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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화분이 시들었다

by 외인 · 2026-10-16

새벽 다섯 시. 눈이 떠졌다.

레티시아는 누운 채로 천장의 날개 벗겨진 천사를 봤다. 그리고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주먹이 단단하게 쥐어졌다.

발가락을 오므렸다. 종아리에 힘이 차올랐다. 어제 저녁까지 팔다리에 매달려 있던 모래주머니가, 밤사이 누가 몰래 떼어 간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았다. 침대 기둥을 잡지 않고.

머리가 맑았다. 깨어난 뒤로 늘 눈 뒤편에 끼어 있던 뿌연 안개가 걷혀 있었다. 그런 안개가 있었다는 것도, 걷히고 나서야 알았다.

창가를 봤다. 흰 제라늄은 어제와 똑같이 거기 있었다.

여섯 시, 복도.

율리안: 하나! 둘!

율리안의 구령이 울렸다. 레티시아는 지팡이를 짚고 걸었다. 열 걸음, 스무 걸음. 숨이 차오르기 시작할 무렵이 지났는데도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서른, 마흔. 복도 끝 창문이 가까워졌다.

율리안의 구령이 점점 작아졌다. 숫자를 세는 목소리가 아니라,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목소리가 되어 갔다.

복도 끝 창문에 손이 닿았다. 레티시아는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침실 문 앞에 섰을 때, 니나가 깃펜을 떨어뜨렸다.

니나: 예, 예순두 걸음이요...

어제 새벽의 마흔 걸음보다 스물두 걸음이 많았다. 단 하룻밤 사이에.

예순두 걸음이라. 묘하게 정이 가는 숫자였다.

레티시아: 아이고, 개운하다.

입에서 저절로 말이 튀어나왔다. 율리안과 니나가 동시에 그녀를 봤다.

율리안: ...레티, 방금 뭐라고 했어?

레티시아: 상쾌하다고요, 오라버니. 상쾌하다고.

율리안은 잠깐 미심쩍은 얼굴을 하다가, 이내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회중시계를 번쩍 들었다.

율리안: 예순두 걸음! 아버지께 보고해야겠다. 아니, 지금 당장!

그는 정말로 뛰어갔다. 복도 저편에서 "아버지!" 하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이른 새벽이었다. 공작이 잠옷 바람으로 또 검을 들고 뛰어나오지 않기를, 레티시아는 진심으로 빌었다.

그날 저녁 보고에서 율리안은 결론을 내렸다. 사흘 평가 결과, 신병 레티시아는 3단계로 진급한다. 계단 훈련 허가, 그리고 하루 세 번.

율리안: 마르타의 수프 덕분이야. 그리고 새벽 공기. 그리고...

율리안은 거기서 말을 흐렸다. 자기 구령 덕분이라는 말은 차마 못 하는 얼굴이었다.

레티시아: 오라버니 구령 덕분이죠.

율리안: ...그런가?

율리안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레티시아는 웃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 구령 없이는 첫 스무 걸음도 없었다.

레티시아: 그리고 마르타한테 상 좀 주세요. 그건 꼭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수프가 몸을 채워 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다만 몸을 짓누르던 것을 치워 준 공은, 창가의 화분에게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약은 하루에 세 번 들어왔다. 그걸 매번 화분에 붓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아침 약은 식사와 함께 들어왔고, 니나가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점심 약은 공작부인이 들러 지켜보는 날이 많았다. 드라벨과 약속을 했으니, 어머니는 그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레티시아는 매번 다른 핑계를 댔다. 너무 뜨거워요, 식혀서 마실게요. 니나야, 커튼 좀 쳐 줄래? 눈이 부셔. 니나야, 마르타한테 꿀우유 좀. 어머니, 그 머리 장식 새로 하신 거예요? 뒤로 돌아서 보여 주세요.

어머니는 그 마지막 말에 걸렸다. 머리 장식을 보여 주려고 등을 돌린 사이, 사발 반이 화분으로 갔다.

동대문에서 까다로운 손님 셋을 한꺼번에 상대하던 솜씨가 이런 데 쓰일 줄은 몰랐다.

물론 다 피할 수는 없었다. 둘째 날 점심, 공작부인은 사발이 빌 때까지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레티시아는 마셨다. 그날 오후 훈련은 스물여섯 걸음에서 끝났다. 전날 오후는 일흔 걸음이었다.

니나는 기록지에 '오후 컨디션 저조'라고 적었다. 레티시아는 머릿속 장부에 다른 줄을 적었다. 마신 날, 스물여섯. 부은 날, 일흔.

남들에겐 들쭉날쭉한 숫자였다. 그녀에게는 아니었다.

이레가 지났다.

넷째 날, 레티시아는 계단 열 칸을 올랐다. 다섯째 날에는 한 층을 올랐다. 엿새째에는 계단 아래에서 공작이 박수를 치다가 공작부인에게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렸다. 하인들이 다 보고 있었다.

그레고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넷째 날부터, 새벽 여섯 시의 복도에는 촛불이 전부 켜져 있었다.

마르타의 식단표는 주방 벽에 못 박혀 걸렸다. 견습생들 사이에서는 아가씨의 그릇이 비어서 돌아오는지를 두고 내기가 벌어진다고 했다. 이레 동안 그릇은 한 번도 남지 않았다. 내기는 판이 서지 않았다.

몸이 대답하고 있었다. 하루하루, 숫자로.

이레째 아침이었다.

니나: 어머.

커튼을 걷던 니나가 멈춰 섰다.

레티시아는 침대에서 고개를 들었다. 니나가 창턱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 앞의 화분을 보는 순간, 레티시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흰 제라늄이 축 처져 있었다.

잎은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말라 들어가고, 줄기는 고개를 꺾은 사람처럼 휘어 있었다. 창턱 위에 흰 꽃잎이 몇 장 떨어져 있었다.

니나: 왜 이러지... 볕도 잘 들고, 물도 잘 줬는데...

니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떨어진 꽃잎을 하나씩 주워 손바닥에 모았다. 아주 소중한 것을 줍듯이.

레티시아: 니나야. 그 꽃, 네가 가져온 거니?

니나: ...네. 작년 봄에요.

니나는 꽃잎을 손에 쥔 채 작게 말했다.

니나: 아가씨 방에 꽃이 하나도 없어서요. 커튼도 못 걷게 하셔서, 방이 늘 어두웠거든요. 꽃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정원사 할아버지한테 한 포기 얻어 왔어요.

레티시아: 그때 나는 뭐라고 했니?

니나: 쳐다도 안 보셨어요.

니나는 거기서 조금 웃었다.

니나: 그런데 버리라고도 안 하셨어요. 다른 건 다 던지셨는데, 이건 안 던지셨어요. 그래서 계속 키웠어요. 아가씨가 이건 괜찮으신가 보다 하고요.

레티시아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 아이는 일 년 동안, 아무도 고맙다고 하지 않는 꽃에 매일 물을 줬다. 아무도 고맙다고 하지 않는 아가씨의 머리맡에서.

그리고 그 꽃을, 그녀가 이레 만에 죽이고 있었다.

니나: 물을 너무 많이 줬나 봐요. 오늘부터는 조금만 줄게요. 볕 잘 드는 데로 옮기고...

레티시아: 니나야.

니나: 네?

레티시아: 네 잘못 아니야.

니나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빨갰다.

니나: 그럼 누구 잘못이에요?

레티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니나가 아침 쟁반을 가지러 나간 사이, 레티시아는 창가로 갔다. 이제 지팡이 없이도 창가까지는 걸을 수 있었다.

화분 앞에 섰다. 흙에 손가락을 대 봤다.

끈적했다.

흙 윗면이 검게 굳어 손가락 끝에 들러붙었다. 손가락을 코에 가져다 댔다. 쓰고, 그 뒤에 달큰한 냄새. 매일 세 번 그녀의 목구멍을 넘어가던 그 냄새였다.

쓴 약이 흙을 이렇게 끈적하게 만들 리가 없었다. 꿀이라면 모를까. 아니, 꿀보다 더 진한 무언가라면.

레티시아는 손가락을 손수건에 닦았다. 손이 차가웠다.

꽃 한 포기가 이레 만에 이렇게 됐다.

이 몸은 그걸 두 해 동안 마셨다.

유리 같은 몸. 드라벨은 그렇게 말했다. 아니었다. 이 몸은 유리가 아니었다. 사흘 수프를 먹고 이레 약을 거르자 계단 한 층을 오르는 몸이었다. 처음부터 튼튼한 몸이었다. 누군가 그 위에 하루 세 번씩, 모래주머니를 얹고 있었을 뿐이다.

화가 났다. 뜨겁게가 아니라, 차갑게.

장사하다 사기를 당했다는 걸 알았을 때의 화였다. 그런 화는 소리를 지르게 만들지 않는다. 계산을 시작하게 만든다.

이 약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누가 만드는가. 누가 파는가. 그리고 이 집은, 이것에 얼마를 내고 있는가.

의심 가는 물건이 있으면, 거래명세서부터 본다.

그런데 그 명세서가 어디 있는지 그녀는 몰랐다. 알 만한 사람은 아마 니나였다. 매일 약을 들고 오는 아이.

이 아이를 끌어들여도 될까.

레티시아는 니나가 모아 둔 꽃잎을 내려다봤다. 창턱 한구석에, 가지런히 모여 있었다.

그날 저녁, 레티시아는 다시 니나를 주방에 보냈다.

꿀우유. 이레째 같은 핑계였다. 니나는 이제 묻지도 않고 나갔다.

문이 닫혔다. 레티시아는 사발을 들고 창가로 갔다. 오늘 밤만은 다른 데 부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 방에서 냄새를 숨길 곳은 그 화분 하나뿐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텨 다오.

사발을 기울였다.

그때 문이 열렸다.

니나: 아가씨, 마르타 아주머니가 우유는 벌써 데워 놨다고...

니나였다. 너무 빨랐다. 이레째 같은 주문이니, 주방에서 미리 데워 둔 것이다. 니나는 꿀우유 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 문가에 그대로 굳어 있었다.

니나의 시선이 레티시아의 손에 들린 사발로 갔다. 사발에서 흘러내리는 검은 물줄기로 갔다. 그리고 그 물줄기가 떨어지는 곳, 누렇게 말라 가는 흰 제라늄으로 갔다.

쟁반 위에서 잔이 달그락거렸다.

니나: 아가씨...

니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레티시아는 알 수 있었다. 이 영리한 아이가 지금 무엇을 먼저 알아챘는지. 아가씨가 약을 버리고 있다는 것보다 먼저.

꽃이, 왜 죽어 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