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양을 재는 법
by 외인 · 2026-10-16
율리안 벨하르트는 약속을 지키는 남자였다.
그는 정말로 레티시아의 방 앞을 지켰다. 복도에 의자를 하나 갖다 놓고, 검을 무릎 위에 가로놓고, 꼿꼿이 앉아 있었다. 하인이 차를 내오면 마셨고, 점심이 오면 그 자리에서 먹었다. 오후에는 아예 의자를 방 안으로 들여와 침대 발치에 앉았다.
레티시아: 오라버니, 기사단 일은요?
율리안: 부단장 대리를 세워 뒀어. 북부는 지금 조용해.
레티시아: 그럼 왕도에서 할 일은요?
율리안: 이게 할 일이야.
율리안은 진지했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쉬었다.
운동 금지 첫날은 길었다.
레티시아는 천장의 장식을 셌다. 금박 장미가 마흔두 송이, 덩굴이 열여섯 줄기, 천사가 여덟. 천사 하나는 날개가 살짝 벗겨져 있었다. 보수비가 얼마나 나올까 계산하다가 그만두었다. 이 세계 금박 시세를 몰랐다.
탕약이 세 번 들어왔다. 아침, 점심, 저녁. 마실 때마다 몸이 노곤해졌고, 그때마다 율리안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약이 잘 듣는구나, 하는 얼굴이었다.
둘째 날도 길었다.
니나는 율리안의 눈치를 보느라 말을 붙이지 못했다. 공작은 하루에 다섯 번 문을 빼꼼 열고 들여다보다 갔다. 공작부인은 저녁에 한 번 와서 이마를 짚어 보고, 머리를 한 번 쓸어 주고 갔다. 그 손길이 어제보다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그날 오후, 레티시아는 율리안에게 누워서 볼 만한 책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율리안은 동생이 책을 찾는다는 사실에 또 감격해서, 서재에서 한 아름을 안고 왔다. 기사도 이야기, 시집, 그리고 두툼한 가죽 장정의 『에르노아 왕국 지리지』.
레티시아는 지리지를 펼쳤다. 첫 장에 지도가 있었다.
한참을 봤다.
대륙은 비스듬히 기울어진 잎사귀 모양이었다. 에르노아 왕국은 그 잎사귀의 서쪽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북쪽 끝에 산맥이 가로놓였고, 그 너머에는 '하르칸 초원'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남쪽은 바다였다. 바다 이름은 '은빛 만'.
한반도는 없었다. 일본도, 중국도 없었다.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도, 섬나라 영국도 없었다. 그녀가 평생 텔레비전과 달력과 은행 벽걸이 지도에서 본 어떤 모양도, 이 종이 위에는 없었다.
외국이 아니었다. 다른 세상이었다.
알고는 있었다. 첫날 밤 이미 짐작했다. 그런데 지도 한 장으로 확인하는 건 달랐다. 장부에 '손실 확정' 도장을 찍는 기분이었다.
돌아갈 길은 없다.
율리안: 레티? 왜 그래? 어디 아파?
율리안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레티시아: 아니요. 지도가... 생각보다 넓어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원칙은 지켰다.
그녀는 지도를 다시 들여다봤다. 이번에는 다른 눈으로. 처음 동대문에 섰던 열아홉 살 때처럼. 그때도 모든 게 낯설었다. 누가 무엇을 파는지, 어디서 물건이 들어오는지, 돈이 어디로 흐르는지. 그녀는 석 달 동안 시장 골목을 걸어 다니며 머릿속에 지도를 그렸다. 그 지도가 삼십 년 장사의 밑천이 되었다.
레티시아: 오라버니. 우리 집 영지는 어디예요?
율리안의 손가락이 지도의 북쪽, 산맥 바로 아래의 넓은 땅을 짚었다.
율리안: 여기. 벨하르트 영지. 왕국에서 제일 넓어.
레티시아: 뭐가 나요?
율리안: 뭐가 나냐니... 양이 많아. 철광산도 있고. 겨울이 길어서 밀은 별로 안 돼.
양.
그렇다면 양모. 레티시아는 그 단어를 머릿속 장부에 굵게 적었다. 왜인지는 아직 몰랐다. 그냥 원단 장사꾼의 코가 먼저 반응했다.
그날 오후 내내 그녀는 지리지를 읽었다. 강이 어디로 흐르는지, 큰 도시가 어디에 있는지, 길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율리안은 동생이 지리지를 그렇게 열심히 읽는 걸 처음 봤다며 저녁 보고 때 아버지에게 자랑했다고 한다.
모르는 시장에 들어왔으면, 시장 지도부터 외우는 법이다.
셋째 날 아침, 레티시아는 결론을 내렸다.
이건 안 된다.
침대에 누워만 있으면 이 몸은 영영 여섯 걸음짜리 몸이다. 사흘 동안 다리가 다시 굳어 가는 게 느껴졌다. 정원에서 벌어 둔 스물다섯 걸음이 하루에 몇 걸음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은행 이자가 거꾸로 붙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몰래 나갈 수도 없었다. 문 앞에 북부 기사단 부단장이 앉아 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협상.
동대문에서 삼십 년 동안 배운 것이 있다면, 반대하는 사람을 이기려고 들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상대의 말로, 상대의 계산으로, 상대가 '그래, 그게 맞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어야 한다. 원단 도매상과 싸울 때는 원단 이야기를 하고, 세입자와 싸울 때는 세입자의 장사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렇다면 기사와는?
레티시아: 오라버니.
율리안: 응?
율리안이 읽던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북부 국경 방어전 전술론』. 사흘째 같은 페이지였다.
레티시아: 기사단에 신병이 들어오면, 어떻게 훈련시켜요?
율리안의 눈이 반짝였다. 레티시아는 그 반짝임을 알았다. 자기 장사 이야기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상인의 눈이었다.
율리안: 신병? 신병은 말이지.
율리안은 책을 덮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율리안: 일단 첫날부터 완전군장을 시키면 안 돼. 그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야. 처음엔 맨몸으로 연병장 한 바퀴. 다음 날 두 바퀴. 일주일이 지나면 가벼운 갑옷을 입히고, 한 달이 지나면 검을 들려.
레티시아: 왜요?
율리안: 몸이 따라올 시간을 줘야 하니까. 한꺼번에 몰아붙이면 다쳐. 다친 신병은 석 달을 날려. 차라리 천천히 가는 게 빨라.
레티시아: 누가 감독해요?
율리안: 교관이 붙지. 매일 기록하고. 숨이 너무 차거나, 어지러워하거나, 다리를 절면 그날 훈련은 끝이야. 사흘에 한 번씩 평가해서 다음 단계로 갈지 정하고.
레티시아: 그럼 신병이 다쳤다고 훈련을 아예 금지하기도 해요?
율리안: 아니, 그건...
율리안이 말을 멈췄다.
레티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침대에 누운 채로 그를 바라봤다. 시장에서 손님이 스스로 답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얼굴로.
율리안의 얼굴이 천천히 변했다. 처음에는 의아함, 그다음은 깨달음, 마지막은 억울함.
율리안: 레티. 너 지금 나한테...
레티시아: 저도 신병이에요, 오라버니.
레티시아는 베개 밑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사흘 동안 니나에게 몰래 받아 둔 종이였다. 그 위에 단정한 글씨가 빼곡했다. 손이 알아서 예쁘게 써 준 글씨였다.
<레티시아 벨하르트 신병 훈련 일정표>
훈련 횟수: 하루 세 번, 1회 15분 이내.
교관: 율리안 벨하르트 (필수 동행).
기록관: 니나 (걸음 수, 시간, 상태 기록).
중단 조건: 숨이 심하게 차거나, 어지럽거나, 다리가 풀리면 그 자리에서 종료.
평가: 사흘에 한 번, 교관이 다음 단계 여부를 결정.
1단계: 방 안. 2단계: 복도. 3단계: 계단. 4단계: 정원.
율리안은 종이를 받아 들고 한참 들여다봤다. 입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율리안: ...이거 기사단 훈련 일지 양식이랑 거의 똑같은데.
레티시아: 오라버니가 방금 다 말해 줬잖아요.
사실 반은 전생의 등산 동호회 신입 회원 관리표였다. 하지만 그건 말하지 않았다.
율리안은 종이를 뒤집어 보고, 다시 앞으로 돌려 보고, 머리를 긁었다. 그리고 마지막 저항을 했다.
율리안: 하루 세 번은 많아. 두 번.
레티시아: 두 번이요?
레티시아는 일부러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열일곱 살 얼굴로 하니 효과가 두 배였다.
레티시아: 그럼 두 번 하는 대신, 사흘 평가에서 통과하면 세 번으로 늘려 주세요.
율리안: ...그건 괜찮아.
거래 성사.
레티시아는 속으로 손뼉을 쳤다. 처음부터 세 번을 부른 건 두 번을 받기 위해서였다. 흥정은 언제나 원하는 것보다 조금 위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그리고 두 번에 '조건부 증량'까지 붙였으니, 따져 보면 원래 원하던 것보다 더 받아 낸 셈이었다.
율리안은 그 계산을 끝까지 몰랐다. 대신 종이를 소중하게 접어 품에 넣었다.
율리안: 아버지께 보고드려야겠다. 제대로 된 작전 계획서니까.
보고는 그날 오후, 공작의 서재에서 이루어졌다.
레티시아는 그 자리에 없었다. 니나가 문틈으로 엿듣고 와서 전해 준 이야기였다. 니나는 흥분해서 말이 빨랐다.
율리안은 정말로 작전 보고를 하듯 했다고 한다. 지도 대신 일정표를 책상에 펼치고, 단계별로 손가락을 짚어 가며 설명했다. 공작은 팔짱을 끼고 들었다. 중간에 몇 번 고개를 끄덕였고, '중단 조건' 항목에서는 오래 들여다봤다고 했다.
니나: 그리고 공작님이 그러셨어요. '이걸 레티가 썼단 말이냐?'
레티시아: 오라버니는 뭐라고 했니?
니나: '제가 옆에서 조언을 좀 했습니다'라고요.
레티시아는 웃음을 참았다. 그건 반쯤 사실이었다. 조언을 '당한' 거였지만.
공작의 결론은 간단했다. 허락한다. 단, 매일 저녁 율리안이 서재로 와서 그날의 기록을 보고할 것. 숫자 하나 빠짐없이.
그 자리에 공작부인도 있었다고 했다. 부인은 일정표를 끝까지 읽고 나서 조건을 하나 더 붙였다.
엘레노어: 훈련 때는 반드시 단정한 실내복을 입고, 머리를 빗을 것. 잠옷 바람으로 복도를 돌아다니는 건 안 돼요. 하인들 보는 눈이 있어요.
니나가 그 말을 전하며 조심스럽게 레티시아의 눈치를 봤다. 예전의 아가씨였다면 여기서 베개가 날아갔을 것이다. 귀찮아, 시끄러워, 나가.
레티시아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시아: 어머니 말씀이 맞아. 니나야, 내일 아침에 머리 좀 빗어 줄래?
니나는 대답 대신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니나: ...예쁘게 땋아 드려도 돼요?
레티시아: 그래. 예쁘게.
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레티시아는 그 얼굴을 보고 생각했다. 이 아이는 1년 동안 이 머리를 한 번도 못 만져 봤겠구나.
다음 날 아침, 첫 훈련이 시작되었다.
레티시아는 연한 하늘색 실내복을 입었다. 니나가 땋아 준 머리가 어깨 위로 늘어져 있었다. 니나는 손에 기록용 종이와 깃펜을 들고, 율리안은 회중시계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문가에, 뜻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그레고르 집사였다. 그 이름은 어제 니나에게서 들었다. 사십 년 동안 이 집을 지킨 수석 집사. 정원에서 연미복을 덮어 준 그 노인.
그레고르는 두 손으로 지팡이 하나를 받쳐 들고 있었다. 짙은 흑단에 은으로 된 손잡이. 손잡이 끝이 오래 만져져 반들반들했다.
그레고르: 선대 공작 각하께서 말년에 정원을 거니실 때 쓰시던 물건입니다.
그레고르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레고르: 창고에 두기보다는, 쓰이는 편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레티시아는 지팡이를 받아 들었다. 생각보다 가벼웠다. 손잡이가 손바닥에 꼭 맞았다.
레티시아: 고마워요, 그레고르.
노인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아가씨가 그의 이름을 부른 게 처음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물러나기 직전,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레고르: 다섯 시 반의 정원은 비워 두겠습니다. 아가씨께서 그 단계까지 가시면요.
레티시아는 그 등을 오래 바라봤다.
동대문에서도 그랬다.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은 말이 적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처음 내미는 호의는, 대개 계산서가 붙어 있지 않았다.
율리안: 자, 신병 레티시아.
율리안이 헛기침을 했다. 완전히 교관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율리안: 1단계, 방 안 보행. 목표는 창가 왕복. 숨이 차면 즉시 보고할 것. 알겠나?
레티시아: 네, 교관님.
니나가 풉 하고 웃었다가, 율리안의 눈총에 입을 막았다.
레티시아는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율리안: 하나!
율리안이 구령을 붙였다.
율리안: 둘!
북부 기사단 연병장에서 쓰는 구령이었다. 우렁찼다. 복도 끝까지 울렸을 것이다. 레티시아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구령에 맞춰 다리가 움직였다.
율리안: 셋! 넷! 좋아, 보폭 유지!
창가에 닿았다. 열 걸음. 지팡이 덕분인지, 사흘을 쉬었는데도 다리가 버텼다.
율리안: 반환점! 돌아서!
돌아섰다. 다시 침대까지. 열 걸음.
율리안: 스무 걸음, 완료! 니나, 기록!
니나: 네, 네! 스무 걸음, 시간은...
니나가 율리안의 시계를 들여다보며 열심히 받아 적었다. 혀끝을 살짝 내밀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침대 끝에 앉아 숨을 고르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전생에서 그녀는 늘 혼자 산에 올랐다. 기록도 혼자 했고, 구령도 없었다. 정상에서 보온병 뚜껑을 열 때 같이 마실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교관이 있고, 기록관이 있다.
이상하게, 스무 걸음이 정상보다 높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 율리안은 약속대로 서재에 보고하러 갔다. 아침 스무 걸음, 오후 스물두 걸음. 어지러움 없음. 숨참 경미. 교관 소견: 의지 매우 강함.
레티시아는 침대에 앉아 저녁 식사를 기다렸다. 두 번의 훈련 덕에 배가 고팠다. 이 몸으로 깨어나서 처음 느끼는, 제대로 된 허기였다.
쟁반이 들어왔다.
레티시아는 쟁반을 내려다봤다.
묽은 보리죽 한 그릇. 숟가락으로 휘저으니 보리알이 몇 개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꿀물 한 잔. 데친 채소 몇 가닥. 그리고 탕약.
그게 전부였다.
레티시아: ...니나야. 이게 저녁이니?
니나: 네, 아가씨. 환자식이에요. 드라벨 선생님 지시로 몇 달째 이렇게...
레티시아: 고기는?
니나: 고기는 피를 탁하게 한대요. 생선도 안 되고, 달걀도 기운이 너무 세서 안 된다고...
레티시아는 보리죽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맛이 없었다. 아니, 맛이라는 게 없었다. 물에 보리 냄새만 입혀 놓은 것 같았다.
그녀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걸로 근육을 만들라고?
신병 훈련을 시키면서 보리죽만 먹이는 기사단이 있다면, 그 기사단은 한 달 안에 망한다. 율리안한테 물어보면 당장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전생의 엄마는 그녀가 몸살이라도 나면 시장에서 제일 큰 닭을 사 왔다. 생선 비린내가 밴 손으로 닭을 손질하고, 마늘을 한 줌 넣고, 밤새 고았다. 아침이면 뽀얀 국물이 냄비 가득 우러나 있었다. 그걸 먹으면, 다음 날은 꼭 일어났다.
레티시아는 보리죽 그릇을 쟁반 한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니나를 불렀다.
레티시아: 니나야.
니나: 네, 아가씨.
레티시아: 이 집 주방은 어디 있니? 그리고 요리장은 어떤 사람이야?
니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니나: 아, 아가씨. 요리장님은... 아가씨가 작년에 수프를 열 번 연속으로 돌려보내신 뒤로...
니나는 거기서 말을 삼켰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마무리했다.
니나: ...아가씨 이름만 들어도 칼을 내려놓으세요.
레티시아는 천장의 날개 벗겨진 천사를 올려다봤다.
다음 장부는 주방이었다. 그리고 그 장부는, 시작부터 적자였다.