린은 곧바로 후회했다.
너무 티가 났다.
이건 누가 봐도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질투하는 사람의 질문이었다.
하린은 얼른 덧붙였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이준 씨가 원래 사람들한테 잘해 주는 편인가 싶어서……."
이준은 잠시 하린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천천히 물었다.
"혹시 질투해요?"
"네?!"
하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아니거든요!"
"아닌가요?"
"아니라니까요!"
"그럼 다행이네요."
이준이 웃었다.
"저는 하린 씨가 질투하는 줄 알고 조금 좋았거든요."
하린은 할 말을 잃었다.
이 남자는 정말 왜 이러는 걸까.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어 놓고 혼자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강이준 씨."
"네."
"진짜 너무해요."
"뭐가요?"
"사람 마음을 자꾸……."
하린은 말을 멈췄다.
아차 싶었다.
'사람 마음을 자꾸 흔들잖아요.'
그렇게 말할 뻔했다.
이준은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자꾸 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린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이준은 그런 하린을 보며 웃다가 천천히 뒤따라갔다.
"하린 씨."
"왜요!"
"저 원래 모든 사람한테 잘해 주는 사람은 아니에요."
하린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네?"
"아까 물어봤잖아요. 제가 원래 여자 친구들이랑도 그렇게 친하냐고."
이준은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섰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니까 편하게 대하는 건 맞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행동하는 건 아니에요."
하린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봤다.
"그럼 수빈 씨랑은……."
"정말 오래된 친구예요. 예전부터 알던 사이고, 가끔 연락도 해요."
"다음 주말에 만나기로 하셨던데요."
"아."
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수빈이가 부탁한 일이 있어요. 같이 가 달라고 했는데 아직 확실하게 대답한 건 아니에요."
"무슨 일인데요?"
하린은 묻고 나서 또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준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수빈이가 예전에 다니던 모임에서 행사가 있대요. 그런데 혼자 가기 어색하다고 같이 가 달라고 했어요. 제가 시간이 되는지 보고 말해 준다고 했고요."
"아……."
"하지만 아직 약속한 건 아니에요."
이준은 잠깐 말을 멈췄다.
그리고 하린을 똑바로 바라봤다.
"하린 씨."
"네."
"제가 다음 주말에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 누구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는 이미 정해져 있는데요."
하린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누군데요?"
이준은 웃었다.
"그걸 정말 몰라서 물어요?"
하린은 대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